풍경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핟.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신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도 모른다.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 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 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 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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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 Talk to 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고된 하루다. 메데아와 베니그로와 마르코와 함께 했다.



메데아는 자기 자식을 죽인 여자고



베니그로는 자기가 사랑한 식물 인간인 환자를 강간한 뒤 감옥에 갇혀 자살한 남자다. 마르코는 우는 혹은 울 줄 아는 남자다.



연결이라고 한다면



투우를 하며 다른 투우사에게 차였느냐고 토크쇼에서 추궁당하는 여자



꿈속에서 본 뱀에 경악해 알몸으로 뛰쳐나온 여자



때로 우는 남자



식물인간인 무용수를 사랑하는 남자



식물인간이 된 무용수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점점 그들은 시간 속에서 섞이며



꾸꾸루꾸꾸가 흐른다. 


(꾸꾸루꾸꾸는 들을 때는 진지한데 부르면 웃긴다. 이 노래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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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라사를 우쓰와 봤다. 

 분명 윤영선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뭔가를 써야 하는데 

지금은 남의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짧게 나마 하자. 인생은 훈련이 필요하고 습관이 필요하다. 확실히 그렇다. 

시동라사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던 것이 윤영선 선생님이구나. 

잘 썼다고 

그랬었다.  

그때부터 연극으로 보고 싶었는데 보는데 4년이 걸린다.  -_-; 

그 사이 윤영선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재미가 있었다. 어떤 면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대한민국 소시민들의 삶을 추적한다.  

무뚝뚝하고 땅딸막한 대한민국 아버지라 할 법한 시동 라사 주인과  

예쁘고 세련된 삶을 원했거나 어울릴지도 모를(피아노로 대변되는)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한 남자, 아내의 옛 남자친구이자 지금은 성공한 공무원으로  

시동라사에서 300만 원 짜리 하얀 양복을 맞추는 

그래서 시동라사 주인이 근 5년만에 양복을 만들게 한 그 남자 

그 남자에게 굽신거리는 남편을 보는데 아찔하고 서글프고 그러면서도  

주변 인물들(시동라사 주인의 친구인 군인과 전파상 주인)이 웃음을 준다.  

세상은 변하는데 거기 적응하지 못하는 자그마한 남자의 절규  

그 절규에 힘겨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응원도 하는 아내

그것을 양복점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그린다. 

현실과 관계를 잘 그려나간다. 

웃기면서 슬프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다.  

여자의 점점 펴가는 얼굴이 피아노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모른 채 

연극은 끝난다.  

남편이 손을 완전히 다쳐가며 만든 그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아내를 채갔는지  

아니면 그것으로 그 둘 사이에 현실의 출구가 생겨 헤쳐나갈 수 있는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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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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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디스트릭트9의 서사는 꽤 단순하다. 익히 보아온 헐리웃 액션(로봇, 펑펑 터지는 피의 난무극, 테러 작전 등)도 존재하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비극적 파토스를 흠뻑 뿜은 주인공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가 처음부터 비극적 파토스를 가진 초인은 아닌 일상적인, 연약한 한 가장이었다는 설정도 이미 꽤 보아온 설정이다. 게다가 정부측과 진정성의 대결이 아니라 거기 끼어든 남아메리카 갱단의 설정은 3중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 그 설정 역시 이제는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갈등이란 1:1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다양한 집단들의 대립이라는 인식 속에 세워진 이 갈등 구조는 가이 리치의 <락스탁 앤 투 스모킹 베럴즈>의 영화를 봤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이 영화는 ‘공존이 존재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 현재적 우리로서는 힘들다는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공존이란 말의 달콤한 허구성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인 갈등을 해소할 아무런 비전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이 나빠서 강대국이고 착취하는 세력이며 아프리카가 착해서 약소국이 아니라 누구나 지배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외계인이라는 약간은 역겹게 생긴 이 존재들은 지구의 방식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약탈이라는 가장 일차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 본능을 이어나간다. 이런 외계인들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냉대는 인상적이며 또한 현실적이다.

그런 외계인들과 전혀 가까워질 마음이 없던 주인공은 약간의 호기심과 붕뜬 마음 때문에 외계 약품(유동액)을 뒤집어쓰고 외계인의 유전자와 자신의 유전자가 결합하는 기이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기이 체험은 극의 마지막 주인공의 다른 두 눈동자를 통해 잘 드러난다.(피터 잭슨은 눈 연기를 좋아한다. 킹콩에서도 킹콩의 눈으로 말하기 연기는 압권이었고 이번에 외계인 크리스토퍼의 눈도 깊은 말을 한다.) 대립된 양극 지점을 함께 가진 이에 대해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가 말하는 달콤한 공존은 실은 그것을 어떻게 상품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갱들의 측면으로는 그의 힘을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말하자면 그는 소유의 문제로 취급되는 상품, 물건이다.  


그런 우리들에 대해 우리 자신이

얄팍한 희망인가 쓰디쓴 절망인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영화는 얄팍한 희망 뒤편에 도사린 쓰디쓴 절망을 이야기한다. 중간자적 존재는 차츰 외계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왕따로서 이 사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문, 이름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는 마지막은 씁쓸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올지도 몰라. ‘날아와 머리 위로 날아와’(패닉의 <UFO>) 라는 그날에 대한 주문이 남는다. 외계인의 3년이 우리의 3년과 같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 언젠가는.(지구의 시간은 지구적 차원일 뿐, 우주적 차원이 아니다) 그날은 맑스주의자들이 말했던 혁명의 그날일까?(물론 이조차 얄팍한 소리일 테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혁명을 기다리던 그들처럼 우리도 혁명의 그날을 기다려야 할까.? 그 혁명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 구조의 해소가 아니라 우리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의 날일 테니 훨씬 더 지독할 것이다. 뿌리째 바꾸어야 할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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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io 2009-10-1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우리 본성의 바뀌는 날이란 표현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