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 회견을 보았다. 어버버 저버버 했다는 얘기가 많아서 찾아 보게 되었다. 다 보지는 않고 질답 장면만 보았다. 박근혜가 나름 선방한 것 같기는 하지만, 어휘가 입에 착 달라붙지 않고 심하게 겉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아마 누구나 다 그런 느낌을 받았으리라. 기자회견을 하는 박근혜에게서 내가 본 것을 한 단어로 말하라 한다면? 열등 콤플렉스.

 

예를 들어 농구를 잘 한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친구는 농구를 잘 안하려 한다. 아무도 없는 밤에 빈 코트에서 혼자 슛 연습을 하거나, 초등학생들하고만 어울려서 농구를 한다고 하자. 우리가 이 친구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또, 이 친구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 친구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친구에 대해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데는 이미 부족함이 없다. 이 친구는 자신의 농구 실력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고 그 때문에 농구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친구는 농구에 대한 열등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박근혜에 대한 모든 설명은 열등 콤플렉스 하나로 끝난다. 박근혜는 자신이 공주인 줄 알고 있는가? 소통을 잘 안하려 하는가? 부모가 모두 살해되는 시련을 겪어서 사람을 잘 믿지 않는가?  그래서 한번 신뢰를 준 사람만 계속 쓰는가?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다. 박근혜는 단지 심각한 열등 콤플렉스를 갖고 있을 뿐이다.

 

국무위원들과 대면 보고를 늘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근혜는 국무위원들을 돌아다 보며 대면 보고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대면 보고가 왜 필요한가? 긴급 현안이 있을 때, 대통령이 특정 사안에 대해 좀 더 깊이 파악할 필요가 있을 때, 또는 장관이 어떤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정치적 지원을 바랄 때 등등. 그런데 대면 보고가 있으려면 둘 사이에 설명, 청취, 질문, 재질문 등의 대화가 오고갈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가 이런 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 아무도 이에 긍정으로 답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므로 모든 안건들은 일단 참모들 손에 넘겨져서 박근혜가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가공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후 박근혜가 야기한 7시간의 국정 공백은 대통령의 즉각적인 반응을 요하는 현안에 박근혜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증명한다. 당시 박근혜에게 올라간 보고서에는 사건의 요점만 있지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없었을 것이니까. 박근혜가 그 문고리 권력 참모들을 교체하라는 요구에 귀를 막고 있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그 사람들은 박근혜에게 어떤 식으로 보고를 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인데 이 귀한 사람들을 어떻게 교체할 수 있겠는가?

 

박근혜는 1년에 한번 밖에 기자회견을 안한다고 한다. 가능한 피하는 것이다. 자신에 완전하게 맞춰진 상황(국무회의)에서나 원고를 보고 말을 한다. 기자회견을 할 때도 질문은 사전에 청와대에 전달되는 것 같고, 추가질문은 당연히 없다. 비판에 극도로 민감하여 "바보같은 짓"이니 "엄청난 조작"이니 하는, 대통령이 공적으로 쓰기에 민망한 말들을 사용해 가면서 사안을 덮어 버리려 한다. 분명 이 모든 것은 열등 콤플렉스의 징후다.

 

이런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박근혜는 한국의 엘리트 시스템 속에서 장기간의 검증을 거쳐 대통령이 된 것이니까. 다시 말하면 박근혜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나는 여기서 똑같은 단어를 다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열등 콤플렉스.

 

예를 들면 대한항공 회항 사건에서 그 부사장은 직원들을 무릎 꿇게 했다고 한다. 어떤 주차장, 어떤 백화점에서도 고객이 직원들 무릎을 꿇게 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열등 콤플렉스의 예이다.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능력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무조건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숱한 예를 들 수 있다. "너 나이 몇 살이야?", "어디서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내가 누군지 알아?", "너 말고 여기 책임자 오라 그래!"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면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화가 난 척 하며 합리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매우 이상하게도 이런 열등 콤플렉스 환자들이 갖고자 하는 것을 쉽게 갖도록 허용해 준다. 정말 관대하다.

 

열등 콤플렉스로 꽉 차 있는 사회에서라면 열등 콤플렉스로 꽉 차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필연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오늘의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아주 질 좋은 거울일 뿐이다.

 

그런데 거울은 우리가 우리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열등 콤플렉스에 대한 논란들은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콤플렉스에 대한 극복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는 헤겔주의자는 아니자만 어쨌든 이런 낙관은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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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때 친구네 놀러갔다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드라마 미생을 보았다. 친구 말이 한국 드라마는 기승전-연애인데 이 드라마에는 러브 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 드라마(현장 드라마?) 스타일인 것 같았다. 오프닝 장면도 좋았고 시나리오도 배우들 연기도 다 좋은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미생을 찾아 보기 시작했다. 오늘 최종회를 봤다. (솔직히 중간 중간 건너 뛰었다. 그래도 10편 이상은 본 것 같다.)

 

해외에서 몇 년만에 한국 드라마를, 특히 현대극을 보는 보는 느낌은 어떨까? 이 드라마가 유달리 디테일에 강한 것인지 한국의 드라마가 다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디테일들에 눈길이 끌렸다. 예를 들면 상급자와 하급자가 술을 먹는데 상급자가 자작을 하자 하급자가 팔을 쭉 뻗어서 상급자의 술잔에 손을 대는 시늉을 하는 장면. 아마 외국인들은 이런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마찬가지로 원 인터네셔널 신입 사원들의 엄청 경직된 모습도 내 눈길을 끌었다. 장그래는 말할 것도 없고 장백기, 안영희도 고참이 부르거나 하면 화들짝 놀라 "기립"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 주었다. 마치 군대에서처럼. 또 많은 경우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하는 지시는 찍어누르는 말투였다. 그래서 하급자가 상급자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들이받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인턴 때는 날아다니던 신입 사원들이 정식 입사 후에는 하나같이 장그래가 되어 버린다. 물론 그 뒤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긴 하다. 그러나 조직 내적인 폭력에 신입 사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결과는 언제나 장그래였다.

 

그래서 오차장과 장그래가 자기들만의 회사에서 의기투합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환타지다. -학벌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사, 사내 정치 없이 회사에 기여한 바에 따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회사. 그러나 현실에서라면 원 인터네셔널과 오차장의 회사의 영역이 겹칠 것이니 당연히 원 인터가 오차장네를 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드라마는 당연히 현실에 대한 극화이기 때문에 과장이 있다. 그래서 장그래가 주인공으로 선택된다. 장그래는 홀어머니를 모시는, 학벌 무의 가난한 청년이다. 그래서 장그래의 키워드는 생존해야 한다는 절실함이다. 이런 절실함은 월급 70만원에도 기꺼이 일하게 만들고, 수당없이도 잔업을 하게 만들고, 상사의 개인적인 수발도 기꺼이 들게 만들고, 조직의 부조리에 맘 편하게 순응하게 만든다. 냉정히 말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폭력이다. 생존의 절실함은 조직의 폭력을 개인에 내면화시킨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항상 개인의 절실함을 강조한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절실함이 없어. 요구만 많아..."

 

드라마 미생이 가장 아프게 찌른 곳이 이런 부분이었다. 왜 21세기 한국의 대형 종합상사의 파릇파릇한 청년들을 그리는 드라마의 주제가 생존에 따른 절실함이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우리 사회가 절실함을 요구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 사회가 폭력적이라는 뜻이다.

 

아마 여기 영국 친구들이 미생을 봤다면 드라마에 가득 찬 폭력들에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나는 드라마가 과장된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납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상사의 폭력에 대해 부하 직원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지? 드라마가 너무 개연성이 없잖아? -쳇, 한국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과장되긴 했지만 현실적인 드라마라고 좋아하는 것인데...

 

어쨌든 이렇다.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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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칠 전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중고로 샀다. 어차피 새 책은 구할 수도 없다. 처음 알아볼 때는 300파운드 이상이어서 살 마음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온 웹 세계를 다 뒤져서 30파운드 안짝에 살 수 있었다. 그 즈음 가격은 대체로 100 파운드 이상에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 또 알아보니 70 파운드 이상이면 살 수 있겠더라.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사르트르의 두 철학적 주저 중 하나다. 나는 사르트르를 총체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꼭 구해 읽어야 했다. "존재와 무"의 인간은 아직 추상적이다. 구체적 인간은 사회 역사적 힘 안에 놓여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철학은, 예컨대 매일같이 일베를 드나들며 글을 쓰고 퍼나르는 어떤 청년이나 대한항공 회장의 딸인 어떤 여자분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나는 사르트르의 단언, 즉 인간을, 그러므로 인간들의 기획의 총체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검토해 보고 싶었다.

 

아마 읽는 데 한참 걸릴 것이다. (중고책 서점에서 살 때 책 무게가 너무 나간다며 웃돈을 요청하더라. 웃돈이라 해봤자 한 급 높은 배달 서비스로 하자는 제안이었을 뿐이지만... 더 빨리, 안전하게 받을 수 있다니 기분 좋게 수락했었다.)

 

(몇 번 "내가 읽은 책"이란 타이틀로 포스팅을 했었는데 어폐가 있는 것 같다. 책은, 특히 철학 책은 한번 읽고나서 "읽음"이라는 도장을 찍어줄 수가 없다. 계속 관점이 달라져서 책도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오만은 접기로 한다.

 

같은 맥락에서,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나온 이후로 "존재와 무"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다는 프레데릭 제임슨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만일 이런 공감이 없었다면 "비판"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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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 달 전 쯤에 한인 신문에 한국의 어떤 대학에서 오래 되고 대출률이 낮은 책들을 처분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어이가 없었다. 오래 되고 대출률이 낮은 책들 중에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양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만약 대학 도서관 등에서 이런 책들을 처분해 버린다면, 이런 책들은 어디에서 구해 본다는 말인가!

 

그로부터 한 두 달이 지나 사르트르에 제대로 꼽힌 나는 영국 아마존을 통해 사르트르 관련 책들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거의 중고 책들이다. 몇 백원도 안하는 것에서부터 대체로 5, 6000천원, 비싸면 2만원 가까이 하는 책들이다. 물론 운송비가 부가되어야 한다. 5000원 정도. 5000원이면 미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독일에서든 책을 가져올 수 있다. 미국에다 주문하면 2, 3주 기다려야 하기는 한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책들 중에는 대학 도서관 직인이나 공공 도서관 직인이 찍힌 게 많다. 아마 장서 문제로 처분한 도서이리라. 아래 사진은 오늘 받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한 도서관에서 방출된 책이다.

 

DISCARD라는 직인이 너무 폭력적이다 싶을 정도로 책이 너무 너무 깨끗하다. 표지도 비닐로 잘 포장되어 있다. 내용이야 보봐르가 말년의 사르트르를 인터뷰한 것이 거진 다 이지만...

 

헌책이지만 이미 절판된 상태에서 나름 특수한 수요가 있는 책들은, 당연히 한없이 비싸다. 사르트르의 "Notebooks for an ethics" 같은 경우가 그렇다. 무려 20만원 가까이 한다. 살 수 없는 금액이다. 이럴 수록 간절히 갖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 책은 사르트르가 윤리학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노트들 중에서 뽑아서 묶어 만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단편들을 묶어 놓은 것들에 더 끌린다. 왜냐하면 거장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고를 완결해 내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 가서 미리 보기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다 왔다. 갖고 싶다. 그러나... 절대 사고 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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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4-12-0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귀한 책을... 저도 갖고 싶네요

Weekly 2014-12-08 08:0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 아마 한국어판도 있을 거예요~

blanca 2014-12-06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마음 십분 이해가네요.

Weekly 2014-12-08 08: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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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전적인 자유를 보증하는 철학이다. 각각의 인간은 자유의 존재이며 그러므로 개별적인 행동들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즉, 행동(인간의 유일한 존재 양식)을 통해서만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꺼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다면 실존주의가 인간 고유의 숭고한 가치를 훼손한다거나, 인간을 공허와 무기력에 빠지게 한다는 등의 비판은 분명 촛점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비판들에 대한 반박을 기획하면서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휴머니즘으로 못 박은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첫째, 실존주의가 인간을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주장함에도 우파(주로 종교계)에서는 실존주의가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우파에서는 세계에는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가치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우파는 반-휴머니즘 진영에 속한다.

 

둘째, 실존주의는 절대적으로 행동의 철학임에도 당시 프랑스의 공산당은 실존주의를 정적주의의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철학인 유물론은 결정론을 함의한다.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의 가능성(운동이란 이런 가능성을 전제한다)을 부정하거나 심하게 제한한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공산당 역시 반-휴머니즘 진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사르트르의 전문용어로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 사실 반박은 이 한 마디로 족하다.) 

 

대체로 이 정도의 내용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에 담겨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 책이 사르트르의 대중 강의를 필사해 옮긴 것이기 때문에 몇 가지 상황적 한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대중 강의이기 때문이겠지만 철학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시계 제작자와 시계의 관계를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그대로 옮겨도 될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 신의 존재 유무와 필연적 관계에 있을까? 등등.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신이 존재하는가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사르트르의 유일한 윤리학 관련 저작이라는 것이다. "존재와 무" 마지막 문장에서 사르트르는 윤리학에 관한 저작을 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야기된 윤리적 논제들을 "존재와 무"에서 충분히 끌어올 수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존재론"에서 끌어온 것에 불과하다. 즉, 아직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일 강의 후 토론에서 토론자가 "실존주의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으면 사르트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내가 보기에 이에 대한 대답은 "존재와 무"에서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존재와 무"는 존재론에 관한 저작이다.)

 

셋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기술된 사상은, 당연히 대단히 피상적이다. 그런데 동시에 완결적이다. 책이 "완결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도 거기서 완결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자신의 사상을 이렇듯 피상적이면서 완결적으로 소개한 것은 분명 사르트르의 실수다. "존재와 무"에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는데 말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몇몇 사람에게는 "존재와 무"에 대한 간판이 아니라 입구이기를 바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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