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둘이 삼 주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고, 떠나고 난 뒤에도 흔적을 좀 남겼다. 그리하여 보게 된 영화 둘.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영화는 캡틴과 아이언맨의 두 개의 갈등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첫 째 갈등: 어벤저스가 유엔의 규제 하에서 활동해야 할까? 아이언맨은 이를 받아들이고 캡틴은 거부한다. 이 갈등은 치명적이지는 않다. 둘이 편을 갈라 싸우기도 하지만 아이언맨은 결국 독자 활동에 나선 캡틴을 돕는다.
두 번째 갈등: 캡틴의 친구가 아이언맨의 부모의 살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이언맨은 그러므로 그 친구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캡틴은 그 친구를 보호하려 한다. 몇 십년 동안 동면 생활을 한 캡틴에게 유일한 정체성의 끈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그 친구이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거의 치명적이다. 그러나 둘은 차마 서로를 파멸시킬 수는 없다.
햄릿을 보고 있나 하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였다.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에 이처럼 깊이 있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 넣을 수 있다니!
너의 이름은: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가 한국에서 370만 흥행에 성공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고, 우선 놀랐고 다음에 화가 났다. 영화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작가가 신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캐릭터에, 살아 있는 개성이 부여되면 스토리는 저절로 필연성을 갖게 된다. 캐릭터 각자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신의 개입 따위는 필요치 않다. 예컨대 캡틴 아메리카의 행위는 그 캐릭터에 있어 필연적으로 보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행위에 공감한다. 외부적인, 부가적인 신의 손이 전혀 필요치 않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에서는 작가가 신이다. 남자 주인공은 평소엔 심약하고 어버버거리는 소년이지만 여자의 몸이 되면 갑자기 씩씩한 남자 성향이 된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가 제멋대로 바뀌는 것도 용남되지 않는데 이런 제멋대로의 변용이 드러내는 것이 여성성, 남성성에 대한 작가의 퇴행적 관점이라니! 이 영화 불과 몇 년 전에 나온 영화 아니던가!
둘째. 우리는 종종 어떤 주제, 대상에 뜻 모르게 집착을 할 수 있다. 영화 주인공 소년의 경우에는 어떤 마을에 대해 그런 집착을 보인다. 왜? 그 누구도 모른다. 소년 자신도 모른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이런 집착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내막으로 소년의 장대한 모험이 드러난다. 소년이 결코 기억해 낼 수 없는, 누구도 증인이 되어 줄 수 없는, 그 어떤 물적 증거도 남아 있지 않은, 객관 세계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자폐성을, 자폐성에 대한 낭만화를 좋게 평가할 수 없다. 나의 선입관 속에서 이러한 자폐성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구성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건강하지 못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영화도 있다.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370만 흥행을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작가가 신이 되고, 성에 대해 고답적 관점을 갖고 있고, 자폐에 대한 낭만화를 시도하는 등의 헛점이 그냥 허투른 헛점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런던의 어학원에서 만난 서울대 학생 생각이 난다. 훤칠하게 생긴 친구였고, 유럽 여행은 그때가 두 번째였단다. 한국 돌아가면 공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이다: "우리 세대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대예요. 나도 지금까지 나의 의지로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해 본 적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듣고만 있었다. 말하자면, 이 친구는 지금 자신의 세계관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세계관이 대단히 자폐적이라고 느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선택하고 싶은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고, 지금의 선택도 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자폐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자페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폐를 낭만화하는 일체의 시도들을 불순하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