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우습게도, 대학 와서 처음 내가 가졌던 희망사항 중 하나가 공익이 되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는 종종 군인이 되어 있는 모습이 가장 상상이 되지 않는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곤 했었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신검에서 4급을 받기에는 그 기준에 비해 나의 신체는 '정상적'이었고, 결국 현역 입대 판정을 받았고, 여차저차해서 입대를 결심하게 된 후, 그래도 굳이 육군으로 가기는 싫어서 소방으로 대체복무를 하게 되었다. 조금은 끝이 보이는 것도 같다.

벌써 몇 달 전에 보려고 했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영화 속 태정(하정우)처럼 나도 어느새 주위로부터 '말년병장'이라고 불리는 '짬'이 되어서인지, 처음에는 그저 이 영화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그런 에피소드들을 지극히 평이하게 그린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참 유행했던 오인용의 '연예인지옥' 같은 플래쉬의 수준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가 견딜 수 없이 나를 자극했던 것은, 영화 구석구석에, 대사 하나 하나 속에 나의 경험들이 교차되고 겹쳐있다는 것, 다시 말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속에 분리불가능하게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훈이었고 또 승영이었고 또 태정이었으니까. 아마도 예비역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과 실제의 경험없이 보는 것은- 어느 쪽의 독해가 더 객관적이라거나 우월하다거나 하는 차원과는 무관하게-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중학교 동창인 태정과 승영(서장원)이 신병과 내무반장의 관계로 만나는 것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일선 서에 배치된 후에 학교 선배를 선임으로 만나기도 했다.물론 선배가 선임이었기에 그 관계의 복잡함은 훨씬 덜 했지만)     

금기시되는 듯 하면서도 오히려 무수하게 많이 소통되어 있는 군대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는 이 영화 속에도 중심에 있다. 물론 그 폭력은 선 후임 간의 위계서열, 군대라는 '조직' 내의 물리적, 상징적 폭력의 문제, 때로는 성기 만지기, 수치심 주기 등으로 등장하는 성폭력에서 표면화된다. 영화 속 승영의 반폭력의 의지가 실천적으로 무력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착한 선임 '하나'가 군 조직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이 영화를 승영 개인의 군대 적응 실패로 요약하는 방식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영의 개인주의(심지어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귀에 달고 있던 이어폰의 이미지가 상징하는)가 결국 폭력의 모방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승영이 후임인 지훈(윤종빈 감독 본인!)에게 '뽀글이'를 끓여준다든지, 전화를 하게 해주는 식으로 '잘해주는 것' 외에 실질적으로 군 선임과 후임의 관계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견교환이나 소통, '집단적인'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종일관 군대의 '비합리'를 외치는 승영의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어쩌면 너무나 소박하고 순진한 태도이며, 이 '비합리적인' '집단주의'의 힘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대립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군 생활의 형태가 아니었고 내무생활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적은 인원과 생활한 나 조차 영화 속 태정, 승영, 지훈 등이 경험한 일들을 거의 겪어봤다는 사실을 재발견한 것은 놀라웠다. 군 생활을 어떻게 견뎠냐는 승영의 질문에 태정이 답한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기간에 따른 진급과 전역제도가 있는 군대의 절대적 진리일까? 군대가 갖는 호소력의 실질적인 힘은 어쩌면 이러한 강한 의미에서의 '평등'이라는 보편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당장 내일모레 전역하는 '깔깔이'를 입은 말년병장에게도 지훈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 역으로 지훈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필연적으로 '깔깔이'를 입게 되리라는 것) 누구도 다시 가라면 가지 않을 군대이지만 남자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군대 얘기를 늘어놓게 되는 것은, 또한 전역 후의 시간적 거리가 갖는 낭만화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들은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위계서열을 경험하고 그 순서가 역전되고 자신이 받은 폭력을 다시금 밑을 향해 돌려주었던 '평등'하고 '인간적인' 시절을 그리워한다. 차이화와 개성화의 원리를 더욱 더 심화시키면서 이를 자신의 고유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의 경향이 심해질수록 이러한 향수는 아마 더욱 강렬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뜬금없게도 진중권 등이 하는 것처럼 한국의 '군사문화'를 비판하고 '일상 속 파시즘'담론이 수면 위로 활발히 떠오르는 오늘의 세태는 이와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군의 문화와 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을 필요이상으로 상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구체적인 개별성들을 무시해버릴 위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문제설정이 현재로서의 '이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위험. 쉽게 '말할 수 있다'는 단언이 과거 전체를 현재 자신과 단절되고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해버릴 위험.

이른바 덜 빡센, '땡보' 생활을 한 나에게 현재를 견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힘든 보직, 더 힘든 군인들의 사례를 보라고 강요하곤 했다.(너희는 군인도 아니야/그래도 너희는 군인이야라는 이중잣대) 그나마 어떤 것보다는 더 낫기에, '덜' 고통스럽기에 견딜만 하다는 것, '덜' 하기에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폭력을 등급화하고 그 효과를 중화하고 그 폐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말이다. 이른바 몇 년전 '노동귀족', '대기업노조' 등에 대해 지배계급(아직 마땅히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퍼부었던 비난의 논리에도 유사한 구조(배부른 대기업노조와 노조 조차 결성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간의 이상한 대립구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견딤/복종의 논리는 꼭 군대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겠지.

그런데 실질적으로 사병 내 계급을 폐지할 수는 없을까? 얼마전 병영 내 존칭 문화 확산에 관한 뉴스를 듣고, 그러한 시도가 실질적인 계급 폐지와 병행된다면 조금은 군 조직에서 폭력의 감축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에 대한 예비역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였으며 이런 식의 댓글이 붙는다. '김 일병님, 대가리 박으세요. 정신이 외박 나갔군요' 그럼 이렇게 얼차려를 주어야 하냐는 식의 항변) 그러고보면 군대 내에서 폭력만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무익한 시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군 조직 자체와 폭력을 동일시하는 것 역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하다. 예전에는 군대없는 세상을 왜 상상하지 못할까? 라고 얼마간 단순하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무책임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군대의 민주화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기만 한 걸까?

이상하게도 영화의 주제랑은 크게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지훈과 승영이 자살하는 두 가지 모습의 대조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군화끈에 목을 매달아 강렬하고 짧은 고통을 택하는 지훈과 수건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려다가(그것도 침대에 누워서!) 실패하고 손목을 그은 뒤 욕조 속에 몸을 담근(음악이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들으면서)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승영.

몸은 힘들었지만 쉽게 잊혀지는 훈련소 시절과 후임을 받게 되면서 고민하고, 힘들었던 몇 달, 그나마 좋아했던 운동과 '공동작업'의 땀흘리던 기억, 목소리가 작다며 얼차려를 받던  기억들, 또 2년.. 영화 중반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나오는 승영과 태정의 대화처럼 나는 '어른'이 된 걸까?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정말 신기하게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던 2년동안의 기억이 점점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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