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은 실재, 가능성, 시간 등등의 어휘에 정의를 제공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한다. 물리학이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또 일상 언어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듯이. 그리하여 이 체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예컨대, 체계 안의 한 점은 그 체계에 의해서만 위치를 지정받는다. 그렇다면 두 체계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를 다른 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한 체계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체계를 다룰 때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요컨대, 언어는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인이 어떤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한, 그런 그림이 그려진다. 예컨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거기엔 우연성이 개입한다. 만약 인간이 천년을 살 수 있다면? 혹은 전세계의 문화권을 유목하듯 산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한 체계 안에 놓인다는 말은, 역으로 인간이 그 체계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의 기술로서 체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 역시 그러한 도구 집단의 하나이고, 그것이 도구인 한에서 그것의 의미는 자신 밖에서 받게 된다. 물론 언어라든지, 문화라든지 하는 것의 밖에 어떤 초월적 주체성, 예컨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것을 상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피하려면 그것들의 발생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그 요소로서 인간 조건과 그 밖의 우연성 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기술에서 가치는 드러나지 않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들이받는 행위와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러한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기술할 수 없고,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러한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구조에 대해 사유해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즉, 가치는 인간 행위의 한 요소가 아닌가,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인간 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답하고자 하는 노력은, 말하자면 인류학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은, 예컨대 정의로움에 대한 다채로운 정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의들이 가능하게 되는 조건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인류학은 일종의 비판 철학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명증성의 기준을 설정하는데 실패한다면. 이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탐구이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 우선적으로 옳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이 담론의 닫힘에 대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을 우리는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존재론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체성이라는 극 없이 실재라든지, 가능성이라든지 하는 개념을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철학자들에 따라서는 실재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없이 전자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은 이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간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체계들은 옆으로 나란히 있거나, 또는 위로 나란히 쌓여 있거나(환원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허물어진 경계 너머로 침범하고 섞이고, 병행하고, 진동하고, 먹히고, 모사하고, 등등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우연성에 지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원대한 의미에서 존재론은 역사의 가능 조건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론은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질서 있게 정리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타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한계 영역에 부딪힌다. 예컨대, 연구실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우주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물리학자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물리학자는 한계 영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그 한계 영역을 우리는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은 현실과의 접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공상과 비슷하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자가 자신의 연구 활동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듯이 존재론도 형이상학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과 거리를 둘 수 있을까? 명증성의 기준. 존재론은 이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재론이 데카르트적인 족보에서 영원히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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