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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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들을 참고하여 한국 다녀오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산 책이다. 보통 긍정적인 리뷰들을 잘 믿지 않는데, 이 책의 경우엔 달랐다. 궁시렁 없이 내내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인 저자의 철학 저술들을 외면해 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이 책은 프랑스 출신 철학자들이 주로 주제화한 현대 철학의 커다란, 아마 가장 커다란 문제인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해 들뢰즈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사르트르 등등의 철학자들을 호명하며 명료하고 신뢰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명료성'과 '신뢰성'이라는 말이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지시할 것이다. 즉, 저자가 정직하다는 것이다. 철학 저술들이 이러 저러한 온갖 종류의 해석가들의 이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저자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성과 신뢰성은 저자의 이러한 정직한 노고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한계를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리뷰를 쓴 다른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각 철학자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병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적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예를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사르트르에게 크게 빚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사상을 표명하고 있는, 두 철학자의 문장들을 병렬적으로 비교하는 것 이상의 작업에 대한 요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런 종합적 검토의 계기를 계속 놓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수치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수치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대자와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수치란 본질적으로 윤리적 의식인 것이다. 조금 더 말해 보자. 저자는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형이상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견해는 칸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형이상학의 긍정성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즉, 존재론의 성과들에 종합적 전망을 제시해 주는 한에서 형이상학도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자 이론에 대해 이러한 형이상학적 종합을 적용한 결과는, 사르트르 자신에게도 놀랍고 우리에게도 놀라운 것으로, 타자성은 나와 타자들이 하나를 이룬 전체의 일종의 모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서술을 더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해 선택한다는 것이다" 라고 쓰면서 사르트르가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타자와 내가 하나를 이룬 전체에 대한 이론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레비나스에서 특히 분명한 것처럼 윤리성은 타자성에서 오고, 사르트르의 경우 그것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갖지만, 어쨌든 타자성과 윤리성의 관계에서 두 철학자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는 기계적이고 병렬적으로 처리한 감이 있다. 그래서, 예컨대 주체라는 개념을 고수한 레비나스와 주체를 소거한 들뢰즈의 입장을 단순히 병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를 반영하여 저자의 특권적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이 저자의 한계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에게 있어 어떤 단계를 지시할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00년이므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저자의 다음 책들을 입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 더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 연구자로 보이고, 프랑스 철학은 특히나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현대 프랑스 철학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역사성 속에서의 유럽인의 자기 의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 철학자로서 일종의 분열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열 의식은 국내 프랑스 철학 써클 안에서 종종 매우 병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제삼자에게는 분명 밥그롯 싸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질 논쟁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에게는 그런 자학적 자기 표출의 어떠한 징후도 없다. 즉, 이 책의 저자는 건강하다. 예컨대, 나는 저자의 우찬제에 대한 짤막한 평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문학계가 철학적 개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시비거리가 될 수 있다. 문학계의, 말하자면 외연 확장에 대해 철학계는 엄밀성에 주의할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개념의 인생 살이 아닐까? 사상의 경찰관이 되는 것은 사상의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직업 아닐까? 나는 저자 서동욱이 "이제 우리는 우찬제의 상처론과 타자론의 조우가 만들어낼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132페이지) 라고 쓴 부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문학자(가)들을 존경하고 격려하고 들볶는 것은 편집장 이상으로 철학자의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철학자의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외래적인 것에 대한 분열적 의식을 치료해 주는 것은 철학적 저술들 밖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어떤 사고, 지금 여기의 바탕 위에서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어떤 사고에 주의하는 것 뿐이리라. 그것은 오로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삶에 대한 주의, 곧 존경, 곧 사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차이와 타자>의 저자 서동욱이 이런 길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건강한 저자들이 더 있겠지? 찾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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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6-06-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동욱의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차이와 타자>에 후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은, 어떤 독자(리뷰를 쓴 사람)의 말을 따르자면, 레비나스나 들뢰즈의 것이 아닌 서동욱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차이와 타자>에서 보여준 서동욱의 명민함에 사람들은 그런 기대들을 많이 가졌었나 보다. 벌써 십여년도 더 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어쨌든 우리의 기대가 타인의 야망을 규정할 방법은 전혀 없을 터이다. 세상이 우발적이고 만남적인 것이라면, 분명 기대라는 것에 할당된 자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