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황당하다. 사랑은 할인매장에 진열된 상품과는 달리 인간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사랑과 관련된 혼란은 비롯된다. 선택 사항이 아니므로 사랑을 가려서 하거나 받을 만한 그 어떤 특별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하거나 범상하거나 간에 사랑에는 기준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통속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제목은 가장 통속적인 냄새를 풍겨서, 한번 들으면 이 소설 꽤나 통속적일 것같다는 예감부터 심어준다. 그러나 제목을 찬찬히 뜯어보면 표현의 정합성 이면에 놓인 비정합성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무관하게 놓여 있고, 사랑은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빠르게 온다. 그리고 기대보다 적거나 많게 오기도 하고, 원하는 길을 에둘러 오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은 한여름 밤의 돌풍처럼 무서운 녀석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랑이라고 부를 때, 사랑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이나 유령같은 녀석이다.


이 소설을 접하는 독자의 전형적인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고 생각된다. 재미 없다와 재미 있다로. 연애 이야기에 주목해서 읽으면 재미 있다는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상처와 분노와 치유에 주목해서 읽으면 재미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의 문제를 떠나서 지루하다, 그래서 끝까지 못읽겠다는 반응도 의외로 많다. 나는 지루하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재미라는 말이 풍기는 가벼움의 인상을 생각하면, 흥미롭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 연애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서 재미 없을 수도 있다. 트렌디 드라마 류의 과장된 이야기에 도취된 사람이 이 소설을 읽으면 지루하고 재미 없어서 환장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등장 인물도 많지 않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건도 없다. 대신 소설의 수많은 페이지를 인물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다. 그래서 신경이 굵은 사람, 즉 섬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김형경이 그려내는 섬세한 심리를 채 따라가지 못하고 풀 죽기 일쑤이다. 그것은 비단 그 사람만의 특별한 문제라기보다는 영상 문화의 비주얼한 폭력에 길든 요즘 사람들의 보편적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설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에 치중하는 요즘 세대에 대한 경고이다. 소설을 영상 문법에 맞춰서 쓰는 것은 이 시대 소설가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이긴 하나, 그 유력한 방법이 오히려 소설이 가지고 있는 참다운 의의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형경의 이 소설은 소설이 가진 소설다운 면이 강하게 이끌고 나간 면이 없지 않다. 소설이 소설다워도 좋지 않은가 하는 작가적인 주장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 간의 우월성 경쟁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소설과 영화를 지나치게 근접시키는 요즘 풍토는 소설을 마치 영화의 밑그림일 때 바람직하다는 오해를 낳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의 상관성을 주장하는 쪽은 영화쪽이지 소설쪽은 아니다. 파워 게임의 관점을 버릴 때, 오히려 소설과 영화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챙길 수 있는 좋은 두 가지 양식일 뿐, 어느 쪽이 다른 쪽에 몸 대주는 관계는 아니다.


1990년대는 유교적 도덕주의 속에서 피폐하고 왜곡된 성을 둘러싼 담론이 개화한 시대이다. 사회주의라는 이성적 기획이 무력해지고 이념이 한갓 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환멸이 뒤덮은 시대이다. 남은 것은 이념의 외피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 몸으로서의 나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1990년대는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측면에서 보다 정직해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몸이 사회주의를 이어받아 하나의 이념이 되었고, 그 이념은 상품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우리가 일용할 농담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무언가 큰 것에 매달리는 것만이 삶의 진정한 방향이라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상처이자 패배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용기이자 승리였다. 그 승리의 방망이를 잡은 쪽으로부터 펼쳐진 성의 전면전은 세상을 평정했다. 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쪽은 사라졌고, 거기에다가 부도덕의 낙인을 찍는 이도 극소수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의 전면화는 성에 부여되었던 환상의 붕괴를 가져왔다. 우리는 전보다 더 많이 섹스를 하고, 더 많이 성을 이야기하지만, 성의 해방 세상에서 우리의 성은 시시한 것이 되어 버렸다. 아랫도리에 달린 것만이 성기가 아니라 몸 자체가 거대한 성기가 되어 버렸다. 성은 가려짐으로써 성으로서의 쾌락과 욕망이 강화된다. 그러나 세상에 환하게 드러난 성은 우리의 쾌락과 욕망은 위축시켜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있었음으로 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질주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가 얻으려 한 것은 우리가 앞서 나간 곳보다 오히려 뒤에 있다. 이런 부조화는 1990년대 우리가 성을 향해 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얻은 것은 그 당시 우리가 얻고자 했던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욕망과 환상의 붕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난처한 처지가 아닐까.


1990년대 벽두 화제를 몰고 온 장정일의 시와 소설은 성의 전면전을 개시하는 신호탄이었다. 난폭한 언어로 점철된 그의 표현들은 우리가 간직한 성의 쾌락과 환상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곳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텍스트로 풀어낸 성은 이성간의 자유로운 결합을 추구하는 자유연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체로서의 여성이 거세된 환상적 대상과 진행되는 성이었다. 그것은 남성적 환상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고독한 인간, 소외된 인간의 절망적 몸부림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남성적이어서 페미니스트들의 집중적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유교적 보수주의자의 공격 대상이기도 했다. 그가 1990년대 내내 사회 속에서 항상 화제 작가로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가로서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시대적인 흐름에 기인한 전쟁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사법부의 보수적 판결로 그의 소설가로서의 위치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보여준 지나친 비주얼 지향에도 원인이 있다. 성을 육체적 행위에 기반한 난폭한 환상으로만 봄으로써, 장정일의 소설들은 갈수록 왜소화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사적 환상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타인이 공유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타인의 환상을 침범하는 것이야말로 포스터모럴의 세계에서도 지켜야 할 모럴이 아니던가. 그에게 가해진 여러 가지 비판의 근저에는 이것이 있었을 터이다. 유교적 보수주의자들의 가부장제적 환상은 장정일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정일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숨기는 것을 제일의 미덕으로 삼는 유교적 보수주의자들이 관음증자라면, 그것을 표나게 드러내놓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장정일은 노출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음증과 노출증이 오십보백보의 욕망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장정일은 유교적 욕망의 자장권에 놓여 있는 셈이다. 다만 둘 사이에 형제애가 부족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장정일의 편이 되어 유교적 보수주의 깨부수기, 문학적 자율성의 신화에 동참했다. 그러나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유교적 형제애의 세계를 거부하고, 그들이 얼마나 한통속인가를 폭로하려고 고군분투했다.

 

현재 장정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노출증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적 불리함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가 소설가로서 생명을 유지하기에는 그의 세계는 단순했다는 점에도 있다. 그는 노출증의 환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그에게는 거짓말과 같은 환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디즘과 메저키즘의 환상을 비주얼로 부각시키는 데만 고집한 그의 결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더 이상 관용할 수 없었던 사법부과 유교적 보수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 성적 환상에 시달린 장선우 역시 동반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남성적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1990년대의 성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적지 않게 심각한 것이기도 했지만, 고작 10여 년 사이에 그간의 모습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가. 그것이 시간의 파괴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을 가볍게 날려버리는 힘을 가진 시간. 그렇게 보면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초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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