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예술 범우문고 82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 범우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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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언제 들었던가 아슴푸레하다. 미술론이나 동양론을 다룬 책이나 논문에서 가끔 흘려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예술을 논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그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논의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새겨볼 기회는 별로 갖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범우문고판으로 나온 글이 있어 이렇게 읽게 되었다. 범우문고판이라면 독서 애호가들 사이에는 정평이 나 있는 시리즈다.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는 않으면서도 지식에 대한 욕구로 불타는 애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시리즈가 새로운 장정과 편집으로 탄생해서 새로운 맛을 더 했다.

요즘 사람들은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무심히만 바라볼 뿐인 조선의 예술에 대해서 야나기가 보여준 가슴 끓은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우리가 우리 것에 너무 무심하지는 않았는가 반성되는 바가 없지 않다. 광화문을 보더래도 예전부터 항상 저런 자태로 있었거니 하게 될 뿐 그것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가, 그것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따져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새로운 각성이라고 할까. 그런 각성이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듯하다.

어저께인가 뉴스를 통해 경천사지10층석탑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어느 석탑 못지 않게 화려하고 기품있는 석탑을 지켜보고 있자니 야나기가 문뜩 떠올랐다. 이런 과정 하나 하나가 바로 독서의 이득인 듯하다. 무심에서 유심으로의 나아감!

화해할 수 없을 만큼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와 일본. 교차점 없이 달려나가는 그 선들에 교차점을 만들 수 있는 것, 그런 게 없을까 항상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 접점이 예술이거나 문화가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훌륭한 예술이나 문화를 통한 교감의 확대 앞에서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야나기와 내가 만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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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사 예연총서 3
이영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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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요를 대중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저급한 오락이나 유희 정도로 폄하하는 시각이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중문화의 폭과 깊이는 상당해졌다. 대중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영화의 경우는 작가 의식을 가지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영화 감독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학을 비롯한 고급예술과 동등한 시각에서 이해되고 평가받아왔지만, 대중가요 분야에서는 최근까지 이와 같은 시각이 전무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9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 영역에서 대중가요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태지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서태지가 불러일으킨 지각변동으로 인해 이제 대중가요가 저급한 문화산업의 산물이라는 고급예술적 시각은 붕괴되었고, 적절한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그동안 연구자적 관점에서 대중가요사를 정리한 연구들은 종종 있어 왔다. 물론 이런 사실 역시 이영미의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동안의 연구를 간접적으로 평가할 때 단순한 자료 정리와 해석 수준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우리는 가요를 귀를 열고 듣거나 무관심하게 흘러보내는 소리의 수준에서 이해해왔을 뿐, 책을 통해서 악보나 음악 양식같은 기술적 측면이나 당대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우리는 대중가요 역시 문학사처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통해서 추적하는 가요사가 얼마나 흥미로운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음악 양식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 가사를 시적으로 해석해내는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 덕분이라고 하겠다. 이 책 한 권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 주변에 산재하면서 공기처럼 듣고 불러온 대중가요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대중가요사 연구의 가치를 절감함과 더불어 비평이 부재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비평은 더 좋은 질의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가정을 전제할 때, 그와 같은 비판의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작금의 현실은 문제적이다. 이것은 그만큼 현재의 대중가요가 생산자와 소비자, 비평가 사이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서 발전해나갈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의 호황기를 접고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음악산업의 현실을 음반산업계에서는 소비자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이지만, 내가 볼 때 결정적인 잘못은 소비자와 비평가와의 대화 창구를 마련하지도 못한 채, 호황기를 근시안적으로 향락한 음반산업계에 있다. 음반산업계가 소비자와 비평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더 좋은 질의 상품을 내놓으려고 고심했다면 지금처럼 음반산업이 급속도로 붕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악산업의 붕괴 요인을 음악 파일 공유에 돌리기 이전에, 음악 그 자체의 질에서 찾아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90년대 음악과 비교해 보더라도 현재의 대중가요는 현저히 떨어진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가까운 역사조차 면밀하게 더듬고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남의 탓만 하는 것은 아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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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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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는 기존의 김형경이 보여준 세계와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작품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여성이 꿈꾸는 성과 로맨스의 환상, 그리고 그 환상의 붕괴와 내면적 좌절과 상처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면, <성에>의 이야기는 비슷한 테마를 실험적이고 지적인 구상 속으로 밀어 넣어 놓은 지적인 소설이다. 김형경의 소설가적 장점은 일부 여성소설가들처럼 무책하게 지적, 감정적 낭만을 늘어놓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김형경에게도 여성 소설가다운 환상은 있으나, 그 환상은 지적으로 규제된 틀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믿음이 간다. 믿음이 간다는 것은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 소설가다운 오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근대적 로맨스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으며, 어떻게 그 견고한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맺기가 가능한가를 집중적으로 묻고 있다. 그런 모습을 가능케 하기 위해 강원도 산골이라는 낯선 공간과 뭔가를 찾아 그곳을 찾은 한 여자와 두 남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 세 사람의 새로운 관계맺기를 통해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조율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새로운 본능학을 주장하고 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반페미니즘적 논리로만 폄하되어 온 성의 본능, 종족보존의 논리를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양날을 지닌 칼, 계륵과 같은 논리임에 틀림없다. 일부일처제가 궁극적으로는 남성 위주 사회 체제를 지속시키는 논리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여성의 성적 억압을 유지하는 원리로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 실험은 무척 색다른 것이긴 하지만, 김형경은 애초 그런 실험을 시작할 때부터 그 실험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김형경의 치밀한 지적 구상과 일말의 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견고한 서술은 이미 그런 실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시도된 김형경의 실험은 지적 구상의 건조함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 실험은 과학적 언어로 서술되어야 하므로 실험보고서와 같은, 혹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신의 눈과 같은 건조함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큼 견의 언어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여성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예전과 같은 섬세한 묘사를 유지하면서도, 자연물의 시점을 취할 때는 지나치게 전지적이어서 시점의 교차적 변화로 구성된 꼭지들을 따라 가며 읽는 것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액자 속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 즉 세중과 연희의 이야기는 액자 속 이야기와 접맥시키기 위해 등장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한때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각자 가정을 이룬 남녀가 서로에 대한 환상을 환상으로 유지하며 가정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 즉 환상이 삶의 필수 요소라는 깨달음은 액자 속 이야기에 비해서는 다소 앙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김형경이 마지막에 서술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김형경은 치밀하고 격조높은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남녀의 성을 다룰 때는 그런 너울을 순간적으로 벗어던지고 그 상황을 농밀하게 그려낼줄 안다. 이 점은 김형경의 독보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전작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정신분석적 자기치료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보여준 분석적인 자기해부의 통렬함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지적인 조작성이 아쉬울 지도 모르겠다. 자기의 문제를 통렬하게 헤짚었던 작가로서는 열린 세상 자기를 놓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 제도와 본능이라는 문명사적 시각으로 자기를 보고 싶은 욕망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번 작품은 반대 방향으로의 널뛰기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이탈은 아니겠지만, 다음 작품에서 아마 균형 잡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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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potato 2007-10-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맺기, 일처다부"에 관해 말하려 했던건 아니것 같고요.
제가 보기에 김형경 작가는 성과 사랑은 결국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아요.
한 남자는 세계일주라는, 한 사내는 일확천금과 그 돈을 미끼(?)로 아내가 되돌아 오기를,한 여자는 자연의 일부로 살기를원하는...
각자의 환상을 가진 사람들로 등장하죠.
그리고 "연희".
연희 또한 12 년전의 연인에 대한 환상으로...

어쨌든 작가는 환상에 대해 고찰하고 환상과 화해하는 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wasulemono 2007-10-0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황당하다. 사랑은 할인매장에 진열된 상품과는 달리 인간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사랑과 관련된 혼란은 비롯된다. 선택 사항이 아니므로 사랑을 가려서 하거나 받을 만한 그 어떤 특별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하거나 범상하거나 간에 사랑에는 기준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통속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목은 가장 통속적인 냄새를 풍겨서, 한번 들으면 이 소설 꽤나 통속적일 것같다는 예감부터 심어준다. 그러나 제목을 찬찬히 뜯어보면 표현의 정합성 이면에 놓인 비정합성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무관하게 놓여 있고, 사랑은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빠르게 온다. 그리고 기대보다 적거나 많게 오기도 하고, 원하는 길을 에둘러 오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은 한여름 밤의 돌풍처럼 무서운 녀석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랑이라고 부를 때, 사랑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이나 유령같은 녀석이다.


이 소설을 접하는 독자의 전형적인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고 생각된다. 재미 없다와 재미 있다로. 연애 이야기에 주목해서 읽으면 재미 있다는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상처와 분노와 치유에 주목해서 읽으면 재미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의 문제를 떠나서 지루하다, 그래서 끝까지 못읽겠다는 반응도 의외로 많다. 나는 지루하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재미라는 말이 풍기는 가벼움의 인상을 생각하면, 흥미롭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 연애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서 재미 없을 수도 있다. 트렌디 드라마 류의 과장된 이야기에 도취된 사람이 이 소설을 읽으면 지루하고 재미 없어서 환장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등장 인물도 많지 않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건도 없다. 대신 소설의 수많은 페이지를 인물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그래서 신경이 굵은 사람, 즉 섬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김형경이 그려내는 섬세한 심리를 채 따라가지 못하고 풀 죽기 일쑤이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만의 특별한 문제라기보다는 영상 문화의 비주얼한 폭력에 길든 요즘 사람들의 보편적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설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에 치중하는 요즘 세대에 대한 경고이다. 소설을 영상 문법에 맞춰서 쓰는 것은 이 시대 소설가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이긴 하나, 그 유력한 방법이 오히려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참다운 의의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형경의 이 소설은 소설이 가진 소설다운 면이 강하게 이끌고 나간 면이 없지 않다. 소설이 소설다워도 좋지 않은가 하는 작가적인 주장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 간의 우월성 경쟁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소설과 영화를 지나치게 근접시키는 요즘 풍토는 소설을 마치 영화의 밑그림일 때 바람직하다는 오해를 낳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의 상관성을 주장하는 쪽은 영화쪽이지 소설쪽은 아니다. 파워 게임의 관점을 버릴 때, 오히려 소설과 영화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챙길 수 있는 좋은 두 가지 양식일 뿐, 어느 쪽이 다른 쪽에 몸 대주는 관계는 아니다.


1990년대는 유교적 도덕주의 속에서 피폐하고 왜곡된 성을 둘러싼 담론이 개화한 시대이다. 사회주의라는 이성적 기획이 무력해지고 이념이 한갓 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환멸이 뒤덮은 시대이다. 남은 것은 이념의 외피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몸으로서의 나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1990년대는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 보다 정직해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몸이 사회주의를 이어받아 하나의 이념이 되었고, 그 이념은 상품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우리가 일용할 농담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무언가 큰 것에 매달리는 것만이 삶의 진정한 방향이라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상처이자 패배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용기이자 승리였다. 그 승리의 방망이를 잡은 쪽으로부터 펼쳐진 성의 전면전은 세상을 평정했다. 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쪽은 사라졌고, 거기에다가 부도덕의 낙인을 찍는 이도 극소수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의 전면화는 성에 부여되었던 환상의 붕괴를 가져왔다.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이 섹스를 하고, 더 많이 성을 이야기하지만, 성의 해방 세상에서 우리의 성은 시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 아랫도리에 달린 것만이 성기가 아니라 몸 자체가 거대한 성기가 되어 버렸다. 성은 가려짐으로써 성으로서의 쾌락과 욕망이 강화된다. 그러나 세상에 환하게 드러난 성은 우리의 쾌락과 욕망은 위축시켜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있었음으로 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질주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가 얻으려 한 것은 우리가 앞서 나간 곳보다 오히려 뒤에 있다. 이런 부조화는 1990년대 우리가 성을 향해 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얻은 것은 그 당시 우리가 얻고자 했던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욕망과 환상의 붕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난처한 처지가 아닐까.


1990년대 벽두 화제를 몰고 온 장정일의 시와 소설은 성의 전면전을 개시하는 신호탄이었다. 난폭한 언어로 점철된 그의 표현들은 우리가 간직한 성의 쾌락과 환상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곳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텍스트로 풀어낸 성은 이성간의 자유로운 결합을 추구하는 자유연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체로서의 여성이 거세된 환상적 대상과 진행되는 성이었다. 그것은 남성적 환상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고독한 인간, 소외된 인간의 절망적 몸부림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남성적이어서 페미니스트들의 집중적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유교적 보수주의자의 공격 대상이기도 했다. 그가 1990년대 내내 사회 속에서 항상 화제 작가로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가로서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기인한 전쟁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사법부의 보수적 판결로 그의 소설가로서의 위치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준 지나친 비주얼 지향에도 원인이 있다. 성을 육체적 행위에 기반한 난폭한 환상으로만 봄으로써, 장정일의 소설들은 갈수록 왜소화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사적 환상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타인의 환상을 침범하는 것이야말로 포스터모럴의 세계에서도 지켜야 할 모럴이 아니던가. 그에게 가해진 여러 가지 비판의 근저에는 이것이 있었을 터이다. 유교적 보수주의자들의 가부장제적 환상은 장정일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정일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숨기는 것을 제일의 미덕으로 삼는 유교적 보수주의자들이 관음증자라면, 그것을 표나게 드러내놓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장정일은 노출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음증과 노출증이 오십보백보의 욕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장정일은 유교적 욕망의 자장권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다만 둘 사이에 형제애가 부족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장정일의 편이 되어 유교적 보수주의 깨부수기, 문학적 자율성의 신화에 동참했다. 그러나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유교적 형제애의 세계를 거부하고, 그들이 얼마나 한통속인가를 폭로하려고 고군분투했다.

 

현재 장정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노출증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적 불리함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가 소설가로서 생명을 유지하기에는 그의 세계는 단순했다는 점에도 있다. 그는 노출증의 환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그에게는 거짓말과 같은 환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디즘과 메저키즘의 환상을 비주얼로 부각시키는 데만 고집한 그의 결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더 이상 관용할 수 없었던 사법부과 유교적 보수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성적 환상에 시달린 장선우 역시 동반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남성적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1990년대의 성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적지 않게 심각한 것이기도 했지만, 고작 10여 년 사이에 그간의 모습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가. 그것이 시간의 파괴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을 가볍게 날려버리는 힘을 가진 시간. 그렇게 보면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초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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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말봉이던 2000년 가을, 나는 최초로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박봉으로 삼남매를 키우면서 어머니는 영화관이라곤 가보실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매사에 절약하시고 또 절약하셨다. 우리가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는, 특별히 낭비가 아니다 싶으면 다 사주셨다. 떼를 써서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을 얻었던 기억이 지금은 철 없던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누구 떼를 썼는지는 몰라도 삼남매를 데리고
동시상영관을 찾은 것이 어머니가 영화관에 발을 딛었던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그 속에는 한 평생을 가족을 위해 고생해 온 한 여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억척스럽게 생을 일구어낸 한 명의 인간에 대한 경이의 느낌, 그리고 지울 수 없는 몇 개의 불편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여하튼 2000년 그 당시 최고의 히트작이자 내 존재조건과 결부된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어머니와 영화관을 찾았다. 어머니는 영화관을 둘러싸고 울려펴지는 엄청난 소리에 우선 놀라셨다. 그리고 총성과 나뒹구는 시체를 똑바로 보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시곤 했다. 그런 모습이 참 순수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시골 소녀의 감성과 순수를 간직한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사람에게서 기대하는 한 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었다.


최근 집에 내려갔다고 우연히 그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영화 때문에 많이 놀라셔서 병까지 생겼다고 하셨다.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보고 병까지 생긴다는 게 도대체 있을 법한 일일까.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이 상기되는 듯 몸서리를 치셨다. 어머니는 병원을 찾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고 하셨다.


돈 벌면 이미자쇼에 같이 가자고 말씀드렸다. 소녀 시절부터 좋아하셨던 이미자, 나도 어머니처럼 이미자를 좋아한다. 조만간 돈을 벌어서 어머니와 함께 이미자쇼에 함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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