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곳 영국 뉴스에 영국 100대 기업들이 이사진의 25%를 여성에 할당하는 목표를 채웠다는 기사가 났다. 영국에서 여성 이사 할당제는 법적인 강제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실질을 보면 25%의 대부분은 (상임이 아닌) 사외 이사였다. 숫자만 형식적으로 맞추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다음 목표는 33%라고 한다.

영국 사람들이 이런 이슈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비비씨 사이트에서 이 뉴스의 댓글들을 몇 개 읽었다. 여성 할당제 때문에 능력 있는 남성이 오히려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댓글 등 부정적 의견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몇 개 읽다가 그만 두었다. 비비씨 댓글들은 이런 이슈들에 대해 거의 언제나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 

아마 여성 할당제를 양성 평등의 이념 위에서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유냐 평등이냐 하는 시대착오적인 논쟁을 재연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할당제는, 말하자면, 기업 경쟁력,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즉, 별 노력 들이지 않고(세금 쓰지 않고) 산업계에 이용가능한 인적 자원을 두 배로 확장해 주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행 초기에는 좁은 여성 인재 풀에서 임원급, 이사급을 골라 내느라 고생스러울 것이고 역차별 논란도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런 정책을 한국도 도입해야 할까. 당연하다. 조사들을 보면 한국이 양성 평등 지수에서 세계 최하위권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다. 지금이 여성 우위의 시대라고 착각하고 있는 몇몇 한국 사람들은 이런 기사들에 황당해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 중 몇 %가 여성일까? 국무위원 중 몇 %가 여성일까? 기업 고위 임원 중 몇 %가 여성일까? 여성과 남성 사이 임금 격차 수준은 어떠할까? 등등. 이런 부분에서 한국은 세계 최하위 수준의 성평등 지수(아마 아랍 국가나 북한 등과 경쟁해야 할 수준)를 보일 것이다. 

(여성들이 사시나 행시, 공무원 시험에 몰리고 또 두각을 타나내는 현상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이런 임용 제도(즉, 객관적 시험을 통하는)만이 성차별없는 공정한 경쟁을 담보해 줄 수 있다는 것, 둘째, 이런 공정한 경쟁 제도 아래에서 여성은 실제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 아마 멍청한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른다. 원래 여성이 시험에는 더 강하다. 그래? 그래서 어쩌라고?)

사회를 주도하는 힘들에서 여성이 철저하게 소외된 결과를 우리는 매일 매일 어디서건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체주의적으로 획일화된 사회. 한국에서 남성-여성 관계의 원형은 전자가 후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관념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남성 사이의 관계는 권력(지위, 나이, 돈 등)에 따라 철저하게 서열화된 형태를 보인다. 나는 한국 사회 특유의 경직성, 획일성, 피상성, 도착성 등의 근원은 결국 성 문제에 있다고 믿는다. 즉, 한국 사회는 여성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며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대상화시키는 것이다. 

(소외는 한 인간을 총체성이 아닌 성, 나이, 지위, 직업, 출신 지역, 기수 등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대상화란 그런 특성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전체 가치 구조 안에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김영미'는 제2의 성(여성)이므로 전체 가치 구조 안에서 주변적인 곳에 위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김영미는 여자라고 보호받고, 여자라고 지도받는다.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야 한다.) 

(한국의 이런 가부장적인 구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고위직 여성 비율이 절대적으로 형편없게 된다. 다른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는 박근혜 정권이다. 박근혜 정권의 통치 구조는 철저한 획일성, 철저한 서열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 서열 구조에서 박근혜는 정점에 있고 그러므로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그러면 박근혜의 절대적인 힘의 근원은 어디일까? 물론 국민이다. 서열의 절대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국민이다. 박근혜가 노령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노령층이 서열의 절대성(이 경우는 나이와 성별)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박근혜가 경북이라는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경북 지역이 서열의 절대성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쉽게, 그러므로 경북 지역이 매우 고령화된 지역이거나 매우 보수적인 지역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보수성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낮은 지위로 드러날 것이다. 서열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을 근원적 범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김영미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으로, 인간이기에 앞서 '여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서열의 절대성이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는 서열이 가능하지 않다.)

(두 번째는 한국의 걸그룹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을 절대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성들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서의 '김영미'와 마주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자신의 수컷성을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것이 곧 걸그룹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걸그룹을 소비하면서 한국의 가부장적 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결론. 한국은 어마 어마하게 남성 우월적인 사회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사람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에는 바로 성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믿는다. 문제의 근원 중 하나가 그것이라면 해답 중 하나도 거기서 나올 것이다. 거기서 나와야만 할 것이다.  

(솔직히 이 포스팅을 쓰게 된 계기는 메갈리안이라는 사이트였다. 나는 (일베에 들어가 보았던 것처럼) 메갈리안에 들어가 보았다. 쓰레기라면 쓰레기다. 주제는 한국 남성 혐오다. 주로 서양 남성의 성기와 한국 남성의 것을 비교하면서 한국 남성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한해 말하면 솔직히 두 가지 흐름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한국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 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서양 남성을 선망하는 것이다. 전자가 운동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또다시 대상화하는 덫이다. 실제로 메갈리안 이용자들은 이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때로는 후자에 휩쓸리기도 하고, 또 그 모습에 스스로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수 많은 쓰레기 글들이 있고, 때로는 성기 잘린 사진과 같이 눈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들도 있고, 매우 불철저해 보이는 글들(스스로를 대상화의 덫에 빠뜨리는 글들)도 많았다. 이러한 한계의 많은 부분은 미러링이라는 방법론 탓이라고 생각한다(말하자면 일베가 여성 혐오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남성 혐오를 표출하는 것). 요컨대, 왜 항상 여성을 남성의 안티테제로 설정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미러링이 아니라면, 예컨대 단순히 논리나 도덕적 훈계를 이용한다면 한국 남성이 꼼짝이나 할까?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남성 우월적인 사회라면 극단적인 남성 혐오 담론이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메갈리안이 너무 늦게 등장했고, 방법론적으로도 너무 온건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메갈리안을 긍정적으로 본다. 메갈리안이라는 사이트의 모든 부작용을 안고서 나는 메갈리안을 긍정적으로 본다. 예를 들어 메갈리안은 한국 남성 혐오를 부추기면서 결과적으로 물질 지향, 외모 지향을 옹호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 남성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고 있지 않은가? 글쎄... 그것이 이미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니던가? 서양 남성의 거대한 성기 사진에 대해 침을 질질 흘려대는, 메갈리안 여성들의 댓글이 좍 달리는 것이나 걸그룹들을 소비하는 우리 남성들의 모습이나 이 어마 어마한 가부장적인 구조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어느 쪽이든 돈과 능력이 되면 자신들의 환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메갈리안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는 반면, 한국 남성들은 추호도 그런 의식이 없다. 말하자면 한국 남성들은 자신을 비출 거울을 갖고 있지 않고, 그러므로 메갈리안의 미러링은 이 경우 아주 유효한 방법론인 것 같다. 고백하자면 나도 메갈리안의 글들을 통해서 다른 옵션, 다른 시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 블로그에 쓴 글들 중에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이제 깨닫고 부끄러워 하고 있다. 관성은 도발에 의하지 않고는 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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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3 0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weekly 2015-11-13 04:38   좋아요 1 | URL
하신 말씀에 한 점 유보 없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마립간 2015-11-1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요를 누르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한 점의 유보를 제외한 내용에 공감합니다만, 공감의 유보는)

미러링이 단순한 논리와 도덕적 훈계보다 (단기적 효과는 있겠지만,)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혹시 서로 상대에게 타당성을 제공하면서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까요?

weekly 2015-11-13 15:58   좋아요 0 | URL
제가 느끼기에 메갈리안이 `아직` 페미니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성혐오에 대해 남성혐오로 맞받아치고는 있지만, 그러면 여성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갖고 있지 못한 듯 합니다. 메갈리안들은 여전히 수컷성에 의해 정의된 암컷성을 내면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메갈리안의 `데이트에서 더치페이를 몰아내자`라는 주장은 미러링이 아니라 순수하게 긍정적 주장입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페미니스트도 이런 주장을 페미니스트적인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메갈리안이 이 단계에 머무른다면, 말씀대로 혐오 세력 끼리의 끊임없는 혐오전이라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론의 주목을 받고, 새로운 회원들이 생기고, 기존 진영과의 연대가 모색되고 하다보면 새로운 운동 논리가 필요해지는 시점이 오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즉, 여성 혐오 대 남성 혐오라는 구도가 아니라 여성 혐오의 근거 자체를 무화시키면서 혐오의 구조를 와해시키는 논리가 필요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여성 혐오자들에게 여성 혐오를 정당화시켜주는 현실적 근거는 군대입니다. `남자들이 너희를 보호해 주었는데 너희들은 싸가지없게...`라는 논리겠지요. 이에 대해 아무리 `여자들은 아이 낳아 주잖아,` `그런 건 국방부에 가서 따져`를 외쳐도 그리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병역세를 자청하고 그것으로 사병들의 급여를 현실화시켜서 제대할 때 2000만원 적금 통장을 남성들 손에 쥐어 주면, 그러할 때에는 여성 혐오의 현실적 근거가 사라져서 여성 혐오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메갈리안 등의 여성 운동이 이렇게 구도 자체를 와해시키는 단계까지, 구조 자체를 초월하는 단계까지 전화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전화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분명 단순 대결 구도 이상이 아니지만요.

진생로얄 2015-11-21 0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하는 아닌데 아쉽지만 메갈리안 여성들에게는 그만한 지적 능력과 현명함은 없습니다 물론 개개인으로 봤을때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말이죠.. 악성 여혐남성들 역시 마찬가지구요 근데 대한민국이 아직 어마어마하게 남성우월주의 라고 하셨는데 주인장 연령대가 좀 있으신가보죠?

weekly 2015-11-22 07: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봤을 때 메갈리안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메갈리안이 지금의 상태를 지속하거나 더 악성의 사이트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메갈리안을 계기로 더 건강한 안목의 운동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후자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구요. 아마 그 운동들은 무엇보다도 진생로얄님처럼 한국이 어마어마하게 남성우월적인(이 말이 불편하시다면 남성중심적인) 사회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분들의 바로 그 인식과 싸워야 할 테지요. 메갈리안도 바로 이 인식과 싸우고 있는 것이구요.

진생로얄 2015-11-2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남성 우월주의라면 보통의 한국남성들은 꼴통 마초 X3배일텐데요.. 저는 지금 이 현상을 답답하게 바라보며 중재하는 의견을 달곤 하는 사람이죠 지금 이 현상은 좁은 의미로 보면 여혐 걸린 남성들을 훈계하는 메갈이지만 광의로 보면 사회현상 이라고 할수 있죠 그런데 의외로 고학력자들조차 협의로밖에 못 보고 있더군요

진생로얄 2015-11-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대한 얘기는 너무나도 방대해서 말로 해야 하는데 저는 글을 쓰기가 귀찮아서 대충 제가 타 웹에 올린 댓글이나 글만 띄워드릴테니 토론해봅시다 고학력자들조차도 대부분들 협의로, 감정적으로 보는 이 상황이 답답한 사람이거든요

http://pann.nate.com/talk/327688884#

http://pann.nate.com/talk/328112641

http://pann.nate.com/talk/321714026

http://lovewar.tistory.com/110 (펌글)

http://pann.nate.com/talk/328754772?page=8 (이 글의 댓글에 리드리스월 이란 닉넴이 제가 쓴 댓글입니다)

아 그리고 절 보고 남성중심적인 이라고 쓰셨는데 그렇게 쓰신 주인장님의 본문글에도 문제가 있는데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신다면 여성편향적입니다 힌트는 쌍방과실입니다


진생로얄 2015-11-2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온라인에서는 위와 같은식의 주장을 할 틈이 별로 없습니다 죄다 논리, 세밀함, 계산기 못 두드림 (플러스 요소가 있다면 마이너스 요소도 있는데 그 부분을 고려를 안함) 등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혐 남혐의 문제가 지적 수준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계산기를 못 두드리는 부분에 대해서 잠시 쓰겠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온라인에서 결혼하면 남자가 손해니 여자가 손해니 하며 따지죠 그런데 중재운동을 한다는 메갈여성들 조차도 계산기를 제대로 두드리질 못해요

결혼비용을 7:3으로 해도 여성이 다 불리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공감하겠지만 실제론 아닙니다
역으로 여성들에게 물어보죠 4년쯤 전에 한국남성 가정경제부담률 95%(대략) 이니 여성들 가사육아 안한단 얘기 하지마라 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건 전 연령대의 수치죠 그 연령대에서는 사회적 평등은 커녕 교육의 평등조차 못 받은 여성들이 많습니다 제 어머니도 교대를 나왔지만 외할아버지에게 졸라서 나온거라더군요 외삼촌들은 한의대 나오고 영국 유학도 보냈는데 딸이라고 고졸만 하라는거 억지로 졸라서 교대 갔다더군요 그시절엔 이런일이 비일비재 했고 말 안해도 알다시피 남녀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았었잖습니까 그러니 가정경제 부담률이 95%가량 나오죠 지금 결혼하는 연령대가 그런 수치가 나올리가 있겠습니까

결혼비용 7:3은 현재 결혼하는 연령의 통계를 내놓고선 가사분담육아는 전 연령의 통계를 들이대는건 문제가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통계는 통계란것입니다 남성이 100을 다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여성이 100 다 부담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통계가 그런 비율로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나 여성의 가사육아, 시댁 제사 등에서는 통계를 들이냈던가요? 요즘 젊은 부부는 명절에 가까운 국내나 시내 번화가에 남편과 데이트나 휴식을 즐기는 비율이 어느정도 있다는 기사도 본적이 있습니다 하는 경우 안 하는 경우 맞벌이일 경우는 남성의 총 경제활동 기간의 몇%를 행하였는지도 고려해봐야 할것입니다 무작정 요즘여성은 맞벌이니 다 불리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라서 제사를 간소하게 지내는 집은 뭘까요 더 쓸말은 많은데 귀찮아서 줄이겠습니다
그런 경우의 수를 배제하고 남성에게만 통계를 들이대고 가사육아 제사 등 여성에게 불리한점에 대해서는 전 연령의 통계를 들이대는것은


ex) 남성 가정경제부담률 90%(전 연령 통계)가 넘으니 너희들 여성 불리한것 입 닫고 있어라 라는 식의 편파주장과 다를게 없습니다

혹 그거 아십니까? 다음 같은 사이트는 닉넴 클릭하면 그 사람의 예전 댓글 전부 볼수있죠 여혐 댓글 단 남성들 정치관련글 댓글엔 진보성향입니다
메갈여성들도 남녀 문제에선 남성vs여성 구도지만 정치얘기할땐 상당수가 같은편이죠 그런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어쩔때는 내편, 어쩔땐 적, 그와 동시에 뼈속까지 같은편도 아닌.. 이익집단의 모임



weekly 2015-11-23 15: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들 잘 읽어 보았습니다.

1). 약간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진생로얄님을 남성우월주의자라고 말한 적은 없고요. 걸어주신 링크 마지막 것을 들어가 읽어 본 지금은 더더군다나 진생로얄님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 전에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2). 진생로얄님은 메갈리아가 사회 현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링크 거신 글에서 경기 불황을 예로 드셨지요? 한국이 경기 불황인 상황이니 채용할 때는 남성 우선, 해고할 때는 여성 우선, 남성 노동자의 가부장적 책임감을 이용하여 오이시디 최장 수준의 노동 강요, 이렇게 배제된 여성들의 자기 방어적 행동 패턴 등등... 한국 사회의 모순된 구조와 가부장적 구조가 어떻게 서로를 견고하게 하는지... 이런 점에서 진생로얄님과 제가 딱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3). 진생로얄님은 `여성 혐오/남성 혐오 문제`(표현은 이렇지만 사실은 여성 혐오의 문제)가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하셨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현재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구요. 또 잘은 모르지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는 단계로 전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여성 혐오가 만연한 가운데 메갈리안같은 반발 움직임이 없었다면 전화의 계기도 없었겠다 싶은 것이구요.

(메갈리안은 일베와 같은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운동적인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일베가 한국 사회의 모순적 구조를 철저하게 내화한 수동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메갈리안은 그 정반대입니다. 또, 메갈리안은 반박될 수 없는 대의를 가지고 대중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과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 차이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다닌다든지 하는... 이런 점들이 제게는 메갈리안의 긍정적 가능성으로 보입니다.)

쿵콰앙 2021-05-0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ㅅㅂ 페미년이다

weekly 2021-08-02 04:45   좋아요 0 | URL
하하, 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실은,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때 아닌 건국 시점 논란. 어쨌든 정리해 보자. 건국 시점에 대해, '말하자면' 기존에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

1. 정통주의: 정통주의의 근거는 대한민국 헌법이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한반도 유일의 정통성 있는 합법 정부다. 그러므로, 예컨대 북한은 불법 단체다.

2. 현실주의: 헌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는 입장이다. 예컨대, 현실적으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미 남북 공동으로 유엔에도 가입했으니까.

아마 한국이 정상적인 나라라면 보수 세력들은 당연히 정통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진보 정당은 정통주의가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고 대결주의적이고 이념적이라는 점에서 현실주의에 기울 것이다. 요컨대, 기존의 논란에서는 북한을 국가로 봐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수 진영을 자처하는 박근혜 정권이 난데 없이 수정주의를 표방하고 나선다.

3. 수정주의: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성립하고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48년이니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은 1948년으로 보아야 한다.

무슨 말장난일까? 물론 말장난이 아니다. 수정주의의 함의는 다음과 같다:

1). 그러므로 1948년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만이 건국 유공자다. 그러므로 예컨대, 김구는 독립 유공자이지 건국 유공자는 아니다. 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들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아무 상관이 없다.
2).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공산화의 위협에 저항하며 건립되었다. 그러므로 반공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 이념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3). 객관적으로 말해서 독립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독립 운동이 기여한 바는 사실상 미미하다.
4). 일제 시대를 산 거의 모든 사람은 사실상 일제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친일이라고 비판하는 인사들도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 일제의 기관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해줘야 한다.  

수정주의는 하나의 관점이고 이념이다. 그러므로 토론을 통해 수정주의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내 생각에는 거의 무의미한 것 같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 뿐이다. (솔직히 한국에서라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물론, 수정주의가 먹혀 들리는 없다고 본다. 교과서를 어떻게 바꾸든 말든 말이다. 수정주의는 민족, 자주, 독립, 민주 등의 긍정적인 테제가 아니라 반공이라는 안티 테제에 기반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가당착이다.

램브란트의 야경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의 어떤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램브란트의 거대한 작품 앞에 서는 순간까지 내내 충격이 빠졌었다. 왜냐하면 관객의 동선을 입구에서부터 램브란트의 그림까지 안내하는 동안 미술관의 의도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네덜란드는 이렇게 외세(스페인)와 싸워 독립을 챙취해 냈다! 라는 것이었다. 램브란트의 그림이 무엇을 의미할까? 자기 돈으로 산 군복을 입고, 자기 돈으로 산 무기를 들고, 그렇게 가지각색의 형상을 한 사람들이 민병대로 모여 서 있는 모습, 그것은 시민들의 '자발성'을, 네덜란드라는 국가의 기초가 시민의 자발성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 그림은, 나 같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람객의 시선 따위는 싹 무시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딸과 아들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네덜란드를 만들어 왔다!" 나는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고,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인 국가주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국가든 그 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을 공동선의 체험, 즉 remembrance의 형태로 가공하여 그 구성원의 통합성을 유도한다. 미국의 독립 기념탑과 헌법이 그렇다. 독일의 런던 대공습 다음 날 새벽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돔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자태를 드러낸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모습이 그렇다, 등등.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수정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공동선의 이념은 반공이고 공동선의 체험은 한국전쟁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 반공? 더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한국 전쟁... 한국전쟁은 냉정하게 보면 동족 간에 벌인 내전이고, 냉전 시대 두 이념 진영 사이의 대리전이었을 뿐이다. 한국전쟁은 공동선의 체험이 될 수 없다.

한국도 다른 모든 나라와 똑같이 그 통합성은 시민적 자발성에서 출발한 공동선의 체험에서 올 수 밖에 없다.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그것은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의 역사이고 독재에 항거한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다. 만약 이런 역사가 없다면, 또 이러한 역사를 remembrance의 형태로 사회가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내가 단지 우연히 태어나 살게 된 땅 이상의 의미는 없게 될 것이다. 거기에 정서적 연대는 없게 될 것이다.

이른바 한국의 보수 진영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의 remembrance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Remembrance는 필연적으로 시민의 자발성을 고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사회가 통합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보수 진영들은 사회 통합의 기제로 가족주의, 가부장주의를 내세운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는 어떻게 한국의 청년들을 20만원도 안되는 급여로 착취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군복무는 공공선의 실현이 아니라 남자라는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생긴 의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군복무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의 부모, 형제의 안녕을 책임진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국가는 단지 너가 그러한 일을 수행할 때 필요한 도구와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다. 다치면? 그러므로, 다친 사람 책임. 끝. (독립 운동이나 민주주의 운동이 공동선의 추구라는 것은 그것이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에 오히려 역행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한다.)

다행히도 이른바 보수 진영의 수정주의는 극소수파의 의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전히 낙관의 근거를 갖고 있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 운동의 역사가, 독재에 항거한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공동선의 체험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낙관은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remembrance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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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국의 현충일 앞 일요일이다. 아마 commonwealth(우리가 영연방이라고 부르는 국가 연합체다. 그러나 '영연방'이라는 말이 너무 영국 중심적이므로 코먼웰스 등으로 불러 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국가들에서 온 대표들이 영국 여왕을 중심으로 행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오늘 아직 테레비젼을 켜지 않아서...) 나도 예전에 우연히 행사하는 곳 근처를 지난 적이 있었는데 가슴에 훈장을 주렁 주렁 단, 스코틀랜드 치마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분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자부심이었다. (내가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낀 것이겠지. 즉, 그 분들에 대한 존경.)

영국의 왕세자 둘은 전부 군대를 다녀 왔다. 그리고 상이 병사들의 복지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얼마 전 어떤 동네의 빈가 개량 사업에 이 왕세자들이 참여했다. 상이 병사들의 복지에 쓰려 한다는 것이다. 왕세자들이 직접 손일을 하는 것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왕세자 해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했다. 1차 복무를 마치고 2차 복무 중에 왕세자가 전장에 근무하게 되면 해당 부대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영국으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그때 해리가 탔던 비행기에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영국 군인 3명, 사망한 덴마크 군인 1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더라. 영국 왕세자들의 이러 저러한 대외 활동을 보면서 나는 연봉값을 잘 하고 있구나, 하고 농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자신이 입은 부상, 정신적 내상 등에 대해 잘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아프다는 소리 안하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신경써야 하는 것이다." 라는 해리 왕세자의 말은 자신이 직접 전장에서 뒹굴어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을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군대는 이 정도의 애정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 한국을 지킨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한편, 일제에 참여한 군인들이 한국군의 최고위층을 장악했고, 군인들이 불법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때로는 시민들에 발포하기도 한 암흑의 역사도 있다. 지금은 어떨까? 전시 작전권 환수를 불안해 하며 한사코 반대하는 것이 바로 군 수뇌부들이다. 어디까지 썩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갖 비리가 난무한다... 아마 딱 한 가지만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사병의 급여 수준을 말이다. 한국군 사병들의 급여 수준은 터무니 없이 비정상적이다. 지금 사병들이 받는 급여 수준이 바로 국가가, 군부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시민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군대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물어 무엇하겠는가? 국가나 군부는 자신들이 군인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한없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부족분을 애국심, 국가 의식으로 채우려고 한다. 물론 허황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은 국가에 애정과 존경을 줄 수 없다는 감정으로 표출된다. 이것은 소외의 감정이다. 

코먼웰스 베테랑들의 자부심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타자 이론은 유서 깊고, 이제는 거의 상식이다. 예를 들어 어버이 연합 노인들의 악에 받친 구호들은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물론 좌파 집단이 아니다. 바로 우리 사회의 소외 자체이며 그들의 삶의 소외 자체이다. 악에 받친 감정의 폭 만큼이 소외의 폭이다. 소외의 감정은 소외의 현실을 표현한다. 그것이 아마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적나라한 수준의 소외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낙관론의 근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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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의 가정 혹은 성과 등을 사르트르 철학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나는 대로 대충 말해 보면 이렇다.

1). 실존이 인식(지식)에 앞선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의 구체적인 경험을 지식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헤겔에 대한 반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의 고유 테제다.

2). 전반성성이 반성성에 앞선다. 전자가 후자를 조건짓는다. 그러므로 근대적 주체(반성적 의식)의 우월성이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3). 유일한 실재, 혹은 세계의 굳건한 토대는 언제나 즉자이다. 관념론에 대한 반박이다. (물론 여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다.)

4). 세계(상황)는 언제나 무(의식, 자유, 경험자 등등 무엇이라 부르든)를 전제한다. 실증주의적 이론들에 대한 반박이다.

반면 한계도 명확하다. 즉, '존재와 무'는 존재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존재와 무'는 아직 추상적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전반성성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없다, 타자 관계를 시선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등등의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존재와 무'가 유연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존재와 무'가 후기 사르트르, 푸코,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의 철학의 생산적인 부분과 필연적으로 배치될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철학 안에 '구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자가당착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성이라는 개념, 전반성성이라는 개념 등등이 더 발전될 필요가 있다. 후기 사르트르의 관심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공하였나?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것의 실패가 필연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존재와 무'의 존재론에 기반한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그 확장에 필연적 장애로 작용할 것이 '존재와 무' 안에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너무 우호적인 스탠스라면 비판적인 스탠스로 바꾸어 다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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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1961년 로마 강연 "Marxism and subjectivity"를 읽었다. (뉴 레프트 리뷰를 새로 구독했는데 온라인으로 과월호를 볼 수 있더라. 피디에프로 출력해서 읽었다.) 철학서를 읽고 감동을 받은 것이 언제였던지! 물론 이 감동은 상당 부분 감정적인 것이다. 사르트르가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를 다루는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한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 때 일이 떠올랐고 그때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을 50여년 전에 파리의 카페에 앉아 글을 쓰던 사르트르가 공유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이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든 지적으로 훈련된 통찰의 결과든 뭐든 나는 기꺼이 사르트르에게서 관념성의 표찰을 떼어주기로 했다.    

나는 이 로마 강연 문서가 이처럼 오랫 동안 잊혀진 상태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 잡지 "현대"에 실린 것은 1993년이고 "뉴 레프트 리뷰"에 영어로 번역되어 실린 것은 2014년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강연문은 사르트르의 후기 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르트르 철학의 전회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물론 이 전회는 실존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개종이라는, 심각하게 유치하고 피상적인 관찰과는 별 상관이 없고 단지 사르트르 철학의 내적 전개 양상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전회에 대해 길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가지 대비만 예시하기로 하자. 즉, self-deception/non-knowing. 아마 이 예시만 보고도 이 전회의 한 측면을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서가 중요하다. 사르트르는 이 짧은 문서에서 자신이 '존재와 무'의 철학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그렇게 하여 성취한 철학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명확하게, 그리고 때로는 아름답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철학 문장을 읽은 것은 또 언제이던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 이후로?)

(그러고 나면 철학의 문제가 남는다. 간단하게 말하면 새로 얻은 개념을 가지고 앞과 뒤를 다시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몇 년 치 장부를 꺼내들고 계산이 맞는지 하나 하나 추적하고 대조해 보는 것과 같다. 새로운 개념에는 항상 이런 번거로운 일이 뒤따를 것이다. 이보다 더 우리의 관성, 보수성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있을까? 그러므로 새로움의 의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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