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직 입과 귀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주중엔 굉장히 피곤하다. 금요일 밤에 반 아이들과 펍(한국으로 치면 맥주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무엇보다도 귀에 익은 곡들이 많이 나와서 좋았다.

필이 박혀서 오늘 유튜브에서 좀 놀았다. 오늘 들었던 곡 중 하나를 올려 놓는다. 무슨 노래를 하려고 저렇게 폼을 잡는지 뻔히 알면서도 느닷없다는 듯 터져나오는 강렬함에 매번 놀라게 된다. 가사도 공연 모습도 굉장히 외설적이지만 곡 자체엔 끈적임이 전혀 없다. 경쾌하고 시원할 뿐. 말하자면 가장 건강한 버전의,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버전의 포르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터 가브리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 하나다. 그가 몸담았던 제너시스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제너시스/피터 가브리엘, 비틀즈/존 레넌, 사이먼앤가펑클/폴 사이먼...의 쌍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윽, 유치하다) 난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할 것 같다. 후자의 경우도 밴드로 재적할 때만큼이나 훌륭한 음악들을 계속 생산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너시스 시절의 피터 가브리엘에게는 영국의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솔로 시절의 그에게는 그런 지방색이 사라진다. 마치 죠슈아 트리 앨범 이후로 U2에게서 아일랜드 분위기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음악의 첫소절만 듣고도 이건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이구나, 이건 U2의 음악이구나 하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그들의 독특한 개성은 그러한 변용을 통해서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해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박수를 보내고 축하를 보내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틀잡음은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20대에 꽃피지 않은 수학적 능력은 수학적 능력이 아닌 것처럼. 바로 말하면 천재는 일찍 온다는 것. 아직 오지 않았다면 이미 어쩔 수 없는 것. 운명은 우주의 법칙 이상으로 강철과 같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밥은 식빵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는다. 요리하느라, 설겆이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 아주 좋다. 음식 쓰레기도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식빵은 아주 싸다. 중간 크기는 1 파운드 정도에 살 수 있다. (빵이나 커피는 한국이 분명히 더 비싸다.)

점심 때까지 집에서 공부한다. 점심 먹으며 텔레비젼을 본다. 제임스데이빗 카메론과 사르코지가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공동 기자 회견을 한다. 카메론이 이번 혁명은 전적으로 리비아 인민들의 것이며 혁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카메론 일행이 병원을 방문하여 손발이 잘린 리비아 사람을 위로하고 리비아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샛님처럼 생긴 영국의 수상과 그리 잘 어울리는 장면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감동을 먹는다.

집을 나선다. 역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던 영국 애들이 차창 너머로 몸을 반쯤 내밀고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엄지를 아래로 향하는 손짓을 한다. 어제는 여자애가 그랬었다. 이러다 타겟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학원 가는 시간을 바꿔야 겠다.

역에서 가디언을 산다. 어제자 신문에서 유니셰프가 영국의 아이 양육 문제를 지적한 게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값비싼 브랜드 상품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 영국은 선진 21국 중에서 아이들 양육면에서 꼴지란다.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없다는 것. 결국 정치 경제적인 문제라는 이야기. 가디언의 다양한 컬럼이 유니셰프의 보고서를 한번씩 인용한다. 이쯤해서 나도 카메론 정권에 분노가 느껴진다.

(어제자 가디언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대학 학비가 비싼 나라는 미국, 한국, 영국 순이란다. 한국이 이런 순위에 들다니!) 

학원에서 라이팅 테스트를 한다. 외국인으로서 런던에 사는 장점과 단점을 쓰란다. 장점은 런던이 매우 국제화된 도시라는 데서 나온다. 각종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다. 단점은 런던이 아직 덜 국제화되었다는 점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일자리를 잡기 힘들다든가, 젊은애들이 외국인에 적대적인 행동을 한다든지 하는 것...

작문을 제출하고 밖에 나와서 친구랑 전화로 떠들다 보니 시간이 지났다. 급하게 교실로 다시 들어간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강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디 사는가, 어디 산다, 교통비가 너무 비싸다, 서울 지하철은 국영인가, 아니 서울시에서 운영하든가 한다(맞나?), 영국은 다 사기업 거다, 레일 관리하는 회사가 따로 있고, 차량 관리하는 회사가 따로 있고 해서 요금이 비싸다, 매년 요금이 죽죽 오른다, 블레어가 수상할 때 왜 국영화 하지 않았나, 블레어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친 자본주의자다, 젊었을 때 뽕 맞고 다녔고 지금도 엘튼 존 등이랑 놀러 다닌다, 지금 카메론 정권이 토리냐, 보수당이냐, 그렇다, 정확히는 연정이다, 얘네들이 무수한 문제를 만들고 있다, 폭동도 그렇다, 신문에서 spending cut이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읽었다(요즘 가디언에 가장 흔하게 나오는 단어가 austerity다), 블레어는 대처랑 똑같다, 한국도 지금 보수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는 진보적인 당이 정권을 잡을 거다, 한국의 진보라면 좌파당을 말하는 거냐, 아니다, 중도다, 블레어도 중도다, 중도는 안좋다... 이러는데 학생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디언을 읽는다. 요즘 유로존은 그리스 문제로 난리다. 경제가 안좋으면 사회가 보수화되고 그러면 약자에게 가장 먼저 타격이 간다. 아까 낮에 나에게 소리를 질러댄 영국 청년들도 돈 많은 집 자제들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같은 가난한 외국 유학생도 사회적 약자다. 나는 영국 사회가 좀 더 관대하고 여유롭고 진보적이기를 바란다. 이상이나 이론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안녕을 위해 하는 말이다. 똑같은 이유로 한국 역시 관대하고 평등하고 여유롭고 진보적인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사회에 대한 나름의 지표. 아이들과 부모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넓고 깊으냐 하는 것. 그 전제. 부모들이 직장에서 해방되어 아이들과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9부터 9/14까지 프랑스를 돌아다녔다. 파리에서 절반, 엑상 프로방스에서 절반. 주로 미술관을 돌았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세잔.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할 말이 너무 많으므로 가능한 말을 줄여야 한다.

프랑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 대단히 활기차다. 사람들은 대단히 친절하다. 문화는 대단히 풍요롭다. 런던에서는 영국 사람들이 외국인들에 눌려 산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프랑스의 주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프랑스 사람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대단히 열심히 일하며 또 일을 대단히 잘한다. (카페나 가게의 점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내 감탄했다)

세잔. 엑상 프로방스의 첫 아침 민박집을 나서는 순간 "아!"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형광색이 날 정도로 파란 하늘과 강한 햇빛 아래, 담벼락을 덮고 있는 초록 이파리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 바로 세잔의 붓터치 그대로였다. 나무의 형태들, 나뭇잎이 뭉쳐 있는 모습들, 해지기 직전의 나무들의 독특한 색감과 입체감... 엑상 프로방스에 있는 내내 세잔의 풍경화 속을 걷는 듯 했다. 세잔의 비밀. 그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로컬 아티스트다.   

파리에서 이미 완전히 압도된 상태로 떼제베를 타고 엑상 프로방스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옆에 앉은 한 친구가 물었다. "피곤해?" "응.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응." 그러면서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모티프를 찾아야 해." 우리는 함께 웃었다. 우리는 허허롭게 웃었다. 창 밖으로는 너르고 푸른 프랑스만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BBC Proms 공연을 봤다. 예정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이 수업을 듣던 스페인 친구 하나가 로열 앨버트 홀에서 피아노 콘서트가 있다고 같이 보자고 해서 가게 된 것이다. BBC Proms 공연인지도 몰랐다.

비가 간간히 내리는 가운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5파운드(한국 돈으로 9천원 정도)를 내고 시간에 맞춰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우리 자리는 맨 위층이었다(갤러리라고 부르더라). 연주가 막 시작되려는 찰라였다. 홀이고 좌석이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갤러리에는 누워서 연주를 듣는 사람, 앉아서 듣는 사람, 심지어 책을 읽으며 듣는 사람도 있었다.

Proms 공연은 Promenade concert의 약자라고 한다. 즉, 자유롭게 걸으면서 듣는 콘서트란 뜻. 100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고 가능한 저렴한 가격에 가능한 자유로운 복장으로 가능한 자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라고 했다. - 수업 시간에 이렇게 들었다.

연주된 곡들에 대해 내가 가진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 처음 듣는 곡들이었다. 그러나 환상적이었다. 나는 음악에 푹 빠져 들었다. 내가 유일하게 신경 쓴 것은 엉뚱한 대목에서 박수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대체로 성공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 4악장이 시작되고 전 악단이 마구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지휘자가 된 것처럼 리듬을 타다, 바로 여기다 하며 무릅을 휘날렸다(손에 맥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홀에서도 박수가 일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나도 조금 무안해졌다^^) 갑자기 관악 파트를 비롯한 전 파트가 죽어라 하며 엄청난 소리를 내며 메인 주제를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갖가지 변주가 쏟아지다 드디어 피날레! 어땠냐고? 행복해서 죽는 줄 알았다! 눈물이 날 정도.

우리는 죽어라 하고 박수를 쳤다. 지휘자가 나와서 악단을 다 일으켜 세우고 인사를 하고 들어가도 막무가내였다. 발을 구르며 앵콜을 안해주면 공연장을 무너뜨리겠다는 기세로 박수를 쳐댔다(팔 떨어지는 줄 알았다^^). 두어 번 뜸을 들이다 지휘자가 나와서 앵콜 곡을 연주하고 들어갔다. 우리는 다시 박수를 쳐대며 지휘자를 불렀다. 지휘자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뜸을 들이다 또 한곡을 연주해 주었다. 우리는 또 박수를 쳐댔다. 지휘자가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이제는 주머니가 빈 것 같았다. 그만 놓아주어야 했다.

같이 간 친구가 어땠냐고 묻길래 마돈나를 인용해 주었다. "Better than sex."^^

나는 Proms 공연이 일주일에 한번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 5파운드는 고정비 지출로 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연장 밖에 붙어 있는  프로그램을 보니, 맙소사 매일한다! 당장 내일 공연 프로그램은 말러, 거기다가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모레는 홀스트의 플레닛! (이번 주 토요일이 이번 시즌 마지막 날이란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런던의 지하철은 요즘 거의 푸시맨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고, 대형 병원들은 파산하고 있고, 폭동의 뒤폭풍은 아직 진행 중이고, 살던 집에서 쫒겨 나는 사람들도 많고, 높은 양육비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는 여성들도 많고, 영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거의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을 전세계로부터 듣고 있고, 영국의 민주주의는 금권 민주주의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고... 영국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문제들을 수없이 안고 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영국은 위대한 나라다. 단돈 5파운드에 최상급의 음악과 연극을 볼 수 있고, 후대에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오리지널한 예술작품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 가능한 많은 구성원들에게 생존 이외의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사회는 위대하다. 그 경험의 폭이 넓을 수록, 그리고 깊을 수록 그 사회는 위대하다.

지하철을 향해 걸으면서도 우리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London is a great city. It offeres us such a great concert at such a cheap price! (문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 뻔한 broken English를 영국 사람들로 가득한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주절댔다. But it's too expensive to live in... 같은 말로 적당히 균형을 맞추면서 말이다. 좋은 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걸어 놓은 동영상은 닥터 후 시즌1의 마지막 에피소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닥터다. 어제 bbc1에서 닥터후를 보다가 문득 옛날 닥터 생각이 났다. 그리고 유튜브를 찾아보니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말이 안된다. 그리고 그 말이 안된다는 것을 핑계로 하고픈 이야기들을 마음껏 펼쳐놓는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방종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에도, 당연히 윤리가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내게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닥터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너무 너무 사랑스럽다. (닥터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타임로드 종족이다. 그래서 그의 다소 과장되고 꺼벙한 행동들 속에는 치유할 수 없는 고독이 숨겨져 있다) 또, 이 드라마의 작가와 감독은 배역과 장면들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다. 위 동영상 속의 두 여인을 보라. 닥터를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디테일들이 드라마를 살아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디테일이 전부다)

화가는 색을, 작가는 문장을, 음악가는 음을, 감독은 장면을, 배우는 연기를 함부로 소비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희소한 자원처럼 다루어져야 하며, 절대적 필연성의 연쇄에서처럼 펼쳐져야 한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유일한 규칙, 구닥다리식으로 말해서 유일한 윤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윤리라는 단어가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의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래는 저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