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5.18 광주학살/항쟁

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김명인 칼럼]5.18광주학살/항쟁 27주년을 맞으며
  2007-05-15 오전 8:41:11
  며칠 뒤면 5.18 광주학살/항쟁 27주년이 돌아온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아직도 늘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80년대 후반생들이 대부분인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5.18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3.1절이나 4.19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아스라한 옛일로 받아들여진다. 하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7년은 6.25가 27주년을 맞았던 해인데 그때 내게도 6.25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이 그저 5.18이 대강 무엇이었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나마 6.25는 우리가 자라던 내내 '상기하자 6.25!'라는 반복되는 냉전적 훈육과 주입을 통해 늘 강박적으로 호명되던 기호였지만 '상기하자 5.18!'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는 요즘 세대들에게 5.18도 모르냐고 퉁박을 주는 것조차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기념공원과 연례적인 국가의례와 보상과 교과서 수록 등으로 이미 국가적으로 전유된 공식기념일이 됨으로써 5.18은 그 본연의 선연한 핏빛 아우라조차 안전하게 박제처리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얼마 전 5.18민중항쟁 서울시 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주최한 5.18 민중항쟁 기념 서울시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운문부 장원을 차지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블로그에 퍼 담았고 게시판마다 화제가 된 듯했다. <그날>이라는 제목의 그 작품 전문을 일단 인용해 본다.
  
  그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디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적 화자의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의 막힘없는 흐름 속에서 (물론 '놈'보다는 '아그'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전라도식 애칭을 사용했으면 더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훌륭한 산문시다. 서울 강남에서 여고 3학년에 다니는 18세의 여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체적 서사성을 획득한 시를 써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여학생의 부모나 부모세대의 친지가 들려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쫓겨 다급하게 지나가던 시적 화자의 자전거 뒤에 올라탄 고등학생과 그를 잡아가기 위해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계엄군, 겁이 나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화자, 결국 그 학생 '어린 놈'은 끌려가고 아직도 그날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화자…. 상황의 급박한 속도감과 전라도 사투리의 느린 전달감이 절묘한 엇박자를 이루는 가운데 "갑시다 갑시다"라는 절박한 청유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그 학살과 항쟁의 기억은 수많은 학술대회와 추도사와 공식 기록 속에서 이제 한국민주주의의 권화로, 민중항쟁의 기념비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날 생사의 기로에 선 희생자들이 내뻗은 "갑시다"라는 간절한 연대의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어떤 기념비도 호사한 무덤도 교과서도 결코 덮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절 한때 그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특권화하고 그것을 한갓 '저항의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배에 기름 낀 운동베테랑들의 그 어떤 회고담도 그 부끄러움을 장송할 수는 없다. 설사 학살원흉이 밝혀져 그날의 구호처럼 그 원흉을 '찢어 죽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광주학살/항쟁을 27년이 지나도록 현재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렇게 절망적 상황에서 고립된 채로 고통받거나 죽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온갖 투기적 개발에 의해 생존의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사실은 다수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타자화되고 주변화되어 소수성을 강제당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그때 광주에서 처절하게 고립되어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 남았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생생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이 남긴 부끄러움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이 저강도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광주학살/항쟁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연례적 기념행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갈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가 몰고 가고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 황급히 뛰어들어 '갑시다, 같이 갑시다'하고 울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당신 누구냐고 빨리 내 차에서 내리라고, 나는 당신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 어린 여학생의 시 한 편을 읽으며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꾸 내 등 뒤를 돌아본다.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하루종일 비가 내린 하루였다. 그때는 태어나지 조차 않았고, 아직까지 광주에 가보지도 못한

나지만 광주하면 언제나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포의 감정이다.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싸울 수 밖에 없는 싸움이 있을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언젠가 오정희 소설집에서, 사는 일이 언제까지는 무서움뿐이더니 언젠가부터는 부끄러움

뿐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거기에 공감하고픈 유혹을 느꼈었다. 근데, 과연 그래도 되는건가

새삼 묻게 된다. 무서움을 부끄러움으로 뒤바꿔쳐도 되는걸까?

그렇게 해서 철든다는 것이 길들여지고 비겁해지는 것이라면? 내 자신의 비겁함과 나약함은

내가 더 잘 알지만, 그래서 그만큼 자신없는 물음이지만 두려움에 벌벌 떨리는 몸을 가다듬고서

역사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그게 역사의 획을 긋는 한 사건 속에서든, 일상 곳곳에 퍼진

권력관계 속에서든, 그래서 혁신(변덕)으로서 또는 충실(고집)으로서의 주체이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저 두려움에 질린 학생들을 환대할 수 있는지... 분명한 건 나 혼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데. 27년 전,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 앞에 떳떳한 시민들이 있었다.

망각과도 싸우고 어설픈 화해와 중재와도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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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회 인권영화제 개최
18-24일, 서울아트시네마..국내, 국외 총 26편 상영
배혜정 기자   배혜정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올해로 11년 째를 맞는 인권영화제가 오는 18일 서울아트시네마(구 허리우드)에서 개최된다. 이번 영화제는 24일까지 총 26편(국내 13편, 해외 13편)을 무료로 상영한다. 인권영화제는 1회부터 현재까지 전 작품을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누구든 인권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개막작 '고스트'(닉 브룸필드 감독/영국/드라마/2006) ⓒ인권운동사랑방

  개막작은 닉 브룸필드 감독의 2006년 작, '고스트'다. 2004년 영국 이민 브로커들에게 고용돼 심야에 모캄베이 해변에서 불법으로 조개잡이를 하다가 밀물에 변을 당한 중국인 불법 노동자 23명의 실화를 영화로 옮겼다. 실제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주노동자 에이 퀸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영화를 보다보면 지난 2월 여수 외국인 화재로 숨진 10명의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이 오버랩 된다.
  
  <사랑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고 당당한 인간으로 인정받게 된 투쟁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캐나다 퀘백주에서 2002년 동성애 부부의 시민 결합권 뿐 아니라 양육권까지 명시된 법안이 통과된 현장을 당사자와 그들과 연대한 이들의 목소리로 생생히 재구성했다. (낸시 니콜/2005년/캐나다. 다큐/68분)
  
  그런가 하면 성전환자들의 애환을 조명한 작품도 있다. 이탈리아 작품인 <레오 N이라는 사람>은 성전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심도 깊고 밀착된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여 준다. 감독은 이들이 '비정상적 성'이 아니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알베르토 벤데미아티/2005/이탈리아/다큐/87분)
  
  이 외에도 입소문을 타고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김명준 감독의 <우리학교>와 최근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이주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다룬 들소리 방송국의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도 상영된다.
  
  
전체 작품 소개

  
  - 한국작품 -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이현정/ 2006/ 다큐/ 134분
  
  2005년 10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희망을 만드는 노숙인 생산 공동체'를 모토로 하는 노숙인 공동체 [더불어 사는 집]은 서울 정릉의 빈 집을 점거해서 함께 모여 살았다. 카메라는 혹독한 겨울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하는가' 질문의 답을 함께 찾아 간다.
  
  

 동백 아가씨
  박정숙/ 2006/ 다큐/ 78분
  
  소록도의 한센인(나병 환자)에 관한 다큐멘터리. 역사의 굴레에서 편견과 무지함 대신 작은 배려만 있었다면 가능했을 여성의 평범한 삶, 78살의 명랑하고 재치 있는 할머니의 지난한 삶을 감독의 나레이션으로 풀어가고 있다. 잃어버린 그녀의 그 삶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멋진 그녀들
  주현숙/ 2007/ 다큐/ 62분
  
  '이주 여성', 또는 '어머니'는 하나의 극적인 장르가 아니라 삶이다. 임신한 이주 결혼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던 과정에서 결혼과 임신을 경험하며 감독은 다른 느낌, 그들과 공동의 무엇을 함께 느끼게 된다.
  
  

 새끼 여우
  이유림/ 2007/ 드라마/ 28분
  
  파업 투쟁의 결과 남겨진 해고의 고통... 그리고 다시 찾아온 복직의 기회...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한 노동자는 갈등한다. 돌아가게 된 사람과 남게 된 사람들은 갈등하고 그가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부로 살고 싶다 - 살기 위하여 -
  이강길/ 2006/ 다큐/75분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끝으로 새만금 이야기는‘뉴스’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이 끝인가?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던가. 아니 우리는 누구의 변명을 믿으며 주민들을 왜곡하며 찢어갔는가! 그 땅에 남겨진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에겐 빅브라더가 있었다
  박정미/ 2006/ 다큐/ 80분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답은 미궁이 아닌 간단한 논리학이다. 위치 추적을 당한 사람들은 ‘삼성’의 ‘전현직’ ‘노동자들’이다. 이를 둘러싸고 삼성 노동자들과 삼성, 그리고 검찰과 인권 단체들 간에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우리 학교
  김명준/ 2006/ 다큐/ 134분
  
  일본 땅 조선 아이들의 용감한 등교가 시작되엇다. '조총련 학교'라고만 알고 있었던 '조선 학교'. 그곳에서 12년 동안의 민족 교육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고3들. '우리학교'를 통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그들을 만나본다.
  
  

 Out : 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
  여성영상집단 움/ 2007/ 다큐/ 110분
  
  천재, 초이, 꼬마. 세 사람의 셀프스토리. 편견 없이 열려있다고 세상은 말하지만 그들에겐 수많은 벽들로 둘러쌓여 있다. 하지만 멈추어 섬이 아닌, 함께하기. 그리고 조금씩 내일을 움직여 넘어서기.
  
  

 파산의 기술
  이강현/ 2006/ 다큐/ 61분
  
  파산하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 눈물 흘리는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 신자유주의의 미친 춤바람에서 살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의 몸부림 뒤에 승리의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림의 떡
  박재현 /2007/드라마/ 28분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고,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라 느껴지는 문화가 바로‘영화’라는 장르이다. 하지만 그‘문제없는 영화’속에 ‘그림의 떡’이란 낯선 시선이 존재한다. 영화를 꿈꾸며 사랑하며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영화이다.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
  들소리 / 2007/ 다큐/ 30분
  
  2007년에도 봄은 왔다. 너무나도 잔인한 봄이 대추리, 도두리에 내려앉았고, 평생 그 땅을 일군 농민들은 결국 떠나야만 했다. 2006년부터 들소리 식구들이 10개월 동안 살아간 대추리는 잔인하지만, 일상 속에 평화가 물들어 있었다. 국가 폭력에 의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 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강요된 미래 그리고 개방
  한미FTA독립영화실천단 /2007/ 다큐/30분
  
  정부의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정책과 최근 한미 FTA 협정으로 한국의 농업은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국민의 안전을 대가로 자동차나 옷을 팔아 수익을 남긴다는 이야기다. 소비자들이 좀 더 똑똑해지면 되는 걸까?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는 알아서 시장의 논리대로 퇴출될 것인가?
  
  - 해외작품 -
  
  

 내 사랑 블레인 Bilin My Love
  샤이 카멜리 폴라 / 2005/ 팔레스타인 / 다큐 / 84분
  
  팔레스타인 마을 블레인은 절반 이상의 땅을 잃을 처지에 놓여있다. 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앗아갈 분리 장벽의 설치에 맞서 싸우고, 카메라는 1년이 넘는 이들의 투쟁을 따라간다. 모하메드와 농부 와지를 중심으로, 함께 저항하는 이스라엘 활동가들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싹트는 관계를 포착했다.
  
  

 땅, 비, 불: 와하까 보고서 Land, Rain & Fire : Report from Oaxaca
  타미 골드 /2006/ 멕시코 / 다큐 /30분
  
  2006년 5월, 멕시코 와하까에서 지역 자치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교사들의 파업으로 시작된 이 투쟁은 와하까 민중연대회의를 만들어냈다. 교사들은 임금 인상과 함께 교과서 무료 배급 등 교육 공공성 확보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와하까 민중들의 요구에 정부는 총탄과 곤봉으로 탄압한다.
  
  

 레오 N이라는 사람 The Person de Leo N
  알베르토 벤데미아티/ 2005/ 이탈리아 / 다큐 / 87분
  
  니콜라 드 레오는 12살 때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는다. 40살이 된 니콜은 이름을 바꾸고 성전환자로 살아간다. 영화는 니콜의 일상과 수술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으며 성전환자가 겪는 어려움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아들이 아닌 딸로서 어머니를 찾아가게 된다.
  
  

 블랙골드 Black Gold
  
  마크 프랜시스 & 닉 프랜시스 Marc Francis & Nick Francis 2006/ 영국/ 다큐/ 78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거래되는 커피 한 잔은 3달러이지만 정작 에티오피아 농부가 힙겹게 버는 돈은 3센트. 에티오피아 협동조합은 세계 커피 시장을 점령한 4개 다국적 기업의 독점적 거래를 고발하며 1천 5백만 농민의 삶을 살릴 공정무역을 찾아 나섰다.
  
  

 사랑의 정치 Politics of the Heart
  낸시 니콜 / 2005/ 캐나다/ 다큐/ 68분
  
  동성애 부부가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양육의 권리를 보장 받는 것은 거기서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하는 것. 영화는 2002년 캐나다 퀘백주에서 동성애 부부의 시민 결합권뿐 아니라 양육권까지 명시된 법안이 통과된 그 현장을 당사자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 이들의 목소리로 생생히 재구성한다.
  
  

 소똥 Bullshit
  페아 홀름퀴스트 & 수잔 카달리안 PeA Holmquist, Suzanne Khardalian/ 2005/ 스웨덴/ 다큐/ 73분
  
  반다나 시바는 인도의 대표적 환경 운동가. 감독은 그녀를 따라 WTO 회담장부터 코카콜라 공장 폐쇄 운동 현장까지 2년 동안 동행한다. 그녀의 유기농 재배 농장과 미국의 생명공학 회사인 몬산토의 연구소를 종횡무진하며, 특허권의 의미와 증가하고 있는 농민 자살율의 근본적인 원인을 묻는 작품.
  
  

 에도시의 노래 The Songs of Eh Doh Shi
  타 하우 코 Hta haw koh 2006/ 태국/ 드라마/ 85분
  
  태국 난민촌 카렌인 마을. 아이들은 출생증명서나 주민증이 없어서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 주민들은 마을 청년에게 아이들 교육을 맡기지만 고아인 에도시는 3일째 공부하러 나오지 않았다. 군인이 되려는 에도시는 서글프게 노래 부른다. "권리와 자유를 위해 ∼ 조국을 위해 ∼ 전장에서 죽어 땅위에 뿌려진 피”
  
  

 이야기해 봅시다 Let's talk about it
  디파 메타 Deepa Mehta 2005/ 캐나다/ 다큐/ 47분
  
  나이지리아 태생의 네카와 인도에서 건너온 아멘딥, 엘살바도르가 고향인 지오마라는 모두 남편 폭력으로 고통을 당한 이주 여성들. 이들의 자녀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모를 인터뷰하며, 침묵 속에 가려져있던 폭력의 실체와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전쟁 기지 필요 없다 基地はいらない、どこにも
  고바야시 에우시 /2006/ 일본/ 다큐/46분
  
  일본 미군 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다. 95년 미군 소녀 성폭행 사건으로 촉발된 이 곳 주민들의 분노는 평택처럼 주일 미군 재편을 맞아 더욱 조직적이고 끈질긴 주민 운동으로 바뀌었다. 영화는 10년 넘게 헤코노 앞바다를 지키는 해상 시위 등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기지 운동을 담고 있다.
  
  

 전쟁 주문 받습니다 Shadow Company
  닉 바이카닉&자송 부르끄/2006/캐나다/다큐/86분
  
  자본주의 시대인 현대에서는 군인마저 돈만 주면 싸워주는 ‘상품’이 되어버렸다. 2004년 이라크는 이들 가장 잘 팔리는 군인들이 크게 돈을 벌 공간일 뿐이었다. 감독은 그 전쟁을 전후로 활약한 용병, 언론인, 정치인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쟁 대행 주식회사’를 낱낱이 비판한다.
  
  

 조각난 이라크 Iraq in Fragments
  제임스 롱리/ 2007/ 미국/ 다큐/ 94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고 바트당이 무너지고 나자 수니, 시아, 쿠르드로 쪼개진 이라크에서 민중들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미국은 어떠한 나라일까. 아버지를 잃은 11살 소년, 중산층 출신의 대학생 그리고 이라크 북부를 차지한 쿠르드인 등을 만나 본다.
  
  

 탐보그란데: 망고, 살인, 광산 Tambogrande
  에르네스토 카벨로스/2006/페루/다큐/85분
  
  페루 남쪽의 주민들은 잘 팔리는 금을 거부하고 전통을 이어 망고를 재배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나간다. 어느 날 그들에게 세계화를 등에 업은 채굴 회사들이 들이닥친다. 영화는 이들 신자유주의의 첨병에 맞서 꿋꿋하게 싸워나가는 그들의 투쟁과 생활을 카메라에 담는다.


2007년05월05일 ⓒ민중의소리

 


 

(더) 더빙, (화) 화면 해설, <비> '비디오로 행동하라!'. +감독 및 활동가와의 대화


5. 18.(금)       

01:00 pm      전쟁 주문 받습니다                       86m   

02:40 pm      땅, 비, 불: 와하까 보고서               30m   

                  전쟁 기지 필요 없다                      46m   

04:10 pm      우리에겐 빅브라더가 있었다 +       80m

06:00 pm      강요된 미래 그리고 개방 <비> +     30m   

07:00 pm      개막식

08:30 pm      고스트 (더)                                  96m


5. 19.(토)      

12:00 pm       이야기해 봅시다                         47m

01:00 pm       그림의 떡 +                                28m   

                 새끼 여우 +                                  28m

02:50 pm       블랙 골드 +                                78m

04:40 pm       내 사랑 블레인                           84m

06:20 pm       할매꽃+                                     97m   

08:30 pm       어부로 살고 싶다-살기 위하여-   75m   


5. 20.(일)  “소수자의 날” 

12:00 pm       고스트 (더) +                             96m   

02:10 pm       동백아가씨 +                             78m

04:00 pm       우리 학교 (화) +                       131m

06:40 pm       레오 N이라는 사람 +                  87m

09:00 pm       사랑의 정치 +                            68m


5. 21.(월)       

01:00 pm      이야기해 봅시다                          47m   

02:00 pm      그림의 떡                                    28m

                  새끼 여우                                    28m

03:10 pm      전쟁 주문 받습니다 +                    86m   

05:10 pm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 +   134m  

07:50 pm      Out: 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 +    110m  


5. 22.(화)

01:00 pm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 <비>           30m   

                  강요된 미래 그리고 개방 <비>       30m   

02:20 pm      어부로 살고 싶다 -살기 위하여-    75m   

04:10 pm      멋진 그녀들 +                               62m

06:00 pm      탐보그란데: 망고, 살인, 광산 +         85m   

08:00 pm      에도시의 노래+                            85m   


5. 23.(수)       

01:00 pm       레오 N이라는 사람                      87m   

02:40 pm       사랑의 정치                                68m

04:00 pm       소똥                                           73m

05:30 pm       블랙 골드                                   78m

07:00 pm       파산의 기술記述 ∙                        61m   

08:30 pm       할매꽃                                        97m   


5. 24.(목)    “반전 평화의 날”      

12:00 pm      조각난 이라크 +                           94m   

02:10 pm      내 사랑 블레인 +                          84m

04:10 pm      땅, 비, 불: 와하까 보고서              30m   

                  전쟁 기지 필요 없다 +                   46m

06:00 pm      황새울 방송국 들소리 <비>+          30m   

07:00 pm      폐막식          

                  올해의 인권영화상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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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5-19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건 많지만 흑;; 일요일 종교외출 밖에 시간이 없군...-_- 고스트나 동백아가씨가 보고싶은...

푸하 2007-05-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권과 종교의 지향하는 가치가 같다는 것을 잘 설명해주면 되지 않을까요? 옮겨 가겠습니다.

바라 2007-05-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그날 보러 갈겁니다.
 
 전출처 : hallonin >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정성일 ②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46250

 

정윤철: 당신이 자주 인용하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정성일: 그 문장을 김우창 번역으로 스무살에 읽었다. 이후 모든 판단에서 하나의 좌표가 되었던 말 중의 하나다.

정윤철: 영화 자체의 미학과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늘 대립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가.
정성일: 아니, 그 반대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누군가는 미학적으로 이해하고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미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하고,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다루고 있다.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임무 중의 하나는 창조적 중재에 있지 않을까. 오직 예술가들만이 창조적 중재에 나선다. 정치가들은 협상을 하고, 장사꾼들은 판매할 뿐이다. 누구도 중재는 하려 들지 않는데, 그것을 해결할 임무가 예술가들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그 중재의 기술을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

정윤철: 하지만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쁜 영화라고 하더라도 쓴 소리를 해야만 발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정성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영화에 관해 쓸 때는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 영화에 대해 ‘친화성’을 느끼거나 ‘적개심’을 느끼는 것. 내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 쓰는 것은 나를 무료하게 만들고, 뭐랄까 내가 망가지는 느낌이다. 나 말고도 비평가는 많으니까 다른 사람이 써도 충분하지 않겠나.

정윤철: 그렇다면 진짜 대중영화는 어떤가. 감독으로서 나는 평론이 계속 세상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는데, 감흥이 없더라도 잘 만든 대중적인 영화에 대해 글을 쓸 수는 없는 건가.
정성일: 나는 당신이 말하는 대중적인 영화도 좋아한다. 나는 지금도 홍콩무협영화를 좋아하고, 두기봉의 <흑사회>를 보면서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기봉의 영화가 왜 아직도 한국에서 개봉이 안되는지 너무 궁금한 사람이다. 혹은 전적으로, 정말 전적으로 김태희의 클로즈업이 보고 싶어서 <중천>을 보러 간다. 아니면 대중들의 관심이 궁금해서 <미녀는 괴로워>를 보기도 한다. 내가 완전히 고립돼서 내 취향만 고집하는건 아니다. 나도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관심사를 공유하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몸이 내 마음이 더 좋아하는 영화들에 끌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떤 평론가에게도 하루는 24시간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봐야 하는 영화와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의 시사회가 겹친다면, 당연히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한다. 하지만 <스윙걸즈> <박치기!> <훌라걸즈>같은 영화들을 보고 아 죽여주게 나를 울리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기는 한다.

정윤철: 느낌을 받기는 해도 그런 영화들은 다른 사람이 쓸 것이라는 건가.
정성일: 내가 보고 싶어서 보기는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와 에릭 쿠의 <내곁에 있어줘>같은 영화들만큼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감흥을 받아야 쓰고 싶은 말이 많아지지 별 느낌이 없는데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같은 주에 <훌라걸즈>와 <좋지 아니한가>를 봤다. <씨네21>에 연재하는 <전영객잔>을 써야했는데, 나는 두 영화 중에서 <좋지 아니한가>를 택했다. 쓸 것이 많고 궁금한 게 많고 질문할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칭찬은 안했지. 하지만 정성일의 관심권 안에 들었다는 생각에 묘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옛날 이장호 감독이 신상옥 감독 조감독을 할 때 5년 동안 감독에게 늘 이름 대신 야이 새끼야, 자식아 불려지다가 어느 날 녹음실에서 신상옥 감독이 ‘장호야~’ 하는 순간 선 채로 눈물을 주루륵 흘렸더랬는데 그런 건가...

정윤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평론가가 되어 인터넷에 평론을 쓰고, 별점이나 인터넷 평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있다. 이런 세태를 본다면 기존 영화평론이 관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필요가 절실해지지 않았는가. 대중영화라고 할지라도 그 최소한의 미덕을 발굴해주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평론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정성일: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읽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데 어떤 시도를 한들 읽겠느냐는 거다. 지금 인터넷 글쓰기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글이 약간만 길면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말로 제껴 버린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영화를 위해 영화비평이 대중에게 굴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평마저 대중에게 굴복한다면 그 다음엔 더 이상 방어선이 없다. 그 다음엔 남는 건 하나, 영화는 돈에 굴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비평은 한편으로 영화를 위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허우샤오시엔을 임권택을 데이빗 린치를 진지하게 사고하고 질문하는 방어선이 사라졌을 때, 그때는 방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 시장에서 어떤 생산적인 담론도 만들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면 때는 영화가 굴복을 해야지. 나는 그때는 굉장히 끔찍해질 것 같다.

정윤철: 모든 감독의 꿈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같이 잡는 것이 아닐까.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정성일: 그 시대는 끝난 게 아닐까. 영화는 태어난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정윤철: 질문을 마저 하자면 결국 비평도 대중성과 심도있는 분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가. 그런 시대도 이미 끝난 건가?
정성일: 나는 영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문제를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상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말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껴안는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나아가던 시대는 영화의 고전주의시대였다(3,40년대). 예를 들면 우리는 고전주의 회화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통과하며 그림에서 형상이 부서졌고, 그림은 보는 이에게 교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고 고전주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퇴행이다.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 100년이라는 역사를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는가. 영화도 관객에게 교양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네마테크적인 경험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게으르게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를 원시적인 상태로 돌려보내는 거다. 영화는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했고, 이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을 왜 퇴행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감독들이 왜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퇴행을 바라보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는 쪽이다.

정윤철: 영화는 꿈이지만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고다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가.
정성일: 그렇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중3때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꿈꿀 수 없다.

정윤철: 중3때!!! 본의 아니게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선악과를 깨문 격이다. 그러니까 신이 내린 거겠다.
정성일: 그분이 오신 거지(웃음) 나중에 다시 보니 프랑스 문화원에서 본 <기관총 부대>는 고다르 영화 중 에서도 그렇게 쇼킹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전까지 주말의 명화와 홍콩액션영화만 보면서 관습적인 영화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이야기에만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문득 이게 영화를 보는 방법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인데, 영화에서 카메라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영화를 볼 때면 언제나 카메라가 먼저 보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실 보통 관객에게는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행복한 거다.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고 인물에 몰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보는 건 고전적인 거고 나아가 원시적인 거다.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퇴행을 즐긴다. 어린애였던 시절, 짐승이었던 때를 그리워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퇴행 아닌가. 순간적으로 어린 애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중3 이후로 영화의 신이 내려 카메라 귀신이 보이는 이 박수무당에게 그 자신이 쓴 몇몇 평론에 대한 의문점을 물어보았고, 그는 진지하고 긴 답변을 한다.

정윤철: 당신은 무엇이 현대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이든 다른 나라 영화든.
정성일: 그것은 아마도 현대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거다. 현대가 컨템포러리가 될 수도 있고 모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현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놓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현대라는 문제를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까닭은 영화가 이미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대의 맨 끝자락에 도착했다. 회화에 모던이 도착했던 인상주의 시대에, 혹은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를 쓰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던 시대에, 영화가 시작됐다.

그 두 작품은 플래시백을 비롯해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했는데,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에서 모던이 끝날 때 영화 자체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고,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던이라고. 거기엔 어떤 동시성이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만일 영화가 박물관으로 간다면 모던한 것에 종말이 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변할지 우리는 예단할 수 없다. 오늘날 미술은 인스톨레이션의 개념이 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프레스코화 개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캔버스로 작업하는 미술은 과거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도 수많은 변화에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영화의 방식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우리가 모던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영화에 두 번째 혁명의 시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뤼미에르 이후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행의 시기가 도래했고 그 핵심은 디지털이다. 그것이 어떻게 혁신될지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누구나 영화감독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영화를 찍는데, 지금은 핸드폰만 켜면 영화감독 아닌가. 프레임과 지속시간과 주연을 결정하고 블로그에 띄어 상영을 한다. 너무나 편한 매체이기 때문에, 예전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이야기를 썼듯, 카메라는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는 점점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 큰 상을 받은 다음 충무로로 오고 있다. 한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3시간짜리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올해부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한편에 15억원씩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생기는데, 그걸 연출하는 감독은 훈련된 연출자가 아닐 수도 있다. 들뢰즈가 생전에 <리베라시옹>과 인터뷰를 했을 때 세번째 책 <디지털 이미지>를 쓰게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책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는 목격은 하고 있다. 혹은 그 시대로 들어왔다. 다만 우리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걸맞는 미학이나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정윤철: 현대적인 영화가 모던 자체라고 해도 일반 관객으로서는 내가 보는 영화가 쌍팔년도 영화인지 재탕영화인지 현대적인 영화인지 알아야할 것같다.
정성일: 반대로 질문하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정윤철: 나는 영화가 100년밖에 되지 않은 예술이므로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과 비교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인상파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왜 이따위 그림을 그렸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인상파가 자리를 잡게된 이유는 그전 그림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데 비해, 그러니까 예수의 승천이나 왕의 대관식이나 그리스 신화 등을 그렸던데 비해, 인상파는 그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나 해지는 인상이나 나무들을. 인상파 회화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느낌과 인상으로 받았고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나는 거기서 모던 회화가 시작됐고, 세잔이 나오고 입체파로 넘어오고, 미술이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시작됐던 영화는 그 다음부터는 뭘 그릴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약하더라도 캐릭터와 사람을 다룰 때, 그것이 모던한 영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플롯 위주의 영화가 아닌 캐릭터 위주의 영화,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뛰어드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기억이라는 것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다루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같은 영화를 보면 사람의 마음 속의 기억과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모던 영화의 시작을 대표한다고 본다.

이야기 자체는 약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드러나고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들, 그러니까 홍상수나 로베르 브레송처럼, 대충 찍은 것 같아도 인간의 캐릭터가 매우 또렷이 보이는 영화들 말이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영화들,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영화들이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정성일: 회화의 결론 중의 하나가 인상주의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상을 그리는 대신에 대상과 그림 사이에 있는 공기를 가지고 오고 싶어한 거다. 공기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공기에 떨어지는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뿐이다. 문제는 거기서 한걸음 나가는 순간 형상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세잔 다음으로 도착하는 인물은, 피카소와 뒤샹과 베이컨이다. 그렇게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하다보면 그다음부터 세상은 정확하게 몬드리안의 그림이 된다. 선과 면만 남는 거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것을 다루어 왔는데, 시간이라는 뇌의 스크린을 다루는 영화들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끝나갈때, 뇌의 스크린이 환상의 구조라고 말할때, 세상은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세상은 표면이 된다. 완전한 표면만 보인다. 나는 영화가 음악에 비해 유치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예술이라면 한없이 내려온 밑바닥에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다루고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찍었다. 사건이란 사실상 이야기고, 이야기가 되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역사란 사실상 어떻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매치 컷과 인비저블 커팅과 더블액션을 비롯한 수많은 방법들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액션을 포기했고, 그것은 사건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간으로 넘어갔지만, 영화가 시간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영화가 세상의 표면만 찍을 때, 그것은 힘을 잃어버렸다. 음악도 회화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즉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을 가지고 관객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테이크5>는 50분 동안 다섯개 쇼트로만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쇼트는 길을 보여주고, 두번째는 들판을 보여주고, 마지막 쇼트는 바다에 파도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세상의 표면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거기엔 시간도 없고 오직 세상의 표면이라는 것만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이 영화가 갈 마지막 길이라고 믿는 거다. 몬테이로가 찍은 <백설공주>는 대사는 들리지만 계속 검은 화면만 보인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한번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상은 두 가지라는 거다. 하늘과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 그 영화가 미학적으로 멀리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야만 하는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도 비평도 그것이 극영화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실험영화와 극영화가 있었지만, 나는 오늘날 남은 실험영화는 하나뿐인 것 같다. 현대의 실험영화는 광고다. 나머지는 다 그냥 영화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정윤철: 우리는 아무리 컴퓨터그래픽이 많고 제작비가 많아도 스필버그의 영화가 현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미래를 찍는다고 해도 그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헤피엔드로 끝나는 고전적인 영화다. 관객이 이 영화가 현대적인 영화구나 아니면 구시대적인 영화구나라는 것을 알면서 본다면, 영화를 보는 눈이 좀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관객들에게 현대적인 영화를 간단하게 정의해준다면.
정성일: 내가 보는 현대적인 영화는 피로를 찍은 영화다. 말하자면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를 살아가는 피로, 속도로 살아가는 피로 말이다. 나는 영화가 그것을 다룰 때 모던한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고다르와 레네와 허우샤오시엔과 린치를 볼때, 모던한 것을 살아가는 피로가 보인다. 피로의 감정, 피로의 인상, 피로의 감각이.

정윤철: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홍상수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모던한 것을 다루는 감독이 아닌가 했다. 모던의 특징은 피로함이라는 건가.
정성일: 그것은 영화가 주는 인상, 감각의 피로함이지, 조폭으로 사는 것의 피로함은 아니다(웃음). 거기에 현대영화의 핵심이 있지 않나 싶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피로하지 않은가. 지아 장커의 <소무> <임소요> <세계>에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의 피로함이 보인다. 심지어 그 무게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인 영화는 현대적인 영화가 되기 힘든 것인가.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피로감을 느꼈지만, 고현정이 차를 몰고 구덩이에 빠졌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해변을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다른 느낌을 보았다. 또다시 구덩이에 빠질 지도 모르지만,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고 달려나가는 인간의 뒷모습에서,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라는 느낌을 본 것이다.

정성일: 나는 정반대를 보았다. 그 차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유턴한다. 그 차가 갔던 길을 돌아올때 지옥으로의 영겁회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아마 그 차는 다시 구덩이에 빠질 거고, 고현정은 내년 봄에 다른 남자와 다시 해변에 오겠지, 하는.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강아지는 동일한 강아지인데도 호명만 계속 변한다. 나는 대상과 호명 사이의 불일치, 그 사이에서 겪어야하는 피로를 봤다. 의도인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좋지 아니한가>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피로하다. 천호진은 완전히 지쳤고 황보라도 지쳤고 박해일도 지쳤다. 그 모두가 피로감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정서는 <가족의 탄생>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무거운 총을 들고 돌아다녀야만 하는 금자도 피로한 거다. 그런 인물들이 모던한 영화 속에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윤철: 그것은 주제적인 측면이 아닐까.
정성일: 그런 것을 주제로 다루지 않는 영화도 모두 거기에 휩싸여있다. 아니 오히려 <우아한 세계>처럼 피로를 다루는 영화는 피로하지 않다. 그 영화는 즉시 장르영화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좋지아니한가>는 피로함을 찍으려고 한 영화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찍기 때문에 피로를 피해가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과 유럽의 영화들이 모두 그야말로 휩싸여 있다.

정윤철: 19세기에 고호와 세잔은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역사에 크게 자리 잡고 있고, 당시 잘나가던 살롱전 입상 화가들은 루브르 지하창고에서 썩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평론가의 역할은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 주목하고 있는 감독이 한국에 있는가.
정성일: 작년에 데뷔한 감독 중에서는 조창호와 신재인을 주목하고 있다. 두 감독 모두 주제와 형식에서 새로운 영화, 이제까지 없던 영화를 찍었다. 특히 신재인은 한국에서 본적이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정윤철: 중견감독은 어떤가
정성일: 임권택 감독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고, 정지우와 정윤철, 윤종찬, 임순례, 임상수의 다음 영화도 궁금하다. 박찬욱이 어떻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음 영화를 밀고나갈 것인가, 김지운이 어떻게 장르를 혁신할 것인가, 류승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계속 방어할 것인가도 궁금하다. 지금 갑자기 떠올렸기 때문에 놓친 이름이 많을 거다.

정윤철: 가장 먼저 언급한 세 감독, 임권택과 홍상수와 김기덕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성일: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영화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뭔가 머뭇거리고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무언가 앞으로 나아간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쫓아가려고 할 때, 비평가도 한걸음 나아간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쓰면 비평가도 퇴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그 세 명의 감독이 매우 소중하다.

정윤철: 한국영화의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친구>가 개봉한 다음에 당신은 그 영화의 성공에 어떤 사회적 무의식과 욕망이 담겨있는가를 물으며 지난 1년 동안 괴로웠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7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무의식과 욕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성일: <좋지아니한가>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했던 이야긴데, 나는 한국영화가 갑자기 가족이라는 화두에 왜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지가 매우 크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때려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맹렬하게 가족과 싸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좋지아니한가>는 이래도 좋은가, 이렇게까지 부서져도 좋은가, 라고 반문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가족이 힘을 합해 싸우고 나서 집을 향해, 밥솥이 있는 집을 향해 뛰어올때, 비루하더라도 참고 사는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물어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지아니한가>가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토록 가족과 싸워야만 하는지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노무현 시대에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스타는 문근영이었다. 문근영은 개인으로서는 착한 소녀지만, 저 소녀에게 스타라고 불릴 만한 힘이 있는지 의아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문근영에게 붙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였다. 왜 스타가 여동생이어야 하는가. 말하자면 가족주의인 것이다. 가족이 되어야만 스타를 사랑할 수 있다. 이 가족의 모습이 흉물스럽게 나타난 것이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계급과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인 삶의 질과 이해관계,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마법처럼 사라지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일치단결했을 때 보여준 무시무시한 하나 되기였다. 이것은 가족 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관객 1400만명이 본 영화 <괴물>이 딸을 죽여야만 끝날 수 있었을 때 무시무시했다.

딸을 죽이면 이 가족은 복원이 안된다. <괴물>에서 변희봉은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현서가 죽어서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현서가 다시 죽었으므로 이 가족은 다시는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 가족 부수기에서 나는 마법적 하나 되기와 국민 되기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가족을 부수면 정말 살 수 있어?’라는 질문을 <좋지아니한가>가 바인딩해서 되던진다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영화는 하나의 시대정신에 대한 무의식적인 메시지와 징후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 <괴물>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국민들은 여전히 하나 되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다.

정윤철: 5년 전에 진보적인 모든 세력이 노무현을 밀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정도로 에측불허의 행동을 했다. 적이라면 싸우면 되지만, 내부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니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고, 가치관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됐다. 그런 것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같다. 2,30년에 걸친 진보운동 끝에 노력하면 된다는 이성주의가 해피엔드를 맞는 듯했는데, 그것이 산산조각 나고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린 것같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탈역사화되고 흥미 위주로 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었던 거대한 사상,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으니, 어디에 기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 자체로 파고들자, 영화만 잘 만들자, 그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평가로서의 걱정은 없나?
정성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윤철: 돈이다.
정성일: 그걸 이데올로기로 말한다면?

정윤철: 개인이 잘 사는 것 아닐까?
정성일: 이런 생각을 해봤다. 각각의 시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70년대는 교양의 시대였다. 그때는 <사상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비롯한 많은 계간지가 나왔고, 지금과는 다르게 파워가 있었다. 그런데 교양과 지성의 단점은 입으로만 떠들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80년대는 행동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실천으로 나갔다. 그런데 정치의 결정의 다른 판본은 도그마이므로, 90년대는 다양성의 시대를 요구했다.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막시즘만 진보가 아니고 페미니즘과 이반과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이 문화의 시대의 약점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실용주의가 된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은 실용적인 게 아니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동산과 주식에 미친 것이다. 나는 이 실용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돗자리를 깔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웃음),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보일 것 같다. 실용주의 시대가 계속될지, 아니면 반작용이 나와 실용주의를 끝장내고 다른 시대를 불러올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선점할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매달려 질질 끌려갈 것인지 지켜보아야 한다. 비평가는 예언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평하는 것이 직업이다. 비평이라는 것은 시대에서 가장 뒤에 오는 것이다.

정윤철: 스크린쿼터가 축소됐다. 영화인들은 다양성을 위해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한다고 하지만 한국영화가 멀티플렉스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이제 스크린쿼터 축소는 기정사실화됐고, 앞으로는 극장과의 싸움이 남아있다. 우리는 생산자이고 관객은 소비자라면 극장은 유통사업자다. 영화를 관객과 만나게 해주는 극장은, 아무리 영화가 시대를 앞서가며 다양성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할거다. 그렇다면 투자자와 배급자가 같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에서 과연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는가라는 걱정이 든다. 교차상영같은 것들을 보면 극장의 파워가 너무 세진 것같다. 비평가에게 그런 것을 물어본다는 것이 애매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다.
정성일: 문제는 그걸 막을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를 끌어들이는 것.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 여우를 내쫓기 위해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성패가 달려있다. 더구나 한국은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는가에 따라 운영방식이 너무나 유동적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믿지만, 운영방식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는 우리들의 화두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나싶다. 계속 몰고 나가면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건 너무 근본적이고 위험하다. 그리고 일개 영화평론가가 이야기하기엔…(웃음)

정윤철: 당신은 십몇 년 동안 한국영화를 지켜보아왔다. 그 동안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답답하거나 안타까웠던 것은 없었는지 묻고 싶다.
정성일: 나에게 신기한 것은 한국의 프로듀서는 신인감독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들(프로듀서들)은 사실상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을 하고 싶은데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은 거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독은 일종의 카게무샤인 셈이다. 죽으면 까내고 또 까내고. 나는 모시고는 일을 못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된다면 프로듀서와 감독의 관계는 창조적인 관계가 되기 힘들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머리가 큰 감독들은 프로듀서를 제작부장처럼 쓰고 싶어할 뿐이고 의논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머리 큰 감독과 머리 큰 프로듀서가 만나 멋진 결과를 끌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창작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시스템적인 힘과 창조적인 의논의 대상으로서 프로듀서가 만나 변증법적으로 승화된 결과가 없는 것이다. 이건 제도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들이 이런 결과에 관해 반성적으로 물어봐야만 한다.

정윤철: <매트릭스> DVD에 메이킹 필름이 수록돼 있는데, 프로듀서인 조엘 실버가 헬기 위에 턱하니 앉아 인터뷰를 한다. 그는 50줄에 접어든 중견이다. 차승재 대표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한데(웃음), 현장에서 뛰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한국에선 웬만한 프로듀서는 삼십대에 이미 영화사를 차리지 않나. 물론 감독들도 많이 그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독은 현장에서 뛰는데, 프로듀서는 30대 후반쯤 되면 현장에서 보기 힘들다. 40대 감독은 가끔 있지만 40대에 현장에서 뛰는 프로듀서들이 얼마나 있는가. 감독은 신인이 많다고 하더라도 4,50대의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말이다. 현장 경험이 많은 프로듀서들이 많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한국영화는 그런 모습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성일: 나는 안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감독과 프로듀서가 의논해 예술적 창작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윤철: 이번에는 <오아시스>에 관해 묻고 싶다. 당신은 <오아시스>에 관해 <씨네21>에 기고한 매우 긴 글에서 그 영화는 환상을 만들고 있다, 장애인이 소재지만 가부장적인 이야기를 한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두 보잘것없는 인간들 사이에 생겨난 사랑 말이다. 홍종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과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여 영화 전체가 위험하고 문제가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정성일: 나는 한공주와 홍종두를 가련하게 생각한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사랑을 맺었으면 좋겠다. 내가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 영화가 환상을 만들어가는 구조다. 이야기는 사랑인데, 이야기의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다. 공주와 종두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그들을 맺어주는 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생산 구조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래서 나는 <오아시스>가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수준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오아시스>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 어떤 비극이 다시 올지는 모른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은 조짐을 보이며 끝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굉장히 많다. 행복의 조짐으로 끝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정성일: 나는 <오아시스>의 마지막을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종두는 감옥에 갔으니 별 네 개를 달고 나올 거다. <오아시스>는 모든 이야기를 한시간만에 빨리 끝내고 그 다음으로 갔어야만 했다. 별 네 개를 달고 나온 전과자가 공주와 행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가. 그 이야기가 있어야만 <오아시스>는 오아시스가 있는지, 너희는 정말 복지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그 직전에 끝난다. 종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더 망연자실한 것은 그 장면에서 공주가 바닥을 청소하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아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그 쇼트를 결합해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끝내는 것은 완전한 환상이다. 거기에서 완벽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우리다. 우리를 환상의 구조에 밀어 넣고선, 우리는 공주와 종두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고 있어, 우리는 그들을 동정했어, 라고 면죄부를 주는 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같은 사회에서 공존의 방식을 묻고 있는가. <오아시스>가 그저 전과자와 교육받지 못한 여자의 문제라면 거기서 끝나도 된다. 하지만 장애인을 끌어들이고 별넷단 남자를 끌어들였다면, 그들이 정말 이 사회를 견딜 수 있는가를 물어야한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을 생각해보자. 만약 <길소뜸>이 신성일과 김지미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멋있을 수 있었을 거다. 관객은 그들이 아들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길소뜸>은 모든 이야기를 한 시간으로 압축하고 1시간 5분만에 어머니가 쓰레기가 되어 있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저분한 아들을 싫어하고 경멸한다. <길소뜸>은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그들은 정말 잘 살았을까, 라는 공존의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공존의 정치학을 질문해야하는 시점에서, 왜 영화를 끝내버리는 것인가. 앞의 이야기를 한시간 만에 끝내고 종두가 감옥에서 나왔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앞의 이야기가 없더라도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을 던져야하는 순간 영화를 끝내는 행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왜 이야기를 꺼냈느냐는 거다. 나도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쪼개 성금을 보내지만, 그런 행동이 스스로도 역겹다. 면죄부를 받는 거거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는 것과 같다. 이 돈을 내면 죄사함을 받을 거야. 그런데 죄가 사해지는가.

정윤철: 이창동 감독은 가난과 힘든 삶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종두가 공주방의 창문을 가리는 나무를 잘라주듯이,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텐데.
정성일: 그렇다면 그것이 신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신파를 하면서 장애인을 끌어들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가장 비참한 데까지 끌어내어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체적 우위에 서게 만들고, 가련함이라는 감정을 자동적으로 끌어낸다. 만약 공주네 집에 돈이 무지 많아 유일한 문제는 장애일 뿐인데, 종두를 만나 같이 산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화가 날거다. 인간은 동정심을 만들어 내는 자동인형 같은 반응을 영화 안에 전제하고 있거든.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던질 때에 사랑은 정말 본질적인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의 다른 판본은 “나 너랑 하고 싶어”다. 모든 숭고한 말에는 외설적인 이면이 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숭고한 면만 있는 것처럼 진행하며 외설적인 이면이 습격해 오는 것을 온갖 방식으로 방어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영화가 매우 값싼 신파처럼 보이는 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걸작을 찍은 것처럼 얘기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윤철: 해피엔드를 싫어하는 건가.
정성일: 납득할 수 있다면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피엔드는 기만이다. 대부분의 비극이 기만인 것처럼. 절대적인 비극과 해피엔드가 가능한 것인가.

정윤철: 그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비극적인 엔딩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정성일: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야하니까.

정윤철: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하는 거겠다.
정성일: 정확하게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한다.

정윤철: 무식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윤리와 미학에 순위를 매긴다면.
정성일: 윤리가 가장 먼저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은 영화에 따라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만약 <오아시스>와 장애인 소재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정성일: 물론 <오아시스>가 훌륭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는 상업영화고, <오아시스>는 내러티브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 이창동이라는 감독의 미학적인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아시스>는 나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오아시스>에 관해 그렇게 길게 썼던 것도 그 영화에 미학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치적이고 윤리적으로 동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 거다.

정윤철: 나도 <오아시스>의 엔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은 종두가 강간을 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쇼트를 교묘하게 배치했다고 썼는데, 우리도 알다시피 종두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강간을 하고 나서도 집에 가서는 엄마하고 묵찌빠를 하면서 노는 거고.
정성일: 내 얘기가 그거다. 종두 같은 인간은 언제든지 공주를 강간할 수 있다.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을 왜 그렇게 붙여놓았느냐는 거다. 마치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처럼. 어떤 남자가 강간을 하고 집에 가서 엄마하고 묵찌빠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강간신 다음에 이걸 붙여놓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종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붙여놓은 편집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시네마틱한 부분이다. 공주가 종두에게 전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사이에 옆집 부부가 공주 집에 와서 섹스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오빠 부부가 공주를 장애인 임대 아파트에 데리고 가서 함께 사는 것처럼 거짓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가. 물론 그런 인간은 무지하게 많다. 하지만 강간과 묵찌빠와 섹스와 오빠라니. 그 다음에 공주가 전화 거는 장면이 나오면 관객은 자동적으로 공주도 섹스하고 싶은 거야, 라며 강간을 용서하게 된다. 그런 편집은 너무나 비윤리적이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영화에서 이미지는 전적으로 운이다. 그 순간 바람이 불 수도 있고 해가 비칠 수도 있고 구름이 지나가며 얼굴에 그늘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구름이 지나간 다음에 한 여자의 얼굴이 붙는 것은 백만분의 일의 우연도 아니다. 나는 <오아시스>가 그런 식으로 장면을 붙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세포 소녀>에 관한 비평도 썼는데, 이런 영화까지 정치적인 기준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나는 조금 그랬다.
정성일: 나는 그 두 편의 영화가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윤철: 어떤 면에서 정치적이라는 건가.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을 비판했는데, 그처럼 판타지적인 엔딩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보수성을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정성일: 왜 판타지로 피해갔느냐는 거다. 판타지가 동원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오아시스>와 똑같은 궁금증을 품게 됐다. 그런 엔딩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엔딩 다음에 왜 정신병원이 나오는 에필로그를 붙였을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문득 질문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정신병원인가 정신병인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 에필로그는 구조로만 따지면 전혀 필요가 없는데, 무엇을 매개하는지 답을 피하기 위해 구태여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은 질문을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정윤철: 정신병인지 정신병원인지 하는 질문이 왜 중요한 것인가.
정성일: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문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목표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윤철: 누가 보더라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영군과 일순이 주인공이고,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가 메인 플롯으로 보이지 않을까.
정성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박찬욱의 재능이고 그 안에 알레고리를 짜넣은 것도 그의 솜씨다. 하지만 그가 너무 나이브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윤철: 그들이 맺어지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인지.
정성일: 그건 상관없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둘만의 이야기로 끝나버리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영군과 일순을 비롯해 이 병원의 모든 인물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것은 이 병원이 한국사회의 압축판이라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병을 안에 숨기고 살아가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걸 뒤집어놓았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끝을 낼 것인가, 환상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할 것인가,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신병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러니까 이건 정신병원을 찍은 걸까 정신병을 찍은 걸까라고 질문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박찬욱은 정치적인 것을 피해가고자 마지막에 그런 질문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왜 마지막에 패러다임을 완전히 지우는가. 박찬욱은 그것이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아니었다. 도대체 1시간 40분 동안 내가 보았던 영화는 무엇이었는가. 이 정신병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남한은 이 수많은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박찬욱은 질문을 바꾼 것이다. 그것은 기만이다. 나는 문득 박찬욱은 용기가 없었거나 엔딩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엔딩을 찾지 못했다고 얘기하든지, 나는 그렇게까지 밀고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얘기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전체와 에필로그, 두개의 신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쪽에서 에필로그를 볼 것인가, 에필로그 쪽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 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 <괴물>이 그런 영화다. <괴물>은 세 개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와 영화 전체, 그리고 송강호가 어두운 매점에 앉아 눈을 희번덕거리는 마지막 신. 의미심장하게도 이 세번째 신은 한강인데도 세트에서 찍은 장면이다. 한강이 나오는 모든 장면을 진짜 한강에서 찍었는데, 이 장면만 세트였던 것이다. 그순간 세상은 시뮬라크라가 되고, 영화는 질문한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정윤철: 당신은 <다세포 소녀>가 프롤레타리아의 사랑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다세포 소녀>는 만화같고 키치적인 영화다. 물론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를 아무 생각없이 쓰기는 했다. 하지만 코미디조차 그렇게 보아야만 할까.


정성일: 원작만화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재용은 왜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그 소녀를 택했는가.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드러내자면 너무나 많은 인물이 있었다. 아니면 만화처럼 인물을 옮겨다닐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영화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고정점을 두고 있으므로, 그녀의 퍼스펙티브로 영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이 영화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성적 취향에는 그토록 자유롭고 관대하면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각색이었다. 영화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나오는 하나의 조합이다.

정윤철: 코미디는 장르적인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씹는 맛에 보는 영화인데 너무 정색을 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정성일: 코미디를 만들 때는 풍자의 관대함과 풍자의 날카로움이 있다. <다세포 소녀>가 풍자의 관대함을 성적 자유에 맞춘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풍자의 엄격함이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맞춰진 것에 관해선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세포 소녀>를 이야기하면서 완성도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성적 취향에는 이토록 관대하고 판타지를 투영하는 영화가 계급 문제에 있어서는 왜 이렇게 현실적인가를 묻고 싶다.

정윤철: 코미디나 대중영화에 있어서까지 그렇게 정치적인 것을 고려해야만 하는 걸까.
정성일: 나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핵심이 되는 질문은 이런 거다. 만약 민주주의를 다룬다면, 그걸로 무엇을 얻고 싶은 건데? 예를 들면 누군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스라엘에 군사자금을 대겠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지만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 반복적인 행위가 결국엔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행동이 된다. 그것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정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거다. 나는 정치가 너무 싫다고 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놀러가는 것도 결국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정윤철: 선거를 피하는 것은 기회를 없애는 거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떤 기회를 만드는 것이 기에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정성일: 수많은 이야기와 인물 중에서 하필 그것을 선택한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좋지 아니한가>에서 천호진이 굳이 학교 선생님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학교 교사인지 직장에 다니는지 자영업을 하는지에 따라 의미의 방점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효과마저 비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펙트를 따지자는 거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의미가 없다. 의도를 묻는 것은 예술을 창백하게 만들 수 있다. 의도는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가 가져오는 이펙트에 대해선 물어야한다고 믿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수적이라고 그의 영화까지 보수적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물론 그의 영화에는 많은 보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이펙트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가 공화당에 찬성한다고 하여 그의 영화도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건 바보짓이다. 마찬가지로 감독이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진보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던 <아멜리에>에 대한 키노의 기사를 보여준다.

<아멜리에>의 열기가 계속되자 ‘리베라시옹'지는 정치가들에게 입장을 물었다. “순진함이 신선했다”고 한 우익 장관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을 읽어낸 파리 공산당 부시장까지 반응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좌익 공화 단체 ’제네라시옹 레퓌블리끄‘도 “민중을 진솔하게 그렸다”고 영화를 칭찬했다. 반면 카간스끼는 <아멜리에>의 감상적 파리묘사를 국민전선 선전 비디오 같다고 비난했다.’리베라시옹‘도 호평은 했지만 한 기자는 주네가 가장 저급한 ’프랑스다움‘을 이용했다는 암시를 남겼다. “아코디언 음악, 서민 구역, 프랑스기...섬뜩하다. 프랑스는 이런 과거를 가진 별 볼일 없는 국가일 뿐이다.”
<아멜리에>의 내용을 생각하면 이런 분석은 과민반응이다. 찬반 양 진영 모두 영화가 코미디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코미디는 과장과 특정한 연기를 통해 사회현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는, 따라서 이념적으로 양면적인 장르다. 코미디는 소위 진지한 장르가 무시하는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동시에 종종 보수적 결론으로 그것을 무마한다.
(..중략..)
비시정권하에서 나치 협력이란 치욕의 역사를 겪은 프랑스인들은 전후 무엇이든 그쪽으로 해석할 만큼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아멜리에>는 따라서 저항이냐 협력이냐 하는 싸움이 전개되는 최신 전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비시 정권하에는 사실 저항에서 무관심, 비겁, 암시장 등쳐먹기, 파시스트 협력 등 다양한 입장의 행동들이 존재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늘 그렇듯이 백퍼센트 좌파, 백퍼센트 우파 행동이란 건 없다. <아멜리에>에 대한 이런 해석은 상관없는 작품에서 부당하게 역사적 경험을 읽어내는 것이다.
-키노 2001년 1월호 SIGHT & SOUND 기사 번역문 중.

정윤철: 단 한순간만이라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잊고 즐기고 싶은 욕망도 있지 않나. 그래서 영화를 보는 거고.
정성일: 그 순간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자살해버리는 거다.

정윤철: 하지만 살다가 힘들면 죽고 싶듯이 영화를 보며 가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정성일: 어떤 인간에게도 생명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사회적으로 자살하겠다고 하는 순간 사람은 훨씬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자기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윤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싸움은 너무도 지난한 것이다.
정성일: 1969년 동경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던 전공투 극좌파 학생들이 잡혀갈때 누군가 벽에 낙서를 남겼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하는 싸움이 있다고. 그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다.

정윤철: 요즘 세대는 책읽기도 싫어하고 인터넷 20자평에 모든 영화의 운명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평론을 써야하는데 어떤 전술을 택할 것인가.
정성일: 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런 태도가 더욱 만연했으면 좋겠다. 20자평도 귀찮아, 나에게 10자평만 줘, 이렇게. 그렇게 된다면 다음 세대가 지금을 비웃으며 반작용을 보이지 않을까. 80년대에는 모두 정치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90년대에 타르코프스키와 키아로스타미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이 몇 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지만, 그때 조금 과하기도 했다. 그래서 반발이 일어났다. 나를 즐겁게 해줘. 나는 지금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계속 방관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윤철: 당신은 <키노>에 글을 쓰면서 <스바키 산주로>에서 주인공인 산주로가 아이들을 뒤돌아보며 던지는 마지막 장면의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바보 자식들,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인 거야, 너희들이 어른이라구! ” 그렇다면 평론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정성일: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부산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 와서 했던 말이다. 그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에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수하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야하는 필수과목이 있었다. 쇼트 나누기였는데, 앙겔로풀로스는 고전적인 편집방식이 너무 싫어서 선생이 요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콘티를 짰다.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앙겔로풀로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발휘하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던지 학교를 나가라. 앙겔로풀로스는 밤새도록 고민하며 물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원하는가 그리고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리고 학교를 떠나 결국 그리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도 묻고 싶다. 내가 글쓰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도 나를 원하는가. 어떤 영화는 글쓰기를 요구하지만 어떤 영화는 감흥이 없다. 완성도를 떠나 아무런 화학작용이 없는데도 글을 쓰는 건 자신과 영화 모두를 망가뜨리는 거고 쥐어짜는 거다.

정윤철: 마지막 질문이다. <키노>를 떠난 후 감독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완벽한 영화는 아직 찍지 않은 영화라고 한다. 언제쯤 완벽하지 못한 영화를 우리에게 보여 줄 생각인가.
정성일: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은 아니다. 그런 건 유치한 20대에나 가능한 생각일 거다. 나는 책상에서 혼자 영화를 하는 것에 한계에 부딪쳤다. 생각이 나가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책을 보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도, 내게 남은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더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 나는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한 숏과 신을 놓고 나눌 것인가 붙일 것인가, 나누는 것이 결단인가 나누지 않는 것이 세상에 순응하는 것인가, 토론하고 싶다. 나는 세상과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아직 욕심이 있고 더 멀리 가보고 싶다. 내 생각을 더 멀리 밀고 나가고 싶다. 학생 시절에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영화에 대해 쓰는 것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에 관해 토론하고, 어떻게 찍을까 붙일까 나눌까 고민을 하는 거였으니까.

정윤철: 마지막으로 <씨네21>에 바라는 바는 없는가.
정성일: 이건 아주 특별한 표현이다. 필사적으로 버틸 것. 나는 <키노>를 해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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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머릿속에 피어난 키워드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종교. 다른 하나는 유교. 이미 정성일의 태도가 종교적인 그것이라는 것은 진작에 확인되던 바였다. 그러나 그 태도 안에서 유교적 흔적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득 이 영화비평가가 종교가가 되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자체도 적당히 비의적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가 세례를 맞은 건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문화원이었다. 어쩌면 그의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불행해질지도 모를 결론이다.

더해서 인터뷰를 읽다가 그가 [보랏]에 대해서 어떻게 평했을지가 궁금해져서 찾아봤는데 세상에, 굉장한 호평이었다. 이정도의 반응은 좀 의외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고전주의자인 그를 재확인할 수 있는 바이기도 했다. 이해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야 할 당위성을 얘기하는 그가 [보랏]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어쩌면 신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보랏]은 오지게 재미가 없었던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정치성이나 그 모든 주변적인 것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바로 그 영화 자체의 진부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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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llonin >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정성일 ①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46249

 

그의 글은 스타일리쉬하다. 수많은 인용, 괄호치고 설명하기, 문장의 도치, 접속사 없애기, 단문의 연속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인용은 영화의 플래시백에, 괄호치기는 나레이션에, 접속사 없애기와 도치 및 단문은 빠른 편집과 점프컷 등에 해당된다. 이런 영화의 대가는 왕가위다. 그리고 그는 왕가위를 굉장히 좋아한다.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시립미술관에서 그를 만난다.

정윤철: 일단 트뤼포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겠다. 그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인터넷 별점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씨네21> 기사를 보는 것이고, 마지막은 정성일의 글을 읽는 것이다(웃음).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신의 글을 많이 뒤적거려봤다. 그런데 굉장히 옛날에 썼던 글이 있더라. 성균관대 3학년 때 쓴 영화평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정성일 학생의 글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려웠다(웃음). 놀랍기도 하고 사람은 정말 바뀌는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대체 영화는 언제부터 좋아했고 글은 언제부터 썼나.
정성일: 프랑스 문화원에 다니면서 내가 본 영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정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일단 어린 나로서는 영어자막을 읽기가 힘이 들었고,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씨네21>도 인터넷도 없고, 참고할 어떤 자료도 없던 시절이었다. 불어를 모르니까 내가 본 영화의 감독 이름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너무 이상한 느낌이 있으니까 그걸 머릿 속에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윤철: 그래도 영화잡지는 있지 않았나
정성일: <스크린>도 나오기 전이었다. <스크린>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야 창간됐다.

정윤철: 대중적인 자료는 전혀 없었으니 혼자 글짓기하듯 쓰는 셈이었겠다.
정성일: 어떤 글도 참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고마웠다.

정윤철: 그렇다면 독자적으로 초식을 닦았다는 건데,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프랑스 문화원에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형이 있었다든지 해서,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지.
정성일: 내가 장남이니까 형은 없었고, 어머니가 영화관에 데리고 갔다. 내가 돈을 내고 혼자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4학년 때 부터다. 주로 재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많이 봤다. 주로 쇼브라더스와 장철의 무협영화들을 미친 듯이 봤는데 성북구 일대 영화관은 안 다닌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라디오 영화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자주 나오는 음악 중의 하나가 영화 <금지된 장난> 주제곡인 ‘로망스’였다. 이 영화가 죽인다는데 볼 수가 없는 거다. 그때는 비디오도 없었고, TV에서 방영되는 <명화극장> 같은 것도 모두 할리우드 영화였으니까. 1974년 즈음인가, 좌우간 내가 중3일 때, 우연히 신문 구석에 있는 작은 기사를 보니 프랑스 문화원에서 <금지된 장난>을 상영한다는 거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서 찾아갔다. 막상 갔더니 <금지된 장난>은 다음 회여서 엉뚱한 영화를 먼저 보게 됐다. 그게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였다. 

정윤철: 고다르도 알았단 말인가? 벌써?
정성일: 알 리가 없지. 중3인데. 좌우간 <금지된 장난>은 기대했던 것보다 전혀 심금을 울리지 않았고 왜 좋은 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관총 부대>는 미학적으로 어떤지 어린애가 알 리가 없었는데도 쇼크가 너무 컸다.

정윤철: 어떤 영화였길래...
정성일: 제목과는 달리 군대 영화는 아니다. 배경은 현대인데도, 시골에 살던 두 청년이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입대하라는 왕의 명령서를 받고, 전쟁이면 재미있겠다, 그러면서 전쟁에 나가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작은 전투들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찍어서 풍자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쇼크를 받았던 이유는, 나는 이게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운데(웃음), 영화를 ‘카메라로 찍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거다. 화면에서 카메라를 본 거다. 그때까지는 주인공과 이야기만 쫓아갔었다. 그런데 <기관총 부대>를 보다가 문득 “아,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라는 존재를 알게 된 거다. 그렇게 영화에서 카메라라는 존재를 발견한 다음부터 내 안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땐 정확하게 몰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 태도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에 몰두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주인공을 쫓아가지 않았다. 영화라는 것은 카메라를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윤철: 카메라의 존재감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영화에 몰입하기가 어려웠겠다.
정성일: 나를 밀쳐낸 거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동화가 안 되는 거지.

정윤철: 그런데 고다르는 그런 점을 의도하는 감독 아닌가. 그런 걸 모르고 그의 영화를 보았는데 도 그런 점이 느껴지던가.
정성일: 만약 고다르가 브레히트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등의 사실을 알고 봤다면 오히려 쇼크를 안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영화에 대한 교양이 전혀 없는, 영화라고는 오직 홍콩영화와 액션영화와 주말의 명화극장에 홀려있던 애한테, 무방비 상태의 애에게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소외 효과를 바로 느끼게 한 거다. 그때부터 영화를 보고 정리를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3 때였다. 그때 <금지된 장난>만 보고 돌아왔다면 그것을 깨닫기까지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정윤철: 중3때 프랑스 문화원이라...대단하다. 당시 그곳의 최연소 관객이었겠다.
정성일: 그땐 이상하게도 그런 애들이 몇 있었다. 중3 마지막 무렵, 11월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예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아주 특별한 학생은 아니었다.

정윤철: 듣자하니 학창시절 때 한가닥 했다는데? 주먹 좀 썼다는 게 사실인가?
정성일: 철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 그랬는데, 별 얘기 다하게 되네(웃음) 그때 이미 지금만큼 키가 커서 70명 중에서 65번, 64번 이랬다. 이미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고, 집으로부터 풀려나기도 했고, 뒤에 있는 애들이랑 어울리다보니 그렇게 됐다. (주먹을 들어보이며) 싸움이란 건 처음에 사람 한번 때리기가 힘든 거지, 그 다음부턴 때리는 건 일도 아니게 된다. 처음에 주먹 날리는 건 힘들었다.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한번 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질 것 같으면 의자를 들어서 내리치고, 상대에게 겁을 주려고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한 1년 반을 진짜 막 살았다. 나는 지금도 싸우다가 접질린 오른쪽 손이 완전히 안 젖혀진다.

놀랍게도 그의 주먹엔 아직도 굳은살이 박혀 있다. 후진 영화를 보고 감독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마다 요즘도 집에서 혼자 벽을 치는 걸까?

정윤철: 프랑스 문화원에 다니면서 그랬다는 건가.
정성일: 아니, 중학교 1,2학년 때였다.

정윤철: 고다르를 만나기 전이었군.
정성일: 그때는 홍콩영화만 봤으니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일치를 한 거다(웃음). 집안이 어려우니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그런데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학교 2학년 마지막 날이었는데 친한 친구가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갔다가 붙잡혀서 애들 앞에서 뺨을 맞았다. 근데 이 녀석이 우리 아버지도 내 뺨을 안 때린다며 선생을 때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저건 아니다 싶었다. 그러고 3학년에 올라갔더니 담임이 불러다가 너 걔랑 제일 친하다며, 나는 때리지 마라, 그러더라.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좌우간 그때 이후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뒤에서 놀던 애들하고 떨어졌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내가 무서운 거야. 1, 2학년때 모습을 봤으니까.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고립이 되다 보니 더욱 영화에 몰입을 했다. <금지된 장난>은 중학교 1,2학년 때부터 궁금했던 영화지만, 신문에 난 상영 기사를 보는 순간 점화 되는 느낌이었다. 피리 부는 사내에게 끌려가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홀리듯 프랑스 문화원에 갔다. 그런 식으로 문화원 다니면서 영화 보고 나서 혼자서 글을 계속 쓰다가 대학에 갔는데, 워낙 친구들 사이에서 영화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었고 과도 신문방송학과이다 보니, 학보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한번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영화평을 쓰기 시작했다.

정윤철: 연극영화과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건가.
정성일: 그것이 정윤철 감독 세대와 내 세대의 차이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보고 있던 TV를 때리더니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계속 TV를 보시더라(웃음). 그때는 영화과에 가는 것이 인생을 망치는 거였다.

정윤철: 우리 때도 비슷했다. 내가 90학번인데 80년대 후반은 1, 2억 가지고 한국영화를 만들 때였다. 전혀 비전이 없었다.
정성일: 그리고 영화과에 간다고 해서 영화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학에 간 다음에 영화수업을 너무 듣고 싶어서 모대학교 영화과에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어떻게 된 놈의 학교가 맨날 휴강이야(웃음) 그렇게 한 학기를 다니다가 좌절하고 다시는 가나봐라 하면서 그만뒀다.

정윤철: 대학 때도 계속 문화원에 다녔을 텐데,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일이 있었나.
정성일: 대학에서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큰 도움이 됐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전양준 선배가 1년 과선배였고,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한상준 선배도 있었고, 독일 문화원에서는 강한섭 교수를 만났다.

정윤철: 당시 독일 문화원파와 프랑스 문화원파가 경쟁을 했다던데.
정성일: 그런 건 아니었다. 궁금하다면 얘기해보겠다. 그때 프랑스 문화원이 활동을 잘하니까 독일 문화원도 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문화원장이 황당무계한 공약을 내걸었다. 독일 문화원 산하 서클에서 활동을 하고 독일 문화원에서 요구하는 어학시험을 통과하면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속아서 약 400명이 한꺼번에 독일 문화원으로 몰렸다. 하지만 유학은 한명도 못갔다. 80년 5월 독일 문화원 산하 헤겔 연구회와 카프카 학회가 광주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서클이 완전히 끝장났고, 원장은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 사람이 약간 좌파였던 것이다. 공약을 내걸었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니까 공약도 무용해졌다.

정윤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처럼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었나.
정성일: 전혀 아니었다. 일단 공부를 하고 싶었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는 도제 제도가 있어서 연출부를 안 하면 감독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출부 임금이라는 것은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다. 집안이 파산을 했기 때문에 나는 소년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정말 충무로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도 쓰고, 서울극장 기획실장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집안을 먹여 살려야 했다. 번역도 하고 필명으로 원고도 썼다. 창피해서 차마 필명을 대지는 못하겠는데 여러 잡지에 썼다. 그런데 사람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이 잘 풀릴 때가 있지 않나. 글이 꽤 인기를 얻어서 여기저기서 청탁이 들어왔다.

정윤철: 그때는 전문비평이 아니고 영화감상 정도였나.
정성일: 지금처럼 쓰면 거기선 안 받지(웃음). 그러다가 <말>지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가 당신 글을 읽었는데 영화평을 좀 써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정윤철 감독의 대학 시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도 좋은 세상이 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어서 <말>지에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말>지는 수배자가 아니라면 본명으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배자는 아니니까(웃음) 그러면 알겠다고 했다. 스물여덟살 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말>지 최장수 필자지. 내가 <말>지 편집장 일곱 명과 담당기자 열 두명을 갈아치웠다(웃음). 그 글을 보고 <스크린> 경쟁지를 만든다고 창간된 <로드쇼> 편집장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이후는 지금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정윤철: <로드쇼> 편집장을 맡으면서 우리가 아는, 공식적인 수면으로 드러난 정성일의 인생이 시작됐다. 나도 <로드쇼>를 본 기억이 나고 이 사람은 누군가 궁금해했다. <로드쇼>를 하다가 <키노>를 만들게 된건가.
정성일: <로드쇼>는 92년에 그만두었고, 그해에 <정은임의 영화음악>에 출연하고 <한겨레신문>에 영화평을 썼다. <로드쇼>를 하면서 열패감이 있었다. 하고 싶은 영화저널을 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30대였다. 그래서 <키노>를 만들게 된거다.

정윤철: 모델이 <카이에 뒤 시네마>같은 잡지였나.
정성일: 그렇다. 하나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영화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인터뷰가 가장 중요한 비평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키노>는 모든 감독, 심지어 단편영화 감독도 인터뷰했다. 결국 최선의 비평은 인터뷰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쓴 영화평은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영화잡지가 하는 일은 기록하는 거다.

정윤철: 그 때문에 임권택 감독과도 그렇게 집요하게 인터뷰를 한 건가. 임권택 감독과 인연을 맺은 건 이장호 감독이 당신을 임권택 감독 책자 필자로 섭외하면서였다고 했는데.
정성일: <씨네21> 598호에 실린 <천년학> 관련 에세이에 이미 썼는데, 내가 임권택 감독을 처음 발견한 건 대학교 1학년때 <족보>를 보면서였다.

그때 황석영을 중심으로 민중문학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학에 가기 전에 나는 한국영화를 너무 경멸했다. 시네마테크도 없고 영상자료원도 없고 글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한국영화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독 이름도 모르는채 <족보>를 봤는데, 즉각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왔다.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과 편집 방식이 너무 다른데 굉장히 아름다웠다. 이게 뭘까, 극장 밖으로 나와 감독 이름을 보니 임권택이었다. 그때부터 그 사람 영화를 줄기차게 보기 시작했다. 신기했던 것은 임권택 감독을 더 알기 위해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전혀 없더라는 것이었다. 유현목과 김기영, 이만희, 신상옥, 하길종 등은 수많은 자료가 있는데 말이다. 만약 임권택 감독을 알면 한국영화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장호 감독은 마음 속으로 유현목이나 김기영 감독 등을 기대했을텐데 내가 임권택 감독에 관해 쓰겠다고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충무로스럽다고 생각했겠지. 대학을 졸업하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 애가 와서 책을 만들 때는 기대하는 게 있었을 텐데 갑자기 상업적인 감독의 이름을 대니 말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임권택 감독을 <만다라>가 개봉한 86년 11월 둘째주 화요일에 처음 뵙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정윤철: <족보>는 개봉한 영화였나.
정성일: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개봉관을 못 잡았고 재개봉관에서 개봉한 걸 봤다.

정윤철: 그게 언제였나.
정성일: 79년이었다. 그이후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등을 계속 봤는데, 영화들이 서로 너무 다를 뿐만 아니라, 매번 일취월장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정윤철: <족보> 이후 100번째 영화인 <천년학>까지 왔는데, 그사이에 있던 영화들을 모두 본건가.
정성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모두 봤다. 아시안 게임 기록영화까지 봤으니까. 그 영화는 프린트 자체가 사라졌다.

정윤철: 한 거장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아온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느낌은 무엇이었나.
정성일: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운 가장 큰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아버지와 불화의 시간을 보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너무 냉정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인생을 들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그것도 호남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가출을 했고 떠돌면서 20대를 보냈던 사람, 수전증까지 걸려서 내가 정말 살기는 살겠나 이러면서 살았던 사람을 말이다. 임권택 감독은 열여덟에 짐꾼을 했는데, 사지가 너무 아프니까 잠을 자지 못해 밤마다 깡소주를 마시다가 수전증에 걸렸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영화를 만드는 걸 보면 건강한 거지. 어쨌든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삶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그가 왜 그토록 나에게 냉정했고 그런 요구들을 했던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임권택 감독 연세가 우리 아버지와 딱 한살 차이다. 문득 내 아버지의 삶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정말 힘겹게 버티어 여기까지 온 모습이. 그러니까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이 내게는 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화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임권택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인터뷰를 통해 나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정윤철: 어떤 치유의 과정을 겪었겠다. 어찌 보면 임권택 감독은 당신의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했던 아버지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정성일: 그렇다기보다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산다는 것에 관한 문제였던 것같다. 꼼짝없이 동시에 체험해야만 했으니까. 1950년대 한국전쟁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폐허 속에서 살았고, 해방 이후 좌우대립을 겪었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 또한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홀로 버티고 살아갈 수밖에 없던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자식들에게 보여준 모습이라는 것은 그 삶의 결과였을 것이다.

정윤철: 이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겠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하는 편이지 않은가. 당신의 비평을 보면 저렇게 많은 책과 영화를 어떻게 보나 놀라게 되는데, 비결이 있는 건가. 잠을 자지 않는다던지, 하는 소문도 돌고 있는데. 아, 그리고 <키노> 시절을 잠깐 떠올린다면, 그 몇 년의 세월, 행복했는가.
정성일: 행복하기도 했고 불행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좋은 동료들과 좋은 책을 만들어서 행복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기자들은 나중에 편집장이 된 이연호 씨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다들 진심으로 일을 했다. 그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불행했던 건 시자하자마자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려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끝내 해결이 안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잡지라는 것을 만들면서 그런 문제에 부딪치면 하중이 편집장에게 걸릴 수밖에 없다. 편집장이 일정 정도 책임이 있는 문제기도 하고. 시작하고 딱 1년 동안만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웠지 그이후로는 굉장히 힘들었다. 아, 책과 영화를 많이 보는 비결은, 그냥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정윤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가.
정성일: 원칙이 하나 있다. 내가 군대에서 맹세한 건데,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은 반드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하고의 약속이다. 두 번째 약속은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이다. 때로는 단상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긴 글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세편이상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집에서 DVD를 보든 시네마테크에 가든. 그것이 내가 스물 두살 이후 지키고 있는 나와의 약속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시네필이어서 영화만 계속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 바보가 된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말이다. 반면 글을 안 쓰고 책만 계속 읽는 사람은 머리가 잡다해지는 것같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재하는 것, 내가 표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정윤철: <키노>가 창간되던 시기는 냉전이 끝나고 포스트모던적인 사조가 밀려들 무렵이었다. 영화에 있어서도 우리가 시도하지 않았던 사조와 담론들이 소개됐다. 독자에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키노>는 그런 것들을 소개하는 거의 유일한 잡지였다. 나도 <키노>를 많이 샀는데,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이름들인 보드리야르, 들뢰즈, 푸코 등을 인용하곤 했다. <키노>는 어떻게 보면 최초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 이론 등을 끌어들여 영화를 연구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방법을 택하게 됐나.
정성일: 책을 읽다보면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소개하게 된다. 우리는 최신 철학을 소개해야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동시대적인 사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있었다. 왜냐하면 <키노>는 혹은 나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거지 과거에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그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한다.. 내가 명석하다면 그 답을 혼자 생각했겠지만 그 정도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 자꾸 다른 사람 견해를 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동시대의 철학자와 미학자, 소설가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서로 접속을 하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고전영화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대를 사고하기 위해 현대영화도 보고 동시대 철학책도 읽지 않나.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이 시대에 살아가기 위한 ‘좌표’를 얻기 위함이다. 칸트와 헤겔과 스피노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을 읽으면서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좌표를 얻기란 쉽지 않다.

정윤철: <키노>가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키노>에서만 다루는 현대 철학과 다른 이론들이 어렵고 낯설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이 잡지는 왜 이런데 관심이 있을까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불어도 많이 쓰고 소제목 이름도 어렵고(웃음). 죄우간 아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하면서 호기심도 생기는, 뭐랄까 어떤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연관을 찾을 수 있지만 당시엔 지식이 없었으니까.
정성일: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탓도 있다. 효율적으로 전달을 하고, 전략을 세워서 배치도 잘 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선 미숙했다.

정윤철: 당신은 그때부터 색이 확실했고 지금도 호불호가 명확하다. <키노>에서 그런 가치관이 확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정성일: 나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는 직관이 포함되어 있고, 논리적으로 따지는건 사기라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이 영화가 좋다 싫다라고 몸이 반응을 한다. 당신도 직관이 오지 않나. 그런 직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관과 경험과 세상에 대한 태도의 총체적인 반응이다. 그대신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이런 걸 묻게 됐다. 나는 이 영화가 싫다, 그러면 왜 싫은가. 그런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비평가로서 어떤 영화에 대해 가지는 자신의 태도는 중요한 것이다.

정윤철: 어쨌든 자기 색이 뚜렷했다.
정성일: 새로 기자를 뽑을 때 난 먼저 <키노>는 편견이 있는 잡지라고 말했다. 우리는 균형 잡힌 사고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싫다면 다른 잡지를 선택해라,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좋아할 거고 우리가 싫어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다고. 만약 영화잡지가 <키노> 뿐이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당시 <씨네21>을 비롯한 너무나 많은 영화잡지들이 생겼고, 얼마 뒤엔 인터넷도 보급됐다. 여러 가지 정보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한 잡지가 소위 균형 잡힌 생각을 한다는 건 이 시장을 다 책임지겠다는 건데, 그건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정책은 무엇인가, 그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키노>에 서운해 하는 감독들도 있다. 나에겐 관심이 없다, 어떤 감독을 과도하게 다루는 거 아니냐, 라는 거지. 그런데 키노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명단이 중요하다고.

정윤철: <키노> 마지막 호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가들에 관한 글을 쓰며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하지만 영화가 어렵고 위대하다고 하여 그걸 해석하는 글조차 어려울 필요가 있는지.
정성일: 거기에 관해선 항상 인용하는 아도르노를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점점 사고를 마비시키고 논리 자체를 무시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내 글을 읽는 것은 사유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아도르노처럼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그 태도는 배우고 싶다.

정윤철: 일부러 쉽지 않게 글을 쓴다는 뜻인가.
정성일: 쉽지 않다는 것은 고마운 표현이고, 나는 내 글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나는 별점을 굉장히 경멸한다. 그 별점은 영화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어떤 영화에 별 두개를 매기는 순간, 그가 영화를 보는 수준도 별 두개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 영화는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는데, 나는 영화를 잠시 멈추어 세우고, 영화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해석의 공간, 창조의 시간에 대한 성찰, 세상에 대한 반성 등을 획득할 수 있다. 내가 그 영화를 봤지, 하고 만다면 누가 영화를 향해 배움을 구할 수 있느냐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누군가 당신의 영화를 보고 나서 스무자로 쓰고 별점 주면 화나지 않나. 그 영화를 싫어해도 길게 쓰는 게 좋지.

정윤철: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소통을 염두에 둘 텐데, 어느 선을 지킬 것인지 고민되겠다.
정성일: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내 글의 독자는 단 한사람,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사실 관심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이름으로 비유되는 영화의 주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윤철이라는 이름에는 그 영화의 모든 관련자들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감독을 호명할 때 그것은 감독 개인이 아니라 그 영화에 참여한 모두, 어떤 총체성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모든 것을 조율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감독 개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더더욱 쉽게 써야하지 않나? 감독들 생각보다 무식하다...라는 말을 나는 차마 못한다.

정윤철: 하지만 글을 쓰면서 대중에게 무언가 설명해주고, 하다못해 계몽을 한다는, 그런 욕망은 있지 않나.
정성일: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전력투구한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알게 되긴 했지만, <좋지 아니한가>를 봤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천호진과 정유미를 보면서 둘 중 하나다 싶었다. 그 이야기에 뭔가 하나가 더 있어야 했거나, 섹스를 하고 새 족을 꾸며서 나감으로써 심씨 가족이 돈 버는 기계인 아버지 없이 견딜 수 있느냐고 물어보거나. 그런데 <좋지아니한가>는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안 했다. 전자라면 이 영화는 뭔가 결핍된 거고, 후자라면 이 영화는 결단을 하지 못한 거다. 이런 불균질성이 발생했을 때 나는 질문을 던져보고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생각하여 글을 쓰는 거다. 그 질문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부서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내가 세상에 대한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영화를 지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정윤철: 글을 쓰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여 결론까지 간다는 건데, 결론이 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정성일: 내가 항상 답을 구하지는 못하니까. 때로는 그 감독의 다음 영화에서 답을 얻기도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질문을 던지는 대상이 단 한명의 독자인 감독인가. 영화는 무생물이니까 말이다.
정성일: 예를 들면 <피와 뼈>의 감독 개인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이름으로 비유되는 영화의 주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윤철이라는 이름에는 그 영화의 모든 관련자들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감독을 호명할 때 그것은 감독 개인이 아니라 그 영화에 참여한 모두, 어떤 총체성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모든 것을 조율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감독 개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어떤 영화를 보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예전에 당신이 에 썼던 글을 읽었다. 주인같은 노예가 있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한 그 노예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논의로 내용을 이어나가며 진짜 영화와 가짜 영화를 언급했다. 좀 더 설명을 해줄 수 있는가.
정성일: 이렇게 대답을 하겠다. 대중으로서 영화를 보는 단계를 지나 내가 자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를 보는 여러 가지 태도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적인 태도와 플라톤적인 태도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니체적인 영화보기가 가능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세상을 대하듯 말이다. 영화라는 것은 세상을, 잠재적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액추얼한 세계로 놓고, 가능한 세계를 찍는다. 이 가능한 세계에 대해 내 자의식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내가 이 화두를 던진 이유는 많은 비평가와 진지한 이들이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데카르트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영화를 볼 때 니체적인 영화보기를 통해서 자기가 영화를 보는 행위에 의문을 던져보고, 그 영화에 붙들린 노예의식이라는 것으로부터 뛰쳐나오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주체를 되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럴때 비로소 니체가 말하는 진짜와 가짜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가짜는 부정적인 의미의 가짜는 아니고,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정윤철: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사유를 하고, 괴로움을 참으면서까지 영화를 보는 이는, 일반 대중이라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굳이 나눈다면, 영화는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로 나눌 수도 있겠는데,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본다. 대중음악은 대중음악 평론가가 있고 클래식은 클래식 평론가가 있고 재즈는 재즈평론가 있는데, 영화는 한명이 그 넓은 스펙트럼을 뭉뚱그려 매체에 글을 쓰지 않나. 그런데서 부담감이 오지는 않나.
정성일: 그것은 생각의 차이일 수 있을 거다. 나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영화를 붙들 것인가, 어떻게 영화를 이해할 것인가, 납득하고 싸울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건 대중영화니까 이건 예술영화니까 이렇게 보지는 않는다.

관객의 숫자와 관계없이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괴물>은 예술영화다. 내러티브 구조와 영화의 형식을 비롯한 여러가지 점에서 그 영화는 아트필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무의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당신도 <말아톤>은 대중영화로 찍고 <좋지아니한가>는 예술영화로 찍고, 그렇게 하지는 않지 않았나.

정윤철: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감독과 배우 몇 명에게 질문을 받았다. 이건 김혜수가 물어온 질문이다. 영화평을 보면 좋고 나쁨을 떠나 이 사람은 이런 영화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저런 영화를 좋아한다고, 안 봐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장르화 되어 있어서 평을 읽기도 전에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잘 안 읽게 된다는 거다.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보나.
정성일: 똑같이 반문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에게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박찬욱 감독에게 다음 영화는 <해변의 여인>과 비슷하게 찍으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비평가들도 자기 세계관이 있고 취향이 있고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보아온 영화가 있고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 <극장전>도 좋아하고 <태극기 휘날리며>도 좋아하면 그 사람 되게 이상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신의 애티튜드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거다. 나는 한쪽을 지지하는 비평가에 대해선 반감이 없다. 가끔 보면 모든 영화에 별 네 개나 세 개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비평가인가. 나는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글은 읽지 않아도 알아, 그 사람이 누구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이것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취향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의 취향 자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공정함을 내세우는 것은 더욱 의심스럽지 않은가.

정윤철: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질 때 의도가 다르다면 어떤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처음부터 목표 지점이 다른 영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카테고리를 지어주면서 비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 영화의 목표지점은 이 정도, 그러니까 음악으로 치자면 대중가요 정도다. 음악에는 댄스그룹의 노래도 있고 싱어송라이터가 부른 그럭저럭 잘 만든 대중음악도 있고 나아가면 클래식이나 이런 예술적인 음악도 있다. 영화도 이런 각자의 틀 안에서 완성도를 평가받는 건 불가능할까.
정성일: 이렇게 대답을 하겠다. 나는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을 지금도 좋아한다. 아주 좋아하고,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기념촬영>은 무언가 간절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수많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을 건너 뛰어와서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다음에 <말아톤>을 봤을 때 나는 그 영화를 대중영화나 상업영화의 카테고리로 보지는 않았다. 나는 이 영화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를 보았다.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더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말아톤>은 자폐증 소년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가족의 문제를 우회해서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야기하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치들, 이야기들,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몰아가기 위해 수없이 덧붙여진 것들이 <말아톤>을 둔하게 만들었다. 나는 질문하고 싶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뻔한데 왜 에둘러갔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아톤>을 보고 나서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기념촬영>을 찍었던 감독이니까. 이 연출자가 두번째 장편으로 <좋지 아니한가>를 찍었기 때문에 나는 기대를 하게 된 거다. 물론 나도 제도권 영화의 현장에서 한 사람의 연출자가 데뷔하기 위해 감수하는 여러 가지 타협의 순간들과 열악한 환경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을 다 괄호칠 만큼 비평가가 세상의 현실에 둔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아톤>을 둔하게 만드는 것들을 보며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묻게 됐다. 그 질문은 비평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영화의 퀄리티나 완성도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내 질문은 이 영화의 애티튜드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웰메이드라는 단어를 경멸한다. 그것은 영화를 제작자나 프로듀서의 것으로, 말하자면 상품으로 보는 것이고, 어떤 창조의 영역도 발견하지 못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창조하는가, 무엇을 비판하는가, 그리고 그사이에서 어떻게 중재하는가를 보고 싶은 거지, 잘 만든 이야기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다.

정윤철: 내가 한국의 영화평들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내러티브(이야기) 위주의 분석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한국평론가들은 줄거리와 이야기에 집착을 하고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도 결국 이야기 아닌가. 그것도 영화에서 핵심이겠지만, 영화가 왜 영화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컷이 있고 사운드가 있고 예술로서 영화가 있는데, 평론은 내러티브와 인물과 구성 위주로만 풀어간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필름아트> 저자인 데이빗보드웰이 한국에 와서 그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미국의 교수가 홍상수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샷 바이 샷으로 분석하며 허우샤오시엔과 비교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미장센과 영화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을 하는 걸 보고 대단하구나 싶었다. 한국영화계에는 그처럼 미학적인 스타일이나 영화 자체를 분석하는 평론이 왜 이렇게 없는 것인가.
정성일: 내가 모든 비평을 읽지는 못하므로 개인적인 소견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겠다. 나는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숏과 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숏과 씬은 결국은 다 떨어져나가는 단위들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숏을 씬으로 연결하는 논리가 필요한데, 이 논리가 이야기다. 영화비평이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그 질문은 정확하게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논리가 무엇인지 묻는 거다. 숏이 어떤 방식으로 붙어있는가, 붙어있는 이야기를 연출자가 어떻게 쪼개고 있는가, 이 이야기는 왜 쪼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장면을 투숏으로 찍었는가 혹은 숏 리버스 숏으로 찍었는가, 하는 것들을 묻는 거다. 나는 한국의 영화감독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영화가 점점 깊이가 없어지는 까닭은 젊은 감독들이 리액션 숏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리액션 숏에 대한 철학이 없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끊어서 상대를 보여줄때, 이것은 결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숏은 어차피 찍어야 하는데, 리액션 숏을 찍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논리를 질문하고 싶다. 그러므로 당신 질문과 똑같은 답이 되는 셈이다. 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문학 텍스트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문화하고 줄거리로 환원하고 그 줄거리를 묻는다면, 이것은 줄거리 요약에 불과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를 따져 물어야 할 때가 있다. 이야기에서는 필연적으로 나와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안 찍은 거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왜 건너뛰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 씬이 없습니까. 그의 영화는 이야기로 환원하지 않으면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임권택은 장면을 건너뛰며 찍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점프컷의 고수라면 임감독님은 점프씬의 대가랄까? 좌우간 <취화선>, <하류인생>에서 끝장을 보여줬지. 많은 관객들이 이야기가 툭툭 끊겨 당황했지만 그런 편집이 개인적으론 씨원 씨원했구 뭔가 미래적인 영화의 느낌이었다.

정윤철: 어쨌든 이야기를 제일 중요시하면서 말이 된다 안 된다 식의 평이 많은 건 사실이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비평이 관객에게는 쉽게 읽힐 수는 있겠지만 감독이나 영화인들에게는 자극이 되지가 않는 것같다. 편집과 연출과 사운드와 연기 같은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왜들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정성일: 나의 동료들을 위해 반문하자면,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보지 않아도 되는 영화들을 찍어줬으면 좋겠다.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는 스토리텔링으로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다. 차이밍량의 <나는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줄거리를 써봐야 이야기 자체가 뭔지 모르는 영화들이다(웃음). 나는 그런 비평이 범람하는 것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한국영화가 스토리텔링에 매여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많은 감독이 스토리텔링에 매여 있고, 당신이 말했던 모든 요소들이 스토리텔링에 봉사하고 있지 않나. 한국영화비평의 약점은 한국영화의 약점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한국영화와 상관없이 쓰여지는 게 아니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들이 영화비평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아닌 부족함이라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고스란히 한국영화의 부족함으로 돌아온다.

정윤철: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일수도 있겠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비평을 하다보니까 감독들이 스토리를 중요시여기고 결국 시나리오도 자기가 쓰려고 하는 것 아닐까?
정성일: 원인과 결과가 바뀔 수는 없다. 영화가 나와야 비평이 나오는 거지, 이런 비평을 받고 싶다고 만드는 영화는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따져 묻는 사람은 없다. 김기덕과 박찬욱도 마찬가지다. 비평가들은 영화에 조응하는 비평을 쓴다. 감독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스토리텔링의 감독은 아니었는지, 내 영화의 많은 요소가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것은 아닌지.

영화를 왜 영화 자체로 못 보는가.. 나와 동료 감독들은 늘 말하곤 한다.

정윤철: 좋다. 당신은 한국영화의 약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건데, 감독도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정치적인 함의를 파악하고, 정신분석하듯 영화를 분석하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비평이 미학적인 관심도 가졌으면 좋겠다. 영화를 잘 찍었다고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무슨 개념으로 리액션 숏을 이렇게 붙인 건가, 클로즈업이 왜 들어가는가, 이 스타일이 주제에 맞게 쓰였는가... 이렇게 영화를, 미학을 지닌 텍스트 자체로 보고 형식 자체에 대한 비평을 한다면 감독들도 좀 더 긴장을 하게 될 거다. 영화를 분석하며 언제나 철학이나 정신분석이나 여러 가지 다른 학문을 끌고 들어와서 분석하는 경향이 많다는 건 영화미학을 너무 폄하하는 것 아닌가?
정성일: 전혀 다른 문제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세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베토멘의 현악사중주를 분석하면서 창작 과정을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악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악사중주에서 도와 미 사이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레와 솔 사이에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차이가 있는지 묻는다면 답은 끝내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은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중산층인가라고. 혹은 <가족의 탄생>을 보면 왜 김태용 감독은 가난한, 거의 부서져가는 가족을 다루는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너무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다. 레와 솔을 물어보듯, 도와 미를 물어보듯, 미학적인 방향으로 완전히 철수할 때, 영화는 굉장히 빈곤해지고 앙상해진다. 그 영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영화 속의) 수많은 질문과 기호와 모순과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끌어안기 위해 세상의 지식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왜? 세상을 찍고 있으니까. 나는 정신분석학이건, 사회학이나 경제학이나 정치학이건, 분과별로 보기보다는 세상의 지식으로 보고 싶다. 지식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니까.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정윤철: 많은 영화인과 감독, 심지어 관객마저도 평론에 불만을 제기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생각해야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그것으로 영화 전체를 평한다는 거다. 나도 그런 경향이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비평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니면 좋을 텐데.
정성일: 똑같이 반문하겠다. 그 질문 자체가 영화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영화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예를 들면 정윤철이 시나리오를 쓸 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쓰는 순간 세상은 이미 시나리오에 끌려온다. 이 인물은 합당한가, 나는 2007년에 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나, 이 이야기가 세상과 어떤 호흡을 이루는가, 가족이라는 토픽을 던질 때 내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한)세계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적 세계에 닿아 있다. 감독들은 홍상수가 가능한 세계 1을, 정윤철이 2를, 김기덕이 3을, 임권택이 4를 만든다. 즉,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둘러싼 여러 (가능한) 세계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비평가들이 가능세계를 만든 영화를 보고 현실세상의 변화 의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봐달라고 한다면 가능세계는 현실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불가능 세계가 된다. 우리가 헐리웃 영화를 보며 후진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다. 영화를 영화로 봐라, 그렇다면 <300>을 보면 되는 거다. <300>이 영화의 참맛인가.

정윤철: 무엇이 좋은 영화이고 나쁜 영화라고 여기는가?
정성일: 나는 이런 말을 인용하고 싶다. 차이밍량이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 질문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렇지만 내 문제만이 아닌 어떤 거대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정성일: 그럼 파시즘이 되는 거지.

정윤철: 환경문제나 남의 문제들을 걱정하는 영화가 나쁘단 말인가?
정성일: 나는 그때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적 프로파간다도 있고 보수적인 프로파간다도 있지만 비슷하다. 나는 똑같은 사건(미국 컬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영화라고 해도 <엘레판트>는 지지하지만 <볼링 포 컬럼바인>은 지지하기가 힘들다.

<볼링 포 컬럼바인>은 폭력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이해해도 괜찮은 건가. 폭력이 이해되는 순간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부조리하다는 질문을 던지고, 가능해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미학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봐달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나. 숭고하다고.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미학에 사로잡히는 것이 타락의 징후로 보인다. 눈을 움직이는 건 미학이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건 숭고함이다.

어떤 이에게 영화란 종교적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정윤철: 영화가 재미있고 분석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영화만이 갖고 있는 상호텍스트성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야기에 세상이 담겨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읽혀지지 않는 영화를 보면 어떻던가?
정성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거대담론도 없고,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딸을 시집 보내는 게 전부인데도 그 영화는 진행이 너무 기괴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오차즈케의 맛>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그 영화는 오즈의 다른 영화들처럼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타이틀이 올라올 줄 알았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러 공항에 갔고 아내는 문제가 해결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즈의 영화에 언제나 나오는 방식으로 텅 빈 방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밤중에 귀신처럼 남편이 돌아온 거다. 이 사람이 미쳤나,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는데, 남편이 비행기가 고장 나서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그러다가 밥을 좀 먹자고 그런다. 그 집은 언제나 식모가 밥을 했는데 한밤중이니까 집에 간 거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내가 남편을 위해 밥을 한다. 오차즈케를. 오차즈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 남편은 자수성가를 했지만, 아내는 부유한 사람이어서 오차즈케를 촌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반찬이 오차즈케 뿐이었다. 부부가 저녁 식탁에 앉았는데, 이건 절대 나누지 못할 거야, 나누는 순간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즈는 그 장면을 나누었다. 그 순간 오즈는 왜 그 장면을 쪼갰는가. 그는 감독으로서 결단하듯 내리친 거였다. 쪼개는 순간 이 구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그 결단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를 찍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찍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즈가 그걸 자르고 진행한 것은, 투샷으로 찍어서 시간이 진행되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이미 투샷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에서 남편은 친구를 만나 여행갔다 온 이야기를 한다. 전날 밤 남편이 돌아온 것이 아내의 꿈이었는지, 남편이 진짜 집에서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난 건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다. 숏을 쪼개는가 마는가, 진행을 하는가 마는가, 마음을 나눌 것인가 이을 것인가의 결단. 오즈는 나에게 이 배움을 줬다. 영화는 세상이지만 쇼트는 그자체로 우주다. 그래서 쇼트는 항상 영화보다 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영화는 세상을 쫓지만 쇼트는 잡는 순간 완결된 우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트를 쪼개는 건 우주를 자를 것인가 말것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것은 브레송에게도 르누아르에게도 히치콕에게도 당연히 묻게 되는 질문이다.

정윤철: 그런 상호텍스트성이나 함의가 없더라도 영화 자체가 신선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영화의 형식 자체가 사유를 하게 만들고 새로움을 느끼게 해준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
정성일: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나는 켄 로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그냥 정치를 다룬다. 나는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 촌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 때는 행복하다. 정치적인 영화는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을 때, 그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롱테이크로 찍었을 두 부부의 식사 장면을 샷을 나눠서 한 명씩 잡았음) 전후 일본사회에서는 오즈에게 있어 숏을 쪼개는 그 결단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전후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성장을 향해 나아갈 때 가족이 어떻게 쪼개지느냐, 개인화, 파편화 하느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다루진 않지만 샷을 쪼개는 것 그 자체가 오즈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정윤철: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와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르다는 말인가.
정성일: 나는 후자를 지지하고 싶고, 후자가 항상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영화를 진행하며 해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일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영화는 쓰레기야, 네가 창조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면 너는 파산한 거야, 그런다. 그것이 아무리 미학적인 것이더라도. 나는 미학적인 결정보다 상위에 있는 결정은 윤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도덕과는 다르다. 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미학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을 경험했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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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정성일 씨는 김기덕 감독을 좋게 볼까요... 이해가 안 되요...

바라 2007-05-1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정성일씨의 김기덕 감독에 대한 평론을 제대로 읽어보진 못했지만요...아마도 그 영화가 갖는 여러 이례성 때문에 그를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네요. 마냥 좋게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질문을 던지기에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게 아닐까요? 아마도 정성일은 김기덕의 영화들을 (사회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아요. 나쁜 남자 같은 영화도 결말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오히려 '수난받는' 주인공(조재현)의 구원을 향한 가련한 환상 뭐 이런 식으로 보니까요... 그러고보니 정성일의 평론들 자체가 워낙에 어렵고 비의적인 투로 쓰여있는 것이 언뜻 종교와도 친화성을 갖는 것 같기도 하네요ㅎㅎ 저는 언젠가부터 정성일의 평론은 (사실 평론 자체도;) 잘 안 읽게 되더라구요. 물론 그 박학다식과 영화에 대한 열정은 존경할 만하지만 영화를 보는 분석도구를 마련하기 위해 '이론'에 너무 경도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특히 정신분석학 등에)...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영화를 직접 보려구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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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옹 | UC 버클리 인류학과
이번 호 <책속의 책>에서는 아이와 옹(Aihwa Ong)의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시민권과 주권의 변이들』(Aihwa Ong, Neoliberalism as Exception: mutations in citizenship and sovereignty, Duke University Press, 2006)의 서문인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Neoliberalism as Exception, Exception to Neoliberalism)를 싣는다.
신자유주의는 대개 국가 권력의 통치 범위를 제한하는 경제 학설, 시장 이데올로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한정된 이해에는 한계가 많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예컨대 최근 제시되고 있는 사회적 투자, 사회 자본에 대한 강조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등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어쨌든 ‘시장지상주의’를 나름대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례를 들어 자본가 계급이 신자유주의를 버렸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전선을 고민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애초부터 (이른바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으며, 양자의 핵심 쟁점은 처음부터 ‘통치성’이었다. 즉 신자유주의는 ‘정책 무용론’이 아니라 ‘정책 개혁론’이며, 위기와 인민의 관리라는 화두로 국가를 개조함으로써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다양한 사회투자, 사회 자본의 흐름들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기는커녕, 신자유주의의 본래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해 자신의 통치성을 강화하려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옹은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능동적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주권과 영토성 사이의 관계가 재형성된다. 즉 각각 다른 체제를 가진 공간들에 적용되면서 신자유주의는 상이한 노동․생활의 환경을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는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기존의 시민권, 주권의 개념들은 이 속에서 시장 가치라는 기준에 의해 변화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사회주의 경제 내부에 경제특구가 창설되며, 곳곳에서 NGO, 기업들의 간접적 영향력이 기존에 국가가 행했던 권리의 보호를 담당한다. 시민들에게는 자기 관리, 자기 경영, 자기 통치에 이르는 일련의 경제적 효율성과 더불어 자기 책임이라는 윤리적 주장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시민권의 틀이 변화한다. 시장에 대한 계속된 강조 속에서 정부와 제도들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성 유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내면화를 강조하는 이런 주체화 기술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주체의 형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을 형성한다. 또 푸코(주의)에 고유한 ‘실증주의’는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많은 생각꺼리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옹의 주장이나 논증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인도주의적 개입이나 NGO식 사회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의 논리를 전개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가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다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는 그녀가 중요한 이론적 준거로 삼는 푸코를 다소 우경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는 단순한 ‘편향’이 아니고 푸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의 작업에 관한 최근의 비판적 소개로는 『문학과 사회 75호』(2006. 가을)에 실린 ‘생명정치’ 특집을 보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아마도 더 뼈아픈 문제는, 과거 사회주의 운동에 비할 정도의 보편주의적 정치 이념과 집단적 주체화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정세와 관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기의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닐 수 없다.

* 지면 관계상 서문에서 책의 각 장에 대한 설명 부분은 생략했으며, 내용 주가 많지 않아 지면에는 싣지 않고 『사회운동』 홈페이지, www.movements.or.kr에 올리는 것으로 한다.

 

서문


예외로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예외


신자유주의는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도가 지나친 권력의 약호가 되었다. 아시아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매개를 이용하여 소규모 경제를 억지로 열어젖히고 이 국가들의 현재와 미래의 경제 복지를 파괴하는 무역정책에 노출시키는 시장 지배 전략으로 본다. 예를 들어 아시아 경제가 부상한 10년 간 (1980년대~1990년대),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시아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이런 수사들은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 더 요란스러워졌다.1) 또한 대중적 담론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 통화와 생활 조건을 위협하는 탈규제된 금융 흐름을 의미했다. 강요된 경제 구조조정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한국의 반신자유주의 시위대는 “IMF는 나는 해고됐다는 뜻이다!”(IMF means I'M Fired!)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시장개방과 사유화 압력은 “야만적 신자유주의”라고 불렸다. 이라크 침략 이후, 미국은 대기업들이 석유자원을 확보하도록 정복전쟁을 할 만큼 비열하다는 인식이 신자유주의 비판에 포함되었다. 이와 같이 전 세계 대중들의 상상 속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점차 무법성과 군사행동에 의존하는 발본화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여겨진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이런 광범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정부들은 경제 구역을 창설하고 시민권에 시장 기준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을 선별적으로 채택해 왔다.


넓은 의미의 신자유주의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학계 밖 대중적 담론의 일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시장 중심 정책들과 신보수주의가 사회복지 폐지와 대자본의 이익 증진을 추구하는 사고와 전략 전체를 약호화하는 토착적 범주다.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가리키는 더러운 단어가 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주당이 족쇄가 풀린 시장 주도 정신의 과잉에 반대하는 개인의 권리와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라고 스스로를 공언하는 반면, 공화당은 무수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법이라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로 읽히는) 담론에 의존한다 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자유주의 모두 정부의 기본 원리와 목표로 자유로운 주체에 초점을 맞추지만, 민주당원이 개인과 시민의 자유를 강조한다면, 공화당원은 자립과 자기관리라는 개인적 의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는 “공화당원의 두뇌는 공동체 의존보다는 자립을, 고립보다는 개입을, 사회 규제보다는 자기 규율을, 즐거움을 찾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포함하는” 가치들을 선택한다고 쓴다.2) 정치 생활에서 두 종류의 자유주의의 합리성들은 자주 겹쳐지고 융합되지만, 공화당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非)미국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지속을 강화했다. 사실 이런 당파적 논쟁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상과 개인의 책임과 운명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원리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균열을 강조했다.

재선에 성공하면서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지침”을 주장했다. 다수의 새롭게 제안된 “시장 중심 정책들”에서 그는 뉴딜 이래로 제도화된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측면들을 해체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사회보장과 보건의료의 사유화에서 진보적 세법 폐지에 이른다.3) 부시는 자신의 새로운 전망을 “소유권 사회”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의 감시 하에 미국의 시민권이 자산의 소유자만을 포함하는 시민권에 대한 초기의, 좁은 전망으로 바뀔 것임을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여기서 특권화되는 것은 경제적 자기 이익을 고립적으로 추구하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다.4)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시민들을 그 혹은 그녀의 운명의 행위자로 만듦으로써… 국민들이 자유 사회에서 삶의 도전을 준비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했다.5) 또한 시민권에 대한 이런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기독교 복음주의 집단의 도덕적 지지를 받았다.6)

그러나 정치를 시장화하고 시민권을 재설계하려는 대통령의 시도들이 반대 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이런 사유화 정책들에 반대했다. 십여 년간 수없는 저항운동들이, 몇 개만 언급하자면 죄수, 노동자, 여성, 동성애자, 소수자, 외국인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끊임없는 침식을 방어해 왔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이성을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그 정신에 따라 다른 정책들 중에서도 빈곤퇴치 계획, 의료보험 혜택, 환경 보호, 식품 안전을 계속해서 역전시키려 한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적 논리, 종교, 권리, 윤리 다발은 미국 시민권의 문제 공간이 되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 이래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해외에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비판받은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예외들


이 책의 주장은 정치적 최적화의 새로운 양식인 신자유주의가 통치와 피통치, 권력과 지식, 그리고 주권과 영토권 사이의 관계를 재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종 국가 권력과 부정적 관계에 있는 경제 학설로, 통치의 범위와 활동을 제한하려고 하는 시장 이데올로기로 논의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그것을 통해 통치 활동들이 기술적 해법이 필요한 비정치적․비이데올로기적 문제로 개작되는 통치와 지식 사이의 새로운 관계로 개념화될 수도 있다.7) 실제로 통치 기술로 간주되는 신자유주의는 “최적화”를 위해 통치와 자기 통치를 합리화하는 매우 능동적인 방식이다. 따라서 통치 기술로서 신자유주의 계산의 확산은 상황적인 정치적 구도를 불균등하게 절합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민족지적 관점은 막 출현하려고 하는 노동과 삶의 구별되는 환경을 상호적으로 구성하는 시장 합리성, 주권, 그리고 시민권의 특정한 정렬을 드러낸다.

나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주권적 지배와 시민권 체제를 절합하는 비서구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능동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차이는 특정한 조사 환경에서 “규범적 질서”가 무엇인가에 따라 정해진다. 이 책은 신흥 국가들에서 예외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곳에서 신자유주의 자체는 통치 기술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에서뿐만 아니라,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탈사회주의적 상황에서도 신자유주의 개입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장 주도 계산이 특정 공간의 주민들과 행정의 관리에 도입되는 변화의 장소에 도입된다. 신자유주의적 예외, 시민권, 그리고 주권의 절합은 일련의 가능한 인류학적 문제들과 결과들을 낳는다.8)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정치적 결정들 속에서 발동되어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에서 주민들과 장소들을 배제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사회안전망을 보호하는 양식일 수도 있고 모든 형태의 정치적 보호들을 없애는 양식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 도시예산 집행에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이 도입될 때에도 주택보조금과 사회적 권리들은 보존되었다.9) 동시에 동남아시아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시장주도 정책들이 창출한 생활기준에서 배제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은 시민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에서 비시민들을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시장 계산에 대한 예외들의 작동에는 중복되는 것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기술들의 통치를 받는 주민들은 신자유주의적 고려에서 배제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적 규범에 종속된 주민과 공간을 이런 규범의 시연(試演) 외부의 것들과 절합하게 되면 윤리적 딜레마가 구체화되고, 사회적 평등과 공동의 운명이라는 기본적 가치들이 뒤바뀔 것이라는 위협이 생겨난다. 이어지는 장들은 예외들, 정치들, 윤리들의 상호작용이 진동하는 관계의 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민족지적 환경들을 제시할 것이다. 통치와 피통치의 새로운 형태들,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새로운 관념들이 곧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접근법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따로따로 다룬 ― 신자유주의와 예외라는 ― 두 개념을 합할 것이다. 통치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시민권과 통치 영역에서의 계산적 선택과 기술들에 의지한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통치성”은 일상적 행실의 체계적․실용적 지도와 규제에 관한 지식 및 기술의 배열을 가리킨다.10) 푸코가 말하듯, 통치성은 “개인들이 서로를 상대할 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전략들을 구성하고, 정의하고, 조직하고, 도구화하는”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11)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시장 주도의 진리들과 계산들이 정치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데서 비롯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은 많은 체제의 행동을 고취하고, 규율, 효율성, 그리고 경쟁력이라는 시장 원리에 따라 자기 관리를 유도당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통치를 고취하는 개념을 제공한다.12)

정치적 예외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식화에서 사법 질서와 일반적 규칙 외부에서 내려진 정치적 결정이다. 슈미트는 “주권자가 총체적인 상황을 만들고 보증한다. 그는 이 최종 결정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다. 여기에 국가 주권의 본질이 있고, 이는 강제나 지배의 독점권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권으로 사법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13) 따라서 예외의 조건은 정치적 경계성, 일반화된 정치적 규범성에서 벗어나는,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에 개입하는 비상(非常)한 결정이다. 슈미트적인 예외는 전쟁 상황에서 적과 친구를 그리기 위해 발동된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예외를 사법 질서 내의 시민과 사법적-정치적 보호를 박탈당한 외부자 사이의 분할에 입각한 주권적 지배의 근본 원리로 사용한다.14)

대조적으로 나는 예외를 더 폭넓게, 즉 배제로도 포함으로도 전개될 수 있는 정책의 비상한 출발로 개념화한다. 통상적 이해에 따르면 주권의 예외는 보호를 거부당한 배제할 수 있는 주체들을 구획한다. 그러나 예외는 신자유주의 개혁과 관련된 “계산적 선택과 가치 지향”15)의 대상으로 선택된 주민들과 공간들을 포함하는 실정적 결정일 수도 있다. 나의 정식화에서는,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이음매를, 통치와 규율, 포함과 배제, 인간 행실에 가치를 부여하거나 부인하는 기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 시대 예외의 정치는 통치와 경계설정의 변화된 기술에서 포함된 자들과 배제된 자들 모두에게 우려스러운 윤리정치적 함의가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예외의 시장 주도적 논리가 다양한 민족지적 맥락과 윤리적 위험, 가동된 질문들 속에서 전개되면서 시민권과 주권의 확립된 실천들을 뒤흔드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예외들, 정치들, 그리고 시민권 사이의 상호관계는 현대 생활의 문제를 결정하며, 이들은 또한 오늘날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윤리적 논쟁들을 틀짓는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적 예외들은 아시아적 배경에서 다양하게 발동되어, 시장 주도 선택과의 관계에서 공간들을 재정의하고, 경제 활동을 다시 도덕적으로 설명하며, 시민권의 사회적 기준을 다시 계산했다. 이런 절합들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이고 모호한 일련의 결과들을 낳았다. 신자유주의적 결정들은 새로운 형태의 포함을 창출하여, 몇몇 시민 주체들을 떼어 놓고 비상한 정치적 혜택과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창출했다. 슈미트적 예외는 특정한 주민들을 버리고 그들을 정치적 규범성의 외부에 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예외들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 사이의 절합은 다양한 인간 범주에 배정된 도덕적 요구들과 가치들의 가능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해 다양한 정도의 보호가 협상될 수 있게 한다.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와 예외의 결합은, 신자유주의적 이성과 메커니즘의 절합 및 탈구 속에서 시민권과 주권이 어떻게 변이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먼저, 신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통치와 시민권 사이의 연관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엄격한 사법적․법률적 관계로 바꿔 놓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기술에서 생명정치적 통치 양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개인과 주민―통치 체제가 이용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원으로서―의 역량과 잠재력에 중심을 둔다. 여기서 사용된 신자유주의는 두 종류의 최적화 기술에 적용된다. 주체성(subjectivity)의 기술들은 혼란스러운 시장 조건에서 시민들이 선택들, 효율성, 경쟁력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자기 고취와 자기 통치를 유도하는 전문가 체계와 지식의 배열에 의지한다. 이런 최적화 기술들에는 보건 체제 엄수, 기술 습득, 기업가 정신의 개발, 그리고 다른 자기 공학과 자본 축적 기술들이 포함된다. 종속(subjection)의 기술들은 점차 시장의 힘에 관여하는 공간적 실천들을 통해 최적의 생산성을 위해 주민들을 다르게 규제하려는 정치 전략들을 지시한다. 이런 규제들은 도시 공간의 요새화, 여행 통제, 그리고 성장의 중추(hub)에 특정 종류의 행위자들을 채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최적화의 개입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행정 전략들과 시민권의 실천을 바꾸는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지배 체제와 시민권의 체제에 상호작용한다. 이는 시장 논리가 정치에 침투하면서 민족 국가에 뿌리내린 법적 지위이자 무국적의 조건에 대한 뚜렷한 반대로서의 시민권의 관념을 개념적으로 뒤흔들린 결과다.16)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경우에 따라 민족 영토 이하의 또는 반대로 민족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공간들에서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한다.

시민권을 창출하는 데 동반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요소들―권리들, 자격들, 영토권, 민족―은 시장의 힘들이 가동시키는 힘들에서 탈구되고 재절합된다. 한편으로 자격, 혜택과 같은 시민권의 요소들이 점차 신자유주의적 기준들에 연관됨으로써 인적 자본이나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기동적 개인들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다양한 장소에서 유사시민적(citizen-like) 요구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처럼 매매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된 시민들은 평가 절하되고 따라서 배제의 실행에 공격받기 쉬워진다. 다른 한편, 시민권의 영토권, 즉 모국의 민족적 공간은 부분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영토권에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의 개입으로 지도에 나타나는 공간들에 배태된다. 이런 예외의 중복된 공간들은 시민권의, 혹은 인권의 보편적 체제의 관습적 통념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인간 가치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요컨대 시민권의 구성요소들은 새로운 공간과 개별적 연계들을 발전시켰고, 이로써 다양한 장소 및 윤리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재절합되고, 재정의되고, 재상상되었다. 시민권의 구성요소들, 행위자들, 그리고 공간들의 이 같은 탈궤(脫軌)와 재접궤(再接軌)는 시장 전략들, 자원들, 행위자들의 분산과 재편성 때문이었다.

둘째로,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개별성으로 오랜 기간 개념화되었던 국가 주권에 대한 연구를 세련되게 한다. 하나의 관점은 국가를 민족의 지형 전체를 평평하게 만들거나, 결국 하나의 단일한 국가 관료제를 강요하려 드는 기계로 본다.17) 실제에 있어서 주권은 다양한 요구들 및 논쟁과 마주치고, 다양하고 우발적인 결과들을 낳는 다중적이고 때로 모순적인 전략들로 나타난다. 나의 주장은 세계 시장과 규제 제도들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주권적 지배가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들, 공간들, 그리고 인민을 통치하는 기술들을 창출하는 예외들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민족 국가의 공간을 쪼개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일정한 주권의 유연성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구역화(區域化, zoning) 기술들은 시장의 힘과 연관된 집단들을 규제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특별한 공간들을 만들었다. 전략적인 정치․경제․사회 조건의 공간적 집중은 해외 투자, 기술 이전, 그리고 국제적 전문 지식을 특정한 고성장 구역에 끌어들인다. 시장 주도적인 공간 분단 전략은 다양한 범주의 인적자본에 대한 세계 자본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에 따라 인접하지 않은, 별도로 관리되는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공간 유형을 낳는다. 게다가 기업들과 NGO들이 서로 다른 정치적 규모의 다양한 주민들에게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우리는 중복된 주권들이 출현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 최적화 기술들은 대도시들을 자원과 행위자 네트워크를 등록하는 중추에 재입지(立地)시켜, 대도시들을 별도의 생태계의 중추로 만든다.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은 세계적 순회(巡廻)를 떠받치는 핵심 기능과 서비스를 통제하는 몇몇 “세계 도시들”―뉴욕, 런던 그리고 도쿄―라는 영향력 있는 모형을 제안한다. 이 초민족적 도시 체계는 “세계적 위계에서 주로 중간 범위에 속하는 남반구의 도시들”을 지배한다.18) 상하이,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의 폭발적 성장은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유발하는 다른 종류의 시공간적 상승 작용이 높아짐을 시사한다. 시장 주도 계산은 내외적 요소를 결합․재결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여 이 도시들을 출현과 새로운 순환의 장소로서 재입지시킨다.

전략적 지식, 자원, 그리고 행위자의 상황적 동원은 진동하는 상호작용의 망을, 즉 초고속성장 지역의 범위를 확대하는 시공간적 “생태계”를 형성한다. 이 생태학으로서의 통치성(govermentality-as-ecology) 전략은 신흥 아시아 중심들을 기존 초민족적 도시 체계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논리는 집(hometown, oikos)을 특정한 물질과 사회적 가치의 전략적 생산을 위해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자아낸 공생관계 망에 재입지하는 것이다.19) 이 마이크로소프트 식 접근은 생태계의 다른 성원들이 각자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서비스들, 도구들, 혹은 기술들”20)―을 창출한다. 이것은 관습적인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미래와 얽히게 되는 국제 기업, 연구 기관들과의 혁신적 협력을 위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중추 전략이다.

셋째로, 개방된 시장의 계산된 메커니즘은 민족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본, 지식, 그리고 노동의 새로운 배열과 영토화를 절합한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영향력 있는 저서인 『제국』은 경제적 세계화가 단일한 세계 노동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1) 그러나 다양한 구역들과 특정한 네트워크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은 노동 규제의 통일된 전망에 대한 강력한 주장에 도전한다. 오히려 나는 자본의 다른 방향들이 노동 규제와 노동 규율이라는 서로 다른 축들을 조정하는 예외의 공간들―“씨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횡방향 생산 체계는 통치성의 늘임뿐만 아니라 다수의 장소를 가로지르는 강제적 노동 체제를 가능케 한다. 따라서 위도의 공간들은 광범위한 지역들에 걸쳐 노동권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작용할 수 있는 규제적․감금적 노동 체제의 혼성 혼합물에 의해 형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줄적 통제는 다양한 장소들 사이로 노동이 이동하는 것에서 간헐적으로 생기는 뜻밖의, 자발적인 도전의 영향을 받는다.

넷째로, 자기 통치의 정신으로서 신자유주의는 특정한 맥락에서 다른 윤리 체제와 마주치고 절합한다. 개인주의와 기업가주의를 장려하는 시장 합리성은 시민권의 규범과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논쟁을 낳는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공적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여성적 미덕에 대한 논쟁을 촉진한다. 울라마들(Ulamas)은 일하는 여성들의 새로운 자율성을 반대하는 반면 페미니스트들은 이슬람의 한계 내에서 일종의 성 평등을 요구한다. 초민족적 인도주의가 상황적 윤리들을 대체했다는 견해와 달리, 신분과 도덕의 문제들은 경제적 합리성, 종교적 규범, 그리고 시민권의 가치에 의해 형성된 특정한 환경에서 문제화되고, 해결되었다.

실제로,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정도의 정치적․도덕적 요구들은 논리와 힘이 변화하는 연결점에서 협상될 수 있다. 정상화된 시민권과 헐벗은 삶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모형들에는 개념적 한계가 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은 사법법률적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과 “구별불가능성의 지역”에 거주하는 배제된 집단들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묘사한다.22) 그러나 특정 상황들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을 위한 협상들이 불명확하거나 모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이것이 특정 환경의 도덕적 문제들과 요구들을 확인하고 절합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NGO들이 하고 있는 복잡한 작업이다. 때때로 시민권 혹은 유사시민권적 보호를 빼앗긴 사람들의 단순한 생존을 추구하면서 심지어 기업 합리성이 발동될지도 모른다. 인도주의적 개입들은 일률적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종횡하는 관계의 변하는 장을 협상해야만 한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서로 환원되지 않는 구성적 관계의 배열을 절합한다. 오히려 민족지적 탐구는 이를 통해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상황적 실천들과 시장 주도 메커니즘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을 드러내 준다. 자기 통치의 기술들은 시민권의 요소들을 절합하고, 자기 경영적 가치들은 이동가능한 사회적 자격으로 번역되고, 기동적인 기업가 주체들은 다양한 장소들에서 유사시민권적 혜택들을 요구할 수 있다. 동시에 통치의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다르게 규제되고 세계적 순회에 연계되는 정치적 공간들을 구성한다. 이런 사회 공학(engineering)과 자기 쇄신(reengineering) 같은 반영적 기술들은 다양한 윤리 체제와 상호작용하면서, 시민권과 윤리적 생활에 대한 현대의 문제들을 결정한다.

이 서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절로 나뉜다. 첫째로 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들을 개관하고 왜 통치 기술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시민권과 주권의 현대적 변이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에 유용한 개념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로, 나는 시장 중심 합리성과 탈궤 및 재접궤할 수 있는 요소들의 집합이라는 시민권 개념을 제안한다. 셋째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규범성과 예외의 단순한 대립이나 개별성이 아니라 안전, 삶, 그리고 윤리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계산들, 선택들, 예외들의 변하기 쉽고 유연한 집합으로서 주권을 다시 생각하는 데 결정적 분석이다, 마지막 절은 어떻게 신자유주의 기획들과 도덕 경제들의 절합이 인간에게서 시민권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헐벗은 삶을 보호한다는 이익을 위해 재편성되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양상들


개념으로서 신자유주의의 계보를 짧게 개관해 보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적 논의는 20세기 초 자유 시장 메커니즘이 인간과 지구의 운명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경고로 시작해야 한다. 폴라니의 유명한 주장은 근대사회의 특징이 “이중 운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은 대항력을 만난다. 현대의 삶에 자유 시장이 미친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효과에 맞서는 자기 보호의 정치적 요구가 그것이다.23) 폴라니는 국가의 입법이 시장을 규제하고 이로써 사회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폴라니의 적수들은 법과 사회적 규범들이 사회에서 자원이 최선으로 사용되도록 보장한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는 대안적 경제 이론을 주관적 수준에서 제안했는데, 이 이론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적 행동들을 공적 자원들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보장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간주한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의 핵심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으로, 이는 시장 경쟁의 활기찬 조건에서 만들어진 도구주의적 형상이다.24) 하이에크의 관념은 1960년대 신자유주의 시카고 학파의 선도적 제안자였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25)과 게리 베커(Gary Becker)26)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학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물결인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와 연관되게 된다. 국내에서 신자유주의 학설은 “큰 정부”와 관료적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다. 기업화와 사유화를 늘리고 “효율성”을 도입하기 위해 국가의 공적 부문을 개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해외에서는 해외 시장 접근을 개방하기 위해 경제 자유화가 증진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동구권에 수출되었을 때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경제들을 경제 경쟁으로 끌어들이도록 개혁하는 일련의 “조정” 전략이었다.27) 해외에서 이런 사유화와 개방경제 정책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혹은 경제적 세계화라 불리었는데, 즉 무역 블록의 형성을 통해 민족에서 지역 수준으로 경제 계획의 국제적 변화를 지지하는 정책이다.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와 제프리 삭스(Jeffey Sachs)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시장 경제의 진화에서 불가피한 종점으로서 이해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같은 유명 인사들은 경제 세계화의 사회적 결과들을 비탄했고 자유롭게 배회하는 시장의 파괴에 반대하는 정치적 방어를 역설했다. 그러나 논쟁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을 심사숙고하는 동안, 대부분이 신자유주의가 “특정한 종류의 진보적 근대화의 표현”이라는 데 동의했다.28) 이 신자유주의의 두 번째 물결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특성들의 개인적 내면화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방식의 주체화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클린턴 정부 하에서 “개인에게 책임지우기”는 보건과 교육처럼 이전에 보조금이 지급되던 영역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으며, “근로연계복지” 사업의 원리로서 이용되었다.29) 요컨대 정치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의 주요 요소들은 (1) 공적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국가보다는 시장이 낫다는 주장과 (2) “‘경쟁적’․‘소유적’인, 그리고 종종 ‘소비자 주권’의 학설에 의해 해석되는 개인주의의 초기적 형태”로의 회귀다.30) 신자유주의의 추론이 경제적(효율성)이고 윤리적(자기 책임)인 주장 양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문과학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현대 생활의 다른 측면들을 평가하는 최고의 힘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 합리성의 범위, 조직 그리고 지식-권력의 차원에 대한 불일치가 있다. 사회 현상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민족적․세계적 수준에서의 구조 변화와 계급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의 재구성을 통해 주로 연구되었다. 신좌파의 비판은 신자유주의를 영국과 같은 선진 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 국가를 공격하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로 본다.31) 더 넓은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헤게모니적 세계 지배의 최종 단계로 개념화된다. 예를 들어 스티븐 길(Stephen Gill)은 신자유주의가 민족 국가와 초민족적 기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준법률적 재구조화에 의지하는 획기적인 질서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국제 규율 체제가 “시장 문명”과 관련된 사회적 위계와 불가피한 진보라는 헤게모니적 개념을 동반한다고 주장한다.32)

이런 양상들은 신자유주의적인 북반구 대 포위당한 남반구라는 구조를 만드는 인류학의 두 학파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북반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초자연적 경제, 메시아주의 운동, 그리고 다른 사회적 격변을 포함하는 남반구의 대응을 낳았다고 본다.33) 두 번째 관점은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을 집중하고 권력을 독점한다고 본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 국가”를 이상적 유형으로 내세우고 이에 따라 의식하지 못한 채 국가를 개별적인 실체로 제시한다. 이런 접근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인 동아시아와 대면할 때 개념적 문제에 마주친다. 하비는 “중국의 이상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명백히 중국의 사회주의적 구성체와 열광적인 자본주의 활동의 공존을 조정하는 분석적 어려움 때문이다.34) 앞으로 볼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개입들과 아시아 정치 문화의 역동적이고 새로운 결합은 단순한 지정학적 남-북 축, 혹은 민족 국가의 유형학에 기반을 둔 유형학적 접근에 도전한다. 우리는 지배적 국가들에서 시작해 소규모 국가들에 이르는 맹렬한 시장 주도 현상의 조류로 신자유주의를 다루는 것보다는, 다양한 기술들로 쪼개 보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주권적 실천을 허용하는 정치적 예외나 기존의 규범에서 벗어난 주체화 기술 같은 종류로 말이다. 동아시아 환경을 절합하는 신자유주의적 형태들은 대개 지방 문화적 감수성 및 민족적 동일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 기술관료들이 기업 의제들을 채택하고 인간 재능과 자기 경영의 이상을 정당화하는 동안, 많은 일반인들은 시장 기준 및 그것이 집단적 가치와 공동체의 이익에 가하는 공격에 대해 계속 양면적․회의적이다. 민족지적 연구가 마주한 도전은 “적절한” 행동 규모―민족이나 세계 또는 지방―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낳는 변이의 변동선을 조사할 수 있게 해 주는 분석적 각도를 식별해 내는 것이다.


통치기술로서 신자유주의


인류학자로서, 우리들은 거대 이론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현대 생활의 이질적 상황들에 대한 상황적 민족지 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커다란 문제들을 제기한다. 몇 년 전,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해석적 접근에는 “지반에 좀 더 가까이 머무르는 이론이 필요하다. … 오직 짧게 번뜩이는 추론만이 인류학에서는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더 긴 것은 형식적 대칭 속에서 학술적 멍함과 논리적 꿈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주제들이 살고 있는 개념적 세계”를 넘어서지만,35) 우리 접근은 여전히 저공비행이라는 특징, 담론적․비담론적 실천들에 가까이 머무르는 분석적 관점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의 목표는 다양한 인간 상황의 변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대 인간 현상을 중간범위에서 이론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사의 장소나 대상을 구성하는 구도들 안에서, 요소들을 탈구하고 재절합하는 변동선을 포착하려고 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문화”나 “구조”가 아니라 원래의 자원에서 탈맥락화할 수 있고, 상호 구성적이며 우연적인 관계들의 구도들 안에서 재맥락화할 수 있는 기동적인 계산적 통치 기술로 연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환경은 문제와 그 해결의 장소인 중간적 공간이다.36)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생명권력”이라는 푸코의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통치 양식으로 “생명과 생명의 메커니즘을 정확한 계산의 영역으로 만들고 지식/권력을 인간 생활을 변형하는 행위자로 만든다.” 생명의 관리에 집중하는 이 정치적 기술은 발전의 양 극 사이에서 동요한다. 한 극이 집중하는 것은 “기계로서의 신체다. 곧 신체의 규율, 신체 능력의 최적화, 그리고 그 힘의 강탈”이다. 다른 극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생물학적 기계장치이자 집단적 복리와 재생산의 기초인 종(種)으로서의 신체다.37) 따라서 생명정치는 생명력을 이용하고 추출하기 위해 주민들과 개인들에게 행해지는 일련의 규제적 통제들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삶을 통치하는 이런 기술들의 가장 최근의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근대 인간의 정치적 실존을 끊임없이 문제삼는 종속과 주체 형성의 정치를 위해 시장 지식과 계획에 의지하는 통치성일 따름이다.

영국의 통치성 학파는 신자유주의를 개인의 능동적 자유의 조건을 논리로 갖는 통치 기예로 보는 이론을 제안한다.38)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일반 경제 학설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시민, 주체의 자활적인 능력을” 근대 통치의 정언명령의 근거로 삼는 기술이다.39)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경험적 기획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자유로운 정치 질서의 기초로서 경제적 인간이라는 하이에크의 처방40)―가 다양한, 현대적 상황들에서 번역되고, 기술혁신되고, 작동되는지에 대해 조사하려고 한다.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는 “자유를 통한 통치” 양식으로서 신자유주의가 영국과 다른 선진 자유민주주의에서 지배적 통치 양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국가를 “축소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사회적인 것과 시민 주체들을 개조하는 기술의 확산을 동반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주민들이 일상생활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 보건, 교육, 관료제, 직업 등 ― 자유롭고, 자기 관리적이며, 자기 경영적인 개인들이 될 것을 요구한다.41)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국가에게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강요받는 자기 경영적인 시민 주체다.42) 예를 들어, “제 3의 길”이라는 깃발 아래에는 공동체 수준의 책임, 그리고 개인적 주체들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들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있다.43)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통치, 자기 통치, 그리고 정치적 공간들 사이의 연관을 재조직하여, 세계화된 불확실성과 위협에 기술적․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조건을 최적화한다.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지만, 북대서양의 상황 외부에서는 거의 조사되지 않았다. 실제로 “경제적 세계화”는 복수의 세계적 장소들을 가로지르는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이 이렇게 탈배태되고 재배태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는 탈식민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탈사회주의처럼 다양한 정치적 환경에서 전개된다.44) 신자유주의적 계산과 선택의 확산을 부추긴 것은 신흥 국가들에게 “정치적 기업가주의” 따위를 처방한 세계은행 같은 국제 기관들이었는데, 이 나라들에서는 평생 학습과 전문지식 담론들이 시민들이 국제지식시장에서 자기 관리하고 경쟁할 것을 권장했다.45) 삶을 최적화하는 데 집중하는 기술들의 배열로서의 신자유주의는 곳곳으로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의 단일한 국제적 조건들의 사례로 분석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배치들과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시민권의 윤리와 변화하는 형태를 우리가 사고하는 데 ― 예외로서의, 그리고 이에 대한 예외인 ― 신자유주의 통치 양식들의 개념적 함의는 무엇인가?


시민권의 절합과 탈구((Dis)Articulation of Citizenship)


일상 생활 위를 맴도는 분석의 관점은 계속되는 사회적 힘들과의 관계에서 윤리의 끊임없는 조정․재조정을 찾아낸다. 특히 시장 주도의 강요는 서로 다른 방식들로 시민권의 요소들을 재편성하면서, 한편으로 시민권의 통일된 모형을, 다른 한편으로 시민권 요구의 민족적 틀에 도전한다. 시민권의 시간적 차원이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덜 고정적이라는 것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으며, 관념들과 사람들의 흐름이 시민권 보호를 감소시키며, 요구들의 새로운 절합이 새로운 정치 공간들에서 출현한다.

지금까지 시민권의 유력한 개념들은 민족 영토에 뿌리내린 시민권의 권리들과 민족 국가 외부의 무국적 조건 사이의 이항대립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정치적-사법적 개념은 오직 민족 국가만이 인정된 정치적 소속을 통해 요구된 보호와 시민권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실제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다.46) 실제로 정치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은 망명자와 난민들에게 계속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는데, 이들에게 망명하는 국가에서 시민권을 얻는 것은 근대적 인간으로 인정받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이주자의 현대적 흐름은 한때 단일한, 영토화된 전체 속에서 얽혀 있던 시민권 요구를 풀기 위해 복잡한 방식으로 주권과 권리 담론에 상호작용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썼던 것처럼 형식적 시민권만으로는, 투표를 하고 정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다거나(정치적 권리들), 혹은 법 아래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시민적 권리들) 것이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샬(T. H. Marshall)은 평등한 시민들로서의 지위를 하락시키는 여성, 빈민, 소수자, 그리고 성적․계급적․인종적 차별 때문에 공격받기 쉬운 여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의 필요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회적 권리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냈다.48) 이 20세기 초의 시민권 개념은 ― 상상된 정치적 동일성으로서, 평등한 권리에 대한 권리로서 ― 민족 국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민족 영토에 고정된 일반시민을 통제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최근 권리 담론은 세계화의 흐름과 분란을 통합함으로써, 민족 국가의 범위를 넘어 시민권이 공유되는 공간을 개방하는 전략을 도입했다. 이 개방은 유럽연합(EU) 내의 지방적․지역적 수준에서 다양한 시민권 요구에 대한 논쟁을 가능케 했다. 권리옹호 운동들은 권리들과 혜택들의 다른 묶음으로 시민권이 “해체”되고, 이에 따라 유럽 국가들이 다양한 비(非)유럽 이주자들과 비(非)시민들을 다르게 통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49) 혹자는 제한된 혜택들과 시민의 권리들이 부분적 시민권의 형태, 혹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탈민족적” 정치 소속을 구성한다고 주장해 왔다.50) 이런 탈민족적 시민권 주장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이주자들이 얻은 이득들을 과장했을 수 있다.51) 또한 지배적 권리 담론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해체 과정 역시 진행 중이라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시장에 대응하면서 (특히 독일에서) 복지 국가가 축소된 것처럼 마샬적인 사회적 권리는 파괴되었다. 유럽에서는 이주자에게 유리한, 또 노동자들의 이익에는 반하는 권리와 혜택의 해체 과정이 진행 중이다.

나는 시민권의 탈구와 재절합을 다르게 생각한다. 시민권 요소들의 새로운 정렬이 근본적으로 기동적인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자기 통치의 기술들이 낳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조건들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의 기술들과 시민권의 요소들 사이의 분리와 재연결에는 시․공간적 차원이 있다. 첫째로, 이전에 시민권에 묶여 있던 구성요소들―권리들이나 자격들, 또 민족과 영토―은 서로 탈구되고 있으며, 타자들이 아니라 주체들의 특정 범주를 정의․평가․보호함에 있어 경제적 논리를 조장하는 통치 전략에 재절합되고 있다. 일부 환경에서, 신자유주의적 예외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계산적 실천들 그리고 우선적 시민으로서 자기 통치적 주체들이다. 동시에 주민의 다른 부분들은 신자유주의적 기준에서 제외되고 이에 따라 시민과 주체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 능력 혹은 시장 기술 수행의 차이는 기존의 사회적․도덕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과 외국 주민들 사이의 정치적 차별을 흐리게 한다.

세계적 순회에서, 교육받고 자기 추진적인 개인들은, 심지어 영토화된 시민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유사시민권적 자격과 혜택들을 요구한다.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은 형식적 시민권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자격의 형태를 구성한다. 심하게 자기만족적이거나 혹은 신자유주의적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민들은 가치가 떨어지는 주체들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은 신자유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외가 되고, 수송 중인 배제가능한 인민들로 구성되어, 성장 지역의 내외를 왕복한다. 우리는 특정한 권리들과 혜택들이 시장성이 높은 재능 보유자들에게 분배되고, 이런 능력이나 잠재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는 부인되면서, 정치적 소속과 민족 영토에서 자격들이 분리되는 것을 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법률적 시민 신분에서 분리할 수 있는 분배적 정의의 도덕화된 체계와 동맹을 맺고 있다. 시민권의 요소들, 기업가적 특성, 그리고 세계적 순환 사이의 절합은 우리가 오랫동안 시민권의 통일된 공간들과 동질적 집단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쪼갠다.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기술들, 그리고 시민권 요소들의 탈구와 재절합에 개념적 초점을 맞추면 시민권과 가치부여적인 기준에서의 변이들을 조사하는 문제 공간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절합들은 담론적 실천들을 전위의 조건 안에서 계속되는 시민권의 협상으로서 지시하기도 한다. 개념적 시간성으로서의 절합은 시장 합리성, 정치, 그리고 윤리의 특수한 배치 안에서의 우연적인 출현으로서 요구들을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세적 공간 내의 모순적 요소들의 번역이나 담론적 협상에 대한 강조는 요소들 사이의 예정된 반대나 적대적 입장을 슬쩍 비껴나지만, 예상치 못한 가능성들과 해법들에 대한 개념적 개방성을 유지한다. 호미 바바(Homi Bhabha) 역시 권력의 역류에서 새롭게 전유되고 재해석되면서 문화적 의미의 불안정성을 유지하는 “언표행위의 모순적이고 모호한 공간”에 대해 언급한다.52) 맥락 특수적인 질문들은 어떻게 대립하는 해석들과 요구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들과 주도권들을 방해하고, 늦추며, 빗나가게 하고, 협상할 수 있게 하는지를 포착하게 해 준다. 이 변동하는 공간의 전달, 번역, 그리고 협상의 시간성은 정치적 정교화, 우연성, 모호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질적 사건들과 힘들의 교차지점에서 있는 언표행위의 시간성은 세계시민적 시민권의 전면적인 요구들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는 탈규제된 시장의 맹공격과 그것이 공적 생활에서 “민주주의의 결핍”을 만드는 것을 탄식했다.53) 그는 사회 보장, 공적 사회 서비스, 성적․계급적 규범, 사형제도 폐지 등과 같은 소중한 이상들을 방어할 수 있는 유럽 전체 수준의 공적 영역과 헌법의 창설을 요청했다. 유럽 문명과 공유된 정치적 민주주의 문화에 대한 이런 요구들은 증가하는 세계시민주의 사고와 감정들, 세계시민주의 시민권 담론의 출현을 반영한다. 유럽의 논평자들은 국제연합(UN)과 인권기구들과 같은 다자적 기관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세계적 공적 영역을 지목해 왔다.54) 그러나 더 큰 포괄성과 연대의 감정은 세계시민주의 제도들의 실질적 창설과 융합할 수 없다. 실제로 일부 관찰자들은 칸트의 세계시민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다원화된 세계 공동체들은 여전히 현실보다 훨씬 이상적이라고 주장한다.55) UN은 자신의 많은 인권적 수단들을 집행할 힘이 부족하며, 인도주의적 개입들을 주창하는 ― 혹은 군사적 침략을 개시하는 ― 선도국들의 영향력에 매우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선제공격은 세계시민적 권리라는 이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어떻게 UN이 모든 인류를 위해 이야기한다는 잃어버린 권한을 회복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게다가 세계시민주의의 가치들―개인주의, 보편성, 그리고 일반성―은 역사적으로 비-유럽 사회들의 정복과 변형에 연관되기도 했다.56) 세계시민주의의 담론들은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명의 결정적 일부였고, 따라서 이전에 식민지 경험을 겪은 나라의 인민들은 이를 회의적으로 대했다.57) 따라서 우리의 시민권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예정된 불가피성의 목적인에 의지하지 않고 시․공간적 상호관계의 장 안에 있는 언표행위의 상황적 본성을 특정하는 것이다. 지정학, 시장 논리, 예외들, 그리고 윤리 담론의 상황적 얽힘은 우연성, 양가성, 불확실한 결과들에 대해 개념적으로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주권과 예외


최근 몇 년 동안 주권의 공간성은 근대 권력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다. 한 입장은 “신 국제 관계” 학파다. 존 러기(John Ruggie)는 세계화가 국가 권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주권이 “영토적으로 정의되고, 고정되며, 적법한 지배의 상호 배제적 비지(飛地)”의 속성이라고 단언한다.58) 이 단일한 공간성과 대조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은 도시-농촌 분할에 기반을 둔 “이원적 국가”의 식민지 유산이 아프리카의 주권 지배를 계속 구조화한다고 주장한다.59) 아프리카의 주권에 대해 더 미묘한 관점은 수도에 고립된 국가 장치들, 요새-창고, 법인 비지, NGO가 관리하는 공간들에 대한 묘사를 포함시킨다.60) 나의 관심은 이것들과 중복되지만, 나의 개념화는 이전의 식민지 분할 통치, 군국주의적 축적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약탈자들, 혹은 “세계 자본”과 NGO들의 침략 안에서 공간적 동역학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보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예외의 선택적 배치이며, 다른 한편으로 주권의 공간화하는 실천에서 도구화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다. 신자유주의와 그 예외들에 의해 절합되는 이 공간화의 동역학은 동아시아의 환경에서는 다른데, 여기서는 아프리카의 약하고 분산된 정치 구성체와 비교할 때, 국가가 더 강건하고 집중화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관점은 정치적 규범성에 대한 예외에서 야기되는 위기 및 도전에 대응하는 전략적․상황적 권력 행사에 기반을 둔다. 그는 “모든 법은 ‘상황의 법’”이라고 주장한다.61) 예외의 우발적인 이용―신자유주의적 기술이나 신자유주의의 배제처럼―은 몇몇 아시아적 맥락에서 능숙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중국이 세계 무대에 재등장할 때의 특징은 “경제특별구역”(SEZS, 경제특구)과 “행정특별구역”(SARS, 행정특구)의 창설이었다. 이 새로운 공간들은 노동시장의 특별한 공간들, 투자 기회, 그리고 상대적인 행정적 자유를 구획하는 메커니즘과 절차에서 제도화된 계산적 선택의 기술에 의해 출현했다. 이 공간들을 구역으로 약호화하는 계산적 메커니즘은 특별과세와 투자 계획, 도시 예산, 기간산업 개발,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율적 통치를 포함한다. 이 경우 예외의 논리는 집중화된 사회주의 생산의 위기에 대응하고, 국가의 나머지 지역들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공간과 조건들을 만들어 낸 시장 개혁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4장)

아시아의 환경에서 예외의 선택지는 국가가 그들의 영토를 분할해서 세계 시장에서 더 잘 종사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 신자유주의적 계산들은 인간 영토권의 실천, 혹은 지정학 공간의 재기입을 통한 주민의 통제에 적용된다.62) 중국의 사례가 예증하는 것처럼, 구역화 기술은 경제적 자유와 기업가 활동의 실험을 위한 대안적 영토성을 부호화한다. 예외의 논리는 세계적 순회의 특정하고 다양하며 우연적인 관계의 형성을 위해 인간 영토권을 분할한다. 이에 따른 단계적 혹은 다채로운 주권의 유형은 국가가 세계적 도전에 맞서는 동시에 질서와 성장을 확보하는 양자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예외의 논리를 통해 산출된 이런 전략들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근대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참여적 시민 주체들의 “계몽”에서 일괄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점 역시 중요하다. 국가가 형식적 주권을 계속 유지하는 동안, 기업들과 다자적 기관들은 특별 구역에서 주민들의 생활․노동․이주 조건에 대해 사실상의 통제를 빈번하게 행사한다. 주권 국가에서 융합되었던 행정적 통제, 시민권, 영토성이 따로 떨어져 작동하는 것에서 우리는 사실상 중복하는 주권들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예외는 주권과 시민권 사이의 솔기를 억지로 열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 너머를 보아야만 하는 저숙련 시민들과 이주자들의 연속적 수준의 불안전을 낳는다.63)

따라서 예외는, 서로 구별되는 경제 활동이 복수의 단계를 지닌 구성체 안에서 뒤섞인다는 정도의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혁신적 공간 행정을 제도화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세계화의 공간을 조사하는 적절한 규모가 지방, 도시, 주, 국가, “지역 경제”와 같은 기존의 행정 단위라고 본다.64) 다른 관점은 국제적 힘들의 효과가 개인, 도시, 민족, 그리고 지역적 규모에 따라 동요한다고 생각한다.65) 그러나 규모의 언어는, 그 자신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을 위험이 있는 개념적 구조물을 투영한다.66) 이 규모의 이미지는 우리가 공간을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보고, “물질성을 끊임없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재묘사”해야 할 때, 시장적 계산은 정치적 전망의 경제학적 구조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시사한다.67) 예외 공간의 논리는 공간들이 항상 이전의 정치적 경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과 흐름의 신중한 동원이 제공하는 기회들과 관련지어 인간 영토권을 분리하는 신자유주의 계획들에 의해 출현한다.

예를 들어, 주권의 예외는 “외부” 공간들과 주민들 모두에 대해서 더욱 유연해졌다. 아시아의 어떤 맥락에서는 유동적 “생태계”라는 용어로 외부 환경의 탄력적 가능성을 기술정치적으로 재개념화한다. 민족 국가는 고정된 영토권이라는 식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기업가적 통치성은 광범위한 자원들에서 전문가, 지식, 그리고 기술들을 입수해 온다. 최적화의 논리와 상호작용의 밀도에서 오는 공생적 상호의존 및 상승작용이라는 생태적 원리 사이에는 흥미로운 수렴점이 있다. 기술관료들이 아시아의 도시들과 도시의 외부 환경을 재설계함에 따라, 민족적 영역은 특화된 마디들로 분할되고, 세계 자본주의의 “활발한 생태계”에 배태된 집(oikos)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기술관료들은 생명기술 연구의 미개척분야를 활기 있게 개발하기 위해 지식 자본, 연구 기관, 그리고 과학자들을 모으고 있다. 생명 형태의 임계질량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승 작용, 공생, 적소 형태, 양성 등 생태적 원리는 생명정치적 상호관계로 탈구, 재절합되는 초민족적 공간에 모국을 재입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을 고취시킨다.

우연적 공간화는 예외의 논리가 초민족적 생산 네트워크의 규율적․규제적 체제를 혁신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경제적 세계화의 지도제작법은 국제적․민족적․거대도시적․지방적 수준의 위계적 도식이라거나, 규제적 서구 사회 대 규율적 아시아 사회로 분할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하트와 네그리는 질 들뢰즈(Gille Deleuze)를 통해서 우리가 규율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했는데, 후자에서 통제의 “메커니즘”은 특정한 규율 기술의 작동을 통하기보다는, 더 “민주적”이 되고 “시민들의 두뇌와 신체를 통해 분배된다.” 통제 체계는 “부유적”(浮游的)이고 본성상 조절적이며, “탈약호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고른 공간”을 산출한다. 노동 체제가 세계적으로 단일하다는 가정에 힘입어 하트와 네그리는, 생산력의 “탈지역화”가 노동 착취를 탈맥락화하고 “비배치가능하게”(non-placeable) 만든다고 주장한다.68) 설사 이 정식화를 성급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유연한 초민족적 네트워크를 비규율적 노동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민족지적 연구가 보여 주듯 초민족적 생산체계는 노동 통제의 감금적 양식을 계속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예외의 논리는, 통치성의 체계와 노동 감금 체제의 조정에 의해 형성되는 홈이 파인 공간들―혹은 “씨줄들”―을 새겨 넣는 초민족적 네트워크 안에서 노동과 관리 체제가 결합할 수 있게 해 준다. 게다가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동 전술과 반란들은 몹시 맥락 특정적인 경향이 있으며, 이들은 세계적 시민권이라는 약속을 가지고는, 세계적 대중운동 혹은 다중들과 쉽게 합체되지 않는다. 요컨대 기업 경영의 실행이 매우 기동적일지라도, 다양한 구역들에서 이를 전달․번역․실행하는 것은 항상 상황적이며, 정치적 가능성 면에서 다양하고 우연적인 제도화된 노동 실천들의 배열에 의존한다.(5장)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 사이의 동요는 또한 윤리적 지리학과 자칭 NGO가 행정을 담당하는 공간을 출현시킨다. 예를 들어, 포함과 배제의 정치가 교차하면서 국외로 이주한 인재들이 전형적인 이상적 시민으로 통합되는 반면, 노동력 착출을 위해 들여온 저숙련 이주자들은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상황들이 창출된다. 이런 비시민들이 이주 노동자나 외부인자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해 달라고 흔히 호소하는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비정부 기관들이다. 여기서 이주 노동자, 밀입국한 개인들, 그리고 망명자들을 위한 요구를 NGO가 절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의 공간들을 그려낼 수 있는 규범적 메커니즘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이 공간들은 이주 노동의 순환과 이들의 착취의 분배에 의해 암시된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생명지도학을 그려냄으로써 NGO들은 이주 노동자와 밀입국한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초민족적 의미를 놓고 다양한 정부들 및 문화적 권위와 협상한다. 요컨대 출현하는 요구들의 지리학은 시장도 국가도 아닌, 이 양자와 절합하는 새로운 정치 체계들에 의해 그려진다.(9장) 따라서 시민권과 윤리의 문제는 공간들, 노동, 그리고 삶을 관리하는 다양한 제도의 교차 속에서 뒤얽힌다.


헐벗은 삶: 윤리의 예외들?


경제적 세계화의 기술들은 다소간 가치 있는 주체들, 실천들, 생활양식, 그리고 좋은 것의 시각에 대한 도덕적 계산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윤리는 특정한 존재 양식을 얻기 위한 자기 돌봄의 규범적 기술, 혹은 자기의 실천이라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의미다.69) 따라서 윤리 체제는 특정한 윤리적 목표에 일치하는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주어진 가치들을 따르는 생활양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종교들은 ― 내 생각에 페미니즘, 인도주의 혹은 다른 덕의 체계들도 마찬가지다. ― 특정한 형태의 자기 행실과 좋은 생활의 전망을 촉진하는 윤리적 체제들이다. 시민권의 윤리적 개념들은 특정한 민족의 핵심 가치들을 표현하는 주체들의 존재 양식, 민족 정신의 표현을 포함한다.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민족 문화, 인문학, 그리고 종교들은 “상상의 공동체”, 곧 공공선의 공유된 전망을 형성하는 데 상호작용해왔다.70)

시민권에 관한 더 넓은 개념들은 공유된 인간성이라는 계몽주의의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난민과 무국적의 사람들로 가득 찬 유럽의 한 가운데서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의 인간의 조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종사하는 세 종류의 근본적 인간 활동을 통해서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생물학적 생명 형태, 노동하는 존재, 정치적 행위자가 바로 그것이다.71) 이 통일된 인간의 조건 개념은 무국적자들이 시민권에 대한 권리를 국제적으로 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이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아감벤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관념을 개작한다. 민족적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었기 때문에, 미등록 노동자, 망명자, 그리고 전쟁 피난민들은 “헐벗은 삶”이라는 비인간적 조건으로 떨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주권 국가는 시민들에게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근대적 인간성을 생산함과 동시에, 비시민들에게 이를 부인함으로써 헐벗은 삶을 생산한다. 오직 (정치체로서) 인민/국민(People)과 (배제된 신체들로서) 인민/민중(people) 사이의 분할을 삭제하는 것만이 시민권을 거부당해 온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에게 인간성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고 그는 단언한다.72) 따라서 민족 국가가 부여하는 단순한 권리로서 시민권을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비시민들과의 보다 넓은 연대로 전환하게 되는데, 자신들이 인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그들의 요구는 세계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우리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아감벤은 인간성의 보편적 규범을 생활 조건에 관한 유일한 분석적이고 윤리적인 척도로서 제시한다. 또한 예외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에 맞서서만 발동된다는 지각도 있다. 주민들이 법적이고 단순하게 둘로 나뉜다는 것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면 두 가지 개념적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이 축은 대안적인 인간성의 윤리 규범을 제기하는 다른 보편화적 도덕 담론―특히 위대한 종교들―의 유효성을 평가절하한다.73)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는 초민족적 덕목에 대한 고유한 시각이 있으며, 여기에는 인권의 견지에서만 배타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윤리들에 관한 고유한 내적 투쟁들이 동반된다. 1장에서 나는 이슬람 공동체―움마(umma)―가 어떻게 윤리적 주체 형성과 영적 소속의 절합을 보편화하는 도식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세계화된 초고속 성장의 장소들 역시 인권 담론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황적인 윤리 체제들을 절합한다.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인류를 보편적으로 분할하는 아감벤식 도식을 엄격히 고집하게 되면, 작용하고 있는 다수의 윤리 체계의 풍부한 가능성들과 복잡함을 놓칠 수 있다.

인권 이외에도, 좋은 삶에 대한 다른 비전들 역시 주어진 생활 영역 내에서 덕의 수행에 대한 윤리적 요구와 규범적 지침을 제공한다. 생명정치와 기술적 이성의 상호작용은 현대 생활의 윤리적 문제들에 형태를 부여하며, 인간의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법들이 이 변화하는 모체 내부에 제기된다. 스티븐 콜리어(Stephen Collier)와 앤드류 레이코프(Andrew Lakoff)는 “생활 체제”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이를 “문제적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발동되고 재작동되는 도덕적 이성의 상황적 형태”라고 정의한다.74) 만약 현대 생활 체제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점점 더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다면, 윤리적 주체 형성은 보편화된 인간 관념에 연동되기보다는, 요소들의 특정한 구도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영속적인 예외 상태의 헐벗은 삶이라는 아감벤의 근본적 준거점은 영토화된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요구의 복잡한 협상 가능성을 무시한다. 시민권 외부에 있는, 모든 비시민들은 “내부와 외부, 예외와 지배,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구역으로 떨어지는데, 여기서 주관적 권리와 사법적 보호의 개념들 자체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 권력은 아무런 매개도 없이 순수한 삶에 지나지 않는 것을 대면하게 된다.”75)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엄격한 이항대립에서 아감벤은 도덕적 보호와 적법성의 요구를 지지할 수 있는 복합적 구별이나 비-권리적 매개의 가능성을 제외해 버리는 것 같다. 포로수용소를 근대 주권의 규범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민족지적으로 부정확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변화하는 인간성의 법률적․도덕적 영역은 무한히 더 복잡해진 것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세계적으로 배제된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일부 국가의 법률적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존의 끈만을 붙잡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이주 노동자, 난민, 밀입국자들은 훨씬 더 위태롭고 포착하기 어렵다. 법률적 시민권이 인간 보호의 다만 한 가지 형태일 뿐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이 권리의 환경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주 숨겨져 있거나 “실패한 국가들”에 살거나, 실향유민인 까닭에 일단 이동하면 사실상 권리들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런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서, 법률적 시민권은 단지 인간성을 (재)정리하고 (재)평가하는 다수의 도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점차 다양한 다자적 체계들 ― 다국적 기업들, 종교 조직들, UN 기관들, 그리고 다른 NGO들 ― 이 학대받고, 헐벗으며, 그리고 금이 간 신체들의 특정하고 상황적이며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개입한다. 배제된 인간성의 비국가적 행정은, 불연속적이고, 어긋나 있으며, 우연적인 특성을 띠기는 하지만, 새로운 초민족적 현상이다. 콜리어와 레이코프는 이런 상황들을 “헐벗은 삶의 대항 정치”로 묘사한다. ―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요구라는 견지에서” 주장할 수 있도록 헐벗은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으는 상황적인 도덕적 추론의 형태로서 말이다.76) 실제로 헐벗은 삶은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정당성이 있으며, 윤리와 노동에 대한 헐벗은 삶의 관계는 항상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에 열려 있다. 인간의 비참에 대한 해법은 항상 까다롭고, 불만족스러우며, 힘겹지만, 정치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는 우리의 세계적 양심을 짓누르며, 현실적으로 국가와 도덕 경제, 시장 제도들의 논리와 결합되어 왔다.77)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난한 시민들은 질병과 기아, 전쟁 때문에 더욱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국가가 아니라, 제약 회사들에게 대해 요구를 제기하는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담론과 절합되면서, 인간 지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78) 생물학적 생존에 기초를 둔 집단적 요구의 또 다른 사례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 이주자 주민들은 해외에서 심한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경우 외부자의 지위와 인종에 기초를 둔 생물학적 타자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력을 도입한 사회의 도덕 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적 복지의 요구들에 의해 역전될 수도 있다.(9장)

요컨대 헐벗은 삶은 구별불가능한 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 공동체, NGO들, 그리고 심지어 기업들의 개입을 통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성이라는 다양한 범주들로 전환되고 재조직된다. 이런 기술윤리적 상황들은 힘을 가진 자들과의 잠재적 제휴, 우선적인 이익, 특수한 요구 등과의 연관 속에서 인간성의 등급을 매기는 인도주의-기업 복합체의 권력이 증가했음을 가리키는 지표다. (치료받을 수 있는 시민권, 생물학적 복지, 그리고 도덕 경제 등) 도덕적 요구의 절합은, 아마 인권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빈번하게, 위압당한 인간적 문제에 대한 임시변통적이거나 일시적인 해결책을 틀지울 것이다. 상황적인 NGO의 개입들은 그들이 현장에서 마주치는 정치적․윤리적 힘들의 연결망에 의해 자주 결정된다. 요컨대 생존의 대항정치들은 생명정치, 노동시장, 그리고 덕의 체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화된다. 이런 윤리적 문제화는 인권이나 시민권을 우회하여, 우연적이고 모호한 인간의 윤리적 지평을 반영하는 해법들에 의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외들과의 관련 속에서 변모하는 시민권의 모든 측면들을 다룰 수는 없다. 아시아 태평양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들은 서로 융합되었던 것들 ― 동일성, 자격, 영토권, 그리고 민족성 ― 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기술들과 주권의 예외들에 의해 혁신적인 관계와 공간들로 갈라지고 재편성되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장소들을 제공한다. 신자유주의 형태들, 주권의 실험, 그리고 시민권 체제들의 새로운 절합은 현실화되는 것들과 인간이 되는 것의 정치적․공간적 가능성들을 발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정한 통치와 자기 통치 기술들은 책략, 협상, 그리고 윤리적 의심의 다양한 의미와 공간들을 산출한다. 명확해 보이는 것은 예외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신흥 경제에 대한 특공대식 습격이건, 통치 이성에 대한 비밀스러운 잠식이건, 자기 혁신과 자기 경영의 기술이건 간에, 통치와 시민권에 대한 전통적 사고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리들, 자격들, 그리고 요구들은 이제 NGO의 개입과 지식 흐름, 통치의 시장 주도적 양식에 의해 배열되는 역류와 힘의 장에 쉽게 순응하고 종속된다. 예외의 논리에 의해 생겨나는 무수한 탈구와 재절합은 우리가 통일된 시민권 개념과 연관시키곤 했던 요소들을, 점차 다양해지고, 파편적이며, 우연적이고, 모호하지만, 그러나 윤리정치적 비판에 영속적으로 종속된 인간성에 놓인 가치들로 변형시킨다.


1) Ong, Flexible Citizenship, chap. 7


2) Safire, "Inside a Republican Brain."


3) "Bush Pledge Broad Push."


4) 자산을 소유한 부르주아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시민권의 초기 개념에 대한 계급에 기초한 비판은 Marx, "Jewish Question," 33~34를 보라.


5) Bush, "Inaugural Address."


6) 어빙 크리스톨 같은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시장 합리성이 미국 민주주의의 도덕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보주의의 이런 주장이 페미니스트 웬디 브라운에게 어떻게 반향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논의는 Cruikshank, "Neopolitics."를 보라.


7) Rose and Miller, "Political Power beyond the State."


8) Collier and Ong, "Global Assemblages, Anthropological Problems."


9)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


10) Foucault, "Governmentality."


11) Foucault, "Ethics of the Concern for Self," 300.


12) Barry, Osborne, and Rose,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13)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


14) Agamben, Homo Sacer, 26~28.


15)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


16) Arendt, Human Condition.


17) 예를 들어 Scott, Setting Like a State; and Ferguson, Anti-Politics Machine.를 보라.


18) Sassen, Global City, and "Local Cities," 2.


19) 이 생태학의 정식화는 “국제 도시-지역”모델과는 개념적으로 다르다. A.J. Scott, "Globalization and the Rise of City-Regions," Research Bulletin 26, July 19, 2000.을 보라. www.lboro.ac.uk/gawc/.


20) Insiti and Levien, "Strategy as Ecology," 69.


21) Hardt and Negri, Empire.


22) Agamben, Homo Sacer, 170.


23) Polanyi, Great Transformation.


24) Nishiyama and Leube, Essence of Hayek.


25) Friedman, Capitalism and Freedom.


26) Becker, Human Capital.


27)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위의 요약은 Peters, "Neoliberalism."에 의거한 것이다.


28) Pabst, "Immanence, Region, and Neo-liberalism."


29) 1996년에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은 “Personal Responsibility and Work Opportunity Reconciliation Act."를 승인했다. 이는 복지 수급자들이 “노동복지” 프로그램에 참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를 끝냈다.


30) Peters, "Neoliberalism."


31) Hall, Hard Road to Renewal.


32) 이 관점은 Gill, "Globalization, Civilization, Neoliberalism."에서 잘 제시되어 있다.


33) Comaroff and Comaroff, "Millennial Capitalism."


34) Harvey, "Neoliberalism," Ⅱ; 강조는 인용자.


35) Geertz, Interpretation of Culture, 24.


36) Paul Rainbow (Anthropos Today, 16~17)는 “문제와 그 해결의 장소는 문제적 상황이다.”라고 쓴다.


37) Foucault, Introduction, 143, 139.


38) Barry, Osborne, and Rose,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and Rose, Powers of Freedom.을 보라.


39) Barry, Osborne, and Rose, introduction to Foucault and Political Reason, 64.


40) Von Hayek, Political Order.


41) Rose, Powers of Freedom, 27~28.


42) Gordon, "Governmental Rationality," 43~44.


43) Rose, "Governing 'Advanced' Liberal Democracies," 56.


44) 신자유주의 계획들이 리시아에서 어떻게 탈사회주의적 관리 시행을 절합하는지에 대한 분석으로는 Collier, "Spatial Forms and Social Norms."블 보라.


45)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를 보라.


46) Arendt, Human Condition.


47) 예를 들어 Bhabha and Coll, Asylum Law.를 보라.


48) Marshall, Class,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49) 예를 들어 Benhab, Claims of Culture.를 보라.


50) Soysal, Limits of Citizenship.


51) Castles and Davidson, Citizenship and Migrant, 18~19.


52) Bhabha, Location of Citizenship, 37.


53) Habermas, "Why Europe Needs a Constitution"; Delanty, Citizenship in a Global Age.


54) 이것은 Held 외, Global Transformation에서 제시된 세계시민주의 질서 출현의 증거다.


55) 예를 들어, Delanty, Citizenship in a Global Age.를 보라.


56) 세계시민주의의 한계와 위험에 대한 논의로는 Bowden, "Perils of Global Citizenship."을 보라.


57) Ong, introduction to Flexible Citizenship.


58) Ruggie, Constructing the World Polity, 180.


59) Mamdani, Citizen and Subject, 16~18.


60) Roitman, "Garrison-Entrepot"; Ferguson, "Seeking Like an Oil Company."


61) Schmitt, Political Theology, 13.


62) Sack, Human Territoriality.


63) Linklater, "Idea of Citizenship."을 보라.


64) 몇몇 이론가들은 세계화의 분석 공간이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Ohmae, End of Nation State.를 보라.


65) Kelly and Olds, "Question in a Crisis“


66) 개념적 경고의 필요성은 Brenner, "Limits to Scale?"에서 볼 수 있다.


67) Harrison, Pile, and Thrift, Patterned Ground, 36, 40.


68) Hardt and Negri, Empire, 23, 328~29, 332, 210.


69) Foucault, "Ethics of the Concern for Self," 282.를 보라.


70)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를 보라.


71) Arendt, Human condition, 7~9


72) Agamben, Homo Sacer, 177, 180.


73) Rainbow, "Midst Anthropology's Problems," 47~48을 보라.


74) Collier and Lakoff, "Regime of Living," 23.


75) Agamben, Homo Sacer, 170~171.


76) Collier and Lakoff, "Regime of Living," 29.


77) Cohen, "Operability, Bioavailability, Exception."


78) Nguyen Vinh-kim, "Antiretroviral Glob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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