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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옛날이야기집 1 - 동물민담편
츠보타 죠우지 지음, 박소현 옮김 / 제이앤씨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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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에 대해 얘기할 때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론적 차원의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런 물음에는 일본인은 한국인, 미국인과도 다른 고유한 인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 역시 한국인은 일본인, 미국인과도 다른 고유한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민족에 대한 관념은 미국이나 호주같은 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공유하는 믿음일 텐데, 그것은 신에 의해 선택된 존재라는 신화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개개 민족이 자기 고유의 신화를 윤색하여 성원들에게 이를 부지중에 믿게 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적 믿음에 기대는 민족일수록 타자를 경시하거나 오도된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본 역시 아마테라스의 후신인 천황의 자손이라는 믿음은 서구에 대항하는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장으로 몰아넣는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윤색된 신화를 들먹이는 이들은 정치가이고, 그들은 이렇게 윤색된 신화를 가지고 민중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고 민중의 사회역사적 상상을 가로막는다. 패전 직후 천황도 한 명의 인간임을 선언했을 때 그때에서야 일본의 신화는 무참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화에 기대어 이어져온 나라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계몽의 단계였다.

<일본의 옛날이야기집-동물민담편>는 일본에서 구전되어온 민담 중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우리 민담과 거의 흡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민담이 상당수 등장하는데, 대체로 타자에 대한 베품이 결국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는 우리 민담과 큰 차이가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는 이 민담들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부분이다. 이 민담들 속에서 동물들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말을 나누고 서로가 처한 곤경을 도와주며 공생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민담에서 동물은 인간의 선행에 보답하기 위해 변신한 인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비하면 일본 민담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애초부터 경계가 없다. 이것은 만물신 사상이 강한 일본의 전통과 맥이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즉 <이웃의 토토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에콜로지와 판타지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유구하게 내려온 민담의 세계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신화는 항상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면서 타자를 누르는 무기로 사용된다. 그러나 민담은 작위적으로 차이를 만들지 않으며 차이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며 그 차이는 순수한 차이로 남는다. 그 차이는 타자에 대한 우월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 차이는 생활 습속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차이로, 현대로 넘어와서 새로운 상상력의 기반이 된다. 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도 여
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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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 한국형 블록버스터
김소영 기획 / 현실문화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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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왔다. 둘이 잘 살라고 남녀를 축복해주는 말이 주례사일텐데, 주례사는 점쟁이의 말처럼 듣기는 좋지만 따지고 들면 들으나 마나한 얘기일 뿐이다. 그걸 굳이 듣는 이유는 들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걸 두고 말의 마력이라고 하는 걸까. 여하튼 이 책은 식장의 주례사처럼 되어버린 문학비평가들의 비평 관행을 개개 비평가들을 각개 격파하고 있는데, 예전 문학권력 논쟁처럼 벌써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다. 곧 읽어볼 참이다.

문학마저 사정이 이런데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총화라고 하는 영화비평도 이런 비판에서 무관하다고 발뺌하기는 힘들 것같다. 다만 영화비평은 문학비평에 비해 동업자 의식이 강하고 비평이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내가 정기 구독하는 모 시사주간지의 영화평을 보면 그 영화가 어떻다는 건지 비평가의 논점이 정확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막 개봉한 영화의 앞길을 막아서는 훼방꾼 역할을 하기 싫은 탓인지는 몰라도 영화얘기를 하다가 비평가 자신의 사적인 얘기가 끼여들면서 글의 논점이 흐려지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런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한국 영화를 좀 더 깊이 읽어내고자 하는 축들에게 한국영화론으로 접근할 만한 책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저널리즘에 몸담고 있는 비평가가 아니라면 대부분 학교에 적을 둔 비평가들일텐데, 활동 인구에 비해 성과물로 내놓는 건 매우 빈약하다. 몇몇 보이는 책들도 대체로 여성학자들의 책이다.(남성학자(좀 이상한데...)들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활발히 연구 업적을 내놓고 있는 사람들 중 단연 그 앞자리는 김소영 교수가 차지하고 있다. 저서의 수도 많을뿐더러 한국영화 역사의 계보를 세우는 작업에 있어 가장 열성적인 것같다. 다만 그녀의 문장이 매끄러운 언어가 아니라 번역식의 순화되지 못한 언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한국영화론은 없다라고 생각하던 중 김소영 교수가 기획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의 에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이력과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필자 중에는 영화기획사 출신도 있고 외국인도 끼여 있는데, 영화기획사에 이런 글을 써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다.

이 책은 <용가리>, <쉬리>를 원점으로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을 점검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이제 흔한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다.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닮되 거기에 한국적인 뭔가를 덧붙여 세계적이면서도 지역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이 전략을 이 책의 필자들은 이 전략이 한국적인 것으로 끌어오는 민족주의적 상상력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접근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이 공히 탈민식민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 필자들이 느슨한 하나의 에콜임을 반증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접근의 필연성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이 취하는 전형적인 탈식민주의적 기획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접근 방법이 유사하기 때문에 간혹 겹치는 얘기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개별 필자마다 자기만의 성찰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한 편은 아니다.

영화를 그냥 보는 게 좋은 사람도 있고, 단순한 보기가 아닌 깊이 꼼꼼히 시간을 들여 읽어내기가 좋은사람도 있다. 이런 차이는 취향과 관심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하지 않는 관용이 필요할뿐이다. 나는 읽어내는 쪽을 선호하는 편인데, 영화를 읽어내는 것과 문학을 읽어내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은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만큼 보기와 읽(어내)기의 무게가 다른 경우도 없을 것이다. 한국영화는 보기보다 읽어내기가 훨씬 고통스런 작업이다. 특히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더 그런데, 그건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깔고 있는 한국적인 것이 보수적인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들이고, 이것에 비판의 매스를 한층 치밀하게 가져다 댈수록 비평과 관객의 괴리는 한층 깊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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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 마인드 1
토머스 J. 스탠리 지음, 장석훈 옮김 / 북하우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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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관심 없는 사람은 없다. 큰 돈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아예 돈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는 절에 계시는 스님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요즘 세상을 사는 이치이다. 뭘 하더라도 필요한 돈, 돈, 돈. imf가 풀리면서 사람들은 자산을 키우기 위한 투자 방법을 찾느라 골몰한다. 주식 시장이 불안정해지니까 부동산으로 여유 자금이 몰리고, 책에서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경제, 경영 코너는 붐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히트를 친 것도 사람들의 이런 욕망을 잘 읽어낸 탓이겠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이런 방향으로 유도하는 측면도 없진 않을 것같다.

경제 감각 없고 무심하기로 나같은 사람도 없을 거다. 수입 없고 모아 둔 돈도 당장 1달 정도밖에 버틸 수 없는 빈곤한 처세가 걱정되었던 탓인지 친구가 <백만장자 마인드>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인문사상예술 쪽 서적을 주로 읽는 나에게 이런 경제, 경영 마인드 컨트롤 서적은 그다지 상관없는 책이지만, 혹 지금과 같은 빈한한 재정 사정을 타개할 만한 묘책이 숨어있을까 해서 2권으로 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미국 저술들의 두드러진 특징인 사례 연구 방법과 인구통계학적 방법을 병용하여 백만장자들의 사고방식, 생활 방식, 가치관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근데 우선 걸리는 건 내가 사례 연구 방법은 이 방법이 주는 생생함 때문에 좋아하지만 인구통계학적인 방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치를 계량화한다고 해서 진리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의 최상급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백만장자들의 대충의 양상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같지는 않다. 나는 중간쯤 순위에 올라와 있는 게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다.

저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만장자의 상당수는 자영업자다. 누구나 알고 있다. 샐러리맨 해서는 집 장만하고 자식 교육시키고 하는 거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웬만하면 틈새 아이템이나 기발한 아이템을 가지고 자기 사업하려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나같이 재능도 자본도 없는 인문주의자마저 그런 생각을 하는 판국이니 누군들 이런 대열에 빠지겠는가. 하여튼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자영업을 하라는 저자의 충고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저자가 백만장자의 마인드라고 서술하고 있는 측면들은 대체로 사회나 윤리 교과서에서 봤음직한 고상한 덕성을 강조한 것이고, 어떤 집을 살 것인가 시간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대한민국의 천민자본주의 졸부들이나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일 뿐, 나같은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 못해 그 이하인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다. 제발 졸부들이 이 책을 보고 좀 고상하게 놀아줬음 하는 게 내 바램이다. 자본주의 1세계의 부자들은 결코 소비에 목숨걸지 않는다는 걸 이 땅의 졸부는 이해하고 행동하기 바랄 뿐이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1, 2권을 읽었는데, 약간 허탈하다. 읽은 것에 비해 내가 받아들인 부분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어떤 책들은 내가 받아들이기 곤란할 만큼 산처럼 다가오는데, 이 책은 무슨 벌레 하나 날아온 정도만큼의 파급력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책은 그 책 나름의 필요 독자가 있는 법인데,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이 문제일 뿐이겠지.

하여튼 평소에 돈 문제 조금도 생각 안 해봤고, 난 왜 이렇게 돈이 없을까 탄식을 내뱉어 본 사람과 자기가 졸부여서 좀 고상하게 보이고 싶다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선택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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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성곤.정정호 옮김 / 창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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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전공이 비교문학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비교문학은 경계선상의 학문이다. 자국의 문학을 기반으로 타국의 문학과의 영향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비교문학의 기본과제인데, 그러므로 비교문학은 끊임없이 자국 문학과 타국 문학의 접변 지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미국인 비교문학자로서 사이드가 제국의 형성기 영국, 프랑스 소설을 매개로 하여 문학과 제국이 맺는 관계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시도한 저서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제국의 소설뿐만 아니라 이 제국의 식민지 출신의 다양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도 그만큼의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사이드는 제국주의와 더불어 탈식민주의의 내러티브를 함께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가 빠져드는 토착주의, 환원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민족의식이 성공한 이후 사회 의식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민족주의는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는 식민지 경험을 가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이드는 파농의 해방 이론이 그런 측면에서 훌륭한 본보기임을 말하고 있다. 파농은 최근 들어 다시 소개되고 있는데, 파농의 유효성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으로 그에게 팔레스타인도 미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정체성의 확고한 근거가 아니다. 그의 이런 위치처럼 그는 일방적으로 중동이나 아랍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오도된 민족주의로 인해 시민사회가 소멸된 아랍 국가들에 대한 시선도 만만치 않게 비판적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다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순수하지 않으며 타자와의 교섭이 빚어낸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사무엘 헌팅턴같은 문명충돌론과는 대조되는 입장이 분명하다.

비교문학은 지역 연구, 인류학 등처럼 제국주의 확장기에 제국 확장과 관리 차원의 필요성 때문에 생긴 학문 분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태생의 조건일 뿐, 이들 학문 분과는 다층적이며 다면적인 세계 문화의 공존과 평화를 위해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정확히 이런 일이다.

마지막으로 번역본에 대해서 한 마디 6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역저를 내는 일은 끔찍하게 힘든 일이다. 번역이란 걸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그 고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역이라고 하기에는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번역 편차가 심한 편이다. 최종 감수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역서 후반부로 갈수록 오자, 탈자, 비문 등이 엄청나게 등장해서 한 문장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수두룩하다. 영문학 전공자로 번역이 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부실한 번역은 원저의 가치에 대한 훼손이자 독자에 대한 불친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개정판을 하루바삐 내서 오류를 말끔히 정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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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혹은 없어짐 - 죽음의 철학적 의미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8
유호종 지음 / 책세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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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혹은 없어짐>의 표지는 테레사 수녀가 관속에 누워있는 장면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처럼 테레사의 얼굴은 약간 찡그리고 있다. 테레사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접하는 무수한 죽음들에 대해 우리는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형상을 차용한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음은 여전히 존재론적 사건일 뿐, 그 존재의 신비를 애써 해명하거나 이해할 필요는 없는 수동적인 사건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존재론적인 사건인 죽음에 대해 그 철학적 의미를 따져보고자 젊은 철학자가 화두를 끄집어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떠남 혹은 없어짐>으로 존재하는데, 그의 논의의 화두가 된 것은 '뇌사'라고 하는 생명윤리적 문제이다. 흔히 말하는 죽음도 아니요 삶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 놓여 있는 모호한 사건, 뇌사를 통해 지은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모호한 인식의 근저를 파헤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충분히 그럴 듯해보고 그 의미도 충분하다. 그러나 죽음이 존재론적 사건으로만 착색된 현실에서 그 사건을 마치 인과관계의 맥락에서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는 지은이의 인식적 관심은 생각보다는 다소 허망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의 탐구가 시작되었을 때와 비교해 그의 탐구가 끝난 시점에서 도출된 결론은 저자 자신의 인식적 관심은 물론이려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의 인식적 관심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한 것같다. 삼단논리적 추론을 따라가느라 골치만 아팠을 뿐, 그 과정 자체도 과연 이런 추론이 정당한가라는 의심을 곳곳에 던지게 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과연 논리적 추론만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죽음은 논리적 사건이 되기에는 가려진 게 너무 많은 존재론적 사건이다. 그리고 죽음 의식에 기반한 삶은 이성적 계산에 따르기도 힘들뿐더러 자신의 계산이 반드시 훌륭한 삶을 보증해주는 것일 수도 없다.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의 논리적 탐구보다는 죽음의 윤리적 탐구에 기반해 현재 삶에서 죽음이 어떤 의미를 띠고 내 삶에 녹아날 수 있는가와 같은 실천적인 측면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볼 때 <죽음의 한 연구>같은 소설이나 죽음과의 힘겨운 대결을 거친 이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내 삶의 죽음과 삶을 반추해보는 작업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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