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경험했겠지만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아니,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지키라. - P164

멋있는 건 그런 것이다. 잘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진창에 빠져도, 뒷모습이 엉망이 되어도, 신발이 진흙과 오물로 뒤범벅돼도 그래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자들이 볼 땐 발악하는 것처럼 보여도, 안 되는 일을 못하는 일을 발버둥 치며 애쓰는 것처럼 보여도. 어쨌든 계속하는 것. - P166

이청준은 내게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여러 덕목 중 하나를 알려줬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도 절대로 끝나지 않고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 그것을 설명하고 표현할 가장 뛰어난 언어형식이 소설이라는 것. - P214

텔러는 작가에서 나온 존재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작가는 텔러로부터 발생한 존재일 수도 있다. 텔러는 작가에게 쓰기를 종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의 입을 막기도 한다. 텔러는 인물 속으로 들어가 인물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인물에서 살짝 벗어나 혹은 더 깊이 들어가 인물 스스로도 모르는 마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 서술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기계처럼 읽어나가는 존재가 아니다. - P262

서술자는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창작자인 동시에 이야기를 연결하는 매개자다.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형상과 이미지를 보이고 존재하도록 물리적으로 구성하면서도, 그 물리적 세계가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이고 환상적인지, 살아 있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과 함께하는지, 시간은 시각과 시계 속에 갇혀 있지 않으며 과거는 현재에게 현재는 미래에게 미래는 다시 과거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아니 그것들은 어쩌면 하나의얼굴 안에서 표정만 바꾸는 살아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독자에게 말해준다. - P263

서술자의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발견하게 된다. 문장 속에 공기도 있고 어둠도 있고 빛도 있고 세상에, 얼굴도 있다니. 그 얼굴, 웃고 울고 나와 눈을 마주치는 깊은 눈동자가 있구나.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눈동자. 이토록 깊고 복잡했다니. - P264

사인칭의 마음을 갖자. 서사에서 시점은 단순히 기능과 도구가 아니다. 인물의 눈동자다. 그 인물을 바라보는 피가 도는 눈동자다. 눈동자에는 의지가 있고 마음이 실려 있으며, 필요하다면 말하고 다가서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살아 있는 렌즈다. 살과 뼈와 시간과 꿈 속으로 침투하는 환청이 아닌 진짜 목소리다. 눈동자에 힘을 실어주는빛이고, 초점을 맞추고 줌인 혹은 줌아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눈동자에 담은 것을 마음에도 담고, 그 단상을 상상과 연상으로, 나중에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내는 창조자다.
어쩌면 작가가 회복해야 하는 능력은 개인에게 집중하는 일인칭도, 이 세계를 조명하고 조망하는 삼인칭도 아니다. 왜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내 안의 서술자는 어찌하여 내 삶보다크고 강력한가를 고민하고 인식하려는 게 아닐까?
서술자가 이야기와 독자를 향해 쏟는 그 마음이나와 타인이 함께 있는 세계를 바라볼 때, 그것은버드아이즈 뷰를 넘어 인간이 막연하게 상정하고 있는 신의 시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 P266

신은 만들고 그저 지켜보는 자가 아니다. 몸을 주고 영과 혼을 주고 이름을 주고 시간을 주는 자이고, 그 모든 것을 좋아하는 자다. 인간을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애쓰고 감정을 쏟는 자다. 나중엔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진짜 인간이 되어 스스로 인물이 된 서술자다.
[다정한 서술자]의 저자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시대의 작가들에게, 작가들 안에 살아 있는 서술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부탁하고 있다. 때로는 명령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정해져야 한다고, 서술자가 전하는 것은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야기에 실린 그 무엇이고, 그것은 읽는 자들의 삶에 꿈에, 환상에, 감각에, 감정에, 비처럼 빛처럼 스며들어 마음이 되고 몸이 되므로 우리가 다정해지자고. - P266

소설을 쓰는것은 인간에게 인간을 돌려주는 근사한 일이다. 일상은 가장 복잡한 서사이며 작은 인간은 누구보다 크다. 소설은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인간에게 필요하다. - P296

내 삶은 점점 결정화되고 있는데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고하는 힘과 의심하는 능력도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 내가 그냥 나일 때, 내 현실이 세계의 전부라고 받아들일 때, 그 순간 나는 그 상태로 박제된다. 살아 있는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삶이다. 내 삶에 잠식되어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소설을 통해 알게 된다.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질문에 답을 해보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저 세계와 이 세계가 무엇이 다른 걸까. 옛날 사람들은 저랬구나, 라는 생각은 곧바로 왜 내가 저기에 있는 걸까, 라는 인식으로 뒤바뀐다. 여전히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 현대라는 고독. 사람들의시선과 말에 구멍 뚫리고 멍들어가면서도 애써 쏠쓸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 몸과 마음이 멍든 이 시대의 슬픈 뚱보들. - P306

누구와 싸우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진 사람들이 있다. 크고 작은 전투 속에서 계속 수세에 몰리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멀리 이 세계의 바깥을 바라본다면, 숨 쉴 곳을 찾는다면, ‘숨‘이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긴다면, 그는 더 이상 루저가 아니다. 라운드는 계속될 테니까. 숨 고르고 다시 링에 서게 될 테니까. 오늘과 지금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 자체로 도전이 될 것이다. - P306

일기를 쓰고 싶게 하는 글. 그것은 가장 강력한 종류의 독후감이다. 어떤 아름다운 충격. 그것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질 나쁜 고백을 하고 동시에 죄를 용서받고 싶다. 기쁨이든 분노든 그것이 무엇이든 말하고 싶게 만든다. - P318

그러나 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전화할 사람도 없고, 작가는 만날 수 없는 곳에, 때론 이 세계가 아닌 곳에, 때론 죽었고, 때론 미래의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내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뭐든 쓰고 뭐든 기록해야 한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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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쓰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마음을 글쓰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마음을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보다 윤리적이고 정당하다. 작가는 비윤리적인 것을 써내는 것이 차라리 윤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 않음으로서의 정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땅에 묻어두고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이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가치가 없다. 어떤 창작의 에너지도 발생하지 않는다. 나쁜 에너지도 좋은 에너지도, 욕하고 논쟁할 수 있는 담론으로서의 가치조차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안전하고 편안한 작가들아. 쓰지 않고서 쓰는 자로 살 수는 없다. 김수영을 읽고 내가 한 다짐이다. - P119

삶을 싸움에 빗대는 비유는 낡았지만 그래서 흔하고 뻔하지만 유효할 때가 있다. 매 순간 경험하는 감각과 느낌이 그렇기 때문이다. 도처에 적이 있고 사방에서 무엇인가 공격해온다. 긴장으로 몸과 마음은 굳어 있고 이 싸움을 멈추고 싶지만 방법도 능력도 없다. 이길 수 없지만 또 질 수도 없기에 링에서 내려올 수 없는 상태. 문학을 하는 것도(사랑하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무엇에 대해 사유하고 감각하는 모든 문학적인 상태들. 홀로 섀도복싱을 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단식 공연을 하며, 때론 그림자들과 극을 하면서 죽는 그 순간까지 무대의 빛을 볼 수 없더라도이 삶을 유지하는 것. 필요하다면 버티고 싸우며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 무의미를 견디고 사소함을 견디고, 질문을 이겨내고 무관심을 이겨내는 것.
때로는 수치와 치욕으로부터, 때로는 쓸모와 의미의 강압으로부터 의연해지는 것.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문학에게 묻고 싶은 날이 있다. - P124

자신의 감각과 사유. 창작을 향한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욕망. 그리고 아직 구체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지 않은 ‘어떤 창작하고 싶음‘ 속에 깃든 고유함. 다른 것들끼리의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 마침내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명명할 때 그것은 고유해진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130

‘사랑‘이다.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단순하고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누구나 쉽게 갖다 쓰는 뻔하고 빤한 표현 같지 않은가. 어딘지 애 같고 노인같은, 그저 낭만 타령이나 하는 감상주의자처럼 느껴지지 않나. 문학은 종이다. 텅 빈 허공이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다. 소설이다. 소설이 아니다. 우주다. 바다다. 바보다. 아무것도 아니다. 쓰러져가는 집이다. 불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이다. 가능한 것들의 불가능한...... 등등. 별 말을 다 해봤는데 아니다. 어딘지 조금씩 빗나가고 엇나간다. 정확하지 않고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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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날과 달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깨달음, 선택과 포기, 후회와 어리석음의 흔적으로 각자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 P54

생각한 뒤 쓴다. 맞다. 하지만 쓰면 생각이 된다. 작가의 회망과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쓸 것이 없어도 쓰면 쓸 것이 생긴다는 것. 무슨 생각인지 잘 몰라도 쓰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
표현하려고 한 것은 실패했지만, 아주 가끔은 실패의 결과로 표현된 그것이 최초의 생각과 감정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 - P70

소설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라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 밑에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타인의 마음에 숲과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고 인간의 감정과 감각에 바람과 별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 P71

경험에 관한 완료된 해석은 그것이 끝나야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는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만, 어쩌면 그 비극과 어리석음의 인식이야말로 삶이 주는선물일 수도 있다. 경험에 대한 완전한 기억과 서사를 얻는 것이다. 이 선물에 의지해 우리는 다른 경험으로 향할 수 있다. 그것은 몇 번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이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이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래 놓고 또 뭔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속고 속이고, 영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환상을 믿으려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별을 향해 전개되는 서사지만 우리는 그것에 또 한 번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투신할 것이다. 안 그럴 것 같겠지만 그런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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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도 없고 우두머리도 아니지만, 아산테는 왕이었다. 아산테는 스스로의 왕이었다. - P209

와니니는 사자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상에 그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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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가를 치른 일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아. 그것이 사자의 법이야. 그러니 이제 울지 마. - P55

‘초원의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지. 말라이카도 너도 마찬가지야. 그게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오늘 네가 할 일을 해. 그럼 내일이 올 거야. 그것이 초원의 법이야.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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