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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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인권’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여러 사상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로 운위되는 것이 ‘인신의 자유’(habeas corpus)라는 것이다. 이 라틴어의 원 뜻은 “내 몸은 내 것이다”(I have my body)라는 말이라 하는데, 13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소위 대헌장(Magna Carta)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헌법적 위치를 가진 구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생겨난 구체적 맥락은 ‘인신의 자유와 영혼의 자율성’과 같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다기보다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이하학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인신의 자유가 요구되었던 것은 ‘소유권’의 확립을 위한 한 장치로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영국의 존 왕(King John)은 전쟁 등을 명분으로 하여 무척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여기에 대해 반발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뭉쳐서 왕이 함부로 신민들의 재산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왕권을 제한하는 것이 그 대헌장이라는 것의 역사적 맥락이었다. 어째서 인신의 자유가 여기에서 관련이 되는가? 서구에서나 동양에서나 권력자가 인민에게서 재물을 뜯어내는 방법이 가렴주구(苛斂誅求) 혹은 글자 그대로 끌어다놓고 주리를 틀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렴주구와 같은 잔혹 행위를 원천적으로 방지해야 했고, 여기에서 ‘인신의 자유’라는 생각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인권과 소유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대헌장의 정신을 고도의 정치 철학으로 발전 승화시켰던 존 로크(John Locke)의 자유(liberty) 개념에서 보인다. 그는 자유란 다시 세 가지 즉 ‘자유, 생명, 재산’(liberty, life, property)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유권이 ‘인신의 자유’와 동일한 정도로 인간 권리의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나의 인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소유가 없다면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반대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산속에서 노상 강도를 만날 경우의 상황이란 나의 인신의 자유의 위협과 나의 소유의 위협이라는 것은 두 개로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은 내 소유를 건드리기 위함이요 내 소유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미권 국가들에서는 다른 이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할 경우 엄벌을 받을 수 있으며 때때로 그 땅주인의 총알 세례(!)를 감수해야 할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소유권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천부 인권으로 보는 관념은 영미 세계의 정치 사회 사상에서 지배적 전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논리적 맹점이 있다. 대헌장이나 존 로크의 저작이 상정하고 있는 사회 상태는 군주가 신민을, 또 인민들 각자가 서로서로 인신과 재산을 마구 노리는 늑대와 같은 상태이다. 이렇게 정글과 같은 사회 상황에서는 소유권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하나의 ‘인권’의 차원으로 올라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질서가 정돈되고 고도로 발전된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과연 소유권은 ‘인권’인 것일까?

실제로 루소나 칸트와 같은 대륙의 사상가들은 소유권이란 공동체 전체의 권위에 의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법적 인정을 받을 때 완결되는 권리라고 보고 있다. 즉 개인이 아기로 태어날 때 옥황상제에게서 받아오는 ‘천부 인권’이라기보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회 그리고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나마 공공의 이익과 권리가 우선할 경우 그 개인에게 주어졌던 소유권은 사회로 회수될 수도 있는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소유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토지였던 농경 사회와 달리 고도로 발전한 산업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가 그다지 투명하게 보일 때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올해에 예상을 뛰어넘는 순이익을 올렸다고 해보자. 이것이 주식 배당금으로 주주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직원들의 임금 상승이나 상여금으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는 쪽으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회사의 금고에 그대로 쟁여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에 따라 국가는 어느 만큼씩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결코 “모든 이들은 인신의 자유를 갖는다”와 같은 간단명료한 문장의 원칙 하나로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복잡한 것들이다.

만약 소유권이 ‘천부 인권’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법적 제도적 질서에서 만들어지는 인공의(artificial) 권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면 이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엄청난 논쟁과 논의의 장으로 들어가는 판도라의 상자 열기와 같은 일이 된다. 개인은 어떤 근거에서 또 어느 정도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소유권을 보유하게 되는가. 그가 사회에 지는 책임은 무엇인가. 프루동이 갈파했던 것처럼 어느 개인의 소유권이 타인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정도로 확장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등. 실제 20세기 선진 자본주의 각국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발전사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져왔고 그 결과 나타났던 20세기 자본주의의 모습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21세기 들어와 이러한 추세가 역전되고 영미의 소위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소유권을 초법적인 위치의 ‘인권’의 차원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소유권을 놓고 복잡하게 발전했던 각종 제도와 규제 장치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일의 주권으로서 그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의 ‘희망’까지 튀어나와 모든 민중들의 머리를 사로잡기 전에 재빨리 상자를 닫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은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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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어린 왕자는 어느 별에서 재미난 아저씨를 만난다. 그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오억 일백 육십 이만 이천 칠백 삼십 개’의 별을 세고 또 세고 있다. 어린 왕자는 그에게 묻는다. 이 별로 무얼 하느냐고. 그는 대답한다. 조그만 문서에 별의 숫자를 적어서 서랍에 넣고 잠근다고. 그러자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이야 꽃을 한 송이 소유하고 있는데 매일 물을 줘. 세 개의 화산도 소유하고 있어서 주일마다 그을음을 청소해 주고는 하지…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건 내 화산들에게나 꽃들에게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하나도 유익하지 않잖아.”

이 짧은 우화는 소유권 개념을 둘러싼 역사적 논의의 중심 가운데 하나인 ‘사용’과 ‘타인의 접근 배제’라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린 왕자는 내가 그것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어 나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또 그 와중에서 그것도 변화를 겪게 되는 ‘사용’이 소유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기 것’이라고 선언된 별들을 숫자로 바꾸어서 서랍에 넣고 잠가버린다. 왜 그럴까. 그런 이상한 숫자 놀음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우주를 헤매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그것을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별의 땅위에 붙들린 채 몇 천 년을 살아온 우리는 그 의미를 몸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이에 숫자로서 적힌 별들에는 그 아저씨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결국 소유권을 적어 놓은 종이를 서랍에 넣고 잠그게 되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그 모든 별들이 그 잠긴 서랍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가 소유권이라는 말을 놓고 이야기를 풀 때에 숱한 혼동을 낳는 지점이다. 소유권이란 그 소유자가 소유 대상을 실제로 사용할 권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허락 없이 타인들이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권리를 말하는가. 만약 전자라면 전혀 ‘배제’없이 ‘사용’만 하는 소유자 즉 자기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가능성만 보장된다면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그것을 또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또 후자라면 전혀 ‘사용’없이 ‘배제’만 하는 소유자 즉 실제로는 그 소유 대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누구 다른 이가 혹시라도 그것에 접근하려 들면 그 즉시 발포하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전자에서는 그래서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여러 소유 형태가 나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 영국 농촌의 공유지(commons)와 같은 것이 있다. 그 마을에 정착하고 사는 이라면 원칙적으로 누구나 그 땅을 ‘사용’할 수 있고 아무도 다른 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그 마을 전체의 소유인 것이다. 또 공유지가 아닌 경우에도 토지의 소유권이란 주로 누가 어떤 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서 정의되어 왔다. 이는 마을마다 또 땅뙈기마다 거기에 얽힌 관습과 특성 등등으로 복잡하게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16세기 영국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힘을 가진 영주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공유지이건 또 누가 경작하기로 되어 있는 땅이건 그 땅을 실제로 사용하던 사람들을 싹 다 몰아내어 버리고 다시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처 버린 것이다. 마르크스가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로, 이러한 ‘종획 운동’(enclosures)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소유권이 탄생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제 소유란 ‘내가 그 땅을 경작할 권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권리’로 즉 ‘사용’에서 ‘배제’로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바의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본질이다. 즉 그것은 ‘사용’의 권리가 아니라 ‘배제’의 권리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그나마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공유물’(commons)의 영역은 계속 더 줄어들고 있으며, 대신 전혀 ‘사용’을 하지 않고 ‘배제’의 권리만을 행사하는 이들-부재 지주, 기업 경영에 관심 없이 주식만 소유하는 주주들 즉 베블린이 말한 ‘부재 소유자’(absentee owners)들, 선물 옵션 시장의 거래자들 등등-은 도처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소유권이란 어린 왕자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 자기가 사용을 하건 말건 남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소유권 개념은 결코 흔히 믿어지듯이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기껏해야 500년을 넘지 못하는 비교적 대단히 새로운 현상에 불과하다.

20세기 초 미국 철학자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이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별을 행하였다. 세상에는 자기가 직접 어떤 대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관계를 빌어서 생겨나는 소유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는 보통 ‘점유’(possession)라고 하는 것으로서 법적 사실로서 인정되는 ‘소유’(property)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점유가 ‘점유자와 점유 대상과의 관계’임에 반해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 즉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밝힌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상 정의하고 있는 것은 ‘소유자와 비소유자의 관계’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밝혀 놓은 것 뿐이라고.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우리는 흔히 소유란 경제적 사실과 개념에 불과하므로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특히 인권 문제와는 더욱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쉽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번 칼럼에서 오히려 소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논리와 그 모순점에 대해서 본 바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 본 것처럼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적나라한 사회적 ‘권력’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코헨은 이렇게 사회적 권력으로 변해버린 자본주의에서의 소유 개념은 정치권력의 주권(sovereignty)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권이 추상적인 권리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려면 인간 존재에 필수적인 타인과 자연에 대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는 분명 그러한 ‘타인들의 접근권’을 배제하는 소유권이라는 지뢰밭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로써 인권과 소유권은 정면으로 모순될 가능성을 배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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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8-01-22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sarangbang.or.kr/kr/oreum/ 좋은 글이 많은 곳
 

http://board4.cgiworld.paran.com/view.cgi?id=yysys&now=1&jd=-1&ino=1318&tmp_no=1359 

나는 차라리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그나마 가장 윤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으나, 좌파 중에는 며칠 남지 않은 대선에 대해서 보이코트를 주장하고 나서는 분들이 간혹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보이코트 선언이야말로 사살상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돌아볼 줄 모르는, 돌아보지 않으려는 좌익 기회주의의 전형이자 이론적 무정부주의의 행위적 표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좌파의 정치적 개입력이 제로 상태로 떨어진 상태에서 보이코트를 선언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여전히 우리가 '의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즉 여전히 자신은 좌파이며, 좌파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며,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한 저 세상의 제도권 정치의 바깥에 철저히 남아 있겠다는 의미. 혁신을 위한 결의의 순수성은 정확히 저 타락한 세상의 바깥에서 달성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이 말한 아름다운 영혼(beautiful soul)의 정의에 이토록 잘 맞아 들어가는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사실 좌파가 대선에서 이토록 수세적인 코너에 몰리게 된 것은 FTA 투쟁 패배의 직접적 효과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좌파의 대선 개입 가능성은 말 그대로 '제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투쟁 패배가 그런데 사회운동의 지난 15년간의 지속적인 패배의 누적된 결과라고 볼 수을까? 일면 그렇다. 그러나 분명 다른 일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FTA투쟁 패배가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회운동의 지난 15년간의 패배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론'적인 사고(누적적인 사고, 적분적인 사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고, 정세의 매 시기시기마다 다시 한 번 발견될 수 있는 미분의 지점들, 미분적인 '또 다른 원인들'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에서 사회운동 좌파의 지난 2년간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사회운동의 '순결'에 대한 강조를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지들에게 미안하지만, 내 판단은 그렇다. FTA 투쟁은 처음부터 철저히 신자유주의 테크노크라트들의 인민주권 강탈에 대한 인민들의 '정치적 투쟁'으로 조직되었어야만 했다(이 점에서 좌파보다는 한나라당이야말로 '정치적'이었다고 말한 서동진씨의 주장은 경청할만 하다).

FTA에 대한 국민투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투쟁은 이때문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미 그것을 일부에서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어버렸을 때였다(즉 FTA가 인민의 대표아닌 대표에 의해 대표-강탈되어버린 시점). 심지어 그러한 지각한 투쟁조차 사회운동 좌파는 더욱 더 늦어지게 만들었을 뿐이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반대를 표명하는 것 외에) 어떤 구체적인 개입경로도 찾아내지 못한 채.

FTA투쟁 실패의 '정세적' 원인(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결정적'인 원인)은 그 투쟁이 인민주권의 정치를 발동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경제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이 한국 대 미국의 구도에서 손익계산을 했지만, 민중주의자들은 민중 대 자본의 구도에서 손익계산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양자는 그렇게 모두 '경제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정확히 동일한 지반 위에 서있었다.

사회운동 좌파는 말한다. 사람들은 FTA경제,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대해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고,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이를 부정할 좌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환상이 아닌 진실로서의 '경제', 진실로서의 '손익계산'을 대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인민주권이라는 또 다른 '환상'을, 그러나 물질적인 '환상'을 대립시킬 것인가? 그것이 처음부터 문제였다는 것을 사회운동 좌파는 결코 인식하려하지 않는다.

싸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일까? 아마도... 다만 1%의 가능성은 남아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신이 돕는다면!

어쨌든 나는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다. 비판적으로. 모든 비판적 지지가 기회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지지야말로 현시점에서는 윤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현재의 패배를 책임지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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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면 대선이다. 가끔 인터넷을 통해 공약들을 보고, 티비를 보다 토론회 등을 잠깐 보고, 길을 다닐 때 여기저기서 나오는 로꾸꺼나 곤드레 만드레 등이 듣기 싫다는 생각만 하고 정작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름 생애 첫 대선이건만, 이 사람이다 싶은 후보도 없고 이런 투표 하나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자신할 수도 없으니 투표를 할 수도 없고 안 하기도 찝찝하다. 기호13번 바라를 찍을까, (FTA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금민보다는) 그래도 차라리 권영길을? 보이콧보다는 나은 비판적 지지? 참세상을 보니 백무산 시인은 또 비판적 지지를 비판하면서 문국현을 지지한다는데.. 이래저래 어지럽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든 말든,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에 대한 대중들의 압도적 열망은 '노망' 운운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고, 노무현 정권이랑 이명박 정권이 그 실내용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다면,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할까? 겉다르고 속다른 현정권보다는 훨씬 전선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까? 그런데 새판짜기와 끼어들기는 위의 비판처럼 불모의 이분법일지도 모르지만, 민노당이 다음 총선에서라도 좀 더 힘을 얻는다면 무언가 정말 달라질까? 선거만 놓고 보자면, 정치고 민주주의고, 다 그냥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다. 물론 여태 '공문구없는 폭력'이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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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5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6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세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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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코 라흐티넨


 
  역주  
 
정세(政勢). 모든 정치적 행위자와 활동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정세를 분석하고 그 판단에 입각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정작 정세가 무엇인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세라는 문제설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치적 사고와 행동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충분히 숙고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스스로를 활동가로 자처하는 많은 이들은 이론과 구조를 폄하하면서 실천과 주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실천과 주체의 '철학', 심지어 '형이상학'이나 '종교'로 미끄러진다. 실천과 주체라는 '유물론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원리(原理)를 정립하려 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비판하는 문제설정과 정확히 동일한, 아니 '이론주의'와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는 이런 편향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자신에 대한 비판은 이 같은 편향을 충분히 '숙정'하지 못한 탓이라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는 더욱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국가를 '전인민의 국가'라고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비판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한 스탈린주의처럼.
이론과 실천, 구조와 주체라는 이 허구적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유효한 문제설정이 바로 정세다. 즉 문제는 정세와 무관하게 정립되는 실천과 주체가 아니라, 정세에 부합하는 실천 그리고 정세를 변화시키기에 적합한 형태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론과 구조 역시 정세의 심문 앞에서,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서 이론, 정세를 규정하는 물질적 역관계에 대한 가늠으로서 구조로 재규정된다. 이렇게 각각의 범주들을 근원적으로 변화·재배치하면서, 정세의 문제설정은 이론과 실천, 구조와 주체의 통일이라는 저 오랜 난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정세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의 고유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치는 모든 사태가 종결된 후 그 원인과 구조를 사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아니다. 정치는 사태가 한창 진행 중이고 그 원인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정오의 칠흑' 속에서 벌어지는 '결단'일 수밖에 없고, 그런 한에서 용기와 대담함을 필요로 한다. 한 편 이 같은 결단은 그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판단과 전혀 의도치 않은 역효과 등 많은 위험부담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이처럼 결단에 구조적으로 따라붙는 위험부담 때문에, 정세와 무관한 주체를 중심에 놓는 윤리 곧 (정세적 변화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주체적 역량의 선형적 확대·축적에 대응하는) '일관성'의 요청과 전혀 다른 '책임'(responsibility) 윤리 곧 의도와 판단과 예상을 벗어나는 효과에 '응답'(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 정치의 관건이 된다. 결단과 책임, 대담함과 (변)덕이라는 외견상 대립된 태도의 통일. 이것이 정세라는 문제설정이 초래하는 또 다른 효과다.
지난 『사회운동』 69호부터 시작한 정치 이념 기획을 일단락하면서 정세를 다룬 글을 선택한 것은, 이처럼 정세라는 문제설정의 채택이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쇄신하는 데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논의였는 데다, 생소한 '최신'의 이론들을 다룬 까닭에 어려움이 커졌지 않았나 싶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대사건 이후 동시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기존의 이념을 반성하고 이 문제를 재정식화하며 나아가 나름의 좌표를 제시하는지 함께 사고하고 토론하고 싶었다.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다시 현재화하기 위해서, 동시대 결국 현 정세 안에서 벌어지는 사고와 쟁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역자들 때문에 본래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까 두렵다. 이 점에 관해서 어떻게 '책임'을 질지 더 깊이 고민하겠다는 말로 변명을 마칠까 한다. 그 동안 많은 관심을 보내 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또 이번 기획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신, 이 자리에서 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많은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다음 호부터는 마르크스에 관한 학습을 도울 수 있는 기획을 시작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위대한 이상이 실현되는 듯 했던 87년,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론과 실천의 분할은 더욱 심각해지고 지적 위계는 한층 강화되고 있으며 그만큼 대중의 자기해방은 억압당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깃발을 다시 치켜들되, 실천과 활동가의 편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정세와 정치를 우위에 둔 사고와 행동을 전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이 질문에 실마리를 주는 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귀 기울이는 것으로 우리의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여기에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세를 분석하는 텍스트가 있다. 그 정세는 이탈리아의 국민 통일의 문제를 분명한 역사적 과제로 제기한다. 또한 그것은 군주와 그의 정치적 실천을 그러한 주요 목표를 성취하는 수단과 동일시한다. 나는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그 정치적 문제설정의 본질적인 결과가 이론 속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이론의 배치와 전형적인 양상을 근원적으로 재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 그러한 정치적 문제설정과 새로운 배치를 동원하고 전개시키는 텍스트는 어떻게 자신이 전개시킨 정치적 실천의 문제설정의 공간 속에 자기 자신을 배치하는가?
최초의 유혹은 정확히 그 텍스트를 어떤 공간이든 그에 외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테제이다. 빛처럼, 진리는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의 유효성을 통해 발생하고 작동하며, 진실의 본질은 계몽을 통해 효과를 발휘한다. (…)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진리'의 유효성의 이론으로 타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적인 것 이외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 즉 진리는 진리 효과에 의해 나타나고, 그 효과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의 효과는 언제나 사람들의 활동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 또한 정치적으로 말해서, 세력들간의 대결, 당파들간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마키아벨리의 텍스트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문헌의 세계에 속하는 텍스트이며, 그 세계 속에서 편을 들거나 입장을 취하는 텍스트이다. (…) 그것은 규격을 맞춘 담론의 배치만이 아니라, 그 작성법까지도 재편하기에 충분하다. 『선언』은 새로운 저술 형태로 쓰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람시가 『군주론』의 구성과 문체에 감탄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새로운 군주에게 호소하기 위한, 겨우 80쪽에 달하는 새로운 구성과 명쾌하며 간결하고, 활기차고 열정적인 새로운 문체.
왜 열정적인가? 자신이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적 문제의 이론-정치적 배치의 구성에서 부단히 한쪽 편을 들었으며, 언제나 여러 세력들의 갈등에 입각하여 정세를 사고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작들 속에서 스스로의 당파성을 공개적으로 언명해야 하고, 자신의 대의에 여러 일파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온갖 수사법과 열정의 자원들을 갖고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첫 번째 의미에서 그의 텍스트는 선언이다. (…) 이탈리아를 구원할 군주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에 관한 이론을 텍스트를 통해 정교화시켰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공표하고 참여하는 투쟁에서 자신의 텍스트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보탬이 되도록 하여, 자신의 텍스트를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그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다.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군주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방송하는 뉴스에 적합한 방식,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의 글쓰기는 새롭다. 그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마키아벨리의 가면』, 이후, 2001, pp. 50~52

 
 


정세를 다시 사고한다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각각의 시각들에 관해 흥미로운 논평을 한다. 그에 따르면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정세를 구조의 생애에서의 짧은 순간이나 혹은 구조의 연속적 단계들 사이의 이행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라는 현실은 정세들의 예측할 수 없는 연속일 뿐이며, 역으로 정세란 구조의 일정한 배치로 결정될 따름이기 때문이다."1)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가 가리키는 것은 경제적 토대와 그 주요 모순이 동질적이고 총체적인 구조가 아닌 방식인데, 여기서 부차 모순들이나 국내적 정황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정치 정세들의 일종으로 고정된다. 이와는 반대로 토대와 상부구조, 또는 국제적·국내적 요소들은 결합하여 복합적인 정세를 이루며 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식으로 '정세' 개념은 경제적 심급의 효과가 나타나는 영역을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정세와 구조가 하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주어진 정세를, 고유한 경향과 모순적인 생산관계 등을 갖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방식으로 특징짓는 배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들은 독자적인 실존을 갖지 않으며, 그들이 실존하거나 존속하고 역사적 형상을 얻는 것은 순전히 정세적이다.2) 발리바르는 구조와 정세라는 대립항의 이 같은 폐기를 지나치듯이 언급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이 변화는 잠재적 결과를 갖는다. 곧 역사적 '이행'(그리고 더욱 심원하게는, 더 이상 단일한 지속을 갖는 연속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시간)이라는 전통적 문제에서 완전한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3)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입각점의 출현을 얻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총체적이고 선형적으로 진보하는 구조나 사회구성체를 목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모순들이 관통·심화되며 구조가 역사적 형상을 얻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정세적 과정들을 감지한다.
이 맥락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학생들 발리바르 자신을 포함하여 이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이라는 변혁을 연구하는 데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는 알튀세르적 개념들을 적용하기 위해 기울인 '필사적' 노력들을 언급한다.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시기구분의 고전적 모형을 따랐으며 구조와 정세의 분할을 포기한다는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의미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4) 이 자기비판의 노선은 알튀세르의 추종자들이 헤겔적 총체성에 입각한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들은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과 마르크스의 지배소를 갖는 구조(structure in dominance) 사이의 차이점에서 파생되는 이론적 문제들을 완전하게 깨닫지는 못했던 것이다.
발리바르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알튀세르 자신이 추구했던 역사적 시간에 관한 구상은, 심지어 당시에도, '역사적 이행'에 대한 측정법과 다른 것이었을 수 있다.5) 나라면, 여기서 [대문자] '보편사'(Universal History)와 '다양한 역사들'의 관점들을 구별할 것이다. 정세들은 역사의 어떤 '일반 시간'과도 어울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역사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정세는 고유한 시간표에 따라 전개되고 지속한다. 이는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특징을 갖는 과정들에서 분명해지는데, 여기서는 모순들이 전위되고 응축되거나, 정세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절합된다.
이하에서는 알튀세르의 '정세적 역사'라는 구상을 간략히 설명함으로써, 이 구상이 정치적 실천을 '정세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납득시킬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피렌체의 서기장'은 탁월한 정치적 실천의 이론가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발본적인 방식으로" 마키아벨리가 주목했던 것은 '모든 정세의 우발적 사실성(factuality)'이다. 역사를 정세적으로, 정세를 우발적 현실들로 보는 것은 정치적 행위나 개입의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논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알튀세르가 「아미엥에서의 주장」(1975,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로 일부 영역된)7)에 적어 넣었듯이, 역사에 대한 헤겔적 구상은 이론적 궁지에 도달한다. "내가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헤겔에서 영감을 받은 정치란 아직껏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원 안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디서 원을 움켜쥘 수 있겠는가?"8)


정세적 역사

발리바르의 용어법에서, 정세는 더 이상 '구조들의 세계사'에서 '지방적'이거나 사소할 뿐인 문제가 아니다.9)역사 자체가 이제 '정세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전제적이고 전능한 중심을 갖지 않는다. 대신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국내적·국제적 정세들에 따라 형성된 '복합적 전체'나 '지배소를 가진 구조'의 일반적 틀 또는 '배치'다.
중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과잉결정하는 매우 강력한 요소들과 지배적인 경향들의 결여는 아니다. 그것은, 정세적 시각에서 볼 때, 진화하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세계 질서'의 '총체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그것은 특정한 추상과 일반성의 수준에서, 자본주의 세계 경제 또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서로 다른 국내적·국제적 정세들에 관한 것이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가 거기 존재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묻는 것은, 이른바 자본주의 곧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그리고 모순들 의 서로 다른 시간들과 장소들에서 어떤 종류의 역사적 형상들이나 유형들이 출현하는가 이다.
만일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 유일하고 반복할 수 없는 특성들을 가진 사건들이나 사례들의 복합적 계열들로 이루어진다면, 즉각 절대적 역사의 지평을 떠나 사뭇 정반대의 무대로 떠나려는 유혹이 생겨난다. 현실은 불가해한 혼돈, 헤아릴 수 없는 이유들과 모순들과 연속들이 원인이 되는 순전한 '연접'(連接, conjunctions)들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현실화되는 모순들은 본성상 사건들의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계열들로 판명될 것이며, 여기서는 언급할 만한 지속성을 가진 어떤 구조적 요소들이나 경향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따라서 이 모순들을 유형화하고 식별할 수 있는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사후에 출판된 그의 후기 작업에서 대답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필연성과 우연성(contingency)이라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이 고찰들 역시 나름의 역사가 있다. 이들은 예컨대 알튀세르가 1969년에 쓴 「모순과 과잉결정」 영역본 보론에서 그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엥겔스가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활용한 방식에 관해 말하자면 비판적으로 논평했고, 이 논평은 우연(chance)과 필연이라는 쟁점을 다루는 길을 열었다.10) 많은 점에서 알튀세르의 엥겔스 비판은 자세하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11) 특히 중요한 점은, '최종심급'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개념이, 무엇보다도 우선 이론적 수단이라는 관점이 등장한다. 이를 갖춘다면 어떤 주어진 시간에 놓인 토대와 상부구조의 당면한 역사적 형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되고,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는 특징을 갖는 역사적 과정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형태들이나 사건들은 '불가사의'나 미시적 원인들의 위태로운(hazardous) 혼돈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른바 혼돈을 모순의 역사적 전개라는 시각에서 이해하고 명확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
'이해'는 역사 철학들에서처럼, 세계에 대한 사변적 설명(관념론 체계의 설계자가 말하는 '이야기')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이해는 사회 형태들에 대한 구체적이지만 이론적인 기초가 있는 분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분석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과정들에 집중하고, 여기서 경제적 요소들('경제적 심급')은 중심적 역할을 하는데 단 이미 다른 요소들로 전위되거나 응축되어 '불순'해지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상태로 그렇게 한다. 이로부터 '최종심급'이란 사회 형태들의 역사적 전개 배후에 있는 보증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대신 그것은 하나의 이론적 출발점, 곧 변화하는 사회 형태들 및 관련된 토대-상부구조의 특정한 형태들을, 적어도 일정한 정도까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점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최종심급'은 상부구조의 정치 형태들과 그 '미세한 사건들'을 넘어서는 경로를 개방한다.
여기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한 편으로, 경제적 모순들이 정치 제도 및 실천의 구성체에 미치는 과잉결정적이고 과소결정적인 효과들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제도와 실천이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의 역사적 형태에 역으로 미치는 영향이 있다. 현실은 항상 복합적 정세이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 결론이 인식론적 공백이고/거나 '경제'가 궁극적 관리자/보증자라는 주장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문제는 복합성을 감출 필요 없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활용될 수 있다. 이들은 복합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만 알튀세르가 복합적 과정들에서 작동하는 각각의 모든 모순들(그리고 다른 구성적 요소들)을 추적할 수 있고 그 효과들을 예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역시 꿈에 관하여 이런 류의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 알튀세르는 역사적 사건들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모순에 대한 분석은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분석의 대상이 되는 어떤 모순도 항상 알려지지 않은 '결여된 원인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현실은 주체들에게, 분석가와 행위자들에게 투명하지 않고 불분명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과정들이 모든 분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꿈은 신비한 밤의 현상이라거나 "그것은 꿈일 뿐이었어"라는 대사로 족한 낮의 잔여물에 불과한 것으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 한 편으로, 예컨대 경제의 주요 모순이 주어진 모순에 대해, 과잉결정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라는, 만성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예견되지 않은 본성의 문제 앞에서 완벽함과 확실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른 한 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심급'이라는 테제가 이 모순 자체에 삽입된 경제적 요소들을 분석가가 조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복합성'은 미시적 원인들의 '혼돈'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복합성은 '미시적 원인들'이 나타나는 역사적 형태들의 전개라는 복합적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이제, 이 과정들이 제공하는 맥락들을 통해, 표현적 총체성 및 그 추상적 도식의 사고에 묶여 있지 않은 이론적 포착을 얻을 수 있다.


헤겔적 유형의 필연과 헤겔적 본질의 발전이 기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주관성의, '다원주의'의, 우연성의 이론적 공백 속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헤겔적 전제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조건하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이 공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과정의 전개와 이 전개의 모든 전형적 측면들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이 복합적이고 하나의 지배소를 갖는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12)



정세적 정치(마키아벨리)

알튀세르의 엥겔스 비판은 그가 1980년대에 우발성에 관해 쓴 작업을 보다 쉽게 평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업들에서 그는 무엇보다 연접들, 사건들과 정세들의 문제를 논한다. 이 (예비적) 연구들에서, 정세의 '예기치 않음'과 '응고'가 나온다. 비록 정세들이 항상 어느 정도 응고되거나 고정되거나 정돈되어 있더라도, 아주 발본적인 종류의 놀라움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갑작스런 전환들과 함께, 지배적 '상수들'은 의문에 부쳐지거나 부쳐질 수 있다.
두 종류의 필연성. 알튀세르가 그 밖에 무엇을 해 왔든 간에, 그는 또한 변화하는 정세라는 문제에 대처하려 노력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도움으로 이를 해 냈다. 행동의 기준과 조건을 설정하는 정세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이들의 시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실천의 이론가' 또는 '실천의 철학자'로 그려지는데, 이는 실천의 일반 이론(또는 '실천 철학')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그 자신과 그의 작업을 특정한 정세 안에 위치지운다는 의미다. 더욱이 마키아벨리는 행위자의 정치적 기획이라는 목표에서 시작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정치적 행위자에게 제시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를 해 냈다.
여기서 혹자는, 이로부터 과거나 현재의 역사적 사건들이 법칙 없는(no law-like) 상수들의 지배를 받아 자의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즉, '우발적'과 '자의적'(또는 우연(chance)이나 운(hazard))은 동일한 의미인가? 알튀세르에게서 직접적인 부인이나 긍정을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필연적/자의적(그리고 확정적/불확정적)이라는 대립항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는다. 그는 필연성을 해석하는 두 가지 종류를 구별한다.
첫 번째 해석은 우연이나 운, 우연성이나 예외가 필연성의 양상들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이들은 헤겔주의자들이 주관적인 '중재'일 뿐이라고 쉽사리 비난하는 '규칙에 대한 예외', 또는 안개와 아지랑이와 광택일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 노선에 따른 필연성 해석을 호되게 비판한다.
두 번째 해석은 우발적 필연성을 그려낸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연성들은 우연성의 양상들이다. 주요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연성을 필연성의 양상 또는 필연성의 예외로서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적 생성으로 사고해야 한다."13)


필연성에 대한 첫 번째 구상은 현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 에피쿠로스의 응고된 세계 같은 것 은 목적론적이거나 인과적인 법칙의 귀결들임을 함축한다. 두 번째 구상은 사전에 존재하는 이 법칙들, 그리고 그것에 의존하는 모든 인과적이거나 목적론적 설명들과 모형들을 의문에 부친다.
그러나 이 같은 수를 둔다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과정이 자의적이며 영원히 신비적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발전이 인과적이거나 목적론적인 발전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들이 이 같은 법칙을 표현하지 않는다- 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해불가능하고 인간 행위자가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와 관련될 뿐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상황들에 대한 설명이나 분석들은 완전함에 미달한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채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사건(coincidence)들은 복합적 과정이다. 사건을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들의 연접에 대해 모든 원인들의 계열들을 설명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마주침은 원인들의 여러 계열들의 결과로 나오는 존재들의 계열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14)


우발성이라는 쟁점은 정치적 행위에 결정적이다.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게 허락된 철학적 기다림과 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의상 무엇이 됐든 해야 하며, 모든 입수할 수 있는 정보에 기초한 최선의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활동가(man of action)- 또는 활동가 집단- 이 행동하는 방식과 그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들에 관한 (아무런 위험부담(risk)도 없는) 절대적으로 확고한 지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활동가가 캘러미티 제인(Calamity Jane) 같은 여성, 서부영화에 나오는 외로운 '우발적'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지는 장에서 '활동가'라는 주제에 관해 논할 때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발성은 행위자들이 오늘을 움켜쥐고 나름의 수를 쓰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개방된 기회들과 호기(그리스어의 카이로스(Kairos))를 의미한다. 분명 기회들은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기준과 조건을 부과하는 하나의 동일한 우발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활동가는 그/녀가 하는 것 또는 그/녀의 행동이 '선언하는' 것을 완전히 깨달을 수 없는 상황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현재 상태에서, 그는 미래가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 자신의 행위가 어떻게 차이를 만들어낼지 또는 그렇지 않을지를 알 수 없다. 또 그는 지나간 일에 기초하여 다가올 일을 예측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제의 법칙이 내일도 계속 적절하리라는 점을 보장하는 것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래란, 주어진 팀이나 선수의 이름이 없고, 사전에 그어진 규정된 공간이나 선이 없으며, 단번에 선포된 정당하거나 부당한 수에 대한 기성(旣成)의 의미가 없이, 각각의 방향에 열려 있는 경기장이다.
군주적 실천 - 우발적 현실. 마키아벨리의 군주 같은 활동가는 자기 사례의 특수성들을 고려해야 하며, 행동할 때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같은 정치적 판단의 학(學)과 기예는 유효한 정치적 행동에 사활적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행동의 우발적 논리를 이해하는 시각을 그의 작업에 도입함으로써, 스스로를 여느 활동가와 구별해 냈다. 비록 마키아벨리가 젊은 외교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책의 저자로서 활동가이긴 했지만, 우리는 그의 작업이 여전히 '충분히 이론적'이라고 말하는 알튀세르에 동의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정세와 그 개별성들 안에서 성공하기 위한 투쟁과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앎과 조사의 종류를 예시하는 충분한 이론이 있다.


"파편들(따라서 마찬가지로 모순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기서 이론적 배치는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을 지배하는 고전적 수사학의 습관과 단절한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작(改作)도 여전히 '이론적인' 것이다. 아마도 사물의 질서는 '변화'해 왔을 것이고, 특수한 정치적 문제의 정식화와 고찰이 대상의 일반적 지식을 대체해 왔을 것이다."15)


알튀세르는 "거의 주목받지 않은 채 지나갔으며 장차 발전시켜야 할"16) 종별적 논리에 관해 썼다. 그의 마키아벨리 해석,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 앞에 놓이는 이 '우발적 논리'에 따르자면 이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여기서 '우발적'이라는 형용사는 사건/사례 및 그 과정이 어떤 하나의 일반 법칙이나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이 이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사건/사례는 어떤 일반 법칙이나 이론 하에 포섭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활동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사건/사례의 과정을 일반 법칙이나 이론, 또는 정적인 사회적 유토피아로 예측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키아벨리의('마초벨리적'(machoveiilan)) 개념들을 빌어 말하자면 각각의 사건은, 느닷없이, '운명의 꼬임으로' '심지어 가장 신중한 사람'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변화무쌍한 운(Fortuna, 포르투나) 또는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의 영향을 받는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계속해서 불안정하게 운동하고 있으며, 예측불가능한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 이런 필연성은 운명의 여신이라는 신화적 개념의 형상에 의해 표상된다."17)


변덕스럽거나 예기치 않은 운[명]은 각각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것에 뜻밖이고 위태로우며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 이유들, 사건들의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비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 요소들이 독특하고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사건은 유일한 특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사물들은 둘이나 그 이상의 사례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되거나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들이 통상 어떤 식으로 행위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지 말할 수 있을지라도, 각각의 종별적 사례에서 그들의 행동들은 다른 사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벌어진다. 사건들이 복합적 정세들인 것은 이 때문이다. 사건들은 원인들의 수많은 계열들의 연접들이다. 사건들은 접합 또는 마주침들이다.


"정세(conjoncture)는 그 자체가 접합(jonction), 연-접(con-jonction)이요, 항상 변화하긴 하지만 응고된 이미 일어난 마주침, 스스로 자신의 무한한 선행원인들을 가리키는, 즉 선행원인들의 무한한 연속에 이 선행원인들의 결과, 예컨대 보르지아(Cesare Borgia)와 같은 어떤 특정한 개인인 이 결과를 돌려보내는 마주침이다."18)


원인-결과의 추론에 기초한 논리는 사건들을 분석하는 데 적절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논리를 사용하게 되면 분석 과정에서 원인들에서 결과들로 움직이는 선택지나 그 반대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으로 함축을 통한 추론을 요구하며, 이 같은 추론의 가능성은 인과 관계 및 관련 법칙에 대한 실재적이거나 상상된 지식에 있기 때문이다. 인과적 추론이 정확하려면 추론이 완전하고 체계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사건을 다룰 때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건에 관한 추론은 위험하고 불완전하며 가설적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런 류의 '약한 논리'(weak logic)는 마키아벨리에게서 만날 수 있다.


"모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원인-결과의 귀결 속에서 사고하지 않고, '만약'(if)과 '그렇다면'(then) 사이의 사실적 계기(繼起, consecution) 속에서 사고한다. (…) 이 경우에 문제는 더 이상 원인(또는 원리, 또는 본질)의 결과로의 귀결이나 논리적 도출이나 논리적 함축이 아니고, 단지 조건들의 계기이다. 여기서 '만약'은, 실제의 조건들이 주어졌다면, 기원적 원인이 없는 이 사실적 정세를 뜻하고, '그렇다면'은 그 결과 정세의 조건들 속에서 관찰할 수 있고 그 조건들에 연결할 수 있는 것을 지시한다."19)


게다가


"『로마사 논고』는 다름 아니라 실제 정세의, 즉 (변)덕(virt )과 운의, 이 매우 특별한 '논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던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조사이다."20)


알튀세르에 따르면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방식 모두에서, 각각의 사건에 대한 원인, 본질이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사건들은 이것들로부터 파생되고 이것들을 표현하거나 이것들의 지도 아래 발전하는 것으로 사고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인(目的因, telos)는 물론 근대적인 논리적·인과적 사고의 의미에서라면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것이 여전히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의 일종이고, 그에 따라 정세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이해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것, 사건들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기초를 모든 본질(Ousia, Essentia, Wesen)의 철학, 즉 이성(Logos, Ratio, Vernunft)의 철학, 따라서 기원 및 목적의 철학(여기서 기원은 이성 또는 최초 질서 속에서의 목적의 예상, 따라서 합리적 질서이든 도덕적, 종교적 또는 미학적 질서이든, 질서의 예상일 뿐이다.)을 근본적으로 기각하는 것 (…), 전체와 모든 질서(Ordre)를 거부하고 분산(데리다라면 자신의 용어로 '산포'(散布, diss mination)라고 할 것이다.)과 무질서의 편을 드는 철학을 위한 이 기각 (…)."21)


마키아벨리적인 방식으로 행위와 행동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은 정세에서 감지된 기준과 조건에 따라 사고하는 것에 기초한다. 이것들은 정세를 변화시키기 위한 기회들과 대안적 행위들의 가능성의 종류를 평가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초를 이룬다. 그들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는 인간들은 항상적인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의 상태 안에 있다. 그들 행위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사건 분석과 행동 전략이 불안정한 기초 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포함되어 있으며 포함될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불안한 분석은 사건 속에서 예견되고 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해야 한다.22)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우발성

활동가가 보유한 지식에 관한 알튀세르의 관점은 우발성과 우연의 해석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내놓는다. 사건들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우발적인가, 아니면 다만 행위자의 무지, '주관적' 우발성의 사례일 뿐인가? 누구의 또는 어떤 시각에서 사건들이 우발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각에서 그런 것인가? 만일 사건이 모든 관점에서 우발적이라면,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발성은 사건의 '객관적'인 속성인가, 아니면 아는 주체 혼자서는, 우발적 요소들과 사건의 과정이 단지 지식의 결여에서 유래할 뿐임을 보여줄 만한 포괄적 이론이나 지식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일 뿐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통념들은 너무 일반적이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해석자들이 지적하는 방식대로 이 속성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제3의 대안이 출현한다. 우발성은 현실의 주관적 특성일 수도, 객관적 특성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이렇게 하면 우발성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지위가 변화하고 동요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3의 선택지의 도움으로 마키아벨리의 우발성이 주관적/객관적이라는 대립항(또는 주체와 대상의 분할)을 적용하기에 상당히 부적합한 관념이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일반 이론도 다가오는 연접들을 예견할 수 없다. 이 같은 발견은, 그 자체만으로는 종종 주체들에게 있어 사뭇 분명하게 '놀라움들'이거나 '사건들'인 뜻밖의 우연적 요소들이 주체의 관점에서 그럴 뿐이라는 가정을 논박할 수 없다. 만일 주체가 더 잘 알았다면, 즉 만일 주체가 우연한 사건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들을 알게 되었다면, 사건들은 주체 편에서의 믿음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사건들이 우발적이라는 알튀세르의 주장은 주관적 시각에서만 옳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보편적 원리들과 필연성들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은 자신의 편에 객관적 진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최종 분석에서, 사건들과 그것들이 취하는 과정이 어떤 본질이나 기원적 전제 또는 목적인 이 사건들이 환원될 수 있는 에 의해 예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알튀세르는 기원적인 원인, 역사 법칙이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역전될 수 있다. 어떻게 기원적 원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주체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실은 기원적 원인이나 발전 법칙 또는 본질에 의해 초래된 것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이런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이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이 실은 특정한 판별적인 인과 관계의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 산출되었음을 어떻게 설명할지 알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23) 알튀세르는 사건에 관한 지식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설명에 기초할 수 없다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대신 이 같은 지식은 항상 우발적 논리와 구별되는 '약한' 추론의 결과다. 분명 어떤 활동가에게 있어서도, 적어도 그가 사건 안에 위치해 있다면, 그의 사건의 과거와 현재와 특히 미래는 (그가 이 점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불분명하다. 만일 그가 그의 사건과 역사의 현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시, 만일 그가 그 사례의 역사와 그 현재 조건을 완벽하게 안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아무 것도 그를 놀래키거나 '사건'처럼 느껴지지 않고, 사건이 더 이상 본성적으로 우발적 사건이지 않도록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알튀세르의 답변은 어느 정도 긍정적이다. 그는 사건을 아는 것이란 원인들 사건은- 이것의 연접이다- 의 모든 계열들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24) 적어도 여기서 알튀세르는 '심지어 원인이 되는 것도 다른 원인의 결과이다'라는 페트로니우스적 진술을 부인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류의 재구성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사건이나 정세 안에 있는 활동가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번에 또는 지적인 통찰로써 알고 이를 철저히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전능한 신이 될(또는 신의 계획을 완전히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주체의 입각점에서 우발적인 것은 신적 입각점에서는 비(非)우발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대표자들이 이런 류의 신적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지는 의문인데,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헤겔의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언급하고, 만일 이 같은 역사 철학들이 가능하다면, 그들의 시간은 오직 사후(事後)에, 사후적으로(post festum)에 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발성의 문제는 마키아벨리적 부류의 활동가에 국한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진 순간에 그가 입수할 수 있는 불충분하고 결여된 지식에 기초해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활동가일 뿐이다. 그는 땅거미가 지는 것을 기다릴 수 없다. 그는 '정오의 칠흑' 안에서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발성을 현실의 객관적 특성으로 다룰 필요가 없다. 이는 주체의 상황과 그것이 일으키는 믿음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발적 추론을 가지고 위험부담들과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에 대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 신의 눈에는 우연이 아닌 것이 활동가의 관점에서는 대부분 사건이 된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주관주의적'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할까? 우발성을 혼란스러운 인간들과 결코 당황하지 않는 신의 구별로 이끄는 방식에 만족할까? 여기서 다시 알튀세르의 답변은 예와 아니오 모두이다. 우연은 '정세 안에서의' 앎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다.25)직분을 다하는 철학자나 전능한 신과는 달리 활동가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며 유쾌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에 직면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이 이 문제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길을 가리키는 까닭은, 다름 아닌 마키아벨리가 특정한 종별적 사건 안에서 행위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자 역시, 현실과 그 법칙을 아는 문제에 이르면, 확실성을 결여한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연에 좌우되는 상태에 머문다. 그들이 헤겔의 충고에 유의하여 황혼을 기다린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이 늦은 시간에조차, 왜 사건의 과정이 그런 식이었는지를 분명하고 논란의 여지 없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은 우선 사회의 본성이나 사물의 본성적 질서와 발전을 정의하는 것에 따라 구축되는 철학 체계를 제공한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이 체계들은 인간들이 '사물 안에서 작동하는 진리'에 기초하여 말할 만한 것에서 멈출 수 있을 만큼 겸손하지 않다. 이 체계들은 비록 존재론적이거나 도덕적인 공준(公準)으로 제시된다 할지라도,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26)
『마키아벨리의 고독』에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궁극적으로 격리된 것은 바로 이 상상들을 폐지했기 때문이었다고 쓴다. 그에 따라 그는 그 귀결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있어서 궁극적인 지점일 것이다. 그가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한 편으로 그가 발본적으로 기각한 도덕적, 종교적, 관념론적인 정치사상의 오랜 전통, 다른 한 편으로 모든 것을 침잠시켰으며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아상을 발견했던 자연법이라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전통 사이에 있는 유일하고 불안정한 장소를 점유했다는 사실 말이다."27)


마키아벨리는 현실을 증명하는 다양한 존재론적, 도덕적, 또는 여타 본질주의적 방식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발본적 기각'을 대표한다.28) 그가 자신의 시대가 아닌 사례를 살펴볼 때조차, 그의 분석은 그 자신이 '사물 안에서 작동하는 진리'라 부른 것에 기초한다. 이것이 등장하는 것은 유명한 『군주론』 15장의 이름난 문단에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것을 쓰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 진리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자는 많은 무자비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몰락을 자초할 것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29)


아주 명시적으로 알튀세르는 우발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사실이나 기성 사실(faits accomplies), 그리고 결과들은 원인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원인 없는 결과, (변)덕과 운의 (에피쿠로스적인) 우발적 마주침으로부터, 즉 우연한 기회로부터 태어나는, 우발적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결과 말이다. 결과의 철학은 결코 선행원인이나 선행본질의 기성사실로서의 효과의 철학이 아니라, 전혀 반대로 우발적인 것[우발성]의, 즉 그 결과가 사실적 표현인, 그리고 달라질 수도 있었던 주어진 조건들의 주어진 결과인, 그러한 우발적인 것의 철학이다."30)


이는 원인없음이 알튀세르 생각에 순전한 환상이라는 관념을 가리키지 않는가?(그리고 그는 환상들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원인없음은 현실의 객관적 특성이 아닌가?
알튀세르는 우발성이, 기성 사실의 결과란 '우연히' 또는 '순전히 뜻밖에' 즉 자의적인 방식으로 그런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를 언급하면서 그는 '우발적 연접'은 (변)덕과 운세의 호기이거나 연-접(con-join)을 포함한다고 말한다.31) 사건의 조건들, 그 정황들, 그 모든 복합성을 지닌 기준과 요구들은 해야 할 일과 정세가 형성되는 방식의 한 원인이 된다. 결정적인 속성은 '사실적'인 것이다. 라틴어 팍툼(factum, 사실)의 본래 의미는 행위와 사건, 사실과 결과다. 사실적 사건은 수많은 행위들과 사실들의 결과이며, 이로부터 뒤따르는 사건들과 행위들, 사실들의 조건들이 형성된다.
실존하는 사건들과 그 계기에 관해서, 어떤 단일하고 종별적인 본질을 정의할 수 없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절합되어 있는 사실들과 행위들의 헤아릴 수 없는 합의 문제다. 사건의 유효한 요소들은 원인과 결과(그리고 이를 서술하는 일반 법칙)의 동일하고 (선형적인) 인과 연쇄의 일부가 아니다. 그보다 사건은 행동의 조건과 정황들이 뒤얽힌 구조물의 일종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안에서 서로서로 다르게 들러붙는 무수한 원인들과 결과들이 뒤섞인다. 그 결과는 그 탄생을 둘러싼 정황들의 '사실적 표현'이며, 이 정황들의 본성은 사실적이다.32)
알튀세르는 '중심의 부재'를 말한다. 이 관념은 그의 헤겔적 총체성 비판에서 그려지는 '복합적 전체', 그리고 원소들을 관통하는(inter-elementary) 과잉결정들과 과소결정들로 특징지어지는 복합적인 상호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사례들의 높은 수준의 복합성 때문에, 행복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행운은 일반 법칙을 통한 예감이나 설명을 넘어서는데, 왜냐하면 유일한 연접들은 이전이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생한 적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례들(이나 사건들) 또는 한 사례의 서로 다른 순간들 사이에서 상수들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주관적 우발성의 수준을 감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일반 이론을 가지고 '상수들'이나 '일반적 경향들'이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식들을 포괄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사례나 사건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상수들, 규칙들, 지배적이고 비(非)지배적 경향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례들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따라서 애초에 '사례'(나 '사건')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접들이 독특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도 일반적인 것을 예시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례들이 일반 이론을 (반증하거나 확증하는 식으로) 시험하는 역할을 하는 포퍼(Karl Popper)적인 반증 관념이 사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구상을 이해하는 데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스피노자와 그의 '3종의 지식'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다만, 내가 스피노자에게서 배운 가장 귀중한 것이 '3종의 인식',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사례의 지식의 본성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에 관해 스피노자는 탁월하지만 종종 오해받은 예시를 제시하는데, (그의 『신학정치론』에 실린) 개별 인민의 역사, 개별 유대 역사가 그것이다. 나의 '사례'는 이 질서 중 하나로서, 그 개별성 안에서 인정되고 다뤄진 의학적·역사적·분석적인 모든 '사례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개별적 사례가 보편적이라는 점 이는 각 사례에서 반복되는 상수들(따라서 포퍼의 확증가능하거나 반증가능한 법칙들이 아니라)을 제시하며, 개별적 사례들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취급의 도입을 허용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갔으며 장차 발전시켜야 할 이 논리와 다르게 사고하지 않는다."33)

포퍼적인 반증의 시각은 역사적, 의학적, 또는 (정신)분석적 사례들(알튀세르 자신의!)에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이론에서 제시된 어떤 이상적 사례의 예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련된 일반 이론에 포함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거나, 사건들이 이론에서 지시된 법칙들에 따르지 않는 사례가 발생하면, 이는 포퍼적 의미에서라면 이 일반 이론의 반증이거나 예외적 사례를 의미할 것이다. 이는 옳지 않다. 알튀세르가 「모순과 과잉결정」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사례들은 '예외들'이다.34)예시적 사례들이나 여기서 벗어나는 사례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사례는 특별한 사례이고 어떤 사례도 표준적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알튀세르는 인용된 구절에서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을 이론적이고 실천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쓴다. 비슷하게, 그는 이미 자기비판적인 언급에서, 구체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보편성의 최소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35)
그러나 '보편적'인 것은 보편 이론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다만 특정한 상수들이 한 사례에서 다른 사례로 되풀이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만일 사례가 본성적으로 완전히 유일하다면, 그것은 다른 사례들과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사례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상, '사례'라는 관념 자체가 공허한 수다가 될 것이다. 사례라고 한다면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 다른 (이전의) 사례들과 유사해야 한다는 점, 특정한 상수들이 한 사례에서 다음 사례로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록 각각의 사례가, 유대민족의 역사나, 10월 혁명에서 무르익은 러시아 역사에서처럼, 다른 사례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특성들을 포함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례들을 다루기

위에서 다룬 사고의 흐름을 명료히 하려면, 활동가의 사례를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 안에서의 활동가의 행동을 규정하는 본질적 기준과 조건 중에는 행위자에 고유한 (변)덕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사례에 관해 논평하면서, 알튀세르는 (변)덕과 운의 마주침을 말한다.36) (변)덕을 가진 행위자는 행위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황들 안에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운은 행위자들의 삶에 아무튼 외적으로 작용하는 신비한 힘(forza del destino)이 아니다. 행위자의 (변)덕은 적어도 일정한 수준까지는 행위자의 운을 틀지우는 데 일정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점성술에서와는 달리, 인간 세계의 정세는, 마키아벨리의 설명을 따르자면, 내재적이고 현세적이며 세속적이다. 아주 확실하게, 인간 정세는 별도의 체계로서 현세적 삶의 질서에 외적 효과를 행사할지도 모르는 천체(天體)의 '천상적' 성좌(conjuncture, 정세)가 아니다.
이로부터 행동을 취함으로써 행위자가 행동의 정세적 기준과 조건의 한 원인이 되고 이를 틀지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이 시도가 바로 그 기준과 조건이라는 토대 이외에 아무런 다른 토대 위에서도 발생할 수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산출된 정세와 운이 신비한 설명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듯이, 마키아벨리의 기획은 오히려 '실제로 작동하는 진리'를 가지고 정세와 운을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것들의 신비로움을 벗겨내는 것이다.37)
사태를 조금 연장하면, 원인과 결과가 뒤얽힌 직물 전체가 어떤 보이지 않거나 숨겨진 기원적 원인 또는 원리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입증 너머에 있는 이 같은 믿음은 행동해야 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즉, 임박한 사건에 대해 우주론적-형이상학적-신학적 시각을 취하는 것은 여기에서 무익하다. 더 나쁜 것은, 그 숙명론적 교리가 수동성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이 교리는 정황들을 분석하고 적절한 수단들을 취할 것을 북돋는 대신 행동의 가능성들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분명, 각각의 사건마다 활동가들이 있다. 누구는 성공하고, 다른 누구는 실패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그 누구의("당신은 영원히 지속하는 공화국을 세울 수 없다") 성공도 보장되거나 영속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활동가는 그것(국가의 지속, cf. 『마키아벨리와 우리』, p. 40)에 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성공은 '신의 손'에 있거나 '별자리에 쓰여 있거나' '타고난 능력'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못하거나 하는 사실적 가능성과 기회다.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또는 디드로의 숙명론자 자크가 생각했던 것처럼 위대한 책들에 쓰여 있다고 가정해 보라. 활동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물들의 의미를 박탈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행위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나 힘을 망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철학자는,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신학적인 근거에서, 행동을 방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어떤 본원적인 원인이나 법칙, 또는 원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점성술사는 현세적 정세들이 단지 천체적 성좌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류의 주장은 결코 원리들의 숨겨진 법칙들을 적합하게 서술해 내지 못한다. 그것이 틀림없이 어려운 까닭은, 이 같은 법칙이 사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미세한 사건들조차 망라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가의 시각에서, 우주론적-형이상학적-신학적 관점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이는 자신의 시대의 종교에 관해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견해였다. 철학자들의 주장은 아마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겠지만, 이는 그것들이 정의상 입증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아무런 실천적 소용에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38) 이 모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이원론에 기초한 관점에서 우발성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연의 '객관성'이나 '주관성'에 관해 다투는 것은 악순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생산적인 논쟁에서 벗어나려면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우발론적 해석이 가지고 있는 더 큰 명료함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우발성 너머로 감히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활동가의 위치와 시각에 집중할 것을 요청한다. 적어도 마키아벨리의 문헌에서는 이 불완전한 위치는 (무지 따위를 의미하는) 부정적 범주만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행위를 도울 수 있는 인지적이고 동적인 입장이나 시각을 가리킨다. 1) 상상과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2) 철학적이거나 우주론적인 체계를 극복하며 3) 행동을 취하기 위한 사실적 기준과 조건, 가능성을 판단하고 활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주관적/객관적 이분법을 넘어서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운이나 정세는 인간 삶에 외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초월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39)그것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해석적 분할을 기각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우연을 볼 때 인간들은 어떤 외부적 체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행동으로써 참여하거나 결합하는 사건 또는 정세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 가지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첫째, 한 편으로 자연과학자들이 우연을 분석하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한 편으로 마키아벨리의 우발적 운 사이의 차이가 있다. 둘째, 한 편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또는 기성 사실)을 설명하는 역사가와,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활동가 사이의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의 운. 자연과학자가 가스 분자들의 운동을 관찰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적어도 연구 대상에 자신의 측정 수단이나 그녀 자신이 미치는 어떤 영향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가 무언가를 변경하더라도, 분자들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가능한 편차의 원인은 여전히 연구자 가 아닐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비록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을지라도, 실험의 타당성과 신뢰성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로, 우연에 관심을 가진 자연과학자들이 관찰하는 가스 화합물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고 역사적인 '가스 화합물의 사례'로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특정한 가스 분자가 어떤 화합물에서 임의로 움직이는 방식에 관한 비역사적이거나 역사외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연구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화합물에서 어떤 종류의 무작위성이 나타나느냐는 연구의 목적에 있어 전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물론 동일한 화합물의 서로 다른 표본과 각각의 분자 운동을 비교하여 관찰된 무작위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법칙을 찾기 위한 것이 요점이 아니라면 말이다.)
활동가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활동가는 자신이 조사하고 있는 사건의 일부이고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건은 그에게 있어 유일한 역사적 사례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미래의 도가니다. 반면, 과학적 실험은 반복가능해야만 한다 즉 다른 과학자들이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그것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들과 달리 활동가는 사건의 과정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화, 적어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례의 '주체'이자 '대상'이며, '원인'이자 '결과'이다. 그가 사건의 과정을 판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많을수록, 그는 그의 정세 안에서 더 잘 행동할 수 있다(비록 이를 위해 가끔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사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는 활동가가 자신의 정황을 분석할 때 우발성을 기각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재치와 기예 안에서 놀라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힘을 다해 '주체적'인 동시에 '객관적'으로 개입하려 노력함으로써 우발성이나 놀라움들을 가장 명확하게 고려한다. 그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과거형인 "무엇을 했는가?"도, 보편적 시간인 "무엇을 할 것인가?"도, 심지어 미래학적인 "무엇을, 일반적으로, 할 것인가?"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지금 여기에서 할 것인가?"라는 개인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 '정치적' 질문은 마키아벨리에게 중추적이었고, 심지어 그가 과거 사건들의 과정과 당시 내려진 결정들(마찬가지로 많은 모의실험을 포함했던)을 분석(하고 모의실험)할 때조차 그랬다.40)
이제, 우발성을 주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활동가가 자신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그의 사례와 활동의 사실적 기준과 조건, 정황들을 정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일정한 형태로 한 사례에서 다른 사례로 되풀이되는 상수들을 아는 것에서 이익을 얻는다. 이로써 그는 그의 무지를 감축하거나 주관적 임의성의 요소를 줄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가는, 자신이 무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들과 예견할 수 없는 결과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인간이 사건 안에서 작동하거나 그것에 기여하는 요소들 전체를 도표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모든 놀라움들을 그 위험부담과 함께 제거하고 사례를 주권적인 방식으로 통달하는 것, 그러니까 지상의 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건의 원인들은 현세적일 것이지만, 현세성은 복합성의 부재나 통달의 약속을 가리키지 않는다. 활동가는 그 자신의 행동이 사건들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안다. 더욱이 그는 그의 행동이 다른 행위자들의 행위, 그리고 또 사건의 다른 기준과 조건들과 연접하면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활동가는 사건 속에 개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또한 그 과정에 개입하여 성가신 놀라움들을 피할 수 있고 위험부담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활동가가 이를 달성하는 데 완벽함이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활동가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수준의 우발성에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이는 ⅰ) 특히 그 자신의 사례와 ⅱ) 더 일반적으로 그 수준의 변화의 한 원인이 되는 것 양 쪽에 걸쳐 있다.
ⅰ) 활동가는 사건과 정세를 틀지어 '유쾌하지 않은 놀라움'들이 그 자신에게보다는 그의 적수에게 벌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는 사건에 연관된 다른 행위자들보다 더 우수하고 더 능숙하게 우발성을 이용하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가장 흥미로운 구절들 중 하나는 자신의 적수들에게 불운한 걸림돌을 배치하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ⅱ) 활동가가 자신의 정세를 틀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건의 우발성의 수준에 개입할 수 있다. 그는 정세의 기준과 조건을 틀지어 그 사건들이 다른 경우에 그랬을 것처럼 위태롭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사실상 우발성의 수준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우발성은 이 점에서 분명 주관적 무지와 다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우발성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으로 객관적'이다. 비록 상상된 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건과 그 안의 활동가가 '객관적으로 비-우발적'일지라도.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해석에서 우발성이라는 쟁점을 이해하려면, 주관적 이해와 객관적 이해의 분할이 말하자면 상상된 신의 시점에서의 일반적 이분법이나 절대적 용어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발성은 인간의 입각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인 객관적 우발성들과 주관적 우발성들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우발성은 어떤 인간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사건들에 관련된 것이다(왜냐하면 각각의 이론이, 관련 법칙과 함께, 속이거나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주어진 보장이 없고 잘못된 순서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복합성들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을 높이(고 우발성의 주관적 수준을 감축하)는 동시에 사건들이 그들에게 더 적은 놀라움을 초래하게 틀지음으로써(즉 우발성의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수준을 감축함으로써)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전능한 신은 이 같은 연구와 변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완전한 존재는 가장 복합적인 상황에서조차 지배적인 법칙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데, 비록 이것들이 인간적 입각점에서 판단할 때 우발성에 대한 통제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그렇다.
역사에서의 운. 역사가들과 달리 활동가의 과거 분석의 특징은 이미 발생했거나 완결된 것(기성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노력에 있지 않다. 혁명적 지도자 레닌처럼 활동가가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행동 전략을 계획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반드시 현재에서 미래로 기투(企投)된 자신들의 기획의 필요에 봉사해야 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역사의 특징이 필연성이 아니라 우발성의 우위라는 알튀세르적 관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연구하는 역사는 여전히 돌이킬 수 없이 있는 그대로의 기성 사실의 일종이다. 게다가 역사가들은 더 이상 예컨대 민족의 탄생을 사건들의 필연적인 목적론적 계열들의 결과로 신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구하는 사건은 (비록 다양한 해석을 허락하긴 하지만) '응고된' 과거의 일부다. 반면 활동가들에게 있어 우발성이 갖는 의미는 피해야 하는 과거와 현재의 위협이자 이용해야 하는 약속이다. 그들 자신의 사건은 모두 미래에 열려 있는 수많은 좋고 나쁜 현재적 가능성들의 경기장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활동가가 (변)덕을 갖는 것은 그가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변)덕스러운 것은 자신의 앎과 수단을 가지고 우발성을 통제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보다 더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놀라움들을 예견하고 심지어 다른 보다 덜 (변)덕스러운 행위자들에게 손해를 입히기 위해 그것을 조작함으로써 우발적 상황들을 다룰 수 있다.
활동가가 점하는 위치는, 역사가의 위치와 비교할 때, 유혹적인 동시에 두렵다. 역사가들이 부러움을 느끼곤 하는 것은, 활동가의 위치가 사건들의 과정에서 자기발명의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에서 근본적인데, 예컨대 혁명적 지도자로서 레닌의 모습처럼 정치적 행동의 진정한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데서 그렇다. 1917년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의 과정에서, 레닌은 분명하게 이야기했지만, 정세의 어떤 것도 볼셰비키가 수행한 혁명적 행동이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의 성공에 절대적인 장애물도 없었다. 볼셰비키의 성공은 우발적인 가능성, 기회였으며, 이를 이용하려면 상황에 대한 적절한 분석뿐만 아니라 적기(適期)에 이루어지는 행동 역시 필요했다.
활동가의 위치 안에 있는 위협적 측면이란, 그의 운이 영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못 쓰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그의 행동이 그의 계획을 부수고 자신을 망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식으로 결합된다면. 이는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에게 생겼던 일인데, 그는 가능한 최대 수준의 (변)덕스러운 활동가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병에 걸렸고,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로마냐의 주도권 하에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기회를 잃었다. 알튀세르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마키아벨리는 원자화한 이탈리아에서 이 마주침이 일어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의 뇌리에는 분명히 체자레가 항상 떠나지 않았다. 무에서 시작하여 로마냐 지방에서 공국을 이루었고 율리우스 2세에 거역하여 그를 면직시키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던 중 결정적인 시점에서 레반나의 습지에서 병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피렌체를 장악한 후 북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했을 저 체자레 말이다."41)


비록 활동가가 사건의 과정에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는 사물들이 진행되는 방식을 통제하는 중심이 아니다(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발성은 우여곡절을 일으키며, 현실의 약속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간 인물과 개인, 정세와 국가의 탄생을 위한 가능성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알튀세르는 파국의 선택지를 잊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제시된 것은 역사가 스스로를 시작도 목적도 없는 위협과 가능성의 유희로 제시하는 파노라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 즉 이들 세계의 인물들, 개인들, 정세들 또는 국가들을 주어진 전제들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고려하고자 하거나 어떤 목적의 잠정적 예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되리라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잠정적 결과들이 다음과 같은 이중의 이유에서 잠정적 결과들이라는 것, 즉 그것들은 지나가 버릴 것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또는 만약 그것들이 상당한 운, 이 형태가 (우연히) 주재하게 된 서로 결합한 요소들에 '지속'의 '기회를 부여하는 상당한 운의 알맞은 토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짧은 마주침'의 효과로서만 일어나리라는 점에서 잠정적 결과들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무 속에 있는 것, 무 속에 사는 것이 아니며, 역사의 의미(역사의 기원들에서부터 역사의 종료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초월하는 목적)는 없지만 역사 속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이 의미는 그 자신 역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효한 그리고 유효하게 알맞은 마주침 또는 파국적인 마주침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42)


그러나 역사의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거나 야기하는 이 사건들 안에서만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 국가의 탄생은 역사의 절대적 의미(Meaning)를 표현하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 우발성 안에서, 사건들의 복합적이고 우연적인 계열들이며, 표현된 절대적 의미 따위로 사후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역사란, 역사의 연속적 단계들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열려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으로, 그리고 미래에 열려 있고 그 개방성 때문에 불분명한 지평 안에서 벌어지는 행동들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1)Etienne Balibar, 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 In Postmodern Marxism and the Future of Marxism. Essays in the Althusserian Tradition, p. 115. Edited by Antonio Callari and David F. Ruccio. Wesleyan University Press, Hanover and London 1996.본문으로

2)
위의 책.본문으로

3)
위의 책.본문으로

4)
위의 책.본문으로

5)
위의 책.본문으로

6) Louis Althusser, L'avenir dure longtemps, p. 213. dition tablie et pr sent e par Oliver Corpet et Yann Moulier Boutang. STOCK/IMEC, Paris 1992.[국역: 돌베개, 1993]본문으로

7)Louis Althusser, Is it Simple to be a Marxist in Philosophy? In Essays in Self-Criticism, pp. 165~207. Transl. Graham Lock, New Left Books, London 1976.[국역: 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1]본문으로

8)위의 책, 182.본문으로

9)Balibar, 위의 책, 115.본문으로

10) Louis Althusser, Contradiction and Overdetermination. In For Marx, pp. 117~128. Transl. Ben Brewster. New Left Books, London 1977.[국역: 백의, 1997, pp. 137~151]본문으로

11)나의 책 Niccol Machiavelli ja aleatorinen materialismi. 특히 이 주제를 자세히 다루는 10장을 보라.본문으로

12)Louis Althusser, For Marx, p. 215.[국역: p. 257]본문으로

13) Louis Althusser,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In 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p. 566. Textes r unis et pr sent s par Fran ois Matheron. STOCK/IMEC, Paris 1994.[국역: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백승욱 편역, 「마주침의 유물론」, 『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새길, 1996, p. 79]본문으로

14) 위의 책, 566.[국역: p. 78]본문으로

15)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In 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p. 58. Textes r unis et pr sent s par Fran ois Matheron. STOCK/IMEC, Paris 1995. / Louis Althusser, Machiavelli and Us, p. 16. Transl. Gregory Elliott. Verso, London - New York, 1999.[국역: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마키아벨리의 가면』, 이후, 2001, p. 59]본문으로

16)L'avenir dure longtemps, p. 234 / The Future Lasts a Long Time, p. 242. Transl. Richard Veasey. Chatto & Windus, London 1993.
본문으로

17)Machiavelli and Us, p. 80.[국역: 71]본문으로

18)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65~566.[국역: p. 78]본문으로

19)Louis Althusser,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In Lignes, 18, janvier 1993, p. 99.[국역: 루이 알튀세르,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철학과 맑스주의』, p. 179]본문으로

20)위의 책, pp. 100~101.[국역: p. 181] virt 를 '(변)덕'이라고 옮긴 이유에 관해서는, 월간 『사회운동』 71호(2007. 1/2) 「책 속의 책」 각주 33을 보라.본문으로

21)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61.[국역: p. 70]본문으로

22)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99본문으로

23)위의 책.본문으로

24)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65~6.본문으로

25) 예컨대 Machiavel et nous, p. 59.본문으로

26)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99~101;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46.본문으로

27) Louis Althusser, Solitude de Machiavel, p. 34. Futur ant rieur, Ⅰ, 1990 / Machiavelli's Solitude, p. 124. Transl. Ben Brewster. In Machiavelli and Us [국역: 루이 알튀세르, 「부록: 마키아벨리의 고독」, 『마키아벨리의 가면』, p. 208]본문으로

28)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p. 99~100.본문으로

29)Il principe, ⅩⅤ.[국역: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옮김, 『군주론』, 까치, 1994, pp. 106~107]본문으로

30) 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5.[국역: pp. 186~187]본문으로

31)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p. 100~1;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45.본문으로

32)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5.본문으로

33)L'avenir dure longtemps, pp. 233~234; cf. 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52 and Essays in Self-Criticism, p. 136.본문으로

34)For Marx, p. 104.본문으로

35)Essays in Self-Criticism, p. 112, note 8.본문으로

36)L'unique tradition materialiste, p. 100; cf. Machiavel et nous, p. 80 and p. 126.본문으로

37) Machiavel et nous, p. 80본문으로

38) David Hume, Enquirie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and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p. 103. Edited L.A. Selby-Bihgge. Third edition. Clarendon Press, Oxford 1977.본문으로

39)이 쟁점은 위에서 언급한 나의 책 5.2 & 5.3절에서 다루어진다.본문으로

40)Machiavel et nous, p. 59.본문으로

41)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p. 544~545.[국역: p. 44]본문으로

42)Le courant souterrain du mat rialisme de la rencontre, p. 567.[국역: pp. 79~80]본문으로






핀란드 탐페레(Tampere) 대학 정치학과 조교. 이 논문은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과 그의 마키아벨리 해석에 관한 나의 책에 기초를 두고 있다. Mikko Lahtinen, Niccol Machiavelli ja aleatorinen materialismi. Louis Althusser ja Machiavellian konjunktuurit ["Niccol Machiavelli and Aleatory Materialism. Louis Althusser and Machiavelli's Conjunctures"]. Acta Universitatis Tamperensis, Tampere 1997. 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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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우습게도, 대학 와서 처음 내가 가졌던 희망사항 중 하나가 공익이 되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는 종종 군인이 되어 있는 모습이 가장 상상이 되지 않는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곤 했었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신검에서 4급을 받기에는 그 기준에 비해 나의 신체는 '정상적'이었고, 결국 현역 입대 판정을 받았고, 여차저차해서 입대를 결심하게 된 후, 그래도 굳이 육군으로 가기는 싫어서 소방으로 대체복무를 하게 되었다. 조금은 끝이 보이는 것도 같다.

벌써 몇 달 전에 보려고 했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영화 속 태정(하정우)처럼 나도 어느새 주위로부터 '말년병장'이라고 불리는 '짬'이 되어서인지, 처음에는 그저 이 영화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그런 에피소드들을 지극히 평이하게 그린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참 유행했던 오인용의 '연예인지옥' 같은 플래쉬의 수준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가 견딜 수 없이 나를 자극했던 것은, 영화 구석구석에, 대사 하나 하나 속에 나의 경험들이 교차되고 겹쳐있다는 것, 다시 말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속에 분리불가능하게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훈이었고 또 승영이었고 또 태정이었으니까. 아마도 예비역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과 실제의 경험없이 보는 것은- 어느 쪽의 독해가 더 객관적이라거나 우월하다거나 하는 차원과는 무관하게-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중학교 동창인 태정과 승영(서장원)이 신병과 내무반장의 관계로 만나는 것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일선 서에 배치된 후에 학교 선배를 선임으로 만나기도 했다.물론 선배가 선임이었기에 그 관계의 복잡함은 훨씬 덜 했지만)     

금기시되는 듯 하면서도 오히려 무수하게 많이 소통되어 있는 군대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는 이 영화 속에도 중심에 있다. 물론 그 폭력은 선 후임 간의 위계서열, 군대라는 '조직' 내의 물리적, 상징적 폭력의 문제, 때로는 성기 만지기, 수치심 주기 등으로 등장하는 성폭력에서 표면화된다. 영화 속 승영의 반폭력의 의지가 실천적으로 무력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착한 선임 '하나'가 군 조직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이 영화를 승영 개인의 군대 적응 실패로 요약하는 방식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영의 개인주의(심지어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귀에 달고 있던 이어폰의 이미지가 상징하는)가 결국 폭력의 모방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승영이 후임인 지훈(윤종빈 감독 본인!)에게 '뽀글이'를 끓여준다든지, 전화를 하게 해주는 식으로 '잘해주는 것' 외에 실질적으로 군 선임과 후임의 관계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견교환이나 소통, '집단적인'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종일관 군대의 '비합리'를 외치는 승영의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어쩌면 너무나 소박하고 순진한 태도이며, 이 '비합리적인' '집단주의'의 힘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대립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군 생활의 형태가 아니었고 내무생활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적은 인원과 생활한 나 조차 영화 속 태정, 승영, 지훈 등이 경험한 일들을 거의 겪어봤다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은 놀라웠다. 군 생활을 어떻게 견뎠냐는 승영의 질문에 태정이 답한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기간에 따른 진급과 전역제도가 있는 군대의 절대적 진리일까? 군대가 갖는 호소력의 실질적인 힘은 어쩌면 이러한 강한 의미에서의 '평등'이라는 보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당장 내일모레 전역하는 '깔깔이'를 입은 말년병장에게도 지훈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 역으로 지훈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필연적으로 '깔깔이'를 입게 되리라는 것) 누구도 다시 가라면 가지 않을 군대이지만 남자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군대 얘기를 늘어놓게 되는 것은, 또한 전역 후의 시간적 거리가 갖는 낭만화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들은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위계서열을 경험하고 그 순서가 역전되고 자신이 받은 폭력을 다시금 밑을 향해 돌려주었던 '평등'하고 '인간적인' 시절을 그리워한다. 차이화와 개성화의 원리를 더욱 더 심화시키면서 이를 자신의 고유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의 경향이 심해질수록 이러한 향수는 아마 더욱 강렬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뜬금없게도 진중권 등이 하는 것처럼 한국의 '군사문화'를 비판하고 '일상 속 파시즘'담론이 수면 위로 활발히 떠오르는 오늘의 세태는 이와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군의 문화와 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을 필요이상으로 상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구체적인 개별성들을 무시해버릴 위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문제설정이 현재로서의 '이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위험. 쉽게 '말할 수 있다'는 단언이 과거 전체를 현재 자신과 단절되고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해버릴 위험.

이른바 덜 빡센, '땡보' 생활을 한 나에게 현재를 견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힘든 보직, 더 힘든 군인들의 사례를 보라고 강요하곤 했다.(너희는 군인도 아니야/그래도 너희는 군인이야라는 이중잣대) 그나마 어떤 것보다는 더 낫기에, '덜' 고통스럽기에 견딜만 하다는 것, '덜' 하기에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폭력을 등급화하고 그 효과를 중화하고 그 폐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말이다. 이른바 몇 년전 '노동귀족', '대기업노조' 등에 대해 지배계급(아직 마땅히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퍼부었던 비난의 논리에도 유사한 구조(배부른 대기업노조와 노조 조차 결성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간의 이상한 대립구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견딤/복종의 논리는 꼭 군대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겠지.

그런데 실질적으로 사병 내 계급을 폐지할 수는 없을까? 얼마전 병영 내 존칭 문화 확산에 관한 뉴스를 듣고, 그러한 시도가 실질적인 계급 폐지와 병행된다면 조금은 군 조직에서 폭력의 감축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에 대한 예비역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였으며 이런 식의 댓글이 붙는다. '김 일병님, 대가리 박으세요. 정신이 외박 나갔군요' 그럼 이렇게 얼차려를 주어야 하냐는 식의 항변) 그러고보면 군대 내에서 폭력만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무익한 시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군 조직 자체와 폭력을 동일시하는 것 역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하다. 예전에는 군대없는 세상을 왜 상상하지 못할까? 라고 얼마간 단순하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무책임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군대의 민주화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기만 한 걸까?

이상하게도 영화의 주제랑은 크게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지훈과 승영이 자살하는 두 가지 모습의 대조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군화끈에 목을 매달아 강렬하고 짧은 고통을 택하는 지훈과 수건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려다가(그것도 침대에 누워서!) 실패하고 손목을 그은 뒤 욕조 속에 몸을 담근(음악이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들으면서)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승영.

몸은 힘들었지만 쉽게 잊혀지는 훈련소 시절과 후임을 받게 되면서 고민하고, 힘들었던 몇 달, 그나마 좋아했던 운동과 '공동작업'의 땀흘리던 기억, 목소리가 작다며 얼차려를 받던  기억들, 또 2년.. 영화 중반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나오는 승영과 태정의 대화처럼 나는 '어른'이 된 걸까?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정말 신기하게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2년동안의 기억이 점점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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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p90

과거의 기억은 대개 아름다운 것만 취하게 마련이고 미래에 대한 예감은 상실이나 실패의 방향으로 기운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 진부한 구절일 수도 있다. 거창할 것도 없이 저런 생각은 중년도, 청년도, 어린 아이도 다 한다. 정말로 두려움을 느끼는 때는 일상성에 묻혀있다가 갑작스레 시간의 비가역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무엇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낮잠을 자다가도 가끔 악몽이 찾아온다. 하루하루가 chicken race 같던 시절, 서로가 시한폭탄처럼 느껴져서 바라보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참으로 좋은 세월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몇 없는 불빛이었다.

요새의 몇몇 기억. 몇 주 전 체육대회를 하러 처음 가본 월드컵경기장 아래 새겨져 있던 붉은 색 H, 정상영업을 알리는 현수막, 닭장차, 2년 전 군화가 맞지 않아서 생겼던 것과 꼭 닮은 푸른 발톱의 피멍. 구청 휴게실에 붙어 있던 11월 11일의 포스터, 03년도엔가 꽃병이 나뒹굴던 11월의 서울 어딘가. 포털 사이트에 옥소리 외도의 진실 따위와 함께 뜨는 연이은 분신 소식, 댓글들, 매캐한 냄새가 떠오르는 허연 소화기 가루, 언젠가 직원이 다쳐서 따라가본 '화상전문' 한강성심병원의 전경.

부쩍 불이 잘 붙는 계절이 오긴 왔다. 그런데 자기 몸에 불을? 명복을 빈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冥福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자살은 더더군다나 안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명복 같은 건 애초에 틀린 거 아닌가. 문득 노무현씨 당신은 노동자들의 분신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합니다. 얄팍한 휴머니즘에 호소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마도 당신들로서도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사람에게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최저 한도'라는 게 있음을 아시는지?

요즘은 체중을 잴 때마다 살이 빠져있다. 지금이 63kg니까 표준 체중하고 한 9kg가 차이가 난다. 11월이면 한창 천고마비의 계절이니, 하는데 이건 또 어디 탈이 났는지 싶기도 하고.. 11월이 가장 우울한 계절이 된 건 아마도 어떤날의 '11월 그 저녁에' 을 듣게 된 이후인 것 같기도 하다. 거리에 스산하게 쓸려가는 낙엽들을 보면서 이런 노래를 들으면 가슴 속에 내내 찬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병약한 체질이라면 지독한 가을비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꾸듯 아득히 구름은 흘러가고
떠나간 친구의 노래가 들려온다
산다는 것이 뭐냐하던
사랑이 모든 것이냐던
누가 내게 대답해주냐던
인생 참 어려운 노래여라

비가 내릴듯 젖은 바람 불어오면
지나간 날들에 내 모습 생각한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
되묻지 못할 너의 대답
말없이 웃어야 했던 날들

서러워 우는듯 나직히 비 내리고
어설픈 미소가 입가에 스쳐간다
나의 어제가 그랬듯이
나의 오늘이 이렇듯이
혼자서 걸어가야만하는
인생 참 어려운 여행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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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파요.

누에 2007-11-0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비 조심하세요. 후두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