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내가 아우스터리츠에게는 시작도 끝도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 그에게는 자신의 전생애가 아무런 지속도 없는 하나의 맹목적인 순간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P132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꺼이 어두워질때까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해독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리고 생각들이 빙빙 돌기 시작할 때까지 한 권의 책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고 밤에 어두운 집 안에서 책상 앞에 앉아 램프의 불빛 속에서연필 끝이 말 그대로 저절로, 전적으로 성실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줄 한 줄 그어진 페이지를 내달리는 그림자를 쫓는 것을바라보며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이제 글 쓰는 일은 내게너무 어려워져서 종종 한문장을 위해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하고 몹시 힘들게 생각해 낸 문장을 기록할 수 없을 때면, 고통스럽게도 나의 구상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과 내가 사용한 모든 단어들의 부적절함이 드러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만하며 때때로 하루 분량이 채워진 것처럼 보일 때라도, 다음날 아침에 그 페이지에 처음 눈길을 던지자마자 매번 심각한 오류와 부조화, 궤도를 벗어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거예요. 기록된 것이 많든 적든간에 그것을 읽어 보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보여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 시작해야 했지요. 나는 곧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요.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어떻게 옮길지 알지 못하는 공중 줄타기 곡예사처럼 나는 내 밑에서 플랫폼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훨씬 벗어나 번쩍거리는 균형 막대의 끝이 더 이상 이전처럼 나의 등불이되지 못한 채, 나를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불길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경악하며 깨닫게 되었지요. - P137

때때로 내 머릿속의 생각이 멋지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직 있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내가 연필을 붙들기만 하면 이전에는 편안하게 나를 맡길 수 있었던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제는 가장 매력 없는 문구의 잡동사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나면 문장 속의 그 어떤 표현도 처량한 절름발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공허하거나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요. 이처럼 수치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나는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앉아서, 영혼을 소진시키고, 예를 들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는 서랍을 치우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나 용무조차 우리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점차 깨닫게 되었지요.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내 속에서 진행되던 질병이 나타난 것으로, 내 속에 뭔가 둔감하고 고집스러운 것이 자리 잡아서 점점 더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것이었지요. 이미 나는 내 머리 뒤에서 인격의 몰락을 불러오는 사악한 공허를 느꼈고, 내가 실은 기억력이나 사고력을, 애초에는 존재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일생 동안 오로지 소멸되어 가는 세상과 나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등을 돌려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 P138

사람들은 매일 저녁 오래 전에 정해진 약속처럼 자신의 침대에 누워이불을 덮고 안전한 지붕 밑에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단지 누워 있을 뿐, 마치 과거에 광야에 난 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두려운 얼굴을 하고 땅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 P142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을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많은 곳은 시간보다는 기후 상황에 의해 지배받고, 그와 더불어 수량화할 수 없는, 직선적인 균등을 알지 못하고 항상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고 정체와 돌연한 흐름에 의해 결정되며, 지속적으로 변하는 형태로 되돌아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크기에 의해 발전되는 것은 아닐까요? 시간 밖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자기 나라에서 남겨지고 잊혀진 지역이나 발견되지 않은 해외의 대륙에 적용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런던 같은 시간의 수도에서조차 적용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들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 자기 집이나 병원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은 그러니까 시간 밖에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로부터 단절시키기위해서는 개인적인 불행으로도 충분하지요. 실제로 나는 한 번도시계를 가진 적이 없는데, 벽시계나 자명종, 주머니 시계, 손목시계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시계가 내게는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근본적으로 뭔가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서 시간의 권위에 항상 저항하고,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시간이 흐르지 않고, 흘러가지 않아서 내가 그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과거처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모든 시간의 ㅅ순간들이 동시에 나란히 존재하거나 혹은 역사가 이야기하는 것 중 그 어느 것도 옳지 않았으면, 일어난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로 다른 순간에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른바 시대적 사건에서 나를 배제시킨 때문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비참함과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절망적인 미래를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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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일 같은 거 없어도 돼." - P27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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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생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인생에게 답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P47

그러나 우리가 처음으로 타인과의 연결을 필요로 할 때는 사실 서로 맞바꿀 게 없을 때가 아니었느냐고 저자는 묻습니다.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어른의 사회는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 곧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 없어지는 사회가 아닌가"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자본주의란 경제시스템을 말하는 동시에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다"고요. 우리는 교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고 그 결과 조건 없는 증여에 ‘소망‘을 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돕는 것이나 선의의 비용 대비 효과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힘, 즉 영향력을 무력하다고 간주하지 않고 당장 눈에 띄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시도하는 상상력을 갖는 것입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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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내가 느끼는 고독감을 덜어준다네. 소설을 쓰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창조하니까 말이야. 따라서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의 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군. 나는 소설에서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네. 설령 그가 아무런 보상도얻지 못하고, 현실 세계에 아무런 파문도 남기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야. 따라서 내가 쓰는 소설은 그의 용기에 대한 찬가라고 할 수 있겠지. - P39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내가 현실에서 직접 관찰한 사람들의 행동의 혼합물이고, 그들은 오직 내 책을 통해서만 기억될 수 있으니까. - P40

내가 애시드를 써서 알아낸 일이라곤 내가 당장 탈출하고싶은 곳에 왔다는 사실뿐이었어. 딱히 더 현실적이라는 느낌도 받지 않았고, 단지 더 끔찍했을 뿐이야. - P41

우리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은 자기가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자주 놓인다네. 실용적인 선택을 한다면, 인간으로서 산산조각 나는 결과를 맞기 마련이야. 하지만 도교는 이 두 가지 선택을 결합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극단적인 대립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어. 사실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야겠지.
따라서 도교는 인간의 해체라는 비극적인 분열이 표면화 되지 않도록 하는 행동 방식을 가르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어. - P46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심리치료가 아니라 목적의식을 갖고 하는 일입니다." - P48

『역경』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실용적인 행위와 윤리적인 행위가 양극화된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실용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른 행동이야.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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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말들 - 후지이 다케시 칼럼집
후지이 다케시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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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데려다 주러 도서관에 갔다가 빌려온 책이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져다 주려다 병원에 갔다가 대기 중에 책을 펴들었다. 병원에 갔다가 책을 반납해야지 했는데 대기 읽은 아래 문장으로 인해 끝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아무리 사소한법규 위반이라도 자신의 판단으로 의식적으로 저지르게될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많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된다그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순간 속에 있다 순간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란 원래  바깥에 있다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인 의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법의 제정 또는  개폐인 것은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  유동적이어서 그것을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정치는 항상 이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 P39

 

해방의 순간이란 움직일  없는 자연법칙처럼 보였던 사회질서가 사실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임을드러내는 순간이다다시 말해 순간부터 사물 같았던 질서가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P47

 

"그리고 드디어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탈락한다그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비인간적인 대치 속에서 비로소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 P59

 

 

관계를 이야기할 사람들은 피해자성을 내세우곤 한다. 연인 관계조차도 관계가 내게 미치는 피해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결국 관계는 얽혀있어서 피해와 가해의 상황을 나누기 어렵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한 그런 관계에 대한 언어에 지쳤다. 사람은 피해상황만을 이야기할까? 본인이 관계를 만들어낸 역학관계는 말하지 않을까? 답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살고 싶다면 위기를 직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또렷이 말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어찌할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피해자성, 그것이 유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든다.

 

한국으로 유학 역사학을 전공한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라는 사람의 글이다. 위안부 문제, 베트남전, 뉴라이트 등에 대해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피해자일 편해지는 마음, 이슈화된 것들에 대해서만 날서고 그런 채로 접합되며 여전히 남은 문제들이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들의 심부를 찌른다. '국제시장', '아이캔스피크' 영화 비평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지점을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한국 정치사회, 촛불집회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의 혼란을 들여다보던 다른 시선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정부(윤석열 정부) 들어선 것도 그처럼 날선 시선으로 사회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도취된 축제 분위기로 받아들이던 탄핵이며 승리가 지금을 낳았을 것이다.

 

역시 말들 속에서 돌아보았다. 두고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있게 해주었다. 나의 도피는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답을 얻었다.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어서였다. 눈을 감아야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있다. 낭만에 젖어 선택이었던가, 앞으로는 어떻게 것인가에 대해 너무 무책임했던가 스스로를 질책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미 선택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여전히 그런 생각의 자욱이 남아있었는데 깨끗이 씻겨나갔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살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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