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note, 4/1, 4/9, 3:30, D
생각하지않는사람들, review, 4/4, 4/4, 2:12, D
새로운과학정신, read, 4/1, 4/9, 2:03, D
새로운과학정신, note, 4/1, 4/9, 1:28, D
CU, read, 4/1, , 0:29,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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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시간44분

-다음 주 계획
1. 새로운과학정신 리뷰 쓸 것
2. CU 읽고 노트할 것
3. TED, Eva Vertes 리뷰 쓸 것
4. WS 읽고 노트할 것
5. CON 읽고 노트할 것
6. KONG 읽고 노트할 것

-비고
1. 주의깊게 읽고 본 모든 것을 기록 항목에 넣을 것
2. 각 항목의 시작 날짜와 완료 날짜를 제때 확인할 것
3. 읽은 쪽수 기록할 것
4. 미디어 종류 기록할 것
5. 각 항목을 the first class와 the rest로 분류할 것
6. 스프레드쉬트를 공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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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 기간: 3/26 ~ 3/28
번역 상태: 나쁘다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이 책은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에 대한 각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말 그대로 맥루한의 저 명제에 대한 확장 부연이 이 책의 내용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러므로(혹은 그러나) 이 책은 맥루한의 통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맥루한의 명제는 미디어가 단순히 콘텐츠를 전해 나르는 도구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콘텐츠임을, 즉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영향은 암시적임을 뜻한다.

저자는 타자기를 사용하게 된 니체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니체에게 벌어진 일이나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게 된 한국의 작가들에게 벌어진 일이나 똑같다. 즉, 문체가 간결하고 명료하게 변했다는 것. 그러므로 사고도.

저자는 우리 시대, 즉 인터넷의 시대를 조망하기 위해 신경 과학, 미디어의 역사, 심리학 등등의 영역으로 독자들을 끌고 다닌다. 다소 산만하고 피상적이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읽을 만 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저자의 무모한 문명 비판적 관점과 비교하면, 적어도 읽으면서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농담들 하나 하나를 들어 비판하는 것은 그만 두기로 하자.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극히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가 인터넷 안에서 하는 일이란 "집중"이 아니라 "서핑"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책을 대체할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건 신문이나 잡지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전자책으로도 만들어 질 수 있으리라. 요점은 "집중"의 공간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작의 작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글을 쓰려거든 전화기부터 끊어 놓으라고 했다. 역시 다작의 철학자이자 놀랍도록 분주한 인간이었던 사르뜨르는 하루 일과 중 자신만의 시간을 일생에 걸쳐 관철해 내었다. 또, 오만가지 일을 해낸 한 명의 인간 크누스는 자신의 생산성의 비결을 "한번에 한가지 일만 하기"라고 요약해 주었다. 따지고 보면  멀티태스킹이란 것도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하나의 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깊게 만들고, 우리를 생산성 있게 만드는 것은 홀로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는 지성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한 상식을 재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바보같이 미래의 프로그래머들에게 인간의 두뇌를 과도하게 기계에 의존케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나는 반대로 얘기하겠다. 아이폰의 텍스트 자동 완성 기능을 좀 더 똑똑하게 만들어 다오, 무척 짜증이 난다오! 인터넷의 빠름은 우리 문명의 빠름을 반영한다. 나는 그것을 거역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에 휩쓸리고 싶지도 않다. 모두가 그 빠름에 허우적댈 때도 자기 중심을 잡고 차곡 차곡 성과를 뽑아낸 사람들이 있었지 않은가? 나는 그 사람들을 본받고 싶다. 가장 효율적인 미디어를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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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기록을 시작하였다. 물론, 류비셰프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다.
*주간 통계를 기본으로 할 것. 그 밖의 잡다한 것은 해 나가면서 결정할 것. 어느 선까지 시간 기록을 이곳에 공개할지 여부를 포함하여.
*시간 기록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고 새 달이 시작되기도 했으니 지난 달 것을 몰아서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난 달의 독서 기록. 포맷은 서명, 시작 날짜, 완료 날짜, 걸린 시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3/26, 3/28, 5.52
새로운 과학정신, 3/26, , 3.13
code name WS, 3/27, , 0.49
code name CU, 3/29, , 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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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it에 Clojure mode를 설치했다. 참조 사이트: http://tipstank.com/2010/11/26/add-edit-modes-to-jedit/
-JEdit는 참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확장성이 뛰어나면서도 사용자를 설정 파일들의 더미 속으로 밀어넣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오늘 ClojureShell 플러그인을 설치했는데, 플러그인 설치는 클릭 두번으로 끝난다. 플러그인 설정은 언제나 플러그인 옵션판에서 한다. 단축키 설정은 단축키 설정판에서 하는데, 물론 플러그인에 단축키를 설정할 수도 있다. 나는 버퍼에 담긴 클로저 소스 코드를 평가하는 명령을 C+x C+e 키조합에 묶어 놓았고 클로저쉘을 여는 명령은 A+x c l o j u r e 에 묶어 놓았다. 버퍼에서 클로저 소스 코드를 작성하고 A+x c l o j u r e를 실행하여 클로저쉘을 띄운 후 C+x C+e를 치면 클로저(쉘)가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로드한 후 프롬프트 위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또 쉘과 에디터 영역 사이는 A+x o로 오고 간다. 마우스에 손 댈 필요 없이 쾌적하게 작업할 수 있다.
나는 JEdit이 무척 마음에 든다. 아래는 스크린 샷. 예쁜 폰트를 자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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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의 이해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논저) 40
한전숙 / 민음사 / 1989년 6월
평점 :
품절


읽은 날: 2011/1/17 ~ 2011/2/26 너무 오래 걸렸다!

책 제목은 "현상학"이지만 후설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알기 쉽고 자상하게 쓰여졌다는 장점과, 그것의 이면인 반복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현상학은 일종의 프로그램, 혹은 방법론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프로그램, 즉 제일 철학의 정초를 위한 노력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과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가 극히 쉽다는 것이다. A4 한장이면 충분할 정도로.

후설은 모든 학의 궁극적 토대가 되어줄 제일 철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적 야망을 갖는다. 그 방법으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만을 노리고 파헤쳐 들어간다. 작업 결과 밝혀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바대로 의식의 철저한 능동성이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한 극이다.

그런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은 의식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질서를 갖춘 채로 의식에 제시된 것들이었다. 즉, 의식은 그것들에 있어 수동적이다. 이러한 의식의 수동성을 후설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다른 한 극이다.

이상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이다. 그럼 후설이 애초 기획한 대로 절대적 주관이나 생활세계적 관념이 제일철학의 토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이 책만 갖고 이에 대답하는 건 불가능하다. 후설이 발굴해 낸 관념 위에서 기존의 학문이 어떻게 재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가 이 책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저자 한전숙은 후설의 생활세계적 현상학이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낳는 "위대한 감성이 아닐까?" 하며 자신없는 긍정으로 책을 마친다. 그러나 그에 근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값싼, 혹은 게으른 긍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비판을 떠올리게도 된다.

예를 들면 후설의 현상학은 결국 감각론이나 신체론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이러한 기반 위에 물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리학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은 후설식의 내성적 탐구나 감성론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버리라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뉴턴의 질량 개념을 보자. 뉴턴의 이론은 아인쉬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경험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길어온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물론 뉴턴의 이론은 이전의 이론에 비하면 충분히 추상적이다). 아인쉬타인의, 예컨대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 법칙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고 그를 위해, 우리의 경험과는 배치되게도 광속 불변의 원리가 채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 질량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따라 나왔다. 여기서 나의 요점은 물리학자들이 따른 길은 후설의 방법론이 아니라 플라톤식의 방법론, 즉 경험이 건네주는 직관에서 가능한 탈피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빗나간 화살이기가 쉽상일 것이다. 현상학적 분석의 실질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일 철학의 설립이란 분명 시대착오적 야망일 것이며 자기소여성에서 명증성을 찾는다는 방법론은 분명 부질없는 기획일 것이다. 그리고 후설의 감성론은 현대인의 강박증을 반영하는 징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이 후설의,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의 원 저작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갖고 있는 편견들이다. 모쪼록 편견은 깨어지기를!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88로 나온 1998년도판 민음사 간 "현상학"이다. 그런데 알라딘에 이 책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 놀라운 일이다! "현상학의 이해"와 같은 책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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