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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자서전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크게 한방을 내리치는 책
에릭 호퍼 자서전,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2003




    력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한국 사회에서 출신을 따지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모양이다. 국적은 바꾸더라도 모교는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학벌이란 족쇄가 얼마나 한 개인을 옥죄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책의 날개에 관례처럼 기록되어 있는 한 저자의 프로필에서 그가 어떤 대학의 출신이냐는 사실이 판매 부수를 결정짓는 주요한 변수 중의 하나라는 것이 출판계의 상식. 책의 질이 그 내용으로 판단되기보다는 저자의 프로필로 좌우된다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가수는 노래로, 책은 그 내용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소위 ‘립싱크’형 가수라 해서 얼굴만 그럴싸한 가수도 있는가 하면, 출판계에서도 저자의 미모(?)가 책의 판매 부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에릭 호퍼에겐 변변한 학력이 없다. “삶을 관광객처럼 살았다.”는 그는 떠돌이였다. 레스토랑 보조 웨이터, 사금채취공, 부두노동자, 자질구레한 직업이 이력의 전부였다. 이 떠돌이 사상가의 유일한 학교는 책이었다. 길은 그를 떠돌게 했고, 책은 그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에릭 호퍼 자서전』(이다미디어)에 의하면 에릭 호퍼는 1902년 뉴욕시티의 브롱크스에서 독일계 이주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7세 때 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의 시력도 잃은 호퍼는 그 후 8년 간 실명 상태로 지내다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다. 다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수불석권(手不釋卷), 그는 떠돌이 생활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학, 물리학, 지리학, 그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천성적으로 배움에 목마른 자였다. 18세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는 생업을 위해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해 오렌지 행상, 야적장 인부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28살의 어느 일요일에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음독 자살을 결심한 그는 수산염을 삼킬 요량으로 길을 걷는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초록빛으로 뒤덮인 들판과 과수원을 굽이굽이 돌며 푸른 바다로 달려가는 길을 생각했다. 배낭을 가볍게 흔들면서 팔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음식을 삼키면서 나는 생이 길이라는 비전-어디로 가는지, 그 위로 무엇이 가는지 모른 채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나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지만 그 일요일에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태어났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삶은 곧 길이었다. 그는 자살 미수를 기회로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캘리포니아를 떠돈다. 캘리포니아는 방랑자에겐 최적의 조건이었다. 날씨는 온화했고, 손을 뻗으면 황금색 오렌지가 길가에 널려있었다.

    그의 모든 사고를 물들이게 된 계기가 되고, 그가 쓰게 될 모든 글의 씨앗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는 엘센트로 부랑자 임시 수용소에서 호퍼는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의 친족적 유사성에 눈을 뜨게 된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 혐오는 일상적인 생존 경쟁에서 유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약자들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함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라고 말한 호퍼는 분명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 에너지가 길로, 학문으로 그를 내몰았다.

    어느 날 그는 오렌지 행상에게 픽업돼 오렌지를 팔러 나섰다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다. 놀라운 장사수완으로 오후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한 트럭 분의 오렌지를 혼자 다 팔아치운다. 두둑하게 받은 돈을 세던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 날로 장사를 그만둔다. 독학한 독일어와 식물학, 화학 실력으로 캘리포니아대 감귤연구소 소장이 쩔쩔매던 감귤의 백화병 치유책을 간단하게 발견한 뒤, 같이 일하자는 교수의 제의를 뿌리치며 그는 길 위로 나선다. 편안함,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미덕이 아니었다. 위험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탈주하는 유목민의 정신, 그는 진정한 떠돌이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엄청난 사고 과정을 요구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 때 그의 손이 사전 속으로 손을 뻗치는 것을 그의 눈이 보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반성적 인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순간 나는 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면 그 같은 나의 행동이 힘든 생각을 회피하려는 수작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 경우 나는 진정한 사상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싫은 불쾌한 발견이었다. 나는 그 책을 바람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쉬운 답과 결론을 구하지 않았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든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이라는, 임제(臨濟)의 선풍(禪風)이 그러했던 것일까. 호퍼는 자신의 눈을 믿었으며 경전화된 문자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성숙한 이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한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미개인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들이 보아온 것보다는 들어왔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라고 호퍼는 쓰고 있다. 문자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 자유(自由)의 사람, 길 위의 사람이었다.

    호퍼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상대는 그의 심성과 재능을 깊이 사랑한 아름다운 여성 헬렌. 그녀와 사귈 때, 헬렌은 호퍼를 비범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호퍼는 그녀의 평가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헬렌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나를 원더맨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작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미친 짓이었다. 나는 헬렌을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 분야의 사람들은 곧 나를 협잡꾼으로 여길 것이다. 내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그녀들과 함께 살면 나는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즉각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정처(定處) 없는 나그네의 길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길을 얻으면 길을 버리는, 그는 진정한 길의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쓰고 있다. “그녀들과의 이별로부터 회복되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다. 실제로 완전히 회복된 적은 없었다.”라고.

    안주(安住)를 허락하지 않는 그는 길 위의 철학자였다. 미래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지인(知人)들의 충고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 미래는 당신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당신의 농장이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실 테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당신은 농장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떠돌이 노동자인 저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죠. 화폐와 사회 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물론 그 일은 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구요. 절대적 안전을 원한다면 부랑자 무리에 섞여 떠돌이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세요.” 바랑 하나 걸머지고 길을 나서는 탁발승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호퍼에게서 ‘무소유’는 관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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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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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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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틀뢴,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추상화된 언어로 불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어떤 공통적 성질을 추출하는 추상(抽象)의 작업은
결국 유(類)로는 환원될 수 없는 개체성을 버리는
사상(捨象)의 과정 속에서만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틀뢴, 그곳에서는 사물들은 개별성의 훼손됨이 없이
자기 고유의 이름으로 명명된다고 합니다.
틀뢴에서의 사물들의 이름은 그 개별적 사물만이 갖는
독특한 향기와 빛깔과 질량을 함유하겠지요.
하기사 4월의 라일락과 6월의 라일락을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우리들의 명명체계는 얼마나 허술하고 부실한 것인지요?
分類와 抽象의 위협으로부터
유일무이한 나만의 오리지낼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 틀뢴,
그곳에서 지금 창 밖에서 마악 꽃봉오리를 여는 라일락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었을까요?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는 華嚴論的인 명제는
틀림없이 나는 네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이 키워낸 부산물일 것입니다.)

모든 類와 種에 아랑곳없이
존재의 특이성이 남김없이 보장받는 곳 틀뢴,
언어의 모음과 자음들이
존재의 유일무이한 광휘를 찬양하는 데 바쳐지는 그곳에서는
사랑이나 우정은 망각에 저항하는 도착적(倒錯的) 열정으로
'이곳'만큼은 아프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현재의 바람이 '살아 있음'의 유구한 기쁨을 노래하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은 오늘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햇살 아래 한 순간을 살다가는 육체들은
열려진 가능성의 미래를 잊은 채
오직 현재를 유일한 기쁨으로 승낙할 것입니다.
그런 현세주의는 근사합니다.
우린 너무나 많은 희망의 노래에 길들여져 왔고
슬픔이나 절망의 초월적 권능을 과장하는 문화에
필요 이상의 상상력을 고갈시켰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희망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의미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보르헤스의 세계는
어찌 한 줄이라도 읽힐 수 있겠습니까?)

보르헤스의 주인공은
틀뢴의 백과사전 11권을 발견한 놀라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밤의 밤>이라 불리는 어떤 밤이 있다.
그날 밤은 하늘의 비밀 문이 넓게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진다고 한다.
만약 하늘의 비밀문이 열렸었다 해도,
나는 그날 밤은 그처럼
이상한 정신적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누가 깊은 숨을 들이 쉬며 쉬어 가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움은 그런 짧은 정지 속에서 기쁨의 순간을 연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틀뢴은 현실태로서 가능한 곳일까요?
모든 존재가 남김없이 자신의 독자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계가 참말로 있을 수 있을까요?
추상의 욕망이 무장해제된 세계,
만약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의 시간은 '이곳'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갈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을 포착하려는 꿈이
그것들을 뭉뚱그려 한데 묶으려는 추상의 욕망을 낳지는 않았을까요?)
'이곳'에서의 찰나가 '그곳'에서는 한 生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의 사물은 오래도록 자신의 광휘를 잃지 않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시간이 덧없이 흐르는 곳에서
기억은 망각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겠지만
느린 시간 속에서 의식은 하품을 하며
나른한 현재를 즐길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누워 있는 안락한 의자 밑으로
구름 한 점이 낙엽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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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을 따라가며 사랑을 사유하기

상은 모든 구체에 대한 폭력이다. 압축 또한 그렇다. 대체 한 인간의 이력을 몇 줄로 압축한다는 것이 되는 말인가. 더구나 섬세한 뉘앙스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사랑의 담론을 몇 줄의 추상적 담론으로 압축한다는 것이야말로 언어도단. 사랑의 담론은 추상적인 히스토리에 있기보다는 시시콜콜한 디테일과 미묘한 뉘앙스를 담은 스토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반드시 디테일로써 읽어야 할 책이다.

심에 찬 새내기들은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조직에서 견실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해서 예술은 일견 패기만만하고 치기어린, 그러나 싱싱하고 약동하는 실험적인 피를 수혈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 드 보통의 처녀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새내기들이 보여줄 수 있는 치기와 기발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드 보통의 철학적 명상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드 보통은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파스칼, 칸트, 마르크스, 예수들 끌어들여 연인들이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등고선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드 보통은 첫키스에서 말다툼과 화해,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의 시종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랑은 어떤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내게 특별한 그 무엇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두 주인공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항공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5,841분의 1이란 확률로 만난다. (이런 확률을 계산해내는 드 보통의 현란한 유머감각이라니!) 누군가에게 불현듯 내가 사랑을 느꼈다면 그에 대한 현실은 증발하고 만다. 남는 것은 내 욕망에 의해 이상화된 연인의 이미지일 뿐. 드 보통은 말한다.“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얼굴, 잠깐이나마 기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얼굴에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환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P.18)" 왜 아니겠는가. 사랑의 욕망은 모든 사실주의를 방해한다. 누구나 조금씩은 눈이 멀게 마련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모든 속물주의로부터 성큼 벗어나 있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P.22)” 이런 식으로 우린 사랑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내 존재를 고양시키리라는 낭만적 허위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것이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P.44)”라고. 대개의 연애소설이 나긋나긋한 문체로 낭만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면 드 보통의 처녀작인 이 소설의 어법은 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련되고 지적이고 참신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마케터들의 입바른 찬사가 아니다.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이 소설을 두고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것처럼 어떤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라고 했다. 이 책이 주는 매혹적인 가벼움과 재치와 유머를 발랄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드 보통이 첫키스를 말하는 방식은 이렇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키스가 시작되었다.(P.57)” 따지지 말자. 드 보통의 애교 있는 과장에 빙긋 웃어주면 그만. 또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은 사랑은 얼마나 건강한 서사적 거리(distance)를 회복하는가에 있다. 서정적 몰입은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그 끝은 결국 죽음일 뿐이다. 드 보통은 거리(distance) 조절에 관한 한 전문가다. 사랑에 몰입하다가도 이내 자신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회복한다. ‘인간은 둘로 나누어져 행동을 하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서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열로부터 반성이 나타난다.(P.63)’ 모든 사랑의 비극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맹목적인 열정의 포로가 되어, 상대를 소유하겠다는 소유의 독점욕이 결국은 자신과 상대를 물어뜯는 것은 아닐까. 이런 파괴적인 열정을 우리는 ‘불같은 사랑’이니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P.68)’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인식하게 되는 사랑의 심리학은 그러나 존재를 영웅으로까지 고양시키게 만드는 에너지로 전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심리학 속에서 그와 나는 늘 ‘그 이상’이어야 만 한다. 그러나 나는 하품을 하고 콧구멍을 후비고, 하루에 몇 번은 방귀를 뀌어야 하는 얼마나 속악한 존재인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짓이다.(P.76)’ 사랑은 나의 전인격과 그의 전인격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콤플렉스는 치료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내 존재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치료되어져야 하는 법은 아니지 않은가. 때론 질병이, 콤플렉스가 하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은 아닌가.

재를 전율케 하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시각은 사실주의를 획득한다. 나레이터는 자신의 취향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고르는 클로이를 두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현실이 이미지를 대치하는 순간이다. 사랑의 시간이 지속되면 될수록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기회보다는 ‘위협적인 차이성’과 마주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많은 연인들은 ‘성격 차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이 위기를 표현한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누구나 다른 법이다. 하나가 되자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꿈이다. 더구나 취향은 강요한다고 해서 쉽게 같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충고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왜 나마저도 이것을 좋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린 아주 궁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 답변을 준비해두곤 한다. ‘우린 남이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어떤 신발을 신어도 상관은 없어, 그러나 너는 남이 아니야. 너는 특별한 존재야. 그러니까 넌 그런 신발을 신어선 안 돼. 바야흐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순간이다.

보통은 말한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P.110)’ 엄지 손가락을 비롯한 네 개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우위를 저마다 설교할 때, 새끼손가락은 그렇게 말했다던가.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다 병신이야.’ 유머는 모든 무거움과 긴장을 살짝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지나친 진지함은 서로를 압제하려 든다. 따지고 보면 유머는 본질적으로 너를 잃지 않고 싶다는, 너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싶다는, 같이 웃고 싶다는 우정의 표현은 아닐지. 그것이 썰렁하든 말든.
름답기 때문에 우린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사랑하는 자는 곧잘 이런 질문에 봉착한다. 드 보통은 스탕달이 아름다움이 “행복의 약속”이라고 정의한 것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클로이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현학적이고 영악스럽기 그지없는 드 보통은 이 대목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동원한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고 갈파했다....고전적인 비례를 갖춘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에 무슨 독창성이 있을까? 반면 치아 사이의 간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에는 분명히 더 큰 노력, 좀더 프루스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P.119)’ 그렇다. 사랑이란 어떤 타입이나 유형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개별성, 대체 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우리의 도저한 집착이 아니었던가. 목젖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사소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조차 신비와 매력을 읽어내는 자들이야말로 사랑에 ‘들린 자’들이 아니던가. 공주와의 사랑이든, 창녀와의 사랑이든 그러므로 사랑은 욕망 앞에서 동등한 것이 아닐까.

보통은 말한다. ‘사랑은 공통의 혐오를 확인함으로써 커나간다.(P.154)’ 하나의 대상을 똑같은 어조로 공격할 수 있는 연인들의 사랑은 견고하다. 태생의 취향이 어떻든 연인들의 취향은 유사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정치색마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좋은 연인들은 ‘하나의 후보’를 지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가진다. 우리가 그런데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낙인이 틀렸자기보다는 그것이 분류불가능성이라는 주관적 느낌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75)’ 누구나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분류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인다는 것, 쉽게 판단된다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남과 같이 도매금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 유일무이한 오리지널리티로 인해서 ‘나’는 아닌가.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내가 부정적으로 뷴류된다는 것은 아이덴티티에 대한 가증스러운 위협이다.

설음, 습관의 파열은 강렬한 욕망을 자극한다. 때로는 이러한 모험이 사랑을 강화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녀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내가 아는 여자가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익숙함이라는 갑갑한 담요 밖으로 나와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P.184)’ 드 보통은 모든 매너리즘은 사랑의 적임을 간파하고 있다. 때로는 반역이, 위반이 필요한 것이다. 피곤한 세상의 율법을 살짝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천사와 악마가 들끓고 있는가. 때론 악마에게도 의사 발언권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지. 천사들이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은 피곤한 세상이다.

러나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순간은 온다. 시간은 우리의 눈을 사실주의자의 것으로 되돌려 놓기 마련. 현실의 그가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연인에게 삐친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은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삐친 연인, 토라진 연인은 아이들과 진배없다. 그들은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방의 위무마저도 단호하게 뿌리쳐 버린다. 냉전, 침묵, 각방 쓰기, 늦게 귀가하기,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말을 술 먹고 내어 뱉기, 상처 주고 흠집내기. 그 모든 투정과 토라짐은 결국 너를 소유하겠다는 욕망, 너를 내 영토 안에 붙들어 놓고 말겠다는 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다.

보통은 칸트를 인용하며 사랑의 무보상성(無報償性)을 말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P.239)’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침실에서건, 까페에서건 공리주의자들의 그것이었다. 드 보통이 인용한 홉스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P.240)’ 그러나 대체 불쾌란 무엇일까. 혹 그것은 우리들의 타고난 자연적 성향이 아니라 사회의 율법에 의해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구성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주류의 율법과 도덕률을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은 아닐까.

로이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이별을 한다. 사랑에 채인 자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킨다. 그는 버림받았기에 위대하다. 사랑을 잃은 자는 버림받았기에 선택된 자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후 3시에 침대에 자빠져서’ 그는 자신을 사랑의 순교자로 만든다. 천박한 영혼이 어찌 고통을 알겠는가. 고통만이 그의 우월성을 증거하는 표지가 된다. 그러나 고통마저도 매너리즘을 이기지 못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깨어진 사랑이었든 아니었든 모든 사랑의 후일담 속에서 그는 잊혀지지 않는 주연이어야 했다. 삶이라는 무의미성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이 초라한 욕망,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의 위대한 시와 서사가 싹 트는 것은 아닌지. 망각에 저항하는 저 불후의 욕망.

느강은 흐르고 시간은 간다. 열정이 식었다고 말해도 좋다. 시간이 흘렀다고 말해도 좋다. 연륜이 쌓였다고 해도 좋다. 드 보통은 사랑에 대해서 비로소 말한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P.275)'

시콜콜한 사적인 연애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철학적 사유가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드 보통의 글쓰기는 시종 유쾌하다. 실패한 첫사랑이든 진행중인 사랑이든 반드시 나의 사랑을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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