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런던에 나가서 한국 총선 투표를 했다. 언제나와 같이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젊은 사람들. 지난 대선 때 런던 재외 투표소에서 젊은 사람들만 잔뜩 보고 나서 영국 재외자 투표는 민주당이 더 많은 득표를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새누리당이 더 많은 표를 얻었던 것 같다. 또다시 환상에서 깨어난 느낌이 들었었다.

 

이번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나의 바램은 야당이 개헌 저지선만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당이란 물론 민주당과 정의당 등을 지칭하는 것이다. 안철수의 당은 언제든 여당과 합당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예전에는 여당과 야당이 정국을 잘 운영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거 양상이 달라졌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선거는 일관되게 여당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식으로만 진행되기 시작한 것 같다.

 

내 기억에 그것은 민간인 사찰 사태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어느 당이 대통령 탄핵 몰이에 나서면 유권자들은 그 반대편에 힘을 몰아주었다. 노무현 정권이 시끄럽고 무능력했다고 판단하면 정권을 반대 측에 넘겨 주었다. 사실 이런 것이 선거 아닌가? 그러나, 내 기억에 여당이 민간인 사찰 사태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이긴 후부터 여당은 어떠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계속 이겼던 것 같다.

 

아마 그 중간에 한국 사회에서 뭔가 중요한 변동이 있었을 것이다. 야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민간인 사찰건이든 세월호건이든, 이른바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정권 교체급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단지 사실일 뿐이고,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니 반민주니 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치쌍이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했을 때, 내 생각에는 민주당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컨대, 대북 정책에서 진보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유권자들에게 북한 문제란 무엇보다도 안보와 연관 관계를 갖는다. 아무리 경제, 외교적인 안보라는 좀 더 합리적인 개념을 들어 설득하려 하여도 유권자들은 요지부동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잠시 내려 놓는 것도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북 문제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상대적 진보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민주당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말처럼 쉬운 것일 수 없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렵고 그 그림을 실행하는 것도 어렵다. 인정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기적으로 우향우 하여 좀 더 보수적인 당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는 민주당이 양당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이 아니라 양당 구조에서 보수당으로서 새누리당을 대체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새누리당을 대체하는 보수 정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전혀 민주당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새누리당같은 정당은 근본이 없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근본 없는 정당이라는 점 때문에 새누리당은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고, 최초로 필리핀계 여성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었고, 세계 어느 나라 보수 정당과 달리 이민 문제에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웃긴 일이지만 그렇다.]

 

그래서 민주당이 당대표로 김종인을 받아들이고 이념적 탈색을 모색하는 가운데 경제 이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김종인이 정창래 등 강경파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거시적인 관찰로 그렇다는 거고, 자세한 사항은 정치 기사 헤드라인 정도만 스쳐보는 나로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김종인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이번 총선과 다음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누가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한국의 야당은 이미 10년에 걸쳐 국정을 운영해 본 정당이다. 충분한 대안 세력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아깝게 지느냐, 간신히 이기느냐는 것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외연 확장 밖에는 길이 없다. 나로서는 이번 민주당이 민주당이 취할 수 밖에 없는 길을 취했다고 본다. 물론, 과거 여당 선대 위원장을 맡았던 장외 인물을 끌어다 당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할 권능 등 전권을 맡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정당 정치에서 있을 수 없는 웃긴 일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이념적 차이는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당이 선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민주당은 지역 기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론을 살피며 국정 운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제 가능한 정권이 한국에 들어선다면, 한국은 한국의 경제적 수준에 맞추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오세훈이나 반기문이 다음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런 진보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건 정치 세력에게 가장 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역시나 정권 교체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 교체가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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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4-0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완전 포기 상태, 일단 노인인구가 너무 많아서.... 투표 인구가 삼천만이라는데, 그 중 구백만이 넘는 표가 노인이라 하더라구요. 65세 노인인구표가 거의 천만표에 육박해서 게임 끝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제 주변 노인네들 다 개누리 뽑겠다고 해서.... 일단 저는 위클리님이 말한대로 개헌유지선때문에 이번엔 비례도 민주당에 올인합니다. 여느때는 녹색당에 투표했는데, 그나마 개헌저지하려면 녹색당에 투표하는 건 무리더라구요. 지금 야당분열로 여당이 휩쓸 것 같습니다.

weekly 2016-04-04 16: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많이 안좋은 상태인가 보네요...-.- 전 그냥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개헌저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데요... 전 이번에도 지역/비례로 나누어 투표를 했습니다.
 

어제 이스터 썬데이 때 갑자기 우박이 폭우처럼 떨어졌다. 자동차 경보기가 여기 저기서 울려댔다. 이번처럼 무자비하게 우박이 떨어져 내리는 건 처음 본다. 조깅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제대로 피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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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시작하기 전 무대 전경. 백발이 많이 보이는 것은 영국 관객의 많은 수가 노년이기 때문이다.)

 

마 레이니즈 블랙 보톰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인물로 실존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마 레이니의 녹음 세션 날 반나절을 그린 작품이라기에 반은 뮤지컬일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흑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이번 연극의 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퓨리처 상을 두 번이나 탄 대가라는 것도,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보고서야 알았다.

 

연극은 마 레이니의 세션에 모인 흑인 연주자들의 옥씬각씬이 대부분의 장면을 차지한다. 이날 이들에게 있었던 일을 신문 기사식으로 처리한다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새로 산 신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흑인들끼리 다투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진실은 저 짤막한 문장 너머에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는데, 혼자 오신 어느 흑인 할머니, 친구들과 같이 온 어느 백인 할머니가 눈시울을 훔치시더라. 나도 가슴이 먹먹해 졌다.

 

사실 흑인 문제, 혹은 중동 문제, 이슬람 문제...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인 문제, 혹은 유럽(미국을 포함하여)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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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읽어 본 철학책 중 가장 어려운 책인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참으로 감탄할 만한 책이다. 이 점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나는 항상 난해함을 의심한다. 이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고. <존재와 무>의 난해함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존재와 무>의 기본 아이디어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언어를 회피한다. 이 점에서 나는 사르트르의 기교적인 언어 사용을 이해해 주고 싶다. <존재와 무>를 난해하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의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의 심원함, 그리고 문제를 백과사전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인 것 같다. 사실상 <존재와 무>는 전통 철학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 백과사전이다.(물론, <존재와 무>의 사상을 꼭 지금의 형태로 기술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저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저자에게 문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존재와 무>는 유럽 내전 직후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실존주의 운동의 기본 저작쯤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당시 사람들이 <존재와 무>를 읽고 제대로 소화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존재와 무>가 실존주의라 칭해지는 유행과 사상적으로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자유나 책임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의, 심지어는 사르트르의 입을 통해 전파된, 그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는 저작인 것이다.

<존재와 무>는 휴머니즘적인 전통에 속하는 저작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존재와 무>를 가장 안전하게 규정하는 방법인 것 같다. 이때 휴머니즘은 물론 실증주의나 자연주의적 태도에 반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고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키에르케고르나 후설, 하이데거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온다. 사실 인간 존재, 혹은 인간 현상에 대한 가지성은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현대에도 <존재와 무>가 의의를 갖는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가 인간 존재의 가지성 문제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한 드문 저작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생각에 <존재와 무>는 아직 충분히 탐구 되지 않은(!) 광맥이다. (그것이 진정 광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탐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는 거의 확신한다.)

아마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이후에 철학 저술을 멈추었다면 <존재와 무>는 한계를 갖는 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예컨대, <존재와 무>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는 무의식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후기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써냈기 때문에, <존재와 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면, 전혀 다른 책이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와 무>의 존재론은 정적 모델만을 다룬 것이고, <비판>을 통해 그 정적 모델이 변증법 안에서 총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문제를 다룰 수 있고, <존재와 무> 안에는 이러한 확장에 저항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사르트르가 처음부터 이런 총체적 기획 안에서 <존재와 무>를 저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의 유일한 기획은, 구체적인 것(요컨대 구체적 체험)을 구체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은 건전하다. 만일 그것에서 어떤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초기 기획의 건전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존재와 무>의 한국어 표준판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현재 유일하게 유통되고 있는 것은 동서문화사판인데, 내 생각에 꽤 좋은 번역인 것 같다. 물론 아쉬운 점도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영역판처럼 대놓고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체제가 좀 허술해 보여도 엄청난 공력을 들여 번역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긴 이 정도로 두텁고 밀도 높은 책을 번역해 내는 분에게는 무조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영어판 역자도 그만 미워하기로 했다. 새로운 영역판이 준비 중에 있다는 소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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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기사와 알파고와의 대국.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의견을 기록해 두려 한다.

(총 5국 중 3승1패로 알파고가 승리를 확정한 상태란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에는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바둑의 최고급 수준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었다가, 알파고가 3연승을 하는 와중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가 거의 바둑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세돌 기사가 한 판을 이긴 후에는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도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이번 대국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아마도 이세돌은 인공지능 바둑 기계에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1). 인공지능 바둑 기계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혹은 장래의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될 수 있을까? 이는 물론 사고나 감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에 따라서는 주판도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요컨대 의식의 현상으로서의 사고와 감정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사고를 하는 것일까?

알파고는 학습형 기계라고 한다. 승리라는 목표(미래)가 주어져 있고, 학습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거)이 있고, 대국의 각 순간은 이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개입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알파고가 학습형 기계라는 것은 과거가 미래를 일의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파고의 이러한 모습은, 몇몇 철학자들이 인간 존재에 고유한 것으로 이야기하던 탈자적 특성과 유사하다. 즉, 자신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양상. 요컨대, 알파고는 자신의 과거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미래를 갖고 있다.

생명체의 어느 수준에까지 의식적 특성을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등 수준의 생명체에 대해 의식적 특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알파고도 의식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인간 수준에서의 의식적 특성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의식의 한 현상으로서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여기서 자아의 문제가 개입할 것이다. 즉, 알파고는 자신에 대한 어떤 상을 갖고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파고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 

몇몇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아는 타자를 전제한다. 즉, 자아는 타자에 대해 자신을 외면성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그 외면성이란 자신의 신체를 말한다. 알파고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의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분명 부정적인 답을 줄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알파고는 아직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래에는? Who knows?

2). 아마 이번 대국은 미래의 역사학자에 의해 프로페셔널리즘의 종말의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기계가 바둑을 더 잘 둘 수 있는 한에서 최고의 인간 기사를 가리는 이벤트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아주 멀지 않은 장래에 이족 로봇이 축구나 야구 등의 프로 스포츠 경기에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도 그렇다.

이런 판국에 170km를 던지는 인간 투수,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뽑아내는 천재 작곡가, 고도로 세련되고 정교한 색채 감각을 자랑하는 화가... 등등은 우리에게 더 이상 큰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하고, 그렇게 최고에 오른 사람들의 작품이나 시합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스런 일이다.

장래는 아마추어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3). 작년에, 중학교 다니는 동네 아이가 로봇이 대체하지 않는 직업이 뭘까 하며 고민하는 소리를 하기에 웃은 적이 있다. 이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테스코 계산대를 추천했었다. 얼마 전 씨엔엔에서도 로봇이 대체하지 않을 직업에 대해 방송하더라. 나는 또 웃었다.

그러나 이번 대국 관련 기사에서는 웃지 못하겠더라. 지금 대로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의 90%는 직업을 잃게 되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렇게 예상되는 장래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90%의 인류가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상 공급이 무한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무한하게 공급할 수 있는 것을 돈을 매개로 사고 팔아야 하는가? 자본주의식대로라면 90%의 인류가 실업자인데 그 무한한 공급에 대한 수요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 두 가지 극단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하나는, 에스에프 영화에서 많이 봤듯이 장래의 세계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사는 폐쇄된 도시와 그 밖의 빈민굴 영역으로 나눠지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필요한 사람은 언제든 물품을 구할 수 있는 공산주의식 사회가 되리라는 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이 두 극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첫번째에 가까울까? 내 생각에 첫번째 그림은 불가능할 것 같다. 우리가 역사에서 운동에 어떤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운동이란 첫 번째 그림을 옵션에서 지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나는 오래 살아서 미래의 사회를 보고 싶다. 내가 전사의 끝자락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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