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BBC Proms 공연을 봤다. 예정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이 수업을 듣던 스페인 친구 하나가 로열 앨버트 홀에서 피아노 콘서트가 있다고 같이 보자고 해서 가게 된 것이다. BBC Proms 공연인지도 몰랐다.
비가 간간히 내리는 가운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5파운드(한국 돈으로 9천원 정도)를 내고 시간에 맞춰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우리 자리는 맨 위층이었다(갤러리라고 부르더라). 연주가 막 시작되려는 찰라였다. 홀이고 좌석이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갤러리에는 누워서 연주를 듣는 사람, 앉아서 듣는 사람, 심지어 책을 읽으며 듣는 사람도 있었다.
Proms 공연은 Promenade concert의 약자라고 한다. 즉, 자유롭게 걸으면서 듣는 콘서트란 뜻. 100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고 가능한 저렴한 가격에 가능한 자유로운 복장으로 가능한 자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라고 했다. - 수업 시간에 이렇게 들었다.
연주된 곡들에 대해 내가 가진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 처음 듣는 곡들이었다. 그러나 환상적이었다. 나는 음악에 푹 빠져 들었다. 내가 유일하게 신경 쓴 것은 엉뚱한 대목에서 박수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대체로 성공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 4악장이 시작되고 전 악단이 마구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지휘자가 된 것처럼 리듬을 타다, 바로 여기다 하며 무릅을 휘날렸다(손에 맥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홀에서도 박수가 일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나도 조금 무안해졌다^^) 갑자기 관악 파트를 비롯한 전 파트가 죽어라 하며 엄청난 소리를 내며 메인 주제를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갖가지 변주가 쏟아지다 드디어 피날레! 어땠냐고? 행복해서 죽는 줄 알았다! 눈물이 날 정도.
우리는 죽어라 하고 박수를 쳤다. 지휘자가 나와서 악단을 다 일으켜 세우고 인사를 하고 들어가도 막무가내였다. 발을 구르며 앵콜을 안해주면 공연장을 무너뜨리겠다는 기세로 박수를 쳐댔다(팔 떨어지는 줄 알았다^^). 두어 번 뜸을 들이다 지휘자가 나와서 앵콜 곡을 연주하고 들어갔다. 우리는 다시 박수를 쳐대며 지휘자를 불렀다. 지휘자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뜸을 들이다 또 한곡을 연주해 주었다. 우리는 또 박수를 쳐댔다. 지휘자가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이제는 주머니가 빈 것 같았다. 그만 놓아주어야 했다.
같이 간 친구가 어땠냐고 묻길래 마돈나를 인용해 주었다. "Better than sex."^^
나는 Proms 공연이 일주일에 한번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 5파운드는 고정비 지출로 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연장 밖에 붙어 있는 프로그램을 보니, 맙소사 매일한다! 당장 내일 공연 프로그램은 말러, 거기다가 바이올린은 안네 소피 무터! 모레는 홀스트의 플레닛! (이번 주 토요일이 이번 시즌 마지막 날이란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런던의 지하철은 요즘 거의 푸시맨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고, 대형 병원들은 파산하고 있고, 폭동의 뒤폭풍은 아직 진행 중이고, 살던 집에서 쫒겨 나는 사람들도 많고, 높은 양육비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는 여성들도 많고, 영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거의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을 전세계로부터 듣고 있고, 영국의 민주주의는 금권 민주주의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고... 영국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문제들을 수없이 안고 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영국은 위대한 나라다. 단돈 5파운드에 최상급의 음악과 연극을 볼 수 있고, 후대에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오리지널한 예술작품들을 공짜로 볼 수 있다. 가능한 많은 구성원들에게 생존 이외의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사회는 위대하다. 그 경험의 폭이 넓을 수록, 그리고 깊을 수록 그 사회는 위대하다.
지하철을 향해 걸으면서도 우리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London is a great city. It offeres us such a great concert at such a cheap price! (문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 뻔한 broken English를 영국 사람들로 가득한 길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주절댔다. But it's too expensive to live in... 같은 말로 적당히 균형을 맞추면서 말이다.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