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이나 제모나 태닝은 그래도 이해가 가요. 하이힐을 신으면 다리가 길어 보이고, 제모를 하면 커팅 윤곽이 또렷해지고,
태닝을 하면 온몸이 탄탄해 보이고. 하지만 일부러 웃고, 쉴새없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달고, 가부키 배우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그런 건 그러니까, 근육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아아, 마침내 나는 실토해버렸다. 그야말로 돈가스덮밥을 앞에 둔용의자가 범행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심경이었다. 단숨에자백을 마치고 죄인이 되는 동시에 반쯤은 이제 해방이구나 하는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 때문인지위치 때문인지, T구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E토가 말한 ‘클래식‘의 의미를 이제 나는 완전히 이해한다. 여자는 심사 항목이 많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대회는 ‘클래식‘
한 것이다.
엄마,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하지만 엄마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평가한 보디빌딩이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이 대회는 세상과 동등하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젠더를 의식하게 하는 자리다.
‘여자다움‘을 추구하라고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자리를 나는 달리 떠올릴 수 없다. 사람들은 보디빌딩을 ‘맨몸 하나로 싸우는대회라 간주하고, 그 순수성을 칭송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칭찬에 머쓱해지고 만다.

팔굽혀펴기를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기묘한 감개가 싹텄다. 다행감多幸感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신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
그럴 만한 시간, 돈, 환경, 평화, 건강한 몸이 내 손안에 있다는것. 다시 말해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다는 것. 이 순간이 영원히이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중에 이런 감정이 솟구친 적이 몇 번 있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처럼, 지금 이 상황을 그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 뒤에서 혼자 묵묵히 팔굽혀펴기에 전념하는 것.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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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 무엇이 아름답게 보일까.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 무엇이 맛이 있을까.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무엇이 꼭 필요할까. 아름다운 것도 맛있는 것도 필요한것도 나는 없었다.

고통은 어째서 저절로 물러나지 않을까. 이렇게 애를 써야만 저만치 물러서서 나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걸까. 힘든 일들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야? 꼭 그것과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어떤 수고로움이든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지어진 생물이라니.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닌빈에 두고 온 나의 과거에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그저 있으면서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나는 그렇게 수 년을 살았다. 한번 태어난 이상 계속해서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기에이르렀고 사람은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언제든 죽으면 된다고그러면 다 끝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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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애쓸수록 미숙함은 쉽게 들통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어른이 되 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가만히 멈춰서 살필 수 있는 시선을 주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 예전에 는 그런 말들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의문을 가지지 않았 다. 양육자의 사랑과 신뢰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런 티 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너 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난다‘는 말은 칭찬으로 다가올까, 상처로 남을까. 스스로 던진 이 질문의 답을 오래도록 고민했다.
배려를 받지 못한 아이, 좋은 어른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소년이 커서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 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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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한 미학자가 아는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건 그리운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과 같다는 얘기를 했어. 책이나 음악과 달리그림은 복제본을 소유하는 게 의미가 없잖아. 장소특정적이라 그도시의 미술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림과 관람자 간에관계를 형성하게 한다는 거지. 어떤 그림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느끼게 되는 건 그런 관계 때문이라는 거야."

지극히 성실하고, 지극히 지적이며, 지극히 교양 있는 노인들.
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종종 생각했다.
우리는 때때로 ‘공부에도 때가 있다‘며 무언가를 배우기에는너무 늦었다고 여기지만 이 강의실에는 한 발 한 발 내딛는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두뇌만은 그 어떤젊은이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지적 열망으로 가득찬 노인들이앉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지식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그들의 부유함이다. 그렇지만 부유하다고 해서 모두 말년에 공부에열중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녀성관계시 임신 가능성을 줄이는 것을 ‘피임‘, 즉 ‘아이 배는 것을피한다‘라고 할 때의 수동성과 ‘버스 컨트롤‘, 즉 ‘아이 낳는 것을통제한다‘고 할 때의 능동성 간의 차이. 그건 각 문화에서 여성이어떻게 자리하고 있는가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피임‘이라 할 때여성은 자기 몸의 주체가 아니지만, ‘버스 컨트롤‘이라 말할 때는자기 몸의 주체가 된다. 꽤나 주체적인 척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순종적인‘ 한국 여성인 건가,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가의 여부는 거대한시민정신이라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인격의 문제라는 것, 인간이란어디서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격의 결함을 사회시스템으로보완할 수밖에 없고, 그 시스템의 정교함이 한 사회의 수준을결정한다는 것 등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다른 게 아니었다.
시스템의 수준이 다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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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구병모작가님을 처음 만나게 된 책이었다. 이번에 새로나온 프리퀄(파쇄)를 읽고 나니 다시 ‘조각‘을 만나고 싶어졌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마치고 나면 홀로 영화캐스팅을 해보게 된다. 10여년전쯤 읽을 때는 이혜영배우님이 조각을 연기해주시면 좋겠다 생각했다.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배우님의 나이가 조각과 비슷해졌으니 더욱더 영상으로 만나고 싶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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