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공사를 하고 있다. 빌더들 일은 내일로 끝날 예정이고, 페인트 등 남은 부분은 우리가 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늦어도 새해가 오기 전까지 끝내는 게 목표다. 


(돈이 모자라므로 벽지 뜯는 작업같은 것은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내가 아니다.)


(업자들의 작업 종료 예정일 하루 전 상태. 그러니까 오늘 우리 집 상태.)


사진에서 보다시피 부엌 유닛이 컨트리하다. 다른 한국 분들 집에 초대받아 가서, 그분들 부엌 해놓은 것을 보면 대부분 '모던'하던데, 우리는 그냥 컨트리하게 살기로 했다. 집의 형태 자체가 올드 패션이기 때문에 그에 맞추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모던을 섞으면 이상할 것 같으니까.  


그래 놓고 보니 신포도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모던이란 무엇인가? 가능한 한 곡선을 지우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제해서 사물을 순전히 그 기능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파트는 모던의 대표적인 예이다. 더 크게 말하자면 모던이란 현대적 삶, 현대적 인간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예를 들면, 현대적 공산품이 그러하듯, 우리들 자신도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즉 잠재적 잉여라는 저변의 의식, 의미는 항상 기능 너머에서 찾아지므로, 현대적 삶에서 삶의 의미는 항상 삶 그 밖에서 찾아진다는 것 등등... 비극은 아니지만 종종 코메디로 느껴지는 것들... (예를 들면 다음 일화. 어느 금융인이 은퇴하여 휴양지 해변에서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 옆에 어떤 꾀죄죄한 남자가 누워 똑같이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은퇴한 금융인이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요? 젊었을 때 열심히 벌어야 나처럼 일찍 은퇴하여 늙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텐데!" 그러자 그 남자가 대꾸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걸로 보이요?" 아무렴, 스피노자처럼 영원의 상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우리의 삶이란 그저 인간 희극일 뿐...)


집 컨셉에 맞는 물건들을 찾아보자 해서 안틱 마켓에 갔다. 어마 어마하게 많은 물건에 어마 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거기에 우리에겐 너무 비싼 가격. 스탠드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하단이 무겁게 되어 있어서 안정감이 있고 디자인도 심플하고... 그러나 너무 비싸서 포기해야 했다. 수십년 전 공산품의 품질과 센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의 기획의 근본적인 성격은 소유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의 윤리적 전망은 크게 봐서 2500년 전 고타마와  다를 바가 없다. 고타마는 출가 후 아마 평생 한 벌의 옷만 지녔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기 작가답게 많은 돈을 벌었지만 번 돈을 주변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눠줬다고 한다.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개인 소유물은 거의 없이, 책도 읽고 나면 다 나눠 줬다고... 모던에 대처하는 사르트르의 방법이라고 해야 할까? 고타마가  현대에 살았다면? 그는 유마 대사가 되어야 했을까? 아마 이들의 공통점으로, 이들은 소진되지 않는 뭔가, 말하자면 자기 중심이라든지 하는 것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한에서 물질은, 혹은 외부적인 것은, 혹은 우연성에 속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면 이러한 '경계 없음'은 경계 없음, 즉 어떤 뛰어넘음, 혹은 성취라기보다는 성격일 수도 있으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아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은 우리 주변의 사물을 사물로 보았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물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 앞의 꽃에, 아름다움, 연약함, 평화 등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진정 나인가? 그러한 의미는 꽃이 나에게 강제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집은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 실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혹은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반영된, 나의 한 연장도 아니다. 아마 그것은 성장하고 쇠약해지기도 하는, 요구하기도 하고 야단하기도 하는,  말하자면 숨을 쉬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옛날 사람들이 물건에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사물에 어떤 생명성 같은 것을 상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마 그것은 하나의 태도일 것이며, 세계관일 것이다. 물론 세계관은 우연성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금 실존주의자들의 실책을 되풀이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그러나 문제는, 적어도 내게는 이 우연성 너머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 어쨌든, 가든의 부름에 내가 응한다는 것과 가든과 나의 관계가 '그것은 나의 것'이라는 관계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것이다. --이는 자아에 대한 문제이고, 동양 종교들의 주된 주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아란 존재치 않는다는 진실을 살 수 있는가?)


아마 이 모든 잡상의 근원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딱 두 세대가 90년 가까이 살던, 크고 아름다운 가든이 딸린 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이 가든을 아름답게 가꾼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쉴라스 가든"이라고 부를 생각이다(아직 팻말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때 내 앞에 놓이게 되는 사상은 "연속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연속성 안에서 나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제를 느낀다. 모든 종교는, 내게는 연속성에 대한 사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던은 비연속성의 삶의 태도라고 본다. 비연속성, 예컨대, 이전 사용자와 현재 사용자 사이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 이전 사용자의 사용 양태가 나의 사용 양태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장치를 강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보기에 모던적인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후기 이전의 푸코는 모던의 사상가이다. 무엇보다도 현대 철학자, 사상가들은 대부분 비연속성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모던의 삶에 편안해 할 것이다. 내 생각에, 흔히 말하는 포스트 모던이란, 모던의 극단으로 보인다. 모던에 대한 모던적 사고 = 포스트 모던. 그러나,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비연속성을 믿는 것 같지 않다. 아이가 있고 집이 있고, 부모님이 있다. 사상가들은 이런 요소들을 고려에 잘 넣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삶의 의미를 두려는 보통 사람들의 태도를, 철학자들은 자기기만의 일종으로 폄하하려 한다. 현대적 철학자들이 틀렸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이상을 보려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모던 이후를 사고한다는 것은 연속성에 대해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연속성에 대한 사고가 모던 이전과 같은 양상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양상인가? 답은 이미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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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것은 모두 사르트르에게 배운 것들이다. 물론,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들은 많다. 예컨대 철학 학파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미국의 실용주의자들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는 앞의 메모에서 내가 난삽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몸의 존재론적 의의를 밝힌 것은 사르트르의 독창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물론 두 철학자들 사이에 완전한 일치란 있을 수 없고, 사르트르 혹은 사르트르적 관점에 서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비트겐슈타인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러 저러한 사항에 관해서 간단히 코멘트해 보자.


1). 5.6, 그러니까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말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동의하기 어렵다. 전자. '나'의 언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후자. 비트겐슈타인 등은 인식론적 방법의 궁지를 깨닫고 이른바 언어적 전회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전회가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2). 5.64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관점에서 고찰된 유아론이 순수 실재론과 통한다고 말한다. 이때 주체는 외연이 없는 한 점이 될 것이다. 사르트르라면 이 말에 100% 동의할 것이다. 즉, 단적으로 사르트르의 기획은 순수 실재론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순수 실재론이란, 예컨대 이 커피잔의 하양은 커피잔에 속하는 것이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뜻한다. 또 하나, 주관성이 외연이 없는 점이라는 것은 주관성이 내부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주관성을 세계의 한계로 보는 한에서 주관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그것은 스스로 드러날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사르트르는 주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것은 내부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사르트르는 주관성의 형식적 차원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실질을 해명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근대 철학의 커다란 특질 중의 하나는, 칸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주관성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분명히 근대 철학의 연속성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근대 철학의 붕괴가 일찌감치 선언된 지금, 사르트르 역시 그 잔해 밑에 깔려 있는 죽은 철학 아니겠는가 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을 주체의 철학이니 의식의 철학이니 하면서. 그러나 삶에서든 학에서든 똑같은 격언이 적용된다. 여기가 에덴이 아닌 한 이름이 실체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그 근대 철학이란 무엇인지? 당신이 말하는 그 주체의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러나 보통은 이렇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리 예의바른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숙고이고, 숙고는 항상 구체적인 것을 향해 흐른다고 믿는다.


다시 정리하자면 문제는 주관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때 주관성은 주관-대상 이원론에서의 그 주관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로서의 주관성이다. 이런 형식적 관점에 섰을 때 주관성의 실질에 대해, 그러므로 세계의 실질에 대해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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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은 존재자들을 분별하고 그것들 사이에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려 시도한다. 예를 들면 우주에는 자연 사물, 인공 사물, 관계들, 사건들, 속성들 등등이 존재한다. 아마 존재론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이 '등등'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방 안에 3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실에 대한 기술은 '이 방 안에는 ㄱ이 있고, ㄴ이 있고, ㄷ이 있다'로 완료되지 않는다.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가 첨가되어야 한다. 이 첨가는 철학적으로 곤란한 문제를 낳는다. 예컨대, 이 '그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우주의 모든 사람들 하나 하나에 대해 그들이 이 방 안에 없음을 주장으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가 럿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갈라짐의 단초이기도 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아궁이에 불을 때는 사건 ㄱ이 있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사건 ㄴ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사이의 관계로 인과론이 거론되고, 이 인과론의 성격이 문제가 된다. 흄은 이 인과적 관계가 일종의 습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아궁이에 불을 때는 사건과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사건에 객관적으로 엄밀한 조건을 부여하여 이 두 사건 사이에 엄밀한 인과적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를 주관적 인과 관계, 후자를 객관적 인과 관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둘 다 세계의 객관적 구조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예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연성의 기묘한 구조이다. 열 명의 존재론자에 대해 열 한 개의 존재론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 자의성을 피하기 위해 근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 근원적 고찰을 위해 사고 실험을 해보자. 흔하게는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 예컨대, 우주에 주관성subjectivity가 없다고 해보자. 그때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우주가 우리의 우주와 같은 시공의 차원을 갖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그' 우주라는 특정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우주에는 수많은 주관성들이 있다. 그러면 만약 인간에게 눈이라는 시각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이 지금과 같이 두 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은 우연성에 속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나에게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주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것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예컨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역시 또다른 차원의 우연성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주에 존재한다는 이 우연한 사건은, 어떤 필연적 사실을 동반한다. 그것은 내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 우주는 내가 보는 대로, 그렇게 결정되고, 구획되고, 그러한 객관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나는 우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존재는 잠재성으로서의 우주를 현실성으로 고착시킨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나의 존재라는 우연성은 우주라는 우연성을 하나의 세계로 구획 짓는다. 이것을 사실적 필연성이라고 부르자. 최초의 필연성은 이렇게 등장한다. 그런데 나의 존재라는 말이 애매하다.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예컨대, 데카르트의 코기토인가?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유하는 코기토는 우연성으로서의 우주를 구획된 세계로 결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우연성으로서의 우주에 구획을 주는 것, 우연성으로서의 우주에 좌표를 주는 것, 그것을 우리는 몸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몸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나의 몸은 하나의 생물학적 사물로 존재론적 창고 안에서 분류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몸의 사실적 면모이다. 즉, 사실성으로서의 몸. 그러나 방금 본 것처럼 몸은 또 다른 면모, 말하자면 초월성으로서의 면모 역시 갖는다. 이 초월성으로서의 몸은 존재론적 창고 안에서 다른 어떤 사물 옆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의 좌표, 구획 등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초월성과 사실성이 우리 존재의 양의성을 구성한다. 주관성, 혹은 초월성은 존재론의 품목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품목의 열거를 가능하게 해준다. 혹은 "이 방에 세 명만 있다"라는 말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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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은 실재, 가능성, 시간 등등의 어휘에 정의를 제공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물리학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또 일상 언어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그리하여 이 체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예컨대, 체계 안의 한 점은 그 체계에 의해서만 위치를 지정받는다. 그렇다면 두 체계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를 다른 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체계를 다룰 때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요컨대, 언어는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인이 어떤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한,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 예컨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거기엔 우연성이 개입한다. 만약 인간이 천년을 살 수 있다면? 혹은 전세계의 문화권을 유목하듯 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한 체계 안에 놓인다는 말은, 역으로 인간이 그 체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의 기술로서 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 역시 그러한 도구 집단의 하나이고, 그것이 도구인 한에서 그것의 의미는 자신 밖에서 받게 된다. 물론 언어라든지, 문화라든지 하는 것의 밖에 어떤 초월적 주체성, 예컨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것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피하려면 그것들의 발생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그 요소로서 인간 조건과 그 밖의 우연성 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기술에서 가치는 드러나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들이받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러한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기술할 수 없고,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러한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구조에 대해 사유해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즉, 가치는 인간 행위의 한 요소가 아닌가,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인간 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답하고자 하는 노력은, 말하자면 인류학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은, 예컨대 정의로움에 대한 다채로운 정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의들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인류학은 일종의 비판 철학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명증성의 기준을 설정하는데 실패한다면. 이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탐구이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 우선적으로 옳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이 담론의 닫힘에 대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을 우리는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존재론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체성이라는 극 없이 실재라든지, 가능성이라든지 하는 개념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철학자들에 따라서는 실재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없이 전자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이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간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체계들은 옆으로 나란히 있거나, 또는 위로 나란히 쌓여 있거나(환원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허물어진 경계 너머로 침범하고 섞이고, 병행하고, 진동하고, 먹히고, 모사하고, 등등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우연성에 지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원대한 의미에서 존재론은 역사의 가능 조건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론은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질서 있게 정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타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한계 영역에 부딪힌다. 예컨대, 연구실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물리학자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물리학자는 한계 영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그 한계 영역을 우리는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은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공상과 비슷하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자가 자신의 연구 활동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듯이 존재론도 형이상학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명증성의 기준. 존재론은 이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재론이 데카르트적인 족보에서 영원히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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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혹은 더 정확하게는 그렇기 때문에 출발점이 필요하다. 이 출발점이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단지 좀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된다. 물론 이런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이는 요구에도 우연성이 개입한다. 나는 노자나 붓다나 콰인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의 취향과 관심, 교육 이력 등등에 따라서. 그러나 어느 출발점이 더 나은 전망을 제공해 줄 거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다른 한편 내가 채택할 출발점은 이미 어느 정도 나의 초보적인 전망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전망 하에서 나는 나의 선택에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미국의 어느 대법원 판사의 말은 언제나 옳다. 


나는 아직 존재론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물론 푸코가 조롱한 것처럼 존재론에 개재해 있는 우연성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실증 과학들을 기초할 제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데카르트-후설적인 기획은 폐기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이론적 활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놓이는 평면을 찾아 확정해 놓는 작업은,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차원들의 혼란에서 빚어지는 사유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즉, 사유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 줄 철학자들로 하이데거라든지, 비트겐슈타인, 무어 등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사르트르를 선택한다. 나는 철학이 항상 구체적인 현실을 비춰 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폭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해보자. 예컨대, 철학자 중에는 감각 자료에서 실재를 구축하려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그리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안으로 사르트르의 경우를 보자.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흰 종이를 쳐다본다. 나는 그것의 형태, 색깔, 위치를 지각한다. 이 다양한 성질들은 공통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들은 그것의 존재가 나의 변덕에 좌우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들을 나에게 드러낸다. 그것들은 나에 대하여 있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사르트르의 "상상력"의 서론) 다시 말하면 여기 있는 이 흰 종이가 실재라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임의적이지 않은 채로(불투명한 채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결국은 같은 말이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실재에 대한 경험에는 그런 불투명성, 혹은 관성이라 불리는 요소와 부정성(내가 아님)이라는 요소가 함께 섞여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론적으로 전자를 즉자, 후자를 대자 혹은 넓은 의미에서 subjectivity라고 부른다. 이 subjectivity는 데카르트류의 사유하고 의지하는 코기토와는 다르다. 차라리 먹이를 향해 접근하는 지네에서도 이 subjectivity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자. 이 경우에는 자신과 환경, 먹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subjectivity가 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존재론이 앞서 말한 구성론자의 것보다, 혹은 무어-비트겐슈타인류의 상식-기반 명제들보다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자의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출발점일 뿐이다. 사르트르 이후, 적어도 프랑스 철학계 내에서 철학적 흐름은 바뀐 것 같다. 예컨대 푸코나 데리다의 경우, 후기의 그 윤리적 전회를 차치하고 말한다면, 굳이 사르트르와의 연결점 하에서 이들 철학자들의 사고를 고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는 다른 것 같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자아, 타자, 상상력, 그리고 앙상블(말하자면 인간들의 집합체) 등의 주제에서 사르트르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관찰이 들뢰즈가 사르트르의 영향 하에서 철학을 수행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사르트르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 뿐이다. 사실 나는 상상력에 대한 사르트르의 경직된 이분법보다는 들뢰즈식의 유연함이 더 유망하다고 느끼고 있다. 사르트르가 워낙 경직된 구분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논리가 그의 철학 전반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한다.


어쨌든 출발점으로서 사르트르의 저작들을 차분히 다시 읽어나가려 한다. (다음 주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 집 공사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메모를 여기 남길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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