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특히 즐겨 듣는 곡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밴드이고 곡이지만 그때는 밴드 멤버들이 이렇게 잘 생겼는지 몰랐다.


저 멤버들 중 키보디스트와 베이시스트가 작년에 타계하였다 한다. 팝음악의 일, 이 세대에 속하는 뮤지션들이 계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재작년인가 Yes가 자신들의 명반 Fragile의 전곡 공연을 했었다. 나는 시간과 돈 계산을 하다가 나중을 기약하자고 미뤘었는데 그만 밴드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크리스 스콰이어는 Yes의 상징적인 멤버이어서 이제 더 이상 Yes라는 이름의 밴드 활동은 없을 듯 하다. 올해 Yes의 오리지널 보컬리스트 존 앤더슨과 키보디스트 웨이크맨이 다른 세션과 함께 그들의 이름 머리자를 딴 밴드 명으로 공연을 한다고 하는데 Yes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가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재작년 피터 가브리엘 공연도 놓쳤었는데, 작년에는 스팅과 조인한 미국 공연만 있었다. 올해는 아직 투어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또 작년에 로버트 플랜트가 참여한다고 해서 콘서트 하나를 예약했었다. 그런데 로버트 플랜트가 스테어웨이 투 헤븐 표절 재판 때문에 로스 엔젤레스 법원에 가야 해서 그를 보지 못했었다. 한 시대의 증인들의 일몰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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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씨어터에서 연극 LOVE를 봤다. 아마 초연일 것이다. 소극장 규모의 작은 무대였고 상연시간도 100분 정도로 짧은 편이었다. 내셔널 씨어터가 이런 작은 연극에 플랫폼을 제공해 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셔널 씨어터를 거쳐 상업 무대로 진출하는 연극들도 꽤 있다. 예매를 제 때 못해 놓친 연극이 하나 있었는 데 상업 무대로 가더니 티켓 값이 몇 배로 뛰더라. 나같은 서민이 감당하기엔 벅찬 가격...

LOVE는 식당, 화장실 등을 공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소소한 갈등을 잔잔하게 묘사하는 연극이다. 아침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한 눈치 싸움, 또 이 컵이 내 것이니 네 것이니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 등등 작은 갈등들을 긴장을 극대화하지 않고, 또 상징적 장치들을 난발하지 않고, 다분히 건조한 현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내 앞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눈물을 훔치는데 손가락에 굵은 물기가 묻어 있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눈물을 훔쳐서, 극이 끝나고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는 순간에는 나도 아랫 입술을 꽉 물어야 했다. 

LOVE라는 제목을 '희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연극의 유일한 상징적 장치는, 삶에 철저하게 실패해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예를 들면 거동도 힘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의 배불뚝이에, 그저 멍한 남자)이 멋모르고 그 공용 주택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그것은 아이로 돌아가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들이 그들에게 순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유일한 대상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거기에 하나를 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아이들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센터와 푸드 뱅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부모와 비좁은 공용 주택에서 사는 아이의 미래란, 즉 가능성이란 이미 아이 외재적으로 상당 부분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희망이란, 사랑이란 그 닫혀진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든 행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 점이 그 공동 주택에 모인 모든 사람들(수단에서 온 여인, 시리아 난민, 화이트 워킹 클라스 실업자 등등)에게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곧 윤리성을 정의하고 정치성을 정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LOVE는 다분히 정치적인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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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JTBC 뉴스를 찾아본다. 오늘 뉴스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손석희 앵커가, 현 상황을 진영 논리로 몰고 가는 세력에 반대하여 이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라고 지적한 부분이었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그 장면에서 손석희가 논리의 벽, 혹은 논리의 한계 앞에 서 있다고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철학적으로는 손석희의 주장에서 비판점을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그 옛날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인간이라면, 아니 좁게 잡아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어떤 보편적 진리가 있다는 말인가? 박근혜에 대한 탄핵 국면에서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박근혜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인가? 태블릿 피씨 문제의 본질은 그 내용이므로, 그 소유자, 입수 과정 등에 의문을 표시하는 것은 본질을 회피하려는 수작에 불과한가?


현대 철학의 어떤 흐름에 따르면 손석희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명제(메시지) 자체의 참과 거짓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파편적일 수 있다. 그 명제가 누구에 의해 발화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어떤 상황 안에 놓이게 되는지 등등을 고려하여 그 효과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단일한 진리 체계를 구성해 놓고 다수성, 즉 다양한 의견이나 생각들을 단일성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그 현대 철학의 지지자들은 하나같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참조점으로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박근혜파의 대응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의견을 묵살하려 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 이것은 현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동시에 철학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더 이상 인류 보편이니 역사의 방향성이니 역사의 궁극의 목표니, 혹은 손석희처럼 상식이니 하며 우리 스스로는 대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 신화는 지난 세기에 이미 모두 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폐허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하여 모든 것을 진영 논리 싸움으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왜 그래서는 안되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시대의 철학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서구의 경우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중심부에, 흑인, 동성애자 등등을 주변에 놓고 사고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등이 여기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적 답이 주어진다고 현실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어떤 시대적 모순을 포착한 관념은 현실로 전화하고는 했다. 앞서 말한 그 현대 철학의 한 흐름도 현실로 전화한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현실적 관념의 현실성을 다시 고민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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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스캔들 때문에 요즘 한국 뉴스를 많이 찾아 본다. 한국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우울하고 마음 아픈 일이겠지만, 바다 건너 딴 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별 감정 없이 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치뤄나가는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한국이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박근혜의 퇴진을 원한다. 그리고 아무 근거 없는 내 단순 느낌에 보수적으로 잡아서 6:4 정도로 국민들은 정권교체를 원하는 것 같다. 여권, 그리고 단독으로는 정권을 잡을 수 없는 국민의 당은 어떻게든 6:4의 판을 뒤집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러쿵 저러쿵을 해본다. 예를 들어 박근혜의 삼차 담화 후 박지원이 "우리 모두는 대통령이 던진 덫에 빠졌다" 며 우왕좌왕하는 척 하는 것을 본다. 박근혜와 박지원은 국민들을 정치 공학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나서 스스로가 대상이 아니라 주체임을 실력으로 증명해 보였다. 참으로 멋진 장면이었다.

 

여기서 일단 정권교체까지 가야 한다. 이런 아웅다웅 끝에 엉뚱한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 유서 깊은 패턴이었다. 한국도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박정희의 쿠데타부터 시작해서 수도 없이 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그런 패턴을 부순 예이기도 하다. 정권 교체까지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이기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총선을 이겼고, 그 승리로 지금의 탄핵 정국의 주도권을 휘잡아갈 수 있었다. 내일 탄핵을 가결시킨다면 온갖 정치 공학을 무찌르고 또 다시 승리를 맛보게 되는 셈이다. 누가 말한 대로 성공의 비결은 성공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사례들로 점철되어 있다. 사실 우리의 혈관에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야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이제 좀 지혜롭게 단지 무너뜨림 뿐 아니라 이룩함에도 성공할 때가 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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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CNN을 켜보았다. 놀랍지는 않았다. 이미 브렉싯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실망스럽기는 하더라. 당분간 뉴스를 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적인 것을 먼저 말하자면 힐러리 클린턴이 너무나 약점이 많은 후보였다. 미국의 양당 구도가 참으로 깝깝하게 여겨졌다. 한국 같으면 제3의 후보가 튀어나와 얼마든지 양당 후보 정도의 경쟁력을 보일 수 있었으련만... 

 

거기서 어떤 흐름이나 의미를 말하자면 아마도 서구 자본주의의 수축기에 있어 백인 노동자 계급의 선택의 경향성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 브렉싯에서와 똑같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자신들이 'left behind'하다고 느끼는 계급의 선택이 투표의 최종적인 결론이 되었다. 기득권에 대한 반발, 변화에 대한 갈망...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의 최종적 양상은 영국에 있어서나 미국에 있어서나 공히 영국-성, 미국-성의 회복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 브렉싯 투표에서 영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인 선더랜드에 사는 사람들, 그러므로 실업률도 높고, 그러므로 이민자도 거의 없고, 그러므로 EU 보조금의 혜택을 많이 받는 지역의 사람들의 다수가 "영국의 자주권을 다시 회복한다"라는 말로 표현된 브렉싯을 선택했다. 아마 기득권을 증오하고 변화를 바라는 미국 백인 노동자 계급 사람들이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고 상속세를 폐지하고 법인세 감면에 찬성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 모순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총괄적으로 미국-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선택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그러므로 그 선택에서 단지 경제적인 의미만을 읽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모순들이 너무 빈번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성과 같은 가치적인 면에만 주의를 기울여서도 안된다. 거기에는 분명 자기기만이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은 쉽지만 실제는 어려운 일인, 총체적 관점을 구축하는 이론적 작업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화 작업 없이도 매우 명백해 보이는 사실이 있다. 이제 유럽의 중심 국가들에서 똑같은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지리라는 것을 과연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다시 이론적인 측면, 혹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최근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다시 읽었기 때문에, 거대서사에 대한 종말 선언은 정말 섣부른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관념의 관념성을, 즉 그 무능성을 드러낸다...      

 

(나는 피쉬앤칲스를 좋아한다. 피쉬앤칲스 가게에 가서 주문을 하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면서 거기 비치되어 있는 썬과 같은 황색 저널을 본다. 선정적이고 재미있다. 브렉싯 전에 나는 이민자를 공격할 요령으로 써제낀 기사들을 킥킥 대며 읽었다. 어이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브렉싯 이후 나는 더 이상 그 저질 신문들을 보며 킥킥 댈 수 없다. 나 외에는 모두 영국 로컬 사람들이고, 후즐근한 복장의 워킹 클라스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그 선정적 신문 기사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분위기다. 그 분위기는 내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단지 주관적인 것일 수만은 없다. 설사 사실은 피쉬앤잎스 가게의 영국인 손님들 전부가 썬의 논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일 지라도... 불행하게도 이런 부정적, 퇴행적 분위기가 점점 더 많은 지구 면적을 덮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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