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p90

과거의 기억은 대개 아름다운 것만 취하게 마련이고 미래에 대한 예감은 상실이나 실패의 방향으로 기운다고 한다면 이는 사실 진부한 구절일 수도 있다. 거창할 것도 없이 저런 생각은 중년도, 청년도, 어린 아이도 다 한다. 정말로 두려움을 느끼는 때는 일상성에 묻혀있다가 갑작스레 시간의 비가역성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무엇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낮잠을 자다가도 가끔 악몽이 찾아온다. 하루하루가 chicken race 같던 시절, 서로가 시한폭탄처럼 느껴져서 바라보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참으로 좋은 세월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몇 없는 불빛이었다.

요새의 몇몇 기억. 몇 주 전 체육대회를 하러 처음 가본 월드컵경기장 아래 새겨져 있던 붉은 색 H, 정상영업을 알리는 현수막, 닭장차, 2년 전 군화가 맞지 않아서 생겼던 것과 꼭 닮은 푸른 발톱의 피멍. 구청 휴게실에 붙어 있던 11월 11일의 포스터, 03년도엔가 꽃병이 나뒹굴던 11월의 서울 어딘가. 포털 사이트에 옥소리 외도의 진실 따위와 함께 뜨는 연이은 분신 소식, 댓글들, 매캐한 냄새가 떠오르는 허연 소화기 가루, 언젠가 직원이 다쳐서 따라가본 '화상전문' 한강성심병원의 전경.

부쩍 불이 잘 붙는 계절이 오긴 왔다. 그런데 자기 몸에 불을? 명복을 빈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하나. 冥福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자살은 더더군다나 안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명복 같은 건 애초에 틀린 거 아닌가. 문득 노무현씨 당신은 노동자들의 분신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합니다. 얄팍한 휴머니즘에 호소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마도 당신들로서도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사람에게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최저 한도'라는 게 있음을 아시는지?

요즘은 체중을 잴 때마다 살이 빠져있다. 지금이 63kg니까 표준 체중하고 한 9kg가 차이가 난다. 11월이면 한창 천고마비의 계절이니, 하는데 이건 또 어디 탈이 났는지 싶기도 하고.. 11월이 가장 우울한 계절이 된 건 아마도 어떤날의 '11월 그 저녁에' 을 듣게 된 이후인 것 같기도 하다. 거리에 스산하게 쓸려가는 낙엽들을 보면서 이런 노래를 들으면 가슴 속에 내내 찬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병약한 체질이라면 지독한 가을비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꾸듯 아득히 구름은 흘러가고
떠나간 친구의 노래가 들려온다
산다는 것이 뭐냐하던
사랑이 모든 것이냐던
누가 내게 대답해주냐던
인생 참 어려운 노래여라

비가 내릴듯 젖은 바람 불어오면
지나간 날들에 내 모습 생각한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시절
되묻지 못할 너의 대답
말없이 웃어야 했던 날들

서러워 우는듯 나직히 비 내리고
어설픈 미소가 입가에 스쳐간다
나의 어제가 그랬듯이
나의 오늘이 이렇듯이
혼자서 걸어가야만하는
인생 참 어려운 여행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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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1-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파요.

누에 2007-11-0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비 조심하세요. 후두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