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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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인권’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여러 사상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로 운위되는 것이 ‘인신의 자유’(habeas corpus)라는 것이다. 이 라틴어의 원 뜻은 “내 몸은 내 것이다”(I have my body)라는 말이라 하는데, 13세기 영국에서 생겨난 소위 대헌장(Magna Carta)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헌법적 위치를 가진 구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생겨난 구체적 맥락은 ‘인신의 자유와 영혼의 자율성’과 같은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다기보다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이하학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인신의 자유가 요구되었던 것은 ‘소유권’의 확립을 위한 한 장치로서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영국의 존 왕(King John)은 전쟁 등을 명분으로 하여 무척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여기에 대해 반발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뭉쳐서 왕이 함부로 신민들의 재산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왕권을 제한하는 것이 그 대헌장이라는 것의 역사적 맥락이었다. 어째서 인신의 자유가 여기에서 관련이 되는가? 서구에서나 동양에서나 권력자가 인민에게서 재물을 뜯어내는 방법이 가렴주구(苛斂誅求) 혹은 글자 그대로 끌어다놓고 주리를 틀어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렴주구와 같은 잔혹 행위를 원천적으로 방지해야 했고, 여기에서 ‘인신의 자유’라는 생각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인권과 소유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대헌장의 정신을 고도의 정치 철학으로 발전 승화시켰던 존 로크(John Locke)의 자유(liberty) 개념에서 보인다. 그는 자유란 다시 세 가지 즉 ‘자유, 생명, 재산’(liberty, life, property)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유권이 ‘인신의 자유’와 동일한 정도로 인간 권리의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나의 인신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소유가 없다면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반대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산속에서 노상 강도를 만날 경우의 상황이란 나의 인신의 자유의 위협과 나의 소유의 위협이라는 것은 두 개로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결국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은 내 소유를 건드리기 위함이요 내 소유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내 인신을 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미권 국가들에서는 다른 이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할 경우 엄벌을 받을 수 있으며 때때로 그 땅주인의 총알 세례(!)를 감수해야 할 경우까지 있다.
이렇게 소유권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부여받는 가장 중요한 천부 인권으로 보는 관념은 영미 세계의 정치 사회 사상에서 지배적 전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논리적 맹점이 있다. 대헌장이나 존 로크의 저작이 상정하고 있는 사회 상태는 군주가 신민을, 또 인민들 각자가 서로서로 인신과 재산을 마구 노리는 늑대와 같은 상태이다. 이렇게 정글과 같은 사회 상황에서는 소유권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하나의 ‘인권’의 차원으로 올라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질서가 정돈되고 고도로 발전된 법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과연 소유권은 ‘인권’인 것일까?
실제로 루소나 칸트와 같은 대륙의 사상가들은 소유권이란 공동체 전체의 권위에 의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법적 인정을 받을 때 완결되는 권리라고 보고 있다. 즉 개인이 아기로 태어날 때 옥황상제에게서 받아오는 ‘천부 인권’이라기보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회 그리고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나마 공공의 이익과 권리가 우선할 경우 그 개인에게 주어졌던 소유권은 사회로 회수될 수도 있는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소유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토지였던 농경 사회와 달리 고도로 발전한 산업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가 그다지 투명하게 보일 때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올해에 예상을 뛰어넘는 순이익을 올렸다고 해보자. 이것이 주식 배당금으로 주주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직원들의 임금 상승이나 상여금으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는 쪽으로 써야 하는가 아니면 회사의 금고에 그대로 쟁여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에 따라 국가는 어느 만큼씩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결코 “모든 이들은 인신의 자유를 갖는다”와 같은 간단명료한 문장의 원칙 하나로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복잡한 것들이다.
만약 소유권이 ‘천부 인권’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법적 제도적 질서에서 만들어지는 인공의(artificial) 권리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면 이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엄청난 논쟁과 논의의 장으로 들어가는 판도라의 상자 열기와 같은 일이 된다. 개인은 어떤 근거에서 또 어느 정도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소유권을 보유하게 되는가. 그가 사회에 지는 책임은 무엇인가. 프루동이 갈파했던 것처럼 어느 개인의 소유권이 타인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정도로 확장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등등. 실제 20세기 선진 자본주의 각국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발전사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져왔고 그 결과 나타났던 20세기 자본주의의 모습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21세기 들어와 이러한 추세가 역전되고 영미의 소위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소유권을 초법적인 위치의 ‘인권’의 차원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소유권을 놓고 복잡하게 발전했던 각종 제도와 규제 장치들이 모두 사라지고 단일의 주권으로서 그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의 ‘희망’까지 튀어나와 모든 민중들의 머리를 사로잡기 전에 재빨리 상자를 닫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홍기빈의 인권이야기]
소유권은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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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어린 왕자는 어느 별에서 재미난 아저씨를 만난다. 그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오억 일백 육십 이만 이천 칠백 삼십 개’의 별을 세고 또 세고 있다. 어린 왕자는 그에게 묻는다. 이 별로 무얼 하느냐고. 그는 대답한다. 조그만 문서에 별의 숫자를 적어서 서랍에 넣고 잠근다고. 그러자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이야 꽃을 한 송이 소유하고 있는데 매일 물을 줘. 세 개의 화산도 소유하고 있어서 주일마다 그을음을 청소해 주고는 하지… 내가 그들을 소유하는 건 내 화산들에게나 꽃들에게 유익한 일이야. 하지만 아저씨는 별들에게 하나도 유익하지 않잖아.”
이 짧은 우화는 소유권 개념을 둘러싼 역사적 논의의 중심 가운데 하나인 ‘사용’과 ‘타인의 접근 배제’라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린 왕자는 내가 그것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어 나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고 또 그 와중에서 그것도 변화를 겪게 되는 ‘사용’이 소유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아저씨는 ‘자기 것’이라고 선언된 별들을 숫자로 바꾸어서 서랍에 넣고 잠가버린다. 왜 그럴까. 그런 이상한 숫자 놀음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우주를 헤매야 했던 어린 왕자에게는 그것을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라는 별의 땅위에 붙들린 채 몇 천 년을 살아온 우리는 그 의미를 몸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종이에 숫자로서 적힌 별들에는 그 아저씨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결국 소유권을 적어 놓은 종이를 서랍에 넣고 잠그게 되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그 모든 별들이 그 잠긴 서랍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가 소유권이라는 말을 놓고 이야기를 풀 때에 숱한 혼동을 낳는 지점이다. 소유권이란 그 소유자가 소유 대상을 실제로 사용할 권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허락 없이 타인들이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권리를 말하는가. 만약 전자라면 전혀 ‘배제’없이 ‘사용’만 하는 소유자 즉 자기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가능성만 보장된다면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그것을 또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또 후자라면 전혀 ‘사용’없이 ‘배제’만 하는 소유자 즉 실제로는 그 소유 대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누구 다른 이가 혹시라도 그것에 접근하려 들면 그 즉시 발포하는 소유자를 상정할 수 있다.
전자에서는 그래서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여러 소유 형태가 나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 영국 농촌의 공유지(commons)와 같은 것이 있다. 그 마을에 정착하고 사는 이라면 원칙적으로 누구나 그 땅을 ‘사용’할 수 있고 아무도 다른 이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그 마을 전체의 소유인 것이다. 또 공유지가 아닌 경우에도 토지의 소유권이란 주로 누가 어떤 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서 정의되어 왔다. 이는 마을마다 또 땅뙈기마다 거기에 얽힌 관습과 특성 등등으로 복잡하게 정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16세기 영국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힘을 가진 영주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공유지이건 또 누가 경작하기로 되어 있는 땅이건 그 땅을 실제로 사용하던 사람들을 싹 다 몰아내어 버리고 다시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처 버린 것이다. 마르크스가 공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로, 이러한 ‘종획 운동’(enclosures)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소유권이 탄생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제 소유란 ‘내가 그 땅을 경작할 권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권리’로 즉 ‘사용’에서 ‘배제’로 뜻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바의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본질이다. 즉 그것은 ‘사용’의 권리가 아니라 ‘배제’의 권리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그나마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공유물’(commons)의 영역은 계속 더 줄어들고 있으며, 대신 전혀 ‘사용’을 하지 않고 ‘배제’의 권리만을 행사하는 이들-부재 지주, 기업 경영에 관심 없이 주식만 소유하는 주주들 즉 베블린이 말한 ‘부재 소유자’(absentee owners)들, 선물 옵션 시장의 거래자들 등등-은 도처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소유권이란 어린 왕자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소박한 의미가 아니다. 자기가 사용을 하건 말건 남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소유권 개념은 결코 흔히 믿어지듯이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기껏해야 500년을 넘지 못하는 비교적 대단히 새로운 현상에 불과하다.
20세기 초 미국 철학자 모리스 코헨(Morris Cohen)은 이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별을 행하였다. 세상에는 자기가 직접 어떤 대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관계를 빌어서 생겨나는 소유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는 보통 ‘점유’(possession)라고 하는 것으로서 법적 사실로서 인정되는 ‘소유’(property)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점유가 ‘점유자와 점유 대상과의 관계’임에 반해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 즉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밝힌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상 정의하고 있는 것은 ‘소유자와 비소유자의 관계’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밝혀 놓은 것 뿐이라고.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우리는 흔히 소유란 경제적 사실과 개념에 불과하므로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멀고 특히 인권 문제와는 더욱 무관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쉽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번 칼럼에서 오히려 소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고까지 주장하는 논리와 그 모순점에 대해서 본 바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 본 것처럼 소유란 소유자와 소유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타인을 배제’하는 권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는 바로 적나라한 사회적 ‘권력’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코헨은 이렇게 사회적 권력으로 변해버린 자본주의에서의 소유 개념은 정치권력의 주권(sovereignty)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권이 추상적인 권리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려면 인간 존재에 필수적인 타인과 자연에 대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는 분명 그러한 ‘타인들의 접근권’을 배제하는 소유권이라는 지뢰밭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로써 인권과 소유권은 정면으로 모순될 가능성을 배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