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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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연약함과 강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영영 숨어서 쫓아갈 수 없는 것들로 희미하지만. 나의 연약함이 때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나의 강함 쪽으로 끌어오며. 누군가는 그 길목에서 원을 그리다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여 파티를 하는 밤도 있지만, 그것은 마치 죽은 자를 위한 다시 한 번의 장례식처럼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상실의 시대는 잃어버린 것들이 영영 거기서 나를 불러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됨에 대한 고백 같은 소설이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것들은 완전히 텅 빈 구멍. 거기 빠지면 그러니까 거기로 스며들면, 점점 흡수되어 버릴지도 몰라라는 불안감과 그럼에도 그것들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그렇듯 자신만의 구멍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 스며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혹은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

십대에 교복을 입고 방바닥에 엎드려 이 책을 다 봤었다. 막 해가 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두 번 더 봤다. 역시 십대였다. 그리고 사이사이 현정이란 아이를 다섯 명 알게 됐으며, 어느 현정이가 이 책을 줬을까 책 간지에 써진 편지를 읽고 한동안 생각했다. 시간은 그만큼 지나갔다. 그 아이가 편지를 쓴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고(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나를 질책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날이다.

이제 나는 이 책의 주인공들보다 나이를 먹었다. 친한 친구가 상실의 시대를 읽어보는 건 어떠냐고 했다.

그리고 일 년쯤 지난 오늘, 또 다른 친한 친구를 만나 그녀의 남편의 직장 생활 이야기를 하며 결국 이 소설에 나온 말을 꺼냈다. 세계의 97%는 쓰레기야, 라고. 하지만 그 97%도 분명 아이가 있고 아내고 있고 남편이 있고 부모도 있다. 이것은 거의 불합리의 수준. 때때로 나도 쓰레기임을 느끼며 역시 불합리. 그래서? 죽을 수는 없잖아, 라는 이상한 결론으로의 도약마저.

그리고 이 책에서 기억했던 문장은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말 것과

그러나 어쨌든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물론 앞 문장이 더 기억에 생생했다.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 일이다.

“누구나 자기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어. 객관적으로 자신을 본다면 죽지 않고 살 수 없다구.”

친구와 나는 그런 말을 하며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때때로 온몸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칭칭 감고 있는 것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

비가 내리고 오늘은 하루 종일 안개가 낀 듯 막막한 날씨

어쨌든 계절은 지나가고

어쨌든 죽지 않고 잘 살아 10대를 마치고 20대도 곧 마칠 것 같다. 이런 기기묘묘한 일이 일어나 30대까지 살아간다. 아니. 사실 머릿속에는 시간이란 게 뒤죽박죽 얽혀있지만. 어쨌든 발바닥은 그렇다. 그리고

나오코가 끊임없이 말을 했었던 밤의 BGM,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었는데, 이런 음악을 며칠간 계속 듣다간 머리가 돌아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머릿속의 나사를 풀어서 그 나사로 공기놀이를 하는 기분.

우선은 살아 있으니 삶을 궁구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떠나거나 내가 남거나 어쨌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되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은 삶을 궁구하는 수밖에 없다. 때때로 자신의 비겁함에 치를 떨며, 들러붙은 거미줄과 발아래 구멍들을 보면서도. (대한민국의 성공한 젊은 작가들 중 하루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없다는 말도 맞다.) 결국 상실의 시대도 그렇게 끝이 난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딱 한 번 웃었는데 미도리가 너무 싸구려로 팔려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할 때였다.

에우리피데스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연극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엉망으로 혼란에 빠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점입니다. 아시겠어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각기 제나름의 사정과 이유와 주장이 있고, 또 모두들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모든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마는 거죠.”

에우리피데스가 이런 이야기구나,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해주다니, 그런데 이 이야기를 죽어가는 남자 앞에서 하고 있었다. 어쨌든 에우리피데스 극에서처럼, 신이 나타나도 그만, 안 나타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러느니 한번 믿어보라고 했던 건 팡세를 쓴 그 사람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주 어설프게 말하자면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죽음 직전에 대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대단히 괜찮은 설정이란 생각이 든다.

나오코라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영혼이 갇힌 아미료와 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세계, 사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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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블루 - 37.2 Degrees in the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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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대한 증오와 한계에 대한 증오는 일치한다. 결국 무한은 가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자유에 대한 인식이며 한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잘 된 이야기들은 죽음을 수반한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승화다.

베티블루의 주인공인 장은 베티를 만나며 인생의 변화를 겪는다. 어느 정도 안일하게 사는 게 목적이던 그는 자기 내면에 감추어진 자유에의 의지를 베티를 통해 발견한다. 그녀와 동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히틀러’를 가지고 역사 소설을 쓰는 인물이기 때문인가? 히틀러라는 독재자, 그의 내면의 광기에 대해 장은 알고 있었고 말하고 싶어 한 인물이기에?


그러나 당장은, 현실 앞에서 무너져 녹아내리는 중 베티는 그런 장을 다시금 그곳에서 구출한다. 장은 점점 베티로 인해 변해간다. 아니 자기 내면에 다가간다고 해도 좋다. 베티는 그런 장을 응원한다. 장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베티는 설득하고 이끌어낸다. 장 역시 이런 베티에 조응하며 여장을 하고 돈을 훔치는 등 사장이 페인트칠을 하라면 하던 순진함을 지워내고 자기 동물성을 마주한다. 그러나 베티의 내면은 광기로 가득 차 있으며 동물성이 그녀를 지배하는 순간, 그녀는 세계가 피의 바다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 가장 지독하다. 세계의 질서는 그녀라는 인물에게 가혹하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는 작품 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지독한 자기 혐오, 운명에 대한 응시(곧 한계에 대한 응시, 죽음에 대한 응시, 혹은 전능할 수 없음에 대한 응시)는 그녀가 스스로 눈알을 파내도록 만든다. 모두 피의 바다이며 힘의 역학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데도 마치 그것이 아닌 듯 행동하고 가증스럽게도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걸까.


그 뒤 베티는 의식을 잃는다. 장은 생도 사도 아닌 경계 속에 머무는 베티를 자유와 한계가 없는 죽음의 영역으로 놓아준다. 

모든 죽음이 승화의 과정은 아니다.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생명이라는 게 가진 힘(피의 역동성)을 다 쏟아 붓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이만큼이 되기 위해 엄청난 피를 쏟아 부었듯이.

모든 생명은 다 살아갈 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어디에 작용시키느냐는 본인이 선택할 문제다. 세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자전축을 바꾸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당할 수도 있다.

장은 베티를 통해 자신이 가진 힘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베티라는 한 인물의 죽음은 그의 내면에서 죽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발견과 예술로 승화한다. 결국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진 힘)을 발견하는데 한 평생을 보내는데, 그래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에서 그는 베티를 만난 것이 행운인 셈이다. 
 

베티 블루는 사랑의 실천이 죽음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이해 불가의 형식이며, ....주인공 남성의 발언, 어디든 피의 바다야 라는 그의 대사는 와닿는다. 낭떠러지 앞에서.  
 

그래도 음악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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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핟.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신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도 모른다.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 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 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 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심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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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 Talk to 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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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하루다. 메데아와 베니그로와 마르코와 함께 했다.



메데아는 자기 자식을 죽인 여자고



베니그로는 자기가 사랑한 식물 인간인 환자를 강간한 뒤 감옥에 갇혀 자살한 남자다. 마르코는 우는 혹은 울 줄 아는 남자다.



연결이라고 한다면



투우를 하며 다른 투우사에게 차였느냐고 토크쇼에서 추궁당하는 여자



꿈속에서 본 뱀에 경악해 알몸으로 뛰쳐나온 여자



때로 우는 남자



식물인간인 무용수를 사랑하는 남자



식물인간이 된 무용수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점점 그들은 시간 속에서 섞이며



꾸꾸루꾸꾸가 흐른다. 


(꾸꾸루꾸꾸는 들을 때는 진지한데 부르면 웃긴다. 이 노래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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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라사를 우쓰와 봤다. 

 분명 윤영선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뭔가를 써야 하는데 

지금은 남의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짧게 나마 하자. 인생은 훈련이 필요하고 습관이 필요하다. 확실히 그렇다. 

시동라사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던 것이 윤영선 선생님이구나. 

잘 썼다고 

그랬었다.  

그때부터 연극으로 보고 싶었는데 보는데 4년이 걸린다.  -_-; 

그 사이 윤영선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재미가 있었다. 어떤 면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 대한민국 소시민들의 삶을 추적한다.  

무뚝뚝하고 땅딸막한 대한민국 아버지라 할 법한 시동 라사 주인과  

예쁘고 세련된 삶을 원했거나 어울릴지도 모를(피아노로 대변되는)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 등장한 남자, 아내의 옛 남자친구이자 지금은 성공한 공무원으로  

시동라사에서 300만 원 짜리 하얀 양복을 맞추는 

그래서 시동라사 주인이 근 5년만에 양복을 만들게 한 그 남자 

그 남자에게 굽신거리는 남편을 보는데 아찔하고 서글프고 그러면서도  

주변 인물들(시동라사 주인의 친구인 군인과 전파상 주인)이 웃음을 준다.  

세상은 변하는데 거기 적응하지 못하는 자그마한 남자의 절규  

그 절규에 힘겨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응원도 하는 아내

그것을 양복점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그린다. 

현실과 관계를 잘 그려나간다. 

웃기면서 슬프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다.  

여자의 점점 펴가는 얼굴이 피아노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모른 채 

연극은 끝난다.  

남편이 손을 완전히 다쳐가며 만든 그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아내를 채갔는지  

아니면 그것으로 그 둘 사이에 현실의 출구가 생겨 헤쳐나갈 수 있는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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