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초월성"은 사르트르의 데뷰작이다. 일반적으로는 후설의 초월적 자아 이론을 비판하고 사르트르 자신의 의식 이론을 정립하게 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르트르는 이 작품을 후설의 현상학을 접한지 2년도 안 되어, 그리고 독일로 가서 후설의 저작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지 1년도 안되어 써냈다.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후설의 이론에서 분기하였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에 개진되어 있는 사상을 사르트르가 평생 견지하게 된다는 점이 놀랍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너무 큰 그림을 그렸다. (평생 그 안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자아의 초월성"은 자아에 대한 현상학적 사례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주제는 제목에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은 중의적이다. 첫째, 의식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상정되는 자아, 즉 초월적 자아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둘째, 배후적 의미로서의 초월적 자아가 부정되었으므로 이제 자아는 의식의 대상으로,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배후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의식에 초월적인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자아의 초월성을 다루는 것이 이 작품의 본편을 구성한다. 사르트르의 아이디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나"는 나에게 반성 행위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전개하면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일상적 경험을 설명해 낸다:

 

철수: 이제 집에나 가자.

영희: 근데, 왜 짜증을 내니?

철수: 나 짜증 낸 거 아닌데?

경철: 철수 너 짜증 낸 거 맞아.

 

데카르트에 따르면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오직 나만이 나를 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는 의식 저편에, 즉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르트르의 중요한 결론들 중 하나이다. -만일 이러한 사상이 뭔가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 저작을 직접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웹에서 피디에프 문서로 된 두 가지 영어 번역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이 80 페이지도 안되는 짧막한 글이다. (나는 오래된 버전의 영역자 서문이 재미 있어서 그걸 구입해 읽었다.)

 

간단하게 주변적인 인상 몇 가지를 덧붙이자.

첫째, 이 책은 작은 "존재와 무"라고 할 만한 것 같다. "존재와 무"에 핵심적인 개념들인 의식의 정립성, 비정립성, 반성적 의식, 전반성적 의식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존재와 무"에서 암시적으로만 다루고 있는 윤리적 함의 등이 이 책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무"라는 단어만 찾을 수 없을 뿐이다.

 

둘째, 사르트르의 철학적 관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한 사건을 해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후설이 이론적 필요(여러 과학들에 엄밀한 기반을 제공해 주겠다는 야심)에서 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셋째, 사르트르의 비판자 중에는 사르트르가 독일 철학의 나쁜 전통을 이어 받아 나쁜 문체로 글을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칸트부터 시작해서 헤겔, 후설으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의 장엄한 전통)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읽어 본 사르트르의 작품들(존재와 무, 자아의 초월성, 감정 소고, 상상력)만 놓고 보면 이런 비판은 부당하다. "자아의 초월성"은 이러한 비판을 반증하는 가장 훌륭한 예이다. (요즘 같이 읽고 있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글들을 보면 사르트르의 문체의 투명성은 광이 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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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로 읽는 것은 사르트르다. 사르트르가 쓴 책들, 사르트르에 대해서 쓴 책들. 어찌 보면 좁은 영역의 사르트르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 것이었는데 이제 사르트르는 내 앞에 너무 넓게 펼쳐져 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서 감정이나 의식 이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접근했었다. 나의 제일 철학자는 스피노자다. 나는 스피노자의 감정, 의식 이론이 너무 개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의 이론들에서 구체적인 것을 보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미권의 감정, 의식 이론들은 너무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르트르에로 관심을 돌려 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철학자가 그렇듯이 사르트르 역시 총체적 이해를 요구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사르트르의 총체적 철학적 기획은, 어떻게 한 인간을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존재와 무"는 이러한 기획의 한 평면만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심리학적 측면. 만약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의 기반 위에서 인간의 사회, 역사적 지평을 구축하려 했다면 그는 거대한 실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이후에 "존재와 무"와 교접하는, 별도의 평면을 구축해 나갔다. 그렇게 하여 사르트르의 기획은 입체적인 것이 된다. 인간 이해에 있어 심리적 측면과 사회-역사적 측면을 아우르는.

 

사르트르를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분명해지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존재와 무"는 이런 기획의 총체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폐기하고 후기 철학으로 나아갔다가 말년에 다시 자신의 초기 철학으로 귀환했다는 식의 사르트르 이해만큼 졸렬한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존재와 무"는 사르트르의 총체적 기획의 유효성의 여부에 따라 유효성 여부를 판정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어폐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의 유효성 여부를 따지며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철학의 고전이다. "존재와 무"도 마찬가지다. "존재와 무"를 이십세기에 출간된 가장 위대한 철학서 중 하나로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사르트르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이유는 이렇다. 내가, 혹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사르트르는 고전으로서의 사르트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1980년에 죽은 아주 당대적인 사람이다. 우리의 당대를 철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일군의 철학자들이 있다. 그 중 사르트르는 그 경쟁에서 분명히 낙오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평가가 섣부른 것이었을까? 만약 사르트르의 철학적 기획이 경쟁적 이론들과 동등하게 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성찰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그 체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와 무"의 유효성도 확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러한 평가 작업은 너무 거대하다. 그러므로 셋째, 만약 사르트르에게서 아주 작은 약속의 빛이라도 발견될 수 있다면, 적어도 내게 그 빛은 이런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탐구는 그의 철학 경력 시작부터 끝까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었음을 나는 거듭 확인하게 된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건전한 태도에서 그의 철학의 긍정성을 기대한다. 현재로는 이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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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가을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오후 4, 5시만 되면 어두워 지고, 웬종일 구름이 끼여 있는데다 비가 내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은 이렇게 끼워보고 저렇게 끼워 보아도 도저히 영국에 적용될 수 없다. 

 

그래도 가을 분위기를 타보기 위해 나돌아 다녀 보았다.

 

(2~3 주 전에 윙크워쓰라는 데를 갔다. 작은 계곡 주위를 정원처럼 가꾸어 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가을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라고 해서 갔는데 보다시피 날이 아주 좋았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분이 정말 좋은 날에 왔다고 운이 좋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아무 생각없이 평상화를 신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죄다 장화를 신었더라.)

 

(윙크워쓰 산책로에 놓여 있는 의자다. 영국 사람은 죽으면 의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내가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 영국의 길가에 종종 저런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누구 누구를 기억하며~ 이런 문구가 패찰이나 나무에 새겨져 있다.)

 

(어제 갔던 데블스 펀치 보울이라는 곳이다. 계곡은 계곡이되 둘레가 대접마냥 둥글게 형성되어 있다. 이곳의 지명은 북구 신화 비스무리한 것에서 따왔다 하는데 안내판을 읽다 말았다. 난 영국의 안내판에 쓰여 있는 말들을 대체로 안믿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과장이 심하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구름이 잔뜩 끼고 비도 오슬오슬 오고 땅바닥도 진창이다. 전형적인 영국의 가을 풍경이다. 데블스 펀치 보울은 나름 산지이기 때문에 덤으로 안개까지 얹혀졌다. -내가 이 곳을 좋아하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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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11-2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 멋있어요.
영국 사람들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장화, 웰링턴 부츠! ^^

weekly 2014-11-25 01: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하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4-11-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 좋아요. 특히 두번째 의자가 놓여있는 풍경이 무척 좋습니다.
:)

weekly 2014-11-25 01:4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솔직히 잘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저도 의자 사진이 맘에 듭니다. 나중에 한국 가서 이 사진을 보면 영국이 떠오를 것 같아서요.
 

요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있다. 연필로 줄을 그으면서 한번 읽었고 지금은 볼펜으로 줄을 그으면서, 나름 이해를 갖은 상태에서 읽고 있다. 어렵긴 하지만 엄청나게 어렵진 않다.

 

존재와 무의 해석서로 영미권에서 그리 마땅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최근 한국에서 존재와 무 해설서가 새로 나왔다고 해서 복잡한 절차와 비용을 감수하며 사 보았다. 결과는 대단한 실망. 저자 분이 존재와 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설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듣도 보도 못한 용어들을 정의 없이 마구 사용한다. 나는 정체불명의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한다. 내게는 이런 것들이 저자의 무지를 감추려는 처량한 노력으로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존재와 무의 첫 문장을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다. "현대 사상은 현존자를 그것을 나타내는 일련의 현출들로 환원함으로써 괄목한 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왜 현존자, 현출과 같은 이상한 단어를 사용해야 할까? 저자는 별 대답이 없다. 그러므로 첫 단계에서부터 저자의 해설을 알아듣기가 힘들어 진다. 이것이 존재와 무라는 책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가 "현대 사상"을 후설의 현상학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현존자, 현출과 같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단어들을 사용한 것도 잘못이다. 사르트르가 첫 문장에서 이야기한 현대 사상은 실증주의, 경험론, 현상론, 현상학 등 반-형이상학적, 혹은 반-실체론적 사상 조류 일반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첫 문장은 "현대 사상은 사물을 그것을 나타내는 현상들의 연쇄로 ~" 라고 옮기면 족하다. 이렇게 하면 앞서 말한 사상 조류를 모두 포괄하여 말한 셈이 된다. existent에 과도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어진 대목들에서 "현상"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비로소 현상학을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 해설서의 저자에게 화가 나 버렸다. 내가 저 해설서를 주문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이 있었는데, 내가 저 책에 실망하고 신오현의 책을 주문하려 했을 때는 책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여기 저기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을 아주 옛날에 읽었었다. 한국에서 나온 사르트르 연구서 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깊이를 가진 책이었다. 작년에 나온 존재와 무 해설서가 저 모양이므로 신오현의 책은 여전히 사르트르나 존재와 무에 관한 한 독보적인 책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쭉...?

 

내가 신오현의 책에서 특히 알고 싶은 대목은 이런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개진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후기에 들어서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르트르가 스스로를 오해한 것이다. 후기의 작품들에서도 존재와 무의 개념들이 풍부하게 원용되고 있다. 사르트르 철학의 연속성은 의심할 수 없고, 사르트르의 철학 내에서 존재와 무의 가치 역시 그렇다.

 

내가 대충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다. 나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신오현의 책을 구할 수가 없다!

 

해서... 혹시라도 신오현의 저 책을 갖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댓글 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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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06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서핑을 하다가 어떤 철학자 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인생의 의미와 같은 거창하고 오만한 질문을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라.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반발을 자제하기 힘들었다.

 

첫째, 이 철학자의 충고 자체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한 답이다. 왜 자신만의 답을 타인에게 강제할까? (이 분은 기분 나쁠 정도로 강요투였다.)
둘째, 질문의 제기 또한 삶의 진실된 순간이고 삶의 진실된 감각이다. 사춘기 아이가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아이가 겪고 있을 상황과 이 질문이 별개일 수 있을까? 타칭 꼰대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 이 꼰대가 처한 상황과 이 고민이 별개일 수 있을까?
셋째, 특히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질문을 금기시한다. "나의 삶"에 대해 고민할 때 주위 사람들은 부모를, 자식을, 회사를 생각하라고 입을 모은다. 더 이상 "인생의 의미"와 같은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넷째, 질문은 추상적이고 감각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아직도 이런 이분법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구체의 의미는 항상 추상에서 얻어진다. 추상의 의미 역시 구체를 통해 얻어진다. 추상은 추상일 뿐이고 구체는 구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2. 신해철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튭에서 그의 음악을 찾아 들었다. 즐겨 듣던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신해철은 아이디어가 넘치고 웅장한 사운드를 좋아한 음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해철에게는 조용필이 갖지 못한 강점도 있었다. 바로 가사를 쓰는 능력. 유튭에서 들은 많은 곡들에서 그의 가사는 심각하다 할 정도로 일인칭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가 철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환기하게 되었다.) 심지어 말랑 말랑한 대중 가요라고 할 수 있는 "안녕"이라는 곡도 그렇다. 겉보기에 이 노래는 돈만 밝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한풀 더 들어가 보면 "꿀"이나 "돈"을 쫓는 삶이 아니라 "꽃"이나 "Lover"로서의 삶, 즉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신해철의 가사는 유치하게 들리기도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 토로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유치하게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어느 선에 이르고 나면 그러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신해철은 거침 없이 이런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예술가란 이런 질문을 일상에 잠긴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퍼부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 아닐까? "인생의 의미"와 같은 타부시되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제기하여 우리들 굳건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굳건함의 일부에 균열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신해철이 대단히 용기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곤 하는 신해철에 나는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왜냐하면 (사르트르를 인용하면)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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