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그 부끄러움은 아직 무덤에 가지 못한다 -5.18 광주학살/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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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5.18 광주학살/항쟁 27주년이 돌아온다. 내 기억 속의 광주는 아직도 늘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80년대 후반생들이 대부분인 요즘 대학생들에게는 5.18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3.1절이나 4.19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교과서 속의 아스라한 옛일로 받아들여진다. 하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77년은 6.25가 27주년을 맞았던 해인데 그때 내게도 6.25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이 그저 5.18이 대강 무엇이었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나마 6.25는 우리가 자라던 내내 '상기하자 6.25!'라는 반복되는 냉전적 훈육과 주입을 통해 늘 강박적으로 호명되던 기호였지만 '상기하자 5.18!'식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는 요즘 세대들에게 5.18도 모르냐고 퉁박을 주는 것조차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대한 기념공원과 연례적인 국가의례와 보상과 교과서 수록 등으로 이미 국가적으로 전유된 공식기념일이 됨으로써 5.18은 그 본연의 선연한 핏빛 아우라조차 안전하게 박제처리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얼마 전 5.18민중항쟁 서울시 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주최한 5.18 민중항쟁 기념 서울시 청소년 백일장 및 사생대회 운문부 장원을 차지한 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그 작품을 각자의 블로그에 퍼 담았고 게시판마다 화제가 된 듯했다. <그날>이라는 제목의 그 작품 전문을 일단 인용해 본다. 그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디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적 화자의 '그날'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의 막힘없는 흐름 속에서 (물론 '놈'보다는 '아그'라는 아랫사람에 대한 전라도식 애칭을 사용했으면 더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훌륭한 산문시다. 서울 강남에서 여고 3학년에 다니는 18세의 여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구체적 서사성을 획득한 시를 써낼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여학생의 부모나 부모세대의 친지가 들려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위를 하다가 계엄군에 쫓겨 다급하게 지나가던 시적 화자의 자전거 뒤에 올라탄 고등학생과 그를 잡아가기 위해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계엄군, 겁이 나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해버린 화자, 결국 그 학생 '어린 놈'은 끌려가고 아직도 그날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화자…. 상황의 급박한 속도감과 전라도 사투리의 느린 전달감이 절묘한 엇박자를 이루는 가운데 "갑시다 갑시다"라는 절박한 청유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그 학살과 항쟁의 기억은 수많은 학술대회와 추도사와 공식 기록 속에서 이제 한국민주주의의 권화로, 민중항쟁의 기념비로 남게 되었지만, 사실 그 순간을 함께 살았던 구체적인 인간들에게는 그날 생사의 기로에 선 희생자들이 내뻗은 "갑시다"라는 간절한 연대의 손짓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어떤 기념비도 호사한 무덤도 교과서도 결코 덮지 못한다. 더구나 그 시절 한때 그 기억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특권화하고 그것을 한갓 '저항의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배에 기름 낀 운동베테랑들의 그 어떤 회고담도 그 부끄러움을 장송할 수는 없다. 설사 학살원흉이 밝혀져 그날의 구호처럼 그 원흉을 '찢어 죽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부끄러움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광주학살/항쟁을 27년이 지나도록 현재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렇게 절망적 상황에서 고립된 채로 고통받거나 죽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실천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8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인권사각지대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투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 온갖 투기적 개발에 의해 생존의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가는 사람들…. 사실은 다수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타자화되고 주변화되어 소수성을 강제당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그때 광주에서 처절하게 고립되어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 남았어야 했던 광주시민들은 지금도 생생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그날이 남긴 부끄러움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속되고 있는 이 저강도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전환시키지 않는 한 광주학살/항쟁의 기억은 그저 '추억'으로 남아 연례적 기념행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갈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가 몰고 가고 있는 자동차 뒷좌석에 황급히 뛰어들어 '갑시다, 같이 갑시다'하고 울면서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당신 누구냐고 빨리 내 차에서 내리라고, 나는 당신 아는 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한 어린 여학생의 시 한 편을 읽으며 나는 진땀을 흘리면서 자꾸 내 등 뒤를 돌아본다. |
#하루종일 비가 내린 하루였다. 그때는 태어나지 조차 않았고, 아직까지 광주에 가보지도 못한
나지만 광주하면 언제나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포의 감정이다.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싸울 수 밖에 없는 싸움이 있을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언젠가 오정희 소설집에서, 사는 일이 언제까지는 무서움뿐이더니 언젠가부터는 부끄러움
뿐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거기에 공감하고픈 유혹을 느꼈었다. 근데, 과연 그래도 되는건가
새삼 묻게 된다. 무서움을 부끄러움으로 뒤바꿔쳐도 되는걸까?
그렇게 해서 철든다는 것이 길들여지고 비겁해지는 것이라면? 내 자신의 비겁함과 나약함은
내가 더 잘 알지만, 그래서 그만큼 자신없는 물음이지만 두려움에 벌벌 떨리는 몸을 가다듬고서
역사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지 않을까? 그게 역사의 획을 긋는 한 사건 속에서든, 일상 곳곳에 퍼진
권력관계 속에서든, 그래서 혁신(변덕)으로서 또는 충실(고집)으로서의 주체이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저 두려움에 질린 학생들을 환대할 수 있는지... 분명한 건 나 혼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데. 27년 전,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 앞에 떳떳한 시민들이 있었다.
망각과도 싸우고 어설픈 화해와 중재와도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