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네 에피소드를 봤다. 그동안 안보다가 피날레가 멋지다길래 시청 유효 기간이 남아 있는 네 편을 보게 되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하면, 여자 주인공인 클라라가 죽었고, 닥터는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 거대한 다이아몬드 벽을 맨주먹으로 45억년 간이나 깨부수는 수난을 감내한다. 클라라를 되살려 내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엉긴 시간 구조를 복구하기 위해 둘 중 하나는 기억을 지워야 했는데 결국 클라라에 대한 닥터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

고대 인도인의 시간 스케일에 고대 그리스인의 불굴의 신화를 섞어 일종의 멜로 드라마를 만들어 내었다고 촌평할 수 있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런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질문이고 그에 대해 답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살아난 클라라가 닥터에게 묻는다. 왜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자신을 구하려고 했느냐고. 닥터는 답한다. 너를 안전하게 살게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닥터는 말하자면 의무를 이유로 든 것이지만, 시청자들은 거기서 사랑을 본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사랑일까?

그것은 닥터의 말대로 의무일 수 있다. 또는, 동행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신의 무결성의 오점을 만회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닥터는 동행자가 죽을 때마다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45억년의 수난을 반복하는 닥터를 보면서 우리는 닥터를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다. 닥터는 일종의 편집증일 수도 있는 것이다.

45억년 동안 다이아몬드 벽을 주먹으로 깨부수는 행동만 가지고는 그것이 사랑인지 편집증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다. 즉, 그 행동의 목적으로서의 클라라, 닥터에게 각별히 의미있는 인물로서의 클라라라는 존재를.

요컨대 사랑과 의무를 가르는 것은 그것이 고유한 개체를 지향하느냐 아니면 보편을 지향하느냐에 달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닥터가 감내한 45억년의 수난이 사랑이었을까? 닥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클라라만을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일까? 그렇다. 어떻게 아느냐고? 닥터 후의 메인 작가는 셜록의 메인 작가이기도 하다. 왓슨은 소시오패쓰인 셜록 홈즈와 영혼의 친구 사이이며, 또 모르고 그런 것이긴 하지만 청부 살인업자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왜? 셜록의 작가는 왓슨이 본질적으로 이들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닥터 후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닥터와 클라라는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일반화하여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애라는 것.

그런데 자기애는 자신을 중심 가치로 하여 타자를 대상화, 혹은 도구화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유아에게 엄마는 나를 쾌적하게 해주는, 세계의 어떤 작용이다. 돈 많은 여자는 나의 경제적 난관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돈으로 내게 표상된다. 그 남자는 나의 외로움과 관련하여 포근한 가슴으로 내게 다가온다, 등등. 

그러나 사랑은 나와 사물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즉, 사랑은 두 인간 실존, 두 인격, 두 가치 중심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자기애로서 사랑은 타자의 전면적 존재를 지향함으로써 나의 전면적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나는 사랑 속에서 타자의 인격 전체를 지향하며, 그리하여 그 지향이 나의 인격 전체로 귀착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 속에서 타자에게 원하는 것은 내가 자유인 한에서 타자의 자유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통해 나는 타자를 자유의 존재로 긍정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실감하고 타자의 인격을 긍정함으로써 나의 인격의 긍정을 실감한다. (반대로,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나는 단지 나 자신을 대상화할 뿐이다. 그가 나에게 단지 돈일 뿐이라면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돈에 대한 욕망으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클라라를 죽음에서 구출해 내면서 닥터는 무엇을 원한 것일까? 클라라가 다시 자신과 여행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을까? 물론 아니다. 닥터는 단지 클라라가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랬을 뿐이다. 닥터는 클라라의 자유를, 클라라의 전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한 것이다. 대상화로서의 자기애를 극복함으로써 닥터는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사랑에 대한 정의가 완비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우리는 지금껏 사랑을 개념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항상 너무 앞서 간다. 그러므로, 예컨대 법정 스님이 "사랑이란 찬란한 오해"라고 한 말을 우리는 긍정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사랑을 열린 지평 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앞서 사랑이란 자기애라고, 그러므로 자기애로써의 필연성, 어떤 운명을 갖는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그러나 바로 이 필연성이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해"라는 것이다. 사랑은 열려 있어야 한다. 사랑은 필연이어서는 안된다. 필연은 사랑을 파괴한다.

닥터 후의 작가는 법정 스님을 이해하고 있었다. 닥터는 이렇게 말한다. "클라라라는 이름만 빼놓고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다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확실한 것이 있다. 내가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닥터는 이 말을 바로 클라라 앞에서 클라라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닥터가 정말로 클라라를 바로 알아보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예컨대 어떤 생리적 기제의 결과일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필연성의 고리 밖에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우연한 만남이고, 어떤 인식이고, 그에 대한 재인식이고, 대상성을 전면성으로 바꾸는 결단이고, 자신과 타자의 인격의 전면성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것은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만들어 가는 공동의 행위일 것이다. 아마도 사랑은 다이아몬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깨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항상 어떤 가능성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감질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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