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주인공 김지영의 고유한 삶의 궤적을 투과하여 당대 한국의 현상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영화가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느냐, 혹은 왜곡, 과장하고 있느냐 하는 논쟁은 내게는 거의 의미가 없어 보인다. 즉, 영화는 우선적으로 영화이지 사회학 논문이 아닌 것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주는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김지영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장면을 들겠다. 영화는 이 영화적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때로는 과거로, 때로는 미래로 관객을 이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영화적 현재는 너무도 추상적이다. 그러므로 감독의 의도는 영화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하나라는 것 이상의 필연성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김지영은 그리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이러 저러다 보니 이러 저러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임신을 하게 되었고, 또 이러 저러다 보니 회사를 그만 두고 전업을 하게 되었고, 등등. 그러므로 베란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영의 시선은, 그런 자기 세계가 없는, 그런 공허한 삶을 사는 사람의 시선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영화의 결론 부분을 보자. 1). 김지영은 카페에서 자신을 맘충이라 욕하는 회사원들에게 딱 부러지게 맞상대를 한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이 일을 보고하고 의사로부터 격려를 받는다. 즉, 김지영은 의사가 하라는 대로 행동한 것이고 의사는 김지영의 팔목에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찍어준 것이다. 김지영의 공허한 세계라는 영화적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영화의 미래 역시 그 공허한 세계의 연장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2). 김지영은 결국 작가가 된다. ... 이리하여 나는 작가가 되었다... 는 흔한 클리셰로 칭찬받을 것도 비판받을 것도 없는 장치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무엇을 걸고? 라는 질문을 하게 될 뿐이다. 영화적 답은, 김지영의 남편이 계속 가정 경제를 책임지면서 육아에도 더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인 것 같다. 김지영이 이혼을 하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전업 주부가 된 남편이 아이가 아파서 하루 종일 고생하며 김지영을 기다리는데, 김지영은 술냄새를 풍기며 늦게 들어와서는, "사장님, 부장님 다 참석하시는 회식이라서..." 라고 변명하는 것도 아니다. 김지영의 존재에는 어떤 위험도 없고, 그러므로 각성도 없다. 즉, 김지영은 여전히 공허한 세계 속에 있다. 감독은 자신이 영화 속에 어떤 계기를 마련해 놓았다고 믿고 있을 테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는 어떠한 계기도 없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관통하는 연속성이 있을 뿐이다. 물론 감독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내가 영화를 보면서 괴이하게 생각했던 점을 말해보자. 김지영의 남편 회사에서 몰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일부에서는 억지스러운 설정이라 비판할 수 있겠지만, 몰카 문제를 영화 안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극 구조상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김지영에게 맘충이라 욕해대는 사람들은 계속 와이셔츠를 입은 등등의 회사원들이었다. 나는 감독이 회사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게 무슨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방송 사고에 준해 영화 사고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이것이 영화 사고가 아니고 무엇일까? 


총평하자면 이 영화는 앞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특히 우리의 시대가 여성-남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특히나 (감독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여성 자신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일부 드러내 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여성을 철저한 수동성으로 묘사하고 있기에 대단히 기이하고 병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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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20-07-17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weekly님, <벌새>라는 영화는 혹 보셨나요? 비슷한 맥락의 비판도 있지만 발생한 논의나 감상은 해당 영화보다 훨씬 숙고된 것이라...추천드려봅니다!

weekly 2020-07-17 16: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여로님 안녕하세요?:) 처음 들어보는 영화 제목인데, 함 봐야 겠네요. 좀 걸리는 게 있긴 한데... 간혹 저보다 젊은 분들에게 영화나 책을 소개받고 감상을 해보면 아,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이구나 하는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더라고요. 벌새라는 영화는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허접한 글... 이라기보다는 싸구려 포스팅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작은 충격과, 작은 부담감을 느끼게 되네요. 자투리 시간에, 퇴고도 없이 써올려제끼는 포스팅인데... 이러하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