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모군의 표절 사태 이야기를 들었다. 송모군이 해외 저널에 낸 논문이 지도교수의 10여년 전 학회 발표문을 표절한 것이며, 송모군이 직접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식도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것으로 평가를 받아 게재 철회되었다는 것이다.

7년 간의 연구를 결산하는 박사 학위 논문의 일부로 제출된 작품이 저작권 저촉을 염려할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복제(80%정도라고 하더라)된 것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할 수 밖에 없다. 해당 학생은 연구자로서의 소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연구 윤리가 절대적으로 미비하다는 것. (물론, 현상적인 파악이다.)

송모군이 해당 기관에서 퇴원되는 것도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해당 기관에서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수여하게 된다면 앞으로 이 기관은 자신이 생산한 연구 결과나 자신이 배출한 연구자들에 대해 어떤 공신력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모군은 대학을 중퇴하고 학점은행을 이용해 학사 자격을 얻어 지금의 석박사 통합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송모군은 왜 대학을 중퇴한 것일까? 송모군측의 이야기로는 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한 연구 욕구를 대학 강의가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모군의 통합과정 지도교수는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첫 2년 동안은 학부 과정을 다시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모군이 대학을 중퇴한 것은 송모군이 학부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어서 대학에서 더 배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야망은 양자 컴퓨터, 블랙홀, 끈이론 등을 연구하는 것인데 현실은 강의실에서 일반 물리학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송모군은 현실과 바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현실과 바람의 차이... 이쯤해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끌어들여 보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 인간이 선택하는 것 = 인간이 행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명제대로라면 현실과 바람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그 사이에 존재자들을 개입시킨다. 나의 현재와 나의 목적(바람, 미래) 사이에 현실의 존재자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통해 관념론과 실재론을 동시에 극복했다고 믿는 것 같다. 관념론은 현실과 바람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며 실재론은 목적, 미래, 바람과 같은 비존재를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송모군은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현재의 나와 멋진 박사학위 논문을 탈고한 미래의 나 사이에는 현실의 충만한 존재자들이 놓여 있다. 이 존재자들은 무엇보다도 수십 권의 두터운 교과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바람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이 존재자들을 나의 목적에 비추어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그것이 곧 나의 연구 활동을 정의할 것이다. 즉, 내가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의 존재자를 이러저러하게 구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체화는 물론 고유성을 갖는다. 

송모군은 수십 권의 책과 수백 편의 논문을 읽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를 자신의 주제에 맞게 재배치하지는 못한 것 같다. 즉, 구체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와 바람 사이의 존재자들은 나의 주제의 빛에 따라 통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채 내가 그 존재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교과서의 비체계적인 단편들이 될 것이다. 나는 물상화된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그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상화된 것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나는 송모군의 유튭 비디오를 몇 개 찾아 보았다. 짧은 것들이고 송모군은 매우 어렸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교과서에서 오려낸 듯한 답변을 하고는 했다... 

아마 송모군이 연구를 하고 싶었다면 대학 일반 물리학 책을 갖고도 충분했을 것이다. 만약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음... 잔인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거기서 누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당연히 송모군이지!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순진하다. 우리는 타인의 즐거움을 대신 사는 경우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람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송모군이 천재인가를 물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논해온 것은 근본적인 좌절이기 때문이다. 천재소년과 80% 가량 복제된 학위 논문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거기서 근본적인 좌절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좌절이란 실패만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상황 속의 나를 의미한다. 다행인 것은 그 실패 역시 나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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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3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모군 표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송모군보다는 그 지도 교수(들)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송모군 같은 천재가 나와도 국내에서는 키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천재를 낳을 수는 있지만, 양육할 능력은 한국(인)에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한국에서 숱한 신동/천재가 나타났었고 나타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그 천재를 천재 이상으로 키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천재라는 꽃이 만개할 수 있는 환경/시스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한국적 현실! 한국에서 천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조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권력지향적인 한국인들, 음주가무지향적인 한국인들, 끼리끼리 친목질지향적인 한국인들, 패거리지향적인 한국인들... 명예욕지향적인 한국인들... 앞으로 100년 존속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weekly 2015-11-30 15: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1. 이번 표절 사태를 고립시켜 생각해 보아도 책임 소재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 보면 해당 연구소와 지도교수가 송모군을 천재로 키워내기 위해 세금을 끌어다 송모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프로젝트 말미에 도저히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자 지도교수가 송모군과 공모하여 논문을 대신 써줬다는 것이 사태의 본질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주된 책임은 해당 기관과 지도교수, 그리고 송모군에 돌아갈 것입니다. 반면 표절 자체에만 촛점을 둔다면 주저자이자 책임 저자인 송모군에게 가장 큰 책임을 지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 원글은 다른 층위도 보자는 이야기고요.

2. 이번 사태를 한국 교육 제도의 실패와 연결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학위 과정에 들어가기 전 송모군의 공교육 이력은 초등6학년 과정 1년, 대학 학부 과정 1년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한국의 교육 제도... 문제가 많죠.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영국도 영국 학생들의 학력이 심각하게 떨어지자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교육 제도를 연구하고 있고요, 잘 아시겠지만 미국도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 제도를 열심히 칭찬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4. 저는 한국 교육이 약점도 있지만 강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에 대해 영재를 위한 엘리트 교육 제도의 창설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여론이 흘러간다면, 이는 정말 끔찍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5. 제 기본적인 생각은 이번 일이 천재를 갈망하는 사회가 빚은 사태라는 것입니다. (송모군의 부모는 송모군에 대해 그러한 사회의 매개 역할을 한 것이구요.) 저는 천재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모두가 다 천재이거나요. 물론 이는 패러다임의 문제이이고요...

6. 한국이 다양성과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고쳐나가야 하는 부분이겠죠. 저는 한국이 지금의 수준까지 오는 데는 성취지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패거리지향적인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한 때인 것도 분명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아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하이트헤드가 인용하여 말한 것처럼 우리의 출발점은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분명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남아 있는 이원론적 사고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의 도입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방법론은 현상학적이라 불리든, 경험론적이라 불리든, 비판론적이라 불리든, 변증법적이라 불리든, 실천론적이라 불리든 결국은 단일한 현대의 정신을 공유하는 셈일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현대 철학의 진보를 선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흔한 예이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가 시를 하나 썼다.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뛰어 왔더니 심장이 쾅쾅 뛰고 얼굴이 발그레해졌단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우리는 아이의 경험의 절대성을 주창할 것인가, 아니면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 물론 둘 다 아니다. 아이의 경험을 상대화하고, 즉 그것을 타자화하고,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며, 다시 그 구성적 힘(사회적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아이의 경험과 아이가 경험으로서 그 구성적 힘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때 매개항을 고려한 사유가 곧 변증법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엡도 테러 당시 파리 시민들이 내건 "자유, 평등, 박애"의 표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현대적'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사상가들이 약간은 예전 사람들이고, 약간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어제 읽은 이번 호 "뉴 레프트 리뷰"의 "Why the Euro Divides Europe"(by Wolfgang Streeck)이라는 논문은 내게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예전 사상가들'의 익숙한 논리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유로존 위기를 색다르게 조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 도달했다면 돌아볼 곳은 역시 방법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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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용.
    from 하나와 앨리스를 위한 작은 방 2015-12-06 04:11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n...
 
 
무진무진 2015-11-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신없이 몇 시간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국시간으로 7시가 넘었네요. 에티카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영어는 잘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저 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논문도 검색해보다 우연히 weekly님의 사적인 공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많이 배워갑니다...자주 들리고 싶은 공간인 것 같아요. 땅을 한 곳만 깊게파면 옆의 토양이 점점 무너지듯이 weekly님이 쓰신 글들을 보고 그런 깊음과 넓음이 느껴져서 좋네요. 다쓰고 나니 이 글 <방법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weekly 2015-11-24 15: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찬이시구요... 여기 있는 글들의 한계는 제게도, 제삼자에게도 명확한 거 같아요. 그 점이 항상 고민스럽지만 이곳이 저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그나마 면피책으로 삼게 되네요.

좋은 하루 되시기를...
 

새로 구독하기 시작한 "뉴 레프트 리뷰"에 한국의 백낙청의 논문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반가웠지만 논문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은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나?" 라는 것이었다. 이런 류의 담론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 내에서 어느 정도 현실적인 힘을 갖고 유통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알아 볼 일이다. 일단은 백낙청의 논문에 대한 나의 '편파적인' 인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두려 한다.

근대성이란 대체로 16세기 이후 서구가 경험하며 이뤄온 성과들(그리고 한계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이중적 기획이란 그러한 근대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이상은 백낙청의 논문 제목에 나타난 개념들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백낙청은 그리 명료하지 않은 것 같다.)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기획'을 언급했으면 그것의 주체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의 논문에는 이런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주체에 대한 온갖 철학적 논의들 다 집어치우고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만 거론해 보자. 서구가 근대성을 만들어가면서 그것의 극복을 고민하는 것과,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을 고민하는 것은 같은 개념으로 포착될 수 없다. 서구에게 근대성이 일차적인 경험이라면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에게 근대성은 자신들이 창조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되지만 동아시아에게 근대성은 이미 현전하는 것으로, 수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 근대성의 수용과 극복은 매우 복잡한 양상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서구화(아침에 스타벅스를 들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등의 패턴화된 서구적 생활 양식), 표현의 자유 등의 규범적, 제도적 이념,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등이 혼합된 것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선택적 반응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선택적 반응이 변용일까, 극복일까? 백낙청은 이에 대한 고민이 없다. 예를 들어 싱가폴과 같이 경제적으로는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있지만 근대성의 제도적 측면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싱가폴은 아직 근대성의 수용에 있어 불철저한가? 이러한 괴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가? 이러한 모순은 궁극적으로 지양될 것인가? 수용과 극복이라는 개념만 갖고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촛점을 한국으로 끌고 와 보자. 백낙청에 따르면 한국은 결핍된 나라다. 즉, 근대성의 주요한 징표인 민족 국가를 아직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족, 민족 국가라는 개념의 생성을 둘러 싼 온갖 논란들을 다 제쳐두고 한 가지 구체적인 문제만 제기해 보자. 한국이 북한과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설립한다는 것은 우리의 근대성의 경험에 어떤 의의를 가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한국이 실질적 민주화를 확충하는 데 중요한 장애가 되는 것은 항상 종북 논리, 다시 말하면 분단 체제의 한계에서 온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통일은 이러한 한계를 걷어치우는 것이니 통일은 한국이 근대성의 규범적이고 제도적 측면을 온전히 누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까? 글쎄...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첫째, 분단 체제는 사실상 명목적인 것 같다. 남한과 북한은 더 이상 하나의 체제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공존하는 두 항으로 볼 수 없다. 분단체제론은 현실을 설명하는 힘이 없다.  
둘째,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된 후 새로 편입된 북한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게 표를 줄까, 민주당에게 표를 줄까? 난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누구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싱가폴과 일본을 보라. 한국이 한반도의 단일 국가를 형성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근대성의 중요한 요구를 만족한다고 해도 서구적 근대성의 이념적, 제도적 측면이 완성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나는 백낙청의 이론이 이러한 문제를 분석하는 틀도, 분석 결과에 따른 실천의 지시점도 제공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근대성의 담론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반성한 것인데 동아시아는 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발점은 동아시아의 구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고할 것은 수용과 극복이 아니라, 마주침과 변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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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테러 공포 와중에 가장 비판받는 정치인은 국제적으로는 메르켈, 영국 내적으로는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뱅인 것 같다.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유화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갈등이 첨예화되고 힘대힘의 정책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유화론, 이상론은 설 자리가 없다. 이렇다는 것은 이러한 국면에서 실제로 유화론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입맛에는 쓰지만...

영국의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뱅은 가장 진보적인 현실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시리아 폭격을 반대하며 문제를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직후부터 매일 매일 군부의 비토를 당하고 있다. 코뱅같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은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가 코뱅이라면 결국 현실론에 따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아이에스가 대화가능한 상대인가? 아니다. 그러면 방치해도 될 상대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행동해야 한다. 행동은 일차적으로 군사적 대응일 수 밖에 없다. 가능한 짧은 시일 안에, 가능한 민간인 피해를 줄이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습과 지상군 투입을 동시에 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 개입을 선언해야, 즉 손을 더럽혀야 민간인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행동하려는 국가들(특히 러시아)을 견제할 수 있고, 문명 충돌론 등을 반박할 권위를 얻을 수 있고, 사태 종식 후 더 이상 근본주의 세력이 준동하지 않도록 국제 협력안을 짤 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나는 서방 세계가 무단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결집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것이 제레미 코뱅이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럴 수 있으려면 권위를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입해야 하고 손을 더럽혀야 한다... -이것이 이 사태에 대한 나의 결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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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스가 다음 테러를 기획한다면 그 대상 중 하나는 분명 런던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부터 너무나 많은 나쁜 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현재 초비상 상태에 있다. 영국 정부는 영국을 테러로부터 지켜 낼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영국 정부의 능력을 믿는다.

영국 정부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고 영국 정보원들이 얼마나 책임감 있고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예를 들 수 있다. 딱 하나만 들어보자. 지난 러시아 민항기 사태때 발칵 뒤집어 진 곳은 러시아도 이집트도 아니고 바로 영국 정부였다. 즉각 비상 회의가 소집되고 테러 첩보가 분석되고 해당 지역에 남아 있는 영국 국민들에게 비행기를 타지 말라는 조처가 내려졌다. 러시아는 2, 3일 후에나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해당 공항의 검문 강화를 위해 이집트 정부에 계속 압박을 가해 온 것도 영국이었다. 결과적으로 수하물을 통해 반입되는 폭탄을 막지는 못했지만...)

11월마다 런던에서는 현충일 행사가 열린다. 커먼웰스 국가들(영연방 국가들)에서 온 대표들과 공동으로 행사를 진행한다. 내가 보기에 영국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식민지 시대때 우리가 잘못한 것은 정말 미안해. 용서해 주면 안되겠니? 1차 대전때, 2차 대전때 우리 힘을 합쳐 전체주의와 싸우지 않았니? 그때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 마음 영원히 간직할테니 우리 앞으로는 사이 좋게 지내자."

영국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 관세 혜택을 주고, 교육, 환경 보호 등을 위해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올해 영국이 국가적으로(비비씨의 기획인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에볼라 퇴치다. 그냥 무심코 보면 영국 국민들하고는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에볼라 퇴치를 위해 영국이 왜 저렇게 신경을 쓰나, 하고 생각될 정도다.

인종적 다양성 문제. 예를 들어 영국 테레비젼에서 흑인 앵커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앵커가 히잡을 쓰고 보도하기도 한다. 영국에서 인종주의자라는 말은 인간 쓰레기라는 말과 동급이다. 그래서 간혹 축구 경기 중에 일어나는 인종주의적 욕설 한 마디에도 난리가 난다. 비비씨는 파키스탄 커뮤니티에 관한 코메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한다. 크리켓 레전드인 인도 선수의 은퇴 소식이 거의 긴급 뉴스급이다. 넬슨 만델라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말 그대로 긴급 뉴스였다. 백인 경찰의 과잉 대처로 흑인 남성이 사망했을 때 영국 내무부 장관의 조처는, 인구 비율에 맞게 흑인 경찰 수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등등.

영국 의회는 영국군의 시리아 폭격에 반대하고 있다. 노동당 당수인 제레미 코뱅은 중동의 테러 세력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뱅은 노동당이 집권하게 되면 이라크 침공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겠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다. 노동당이 집권하면 영국의 이라크 침공 참여에 책임이 있는 토니 블레어 전총리는 실제로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토니 블레어조차 이라크 침공이 아이에스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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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5-11-17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이 정책적으로 노력하는 부분만 보면 그렇지만 the sun 이나 다른 보수 언론의 커버기사나 거기에 달리는 덧글에 극명히 보이는 외국인/난민 혐오도 함께 염두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weekly 2015-11-18 01: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어느 사회건 극우적인 성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구가 20%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증폭시켜서 주도적인 여론으로 만들때 발생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잠재되어 있는 20% 정도의 극우적 성향은 그냥 정상적인, 건강한 사회의 일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국에서도 유킵이 이 정도 지지를 받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영국은 극우적인 성향이 주도적 여론이 되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극우 세력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잉글랜드 백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러면 유나이티드 킹덤의 통일성이 깨져 버리죠. 더구나 현충일 행사에서 보듯 영국의 정체성은 여왕을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인종까지 포괄합니다. 즉, 극우적 목소리는 여왕의 상징적 통일성마저 위태롭게 하는 셈이지요...

얼마 전 보수당이 가난한 가정에 대한 세제 혜택을 축소시키는 법안을 내었지만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하우스 오브 로드에서 이를 부결시켰다는 기사를 보셨는지요? 중도라지만 어쨌든 경제 전문지인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하우스 오브 로드를 지지하는 기사를 냈더라고요. 영국은 계급 사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서민 계층을 가능한 압박하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워킹 클라스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관리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것도 극우의 준동을 막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퓌쉬앤칲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게에 가면 어쩔 수 없이 썬이나 데일리 메일을 보게 됩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이 신문들은 이민자/난민 혐오를 열심히 조장하고 있습니다. 전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왜나하면... 얼마 전에 엄청난 일이 있었죠? 파키스탄 동네에서 백인 소녀들을 다년간 성폭행하고 매매춘시킨 것... 한국에서라면 원자폭탄급 이슈였을 텐데요... 영국은 조용 조용하게 넘어가는 것 같더라구요. 이런 기사들을 썬이나 데일리 메일 등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제가 보지를 못했지만 이러한 엄청난 사건도 반-이민, 반-외국인 문제를 표면화시키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껏 이슈화되는 수준은, 루마니아나 시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베네핏을 갉아 먹는다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 정도야 뭐~ (게다가 영국 언론에서 이민자들이 영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는 바를 열심히 선전해 주고 있죠. 예를 들면 엔에치에스 인력의 10% 정도가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 등등.)

이제 새로 이슈화된 것이 테러 위협인데 이건 또 보수당이 잘 하고 있죠. 영국이 할당받은 수의 시리아 난민을 터키의 난민촌에 직접 가서 선별하여 데려온다든지 하는...

qualia 2015-11-18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대화”가 최선이라고 봅니다. 차별/테러/폭력/전쟁 따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대화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weekly 님 전언의 핵심으로 이해합니다.

weekly 2015-11-18 17:3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음... 사실은 제 의견도 계속 진동하고 있기 때문에...

Forgettable. 2015-11-1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거라 생각했지만 이 글은 약간 편파적인것 같아 덧글을 달았네요. 영국인의 각자 개개인의성향이 어떻든 국가에 대한 믿음은 완고한 것 같아요. 스페인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대조적이어서 질투도 나고 뭐 그렇습니다. ㅎㅎ

weekly 2015-11-18 17: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현상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저도 하고 있었더랬습니다. 원 글은 단지, 영국이 (원죄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선도적인 조치들을 하고 있는가를 두서없이 떠벌인 것 뿐이랍니다.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구요.

다 떠나서 포겟터블님이 말씀하신 대로 영국인 각자의 국가에 대한 믿음은 확고해 보여요. 저도 놀랍고 질투나고 그렇답니다. 그러나 공짜로 그렇게 된 것은 또 아니라는 것이구요. 영국 왕실과 정부가 국민적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들을 평가해 주어야 하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국인의 국가에 대한 믿음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국가의 노력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뜻이라고 저는 판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