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런던 한국 영사관에 가서 투표를 했다. 대선, 총선 등 영국에 온 뒤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선거에 참여했었는데, 입구서부터 줄을 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20, 30, 4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면 무조건 민주당일 거라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문재인에, 아내는 심상정에 표를 주었다. 나는 애초 심상정을 뽑으려 했었다. 대통령은 어짜피 문재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진보 세력의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철수에 대한 검증이 시작되면서 문재인을 찍기로 마음을 바꿨다. BW 논란 등은 안철수에게, 법적인 논란거리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치명적인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재인의 아들 논란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서, 나는 문제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문재인이 그동안 이만큼이나 자기 관리를 잘 해왔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에게 표를 주기로 했다. 아내는 그동안 나에게 문재인을 뽑으라고 강력하게 협박을 했었다. 그런데, 토론을 보면서 문재인이 토론을 너무 못하고, 동성애 관련 발언 등에서 보듯 너무 보수적이라는 점에 답답해 했다. 특히, JTBC 토론에서인가, 문재인이 너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서, 지난 대선 토론회 때 이정희가 사퇴하고나서 긴장이 풀린 박근혜가 의자에 기대앉아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것이 연상된다면서, 그 꼴을 보고도 문재인을 찍으면 그때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니냐며, 결국 토론을 가장 잘한 심상정에 표를 주기로 한 것이다. 혹시 정권 교체가 되지 않을까 지금 두려워 하고 있다...:)


지난 해부터 올해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참으로 경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전진의 한 단계를 5월9일날 잘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강력하게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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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영국은 지금 저녁이라 내일 아침에 일어나 보면 탄핵 심판 결과가 나와 있을 것 같다. 탄핵 사유도 많고 관련 증거들도 많기 때문에 재판관들이 그 모든 사실 확인에도 불구하고 기각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들 한다. 게다가 국민의 80% 가까이가 꾸준히 탄핵 인용을 요구하고 있으니...

국외에서 바라봤을 때 이번 탄핵 사태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탄핵 인용을 주장하는 국민의 수가 고정적으로 80%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고영태 녹취 파일 문제도 있었고, 한 재판관의 퇴임 날 전에 선고 기일을 잡느라 일정상 무리한다는 주장이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도 놀라운 규모의 반 탄핵 시위가 연일 벌어졌었기 때문에 탄핵 찬성의 세가 어느 정도는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었다. 아내의 말로는 친박 세력들이 워낙 진상 짓을 해서 사람들이 아주 질려 버렸을 것이란다. 좀 진솔한 척, 좀 죄송한 척, 좀 불쌍한 척을 했었더라면, 탄핵 인용이야 피할 수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살 수는 있었을 텐데 박근혜는 끝까지 바보짓을 하고 만 셈이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과목을 더 철저하게 공부할 기회가 된 것 같다. 

(여기 살고 있는 어떤 분의, 한국 사는 부모님도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그 분이 "집회 가는 건 좋은데 몸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적어도 한국의 노인 세대의 반은 반 탄핵 입장일 줄 알았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60대 이상에서도 탄핵 찬성이 과반 이상이라고 하더라. 20, 30대의 90% 이상의 찬성률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 희망을 보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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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히 즐겨 듣는 곡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밴드이고 곡이지만 그때는 밴드 멤버들이 이렇게 잘 생겼는지 몰랐다.


저 멤버들 중 키보디스트와 베이시스트가 작년에 타계하였다 한다. 팝음악의 일, 이 세대에 속하는 뮤지션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인가 Yes가 자신들의 명반 Fragile의 전곡 공연을 했었다. 나는 시간과 돈 계산을 하다가 나중을 기약하자고 미뤘었는데 그만 밴드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크리스 스콰이어는 Yes의 상징적인 멤버이어서 이제 더 이상 Yes라는 이름의 밴드 활동은 없을 듯 하다. 올해 Yes의 오리지널 보컬리스트 존 앤더슨과 키보디스트 웨이크맨이 다른 세션과 함께 그들의 이름 머리자를 딴 밴드 명으로 공연을 한다고 하는데 Yes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가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재작년 피터 가브리엘 공연도 놓쳤었는데, 작년에는 스팅과 조인한 미국 공연만 있었다. 올해는 아직 투어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또 작년에 로버트 플랜트가 참여한다고 해서 콘서트 하나를 예약했었다. 그런데 로버트 플랜트가 스테어웨이 투 헤븐 표절 재판 때문에 로스 엔젤레스 법원에 가야 해서 그를 보지 못했었다. 한 시대의 증인들의 일몰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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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씨어터에서 연극 LOVE를 봤다. 아마 초연일 것이다. 소극장 규모의 작은 무대였고 상연시간도 100분 정도로 짧은 편이었다. 내셔널 씨어터가 이런 작은 연극에 플랫폼을 제공해 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셔널 씨어터를 거쳐 상업 무대로 진출하는 연극들도 꽤 있다. 예매를 제 때 못해 놓친 연극이 하나 있었는 데 상업 무대로 가더니 티켓 값이 몇 배로 뛰더라. 나같은 서민이 감당하기엔 벅찬 가격...

LOVE는 식당, 화장실 등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잔잔하게 묘사하는 연극이다. 아침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한 눈치 싸움, 또 이 컵이 내 것이니 네 것이니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 등등 작은 갈등들을 긴장을 극대화하지 않고, 또 상징적 장치들을 난발하지 않고, 다분히 건조한 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눈물을 훔치는데 손가락에 굵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눈물을 훔쳐서, 극이 끝나고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순간에는 나도 아랫 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LOVE라는 제목을 '희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연극의 유일한 상징적 장치는, 삶에 철저하게 실패해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예를 들면 거동도 힘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배불뚝이에, 그저 멍한 남자)이 멋모르고 그 공용 주택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그것은 아이로 돌아가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그들에게 순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대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거기에 하나를 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아이들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센터와 푸드 뱅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부모와 비좁은 공용 주택에서 사는 아이의 미래란, 즉 가능성이란 이미 아이 외재적으로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희망이란, 사랑이란 그 닫혀진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든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 점이 그 공동 주택에 모인 모든 사람들(수단에서 온 여인, 시리아 난민, 화이트 워킹 클라스 실업자 등등)에게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곧 윤리성을 정의하고 정치성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LOVE는 다분히 정치적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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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JTBC 뉴스를 찾아본다. 오늘 뉴스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손석희 앵커가, 현 상황을 진영 논리로 몰고 가는 세력에 반대하여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라고 지적한 부분이었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손석희가 논리의 벽, 혹은 논리의 한계 앞에 서 있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철학적으로는 손석희의 주장에서 비판점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그 옛날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인간이라면, 아니 좁게 잡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어떤 보편적 진리가 있다는 말인가? 박근혜에 대한 탄핵 국면에서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박근혜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인가? 태블릿 피씨 문제의 본질은 그 내용이므로, 그 소유자, 입수 과정 등에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본질을 회피하려는 수작에 불과한가?


현대 철학의 어떤 흐름에 따르면 손석희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명제(메시지) 자체의 참과 거짓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파편적일 수 있다. 그 명제가 누구에 의해 발화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어떤 상황 안에 놓이게 되는지 등등을 고려하여 그 효과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단일한 진리 체계를 구성해 놓고 다수성, 즉 다양한 의견이나 생각들을 단일성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그 현대 철학의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참조점으로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박근혜파의 대응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의견을 묵살하려 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 이것은 현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철학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더 이상 인류 보편이니 역사의 방향성이니 역사의 궁극의 목표니, 혹은 손석희처럼 상식이니 하며 우리 스스로는 대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 신화는 지난 세기에 이미 모두 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폐허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하여 모든 것을 진영 논리 싸움으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왜 그래서는 안되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시대의 철학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서구의 경우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중심부에, 흑인, 동성애자 등등을 주변에 놓고 사고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등이 여기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적 답이 주어진다고 현실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떤 시대적 모순을 포착한 관념은 현실로 전화하고는 했다. 앞서 말한 그 현대 철학의 한 흐름도 현실로 전화한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현실적 관념의 현실성을 다시 고민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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