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나라'라고 제목을 적어놓고 보니 국가적인 인물의 서거에 지나치게 사적인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민주개혁진영의 입장에서 보자면(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 입장을 이해하는 편이긴 하지만 내 입장은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불과 두 달여 사이에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다. 며칠 전 어느 정치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DJ가 후광으로 존재하는 민주당과 그렇지 않은 민주당은 많이 다를 것이며, 지금의 MB정국에서 DJ만한 돌파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정치인이 다시 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무렵, 그는 풍문의 정치인이었다. 마을 어귀 쉰내 나는 개천 사이 골목길로 접어들면 지금도 눈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이미지는 '김대중 선생 연설회' 벽보였다. 그는 아직 미국에 있었고,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나 그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는 광주 비디오가 돌아다니기 전부터 호남향우회든, 아니면 다른 조직이든 비밀스럽게 그의 연설을 듣는 모임을 가졌다.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형욱 회고록 때문이었다. 당시엔 깨알 같은 글씨로 세 권 정도로 출판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때 박정희의 수족이었던 김형욱의 회고록은 5공 치하에서 유신 정국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책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충분한 편집자주가 따라붙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한국 정치사의 한 흐름 속에서 DJ는 결코 진보(좌파)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정치역정과 계보를 따지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잠시 몽양(건준)을 기웃거리긴 했으나(이것이 두고두고 그를 좌파빨갱이로 낙인 찍히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우편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후 그는 줄곧 소규모 지주 계급이 지지기반이자 뿌리였던 민주당 신파(장면)의 계보를 잇는 인물이었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뿌리는 호남이었다.
나는 가끔 지역감정의 일부 원인을 호남(혹은 호남 사람들)에서 찾는 이들에게 분개하곤 한다. 그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질서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는 것과 흡사할 정도로 무책임한 짓이라 여긴다. 호남과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호남은 한국의 식민지(지역적으로는 말이다)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희생자에게 그 결과물로 생긴 현상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어찌 되었든 잔인한 일이란 뜻이다.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30년쯤 전에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거와 또 많이 다른 길을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역 감정의 양상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우리 집안은 호남쪽과 별 관련은 없었다. 도리어 비호남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러하듯 DJ와 호남에 대해 차별의 정서를 은연중에 나타내는 편에 가까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보다 통일을 향한 그의 노력이었다. 불과 몇 해 전 서울 불바다를 뚫고,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 일보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던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에서 구해냈다. 남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에 가까이 다가선 듯 보였다. 민주적인 정권교체는 통일에 대한 그의 업적에 비하면 도리어 작은 편에 속하며 IMF외환위기 극복은 업적 축에도 들지 못할 만큼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그의 용서는 천주교 신자로서 그만의 개인적인 것이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그가 잘못 뿌린 씨앗 중 하나를 노무현이 바로 잡으려 했으나 그만큼 후임자를 힘들게 만든 일 중 하나였다. '과거사 진상규명' 말이다.
가끔 한국 사회의 '소중화주의' 내지 '리틀 아메리카니즘'은 한국 사람들에게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만든다.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를 모르는 사람은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는 여전히 '지역정서'에 의해 지배당하며 앞으로도 꽤 오래도록 존속될 것이다. 그러나 지역정서가 한 편으론 종교적 열정과 흡사해보일지라도 종교적 열정이 정치적으로 발산되는 밑바탕에조차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정서의 실제 내막 역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일 뿐이다. 지역감정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은 솔직히 매우 많다.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지역 연고가 이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실(공적인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식적인 수준으로 후퇴하기 전까지)이 도래하기 전까지 지역정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고, 이것이 제3세계, 정치적 후진국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당연히 한국도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체감과 상관없이 그 후진국들 반열에 포함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노무현은 DJ의 자식이다. 그가 친아들이 아니라 양아들이라 할지라도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차지한 것이라 하더라도 노무현을 선택한 것은 그의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광주와 호남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제 노무현이 떠나고, 김대중도 떠났다. 한국의 민주개혁진영, 호남 지역의 정치적 아이콘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DJ는 살아 생전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왔지만 노무현의 출현으로 전근대적인 후계자 지명 같은 정치질서는 사라졌다. 이제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오래된 구세주와 새로운 구세주 모두를 잃었다. 마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고애자(孤哀子)' 신세처럼 보인다.
내게 '한겨울 매서운 추위, 눈밭을 뚫고 피어난 인동초'로 표현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마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못지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되던 해 선거에서 나는 그에게 표를 찍었고, 노무현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진보정당를 지지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우리에게 그만한 여유는 생겼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세월로는 아니,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민주화란 관용이 폭넓게 자리매김하기까지는 아직 우리 모두가 좀더 외롭고, 슬퍼야 하는 시절인가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 아니,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죽산 조봉암, 장면의 뒤를 이은 김대중 선생의 서거를 깊이 애도한다.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중도정치인의 한 맥을 그가 이었다.
부디, 이들에 대한 추모와 기억을 밑거름으로 이 땅에서 새로운 정치, 올바른 정치가 꽃피어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