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의 이해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논저) 40
한전숙 / 민음사 / 1989년 6월
평점 :
품절


읽은 날: 2011/1/17 ~ 2011/2/26 너무 오래 걸렸다!

책 제목은 "현상학"이지만 후설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알기 쉽고 자상하게 쓰여졌다는 장점과, 그것의 이면인 반복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현상학은 일종의 프로그램, 혹은 방법론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프로그램, 즉 제일 철학의 정초를 위한 노력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과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가 극히 쉽다는 것이다. A4 한장이면 충분할 정도로.

후설은 모든 학의 궁극적 토대가 되어줄 제일 철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적 야망을 갖는다. 그 방법으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만을 노리고 파헤쳐 들어간다. 작업 결과 밝혀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바대로 의식의 철저한 능동성이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한 극이다.

그런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은 의식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질서를 갖춘 채로 의식에 제시된 것들이었다. 즉, 의식은 그것들에 있어 수동적이다. 이러한 의식의 수동성을 후설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다른 한 극이다.

이상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이다. 그럼 후설이 애초 기획한 대로 절대적 주관이나 생활세계적 관념이 제일철학의 토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이 책만 갖고 이에 대답하는 건 불가능하다. 후설이 발굴해 낸 관념 위에서 기존의 학문이 어떻게 재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가 이 책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저자 한전숙은 후설의 생활세계적 현상학이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낳는 "위대한 감성이 아닐까?" 하며 자신없는 긍정으로 책을 마친다. 그러나 그에 근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값싼, 혹은 게으른 긍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비판을 떠올리게도 된다.

예를 들면 후설의 현상학은 결국 감각론이나 신체론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이러한 기반 위에 물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리학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은 후설식의 내성적 탐구나 감성론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버리라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뉴턴의 질량 개념을 보자. 뉴턴의 이론은 아인쉬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경험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길어온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물론 뉴턴의 이론은 이전의 이론에 비하면 충분히 추상적이다). 아인쉬타인의, 예컨대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 법칙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고 그를 위해, 우리의 경험과는 배치되게도 광속 불변의 원리가 채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 질량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따라 나왔다. 여기서 나의 요점은 물리학자들이 따른 길은 후설의 방법론이 아니라 플라톤식의 방법론, 즉 경험이 건네주는 직관에서 가능한 탈피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빗나간 화살이기가 쉽상일 것이다. 현상학적 분석의 실질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일 철학의 설립이란 분명 시대착오적 야망일 것이며 자기소여성에서 명증성을 찾는다는 방법론은 분명 부질없는 기획일 것이다. 그리고 후설의 감성론은 현대인의 강박증을 반영하는 징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이 후설의,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의 원 저작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갖고 있는 편견들이다. 모쪼록 편견은 깨어지기를!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88로 나온 1998년도판 민음사 간 "현상학"이다. 그런데 알라딘에 이 책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 놀라운 일이다! "현상학의 이해"와 같은 책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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