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라는 영화를 보았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영화 일반에 대한 나의 취향(?), 선입견(?) 같은 것을 먼저 말해 놓는게 좋을 듯 싶다.
내가 영화나 소설 등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흔히 변증법, 혹은 구체성, 혹은 우발성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아주 어렸을 때에 이어령 교수님이 쓰신 책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어떤 아이가 쓴 글이 학생 잡지 독자 투고란에 실렸다. 자신이 애지중지 키우던 닭을 엄마가 복날이라고 잡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방에 처박혀 엉엉 운다. 그러다 저녁이 되고, 맛있는 냄새가 나고, 엄마가 밥먹으라고 해서 삼계탕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학생 잡지의 평자는 그 글이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했단다. 자신이 키우던 닭이 죽어서 슬펐다면서 어떻게 그 닭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어령 선생은, 어떤 논리적 구도에 따라 이야기를 짜맞추지 않고,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글을 더욱 진실되게 만든다고 했다. 어떤 논리적 구도에 맞추어 이야기를 짜나가는 것을 관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일견 모순으로 보이는) 현실의 운동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을 변증법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변증법적 운동은 우리의 사고에 대해, 그 필연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즉 우발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우발성이라 칭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구체적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를 구체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괴테가 작가들이여 대상 앞에 서라, 라고 말한 것도, 윌리엄 제임스가 나는 결코 원리들로 환원되지 않는 고집불통의 사실들을 그 자체로 고수하려 한다 라고 말한 것도, 다 똑같은 사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우발성의 주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바로 타자이다. 즉, 타자란 나의 관념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불투명성, 혹은 비합리성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은 동시에 타자란 존재에 대한 존중, 혹은 인정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디 앨런의 작품들을 우발성의 영화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디 앨런은 우발성을 거의 클리쉐 수준으로 써먹는다. 그리고 인디애너 존스나 척 노리스 영화들에 부재하는 것은 타자이다. 인디애너 존스 영화에서 아랍인 악당이란 존스 박사의 총 한 방으로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사물적 장애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변증법이란 내게 윤리적, 혹은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즉,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를 본 지 벌써 10년이 넘은 것 같지만, 여튼 홍상수 감독은 캐릭터들을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들은 각자의 결을,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다. 내가 켄 로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의 캐릭터에 대해 민주적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른바 예술 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에서 영화는 흔히 감독의 사고와 동치가 되고, 감독의 관념이 배우를 매개로 필연성의 고리를 따라 전개되는 공간이 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코리아>는 최근에 본 영화 중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화였지만, 내게 그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감독의 관념을 구현하는, 생기없는 종이 인형으로 느껴졌다.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한 장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석사 논문을 급하게 완성하여 제출한다. 주인공의 논문을 읽은 지도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건 논문이라기보다는 선언문인데?” 라고 말한다. 주인공, 혹은 저자의 자아 관념은 무한으로 팽창한다. 그리하여 지도 교수는 그 논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아닌 사물성으로서의 교수로 전락한다. 이런 거친 자기애의 노출은 일종의 미성숙에 해당한다고 나는 본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병상의 모차르트가 멜로디를 불러주자 살리에르는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받아 적는다. 이 영화에서 인간 살리에르는 천재성의 불가접근성을 드러내주는 장치로만 활용되고 버려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영화들에 굉장한 불편을 느낀다. 등등.
이제 벌새라는 영화로 돌아가보자. 아, 그에 앞서 한 마디만 더 해보자. 벌새는 근과거를 다루는 영화인데 나는 근과거를 다루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근과거를 다루는 영화를, 나는 일종의 반칙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근과거의 영화를 볼 때 즉각, 심지어는 영화의 주제와도 상관없이, 어떤 감정적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것을 향수라 칭해보자. 인간이 근과거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향수가 섞여들어가는 것은 거의 인간 조건에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근과거의 영화를 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가벼운 흥분 상태에,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져버리는 그런 상태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변호인>이든 무엇이든 그런 영화를 구태여 보려 하지 않는다. 영화가 아무리 쿨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나는 나에 대해 신파를 경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벌새는 일차적으로 이러한 어드밴티지 혹은 트릭에 의존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 점을 잘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근과거의 영화는 여차하면 감정 과잉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감독이 영화의 균형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 같다.
앞서 말한 우발성의 구현도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감독이 이 점 역시 명확히 의식하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렇다. 은희의 후배 여학생 유리가 은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은희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새학기가 시작되자 유리는 은희를 피한다. 은희가 유리에게 이를 따져묻자 유리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건 저번 학기 얘기잖아요.” 이를 우발성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반전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별로 진지하지 않은 감독이라면 멋진 대사를 하나 딴 것으로 흡족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평면적이지 않다. 은희가 유리를 배신자라며 계속 씹어대자, 옆에서 보던 은희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넌 걸핏 하면 유리 이름을 입에 올리지만 유리네 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넌 가끔 보면 너무 너만 생각해.” 이 대사는 은희에 대한 제3자적 시점을 드러내 줌과 동시에, 유리라는 캐릭터에 결을, 세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이 장면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했다. 은희 친구가, 순간 충격을 받아 멍해져 있는 은희의 팔짱을 끼며 “빨리 가자!” 하는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물론 이런 높은 수준에서의 특성화가 영화 내내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감독이 은희의 남자 친구 캐릭터를 소모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부분들을 좀 지적해보자. 은희와 유대감을 갖고 있는 지영 선생님이 성수 대교 사고로 죽는다. 얼마 전 은희의 엄마도 오빠를 잃었다. 그러므로 둘은 상실에 대한 감정을 공유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부엌에서 엄마가 은희에게 감자전을 부쳐주며 이런 이야기를 지나치듯 나누다 엄마가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장면. 이 상실감의 공유에 대한 아이디어는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출이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단 한번 등장하는 은희 외삼촌 장면, 이어서 장례식 장면, 그리고 부엌에서 감자전 먹는 장면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좋아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상황에서 과연 감자전이 입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2, 3일 끙끙 앓아눕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영지 선생님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장면들은 내게 그리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영지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그렇다. 내게도 중학교 2학년 때 새로 온 남자 윤리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김민기의 노래를 가르쳐 주시던 기억이 있다. 김민기의 앨범이 금지되어서 암시장에서 엘피판 하나가 수 십 만원이 넘는다는 안개를 피우면서 노래 가사를 칠판에 적어 놓고 따라 부르게 하셨다. 그러나 그 생경한 노래들이 선생님과 우리를 가깝게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운동권 선생님이구나 하는 느낌. 그 분과 우리들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한 것은 그 분의 첫 사랑 이야기, 여자랑 키스해 보셨느냐는 이야기, 자 보았느냐는 이야기 등등이었다. 윤리 선생님은 얼굴이 뻘개지시면서 “너희들일랑은 잘 아껴놓았다가 첫 날 밤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리도록 해라~” 라고 외치셨고 우리들은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한껏 웃음을 터뜨렸었다. 확연한 타인(나이, 성별, 계급, 직업 등등으로 분리되는)을 순식간에 나와 가까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은밀한 것에 대한 공모의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장면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영지 선생님과 은희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설교적, 교훈적 관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의아스러운 것이다. 내 생각에 영지 선생님 캐릭터는 충분히 연구되고 조사되지 않은 것 같다.
영지 선생님 캐릭터에 대해서는 감독이 욕심을 부린 것일 수 있다. 나는 그 시대 즈음에 대학에 다녔고 영지 선생님과 같은 친구들을 더러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국제 사회주의자 학생 그룹. 그 중 한 친구는 나만 보면, “형, 요즘 생각 많이 하십니까?” 라며 고뇌의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여기서 ‘생각’이란 ‘고민’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여성)이 감옥에 갔을 때 나는 면회를 가기도 했었다. 그 시대는 애매한 시대였다. 80년대 말 학번들 중 운동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졸업 후 많이들 현장으로 갔다고 하지만 90년대는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내가 공부방 교사를 하고 있던 지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동네에 철거 깡패들이 출몰하기 시작했고, 나는 근처 대학의 철거 대책위를 찾아 갔었다. 철거 대책위란 별 것이 아니다. 철거 깡패에 맞서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세입자들을 지키는, 대학교 총학생회 산하의 학생 조직일 뿐이다. 대책 위원장의 얼굴은 까맸고, 그는 나의 눈을 계속 피했다. 이제 그런 일을 그만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즉각 상황을 이해했고 그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 시대는 이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영지 선생님이 부른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와 재개발 지역에 걸린, 거친 필체의 현수막은 하나의 배경을 형성한다. 그러면 영지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그는 현장이 아니라 한문 학원에 있다. 그곳이 그에게 피난처였을까, 그곳은 그의 타협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그가 은희에게 해 준 말은 동시에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을까 … 이 모든 질문들은, 허망하게도 최종적인 굳건함을 얻지 못하고 만다. 왜냐하면 영지 선생님은 다름 아니라 성수 대교가 붕괴하면서, 즉 전적인 우발성으로 인해 죽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우발성에 대한 숙고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 같다. 우발성 역시 하나의 필연성, 즉 변증법적 필연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변증법이나 우발성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그것들 역시 극적 트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발성과 자의성은 절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작가의 말대로, 예컨대 식탁 위에 빨간 장미가 놓여 있다면 그 빨간 장미는 극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건에 개입해야 하고, 그렇게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인 영지 선생님을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한 것이 내 눈에는 이 작품의 커다란 한계로 보인다. 혹은 중2 학생 은희의 세계에 그런 내적 논리를 가진 캐릭터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였거나… (이 점은 <풍금>에서의 이병헌, 이미연의 캐릭터와 비교해보면 확연해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흔한 클리쉐의 하나이다. 익숙함, 친숙함으로의 복귀, 그러나 이전의 일상이 더 이상 익숙하지도 친밀하지도 않게 되었음을 표현하는. 그렇다는 것은 주인공이 어떤 모험을 겪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내적 세계가 변모를 겪었다는 것을 뜻한다. 은희의 1994년은 그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아니면 여느 자잘한 일상들, 사건들이 계기하는, 그런 평범한 시간들 중의 하나일까? 아마 은희에게 1994년은 성수 대교가 무너져서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그 해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주제로 부각되기에는, 내 생각에는, 영화가 너무 산만한 것 같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한 것 같다.
여튼 영화 <벌새>가 상당한 성과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영화의 잘된 장면들을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한계도 노출하고 있다. 아마도 1994년에 중2였을 감독에게 이렇게 저렇게 경험되었던 것들이 영화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구체화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성과라 한다면 그때 그에게 이해되지 못했던 많은 것들 중 상당 부분이 감독의 현재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못하고, 여전히 체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한계일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 앞에 놓인 도전은 감독에게 친숙하지 않은 인격들, 세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구체성을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옛날 사람이므로, 여기에 비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이 시란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영화에서도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시의 문제도 아니고 영화의 문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삶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거짓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가 그렇듯 영화도 투명한 것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벌새>은 정직하고 투명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과제는 그 투명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세계를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인 것 같다.
(난잡한 리뷰이지만 정리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올린다. 앞으로도 하던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