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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라리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그나마 가장 윤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으나, 좌파 중에는 며칠 남지 않은 대선에 대해서 보이코트를 주장하고 나서는 분들이 간혹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보이코트 선언이야말로 사살상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돌아볼 줄 모르는, 돌아보지 않으려는 좌익 기회주의의 전형이자 이론적 무정부주의의 행위적 표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좌파의 정치적 개입력이 제로 상태로 떨어진 상태에서 보이코트를 선언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여전히 우리가 '의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즉 여전히 자신은 좌파이며, 좌파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며,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한 저 세상의 제도권 정치의 바깥에 철저히 남아 있겠다는 의미. 혁신을 위한 결의의 순수성은 정확히 저 타락한 세상의 바깥에서 달성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이 말한 아름다운 영혼(beautiful soul)의 정의에 이토록 잘 맞아 들어가는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사실 좌파가 대선에서 이토록 수세적인 코너에 몰리게 된 것은 FTA 투쟁 패배의 직접적 효과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좌파의 대선 개입 가능성은 말 그대로 '제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투쟁 패배가 그런데 사회운동의 지난 15년간의 지속적인 패배의 누적된 결과라고 볼 수을까? 일면 그렇다. 그러나 분명 다른 일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FTA투쟁 패배가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회운동의 지난 15년간의 패배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론'적인 사고(누적적인 사고, 적분적인 사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고, 정세의 매 시기시기마다 다시 한 번 발견될 수 있는 미분의 지점들, 미분적인 '또 다른 원인들'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에서 사회운동 좌파의 지난 2년간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사회운동의 '순결'에 대한 강조를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지들에게 미안하지만, 내 판단은 그렇다. FTA 투쟁은 처음부터 철저히 신자유주의 테크노크라트들의 인민주권 강탈에 대한 인민들의 '정치적 투쟁'으로 조직되었어야만 했다(이 점에서 좌파보다는 한나라당이야말로 '정치적'이었다고 말한 서동진씨의 주장은 경청할만 하다).
FTA에 대한 국민투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투쟁은 이때문에 매우 중요했는데, 이미 그것을 일부에서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어버렸을 때였다(즉 FTA가 인민의 대표아닌 대표에 의해 대표-강탈되어버린 시점). 심지어 그러한 지각한 투쟁조차 사회운동 좌파는 더욱 더 늦어지게 만들었을 뿐이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반대를 표명하는 것 외에) 어떤 구체적인 개입경로도 찾아내지 못한 채.
FTA투쟁 실패의 '정세적' 원인(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결정적'인 원인)은 그 투쟁이 인민주권의 정치를 발동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경제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이 한국 대 미국의 구도에서 손익계산을 했지만, 민중주의자들은 민중 대 자본의 구도에서 손익계산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양자는 그렇게 모두 '경제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정확히 동일한 지반 위에 서있었다.
사회운동 좌파는 말한다. 사람들은 FTA경제,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대해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고,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이를 부정할 좌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환상이 아닌 진실로서의 '경제', 진실로서의 '손익계산'을 대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인민주권이라는 또 다른 '환상'을, 그러나 물질적인 '환상'을 대립시킬 것인가? 그것이 처음부터 문제였다는 것을 사회운동 좌파는 결코 인식하려하지 않는다.
싸움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일까? 아마도... 다만 1%의 가능성은 남아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신이 돕는다면!
어쨌든 나는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다. 비판적으로. 모든 비판적 지지가 기회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지지야말로 현시점에서는 윤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현재의 패배를 책임지는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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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면 대선이다. 가끔 인터넷을 통해 공약들을 보고, 티비를 보다 토론회 등을 잠깐 보고, 길을 다닐 때 여기저기서 나오는 로꾸꺼나 곤드레 만드레 등이 듣기 싫다는 생각만 하고 정작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름 생애 첫 대선이건만, 이 사람이다 싶은 후보도 없고 이런 투표 하나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자신할 수도 없으니 투표를 할 수도 없고 안 하기도 찝찝하다. 기호13번 바라를 찍을까, (FTA에 대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금민보다는) 그래도 차라리 권영길을? 보이콧보다는 나은 비판적 지지? 참세상을 보니 백무산 시인은 또 비판적 지지를 비판하면서 문국현을 지지한다는데.. 이래저래 어지럽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든 말든,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에 대한 대중들의 압도적 열망은 '노망' 운운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고, 노무현 정권이랑 이명박 정권이 그 실내용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다면, 그 이후를 고민해야 할까? 겉다르고 속다른 현정권보다는 훨씬 전선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까? 그런데 새판짜기와 끼어들기는 위의 비판처럼 불모의 이분법일지도 모르지만, 민노당이 다음 총선에서라도 좀 더 힘을 얻는다면 무언가 정말 달라질까? 선거만 놓고 보자면, 정치고 민주주의고, 다 그냥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다. 물론 여태 '공문구없는 폭력'이란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