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씨어터에서 연극 LOVE를 봤다. 아마 초연일 것이다. 소극장 규모의 작은 무대였고 상연시간도 100분 정도로 짧은 편이었다. 내셔널 씨어터가 이런 작은 연극에 플랫폼을 제공해 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셔널 씨어터를 거쳐 상업 무대로 진출하는 연극들도 꽤 있다. 예매를 제 때 못해 놓친 연극이 하나 있었는 데 상업 무대로 가더니 티켓 값이 몇 배로 뛰더라. 나같은 서민이 감당하기엔 벅찬 가격...

LOVE는 식당, 화장실 등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잔잔하게 묘사하는 연극이다. 아침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한 눈치 싸움, 또 이 컵이 내 것이니 네 것이니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 등등 작은 갈등들을 긴장을 극대화하지 않고, 또 상징적 장치들을 난발하지 않고, 다분히 건조한 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눈물을 훔치는데 손가락에 굵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눈물을 훔쳐서, 극이 끝나고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순간에는 나도 아랫 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LOVE라는 제목을 '희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연극의 유일한 상징적 장치는, 삶에 철저하게 실패해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예를 들면 거동도 힘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배불뚝이에, 그저 멍한 남자)이 멋모르고 그 공용 주택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그것은 아이로 돌아가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그들에게 순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대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거기에 하나를 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아이들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센터와 푸드 뱅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부모와 비좁은 공용 주택에서 사는 아이의 미래란, 즉 가능성이란 이미 아이 외재적으로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희망이란, 사랑이란 그 닫혀진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든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 점이 그 공동 주택에 모인 모든 사람들(수단에서 온 여인, 시리아 난민, 화이트 워킹 클라스 실업자 등등)에게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곧 윤리성을 정의하고 정치성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LOVE는 다분히 정치적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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