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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을 따라가며 사랑을 사유하기
추상은 모든 구체에 대한 폭력이다. 압축 또한 그렇다. 대체 한 인간의 이력을 몇 줄로 압축한다는 것이 되는 말인가. 더구나 섬세한 뉘앙스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사랑의 담론을 몇 줄의 추상적 담론으로 압축한다는 것이야말로 언어도단. 사랑의 담론은 추상적인 히스토리에 있기보다는 시시콜콜한 디테일과 미묘한 뉘앙스를 담은 스토리에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반드시 디테일로써 읽어야 할 책이다.
야심에 찬 새내기들은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조직에서 견실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욕망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해서 예술은 일견 패기만만하고 치기어린, 그러나 싱싱하고 약동하는 실험적인 피를 수혈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알랭 드 보통의 처녀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새내기들이 보여줄 수 있는 치기와 기발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드 보통의 철학적 명상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드 보통은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파스칼, 칸트, 마르크스, 예수들 끌어들여 연인들이 겪을 수 있는 감정의 등고선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드 보통은 첫키스에서 말다툼과 화해,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연애의 시종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사랑은 어떤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내게 특별한 그 무엇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있게 마련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두 주인공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항공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5,841분의 1이란 확률로 만난다. (이런 확률을 계산해내는 드 보통의 현란한 유머감각이라니!) 누군가에게 불현듯 내가 사랑을 느꼈다면 그에 대한 현실은 증발하고 만다. 남는 것은 내 욕망에 의해 이상화된 연인의 이미지일 뿐. 드 보통은 말한다.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얼굴, 잠깐이나마 기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얼굴에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환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P.18)" 왜 아니겠는가. 사랑의 욕망은 모든 사실주의를 방해한다. 누구나 조금씩은 눈이 멀게 마련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모든 속물주의로부터 성큼 벗어나 있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P.22)” 이런 식으로 우린 사랑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내 존재를 고양시키리라는 낭만적 허위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것이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P.44)”라고. 대개의 연애소설이 나긋나긋한 문체로 낭만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면 드 보통의 처녀작인 이 소설의 어법은 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련되고 지적이고 참신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마케터들의 입바른 찬사가 아니다. 역자 후기에서 정영목은 이 소설을 두고 ‘온탕과 냉탕을 왕복하는 것처럼 어떤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라고 했다. 이 책이 주는 매혹적인 가벼움과 재치와 유머를 발랄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드 보통이 첫키스를 말하는 방식은 이렇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키스가 시작되었다.(P.57)” 따지지 말자. 드 보통의 애교 있는 과장에 빙긋 웃어주면 그만. 또 모든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좋은 사랑은 얼마나 건강한 서사적 거리(distance)를 회복하는가에 있다. 서정적 몰입은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그 끝은 결국 죽음일 뿐이다. 드 보통은 거리(distance) 조절에 관한 한 전문가다. 사랑에 몰입하다가도 이내 자신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회복한다.
‘인간은 둘로 나누어져 행동을 하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서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열로부터 반성이 나타난다.(P.63)’ 모든 사랑의 비극은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맹목적인 열정의 포로가 되어, 상대를 소유하겠다는 소유의 독점욕이 결국은 자신과 상대를 물어뜯는 것은 아닐까. 이런 파괴적인 열정을 우리는 ‘불같은 사랑’이니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P.68)’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를 초라하게 인식하게 되는 사랑의 심리학은 그러나 존재를 영웅으로까지 고양시키게 만드는 에너지로 전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심리학 속에서 그와 나는 늘 ‘그 이상’이어야 만 한다. 그러나 나는 하품을 하고 콧구멍을 후비고, 하루에 몇 번은 방귀를 뀌어야 하는 얼마나 속악한 존재인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짓이다.(P.76)’ 사랑은 나의 전인격과 그의 전인격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콤플렉스는 치료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 그것은 내 존재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치료되어져야 하는 법은 아니지 않은가. 때론 질병이, 콤플렉스가 하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를 전율케 하던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시각은 사실주의를 획득한다. 나레이터는 자신의 취향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고르는 클로이를 두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현실이 이미지를 대치하는 순간이다. 사랑의 시간이 지속되면 될수록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기회보다는 ‘위협적인 차이성’과 마주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많은 연인들은 ‘성격 차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로 이 위기를 표현한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누구나 다른 법이다. 하나가 되자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꿈이다. 더구나 취향은 강요한다고 해서 쉽게 같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충고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 왜 나마저도 이것을 좋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린 아주 궁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 답변을 준비해두곤 한다. ‘우린 남이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어떤 신발을 신어도 상관은 없어, 그러나 너는 남이 아니야. 너는 특별한 존재야. 그러니까 넌 그런 신발을 신어선 안 돼. 바야흐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순간이다.
드 보통은 말한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P.110)’ 엄지 손가락을 비롯한 네 개의 손가락들이 자신의 우위를 저마다 설교할 때, 새끼손가락은 그렇게 말했다던가.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다 병신이야.’ 유머는 모든 무거움과 긴장을 살짝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지나친 진지함은 서로를 압제하려 든다. 따지고 보면 유머는 본질적으로 너를 잃지 않고 싶다는, 너와의 친밀감을 유지하고 싶다는, 같이 웃고 싶다는 우정의 표현은 아닐지. 그것이 썰렁하든 말든.
아름답기 때문에 우린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사랑하는 자는 곧잘 이런 질문에 봉착한다. 드 보통은 스탕달이 아름다움이 “행복의 약속”이라고 정의한 것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클로이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현학적이고 영악스럽기 그지없는 드 보통은 이 대목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동원한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고 갈파했다....고전적인 비례를 갖춘 사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에 무슨 독창성이 있을까? 반면 치아 사이의 간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에는 분명히 더 큰 노력, 좀더 프루스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P.119)’ 그렇다. 사랑이란 어떤 타입이나 유형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개별성, 대체 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우리의 도저한 집착이 아니었던가. 목젖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사소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조차 신비와 매력을 읽어내는 자들이야말로 사랑에 ‘들린 자’들이 아니던가. 공주와의 사랑이든, 창녀와의 사랑이든 그러므로 사랑은 욕망 앞에서 동등한 것이 아닐까.
드 보통은 말한다. ‘사랑은 공통의 혐오를 확인함으로써 커나간다.(P.154)’ 하나의 대상을 똑같은 어조로 공격할 수 있는 연인들의 사랑은 견고하다. 태생의 취향이 어떻든 연인들의 취향은 유사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정치색마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좋은 연인들은 ‘하나의 후보’를 지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가진다. 우리가 그런데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낙인이 틀렸자기보다는 그것이 분류불가능성이라는 주관적 느낌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75)’ 누구나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분류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인다는 것, 쉽게 판단된다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남과 같이 도매금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 유일무이한 오리지널리티로 인해서 ‘나’는 아닌가.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내가 부정적으로 뷴류된다는 것은 아이덴티티에 대한 가증스러운 위협이다.
낯설음, 습관의 파열은 강렬한 욕망을 자극한다. 때로는 이러한 모험이 사랑을 강화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녀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내가 아는 여자가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익숙함이라는 갑갑한 담요 밖으로 나와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P.184)’ 드 보통은 모든 매너리즘은 사랑의 적임을 간파하고 있다. 때로는 반역이, 위반이 필요한 것이다. 피곤한 세상의 율법을 살짝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천사와 악마가 들끓고 있는가. 때론 악마에게도 의사 발언권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지. 천사들이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은 피곤한 세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순간은 온다. 시간은 우리의 눈을 사실주의자의 것으로 되돌려 놓기 마련. 현실의 그가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연인에게 삐친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은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삐친 연인, 토라진 연인은 아이들과 진배없다. 그들은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방의 위무마저도 단호하게 뿌리쳐 버린다. 냉전, 침묵, 각방 쓰기, 늦게 귀가하기,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말을 술 먹고 내어 뱉기, 상처 주고 흠집내기. 그 모든 투정과 토라짐은 결국 너를 소유하겠다는 욕망, 너를 내 영토 안에 붙들어 놓고 말겠다는 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다.
드 보통은 칸트를 인용하며 사랑의 무보상성(無報償性)을 말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P.239)’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침실에서건, 까페에서건 공리주의자들의 그것이었다. 드 보통이 인용한 홉스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P.240)’ 그러나 대체 불쾌란 무엇일까. 혹 그것은 우리들의 타고난 자연적 성향이 아니라 사회의 율법에 의해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구성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주류의 율법과 도덕률을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은 아닐까.
클로이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이별을 한다. 사랑에 채인 자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킨다. 그는 버림받았기에 위대하다. 사랑을 잃은 자는 버림받았기에 선택된 자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후 3시에 침대에 자빠져서’ 그는 자신을 사랑의 순교자로 만든다. 천박한 영혼이 어찌 고통을 알겠는가. 고통만이 그의 우월성을 증거하는 표지가 된다. 그러나 고통마저도 매너리즘을 이기지 못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깨어진 사랑이었든 아니었든 모든 사랑의 후일담 속에서 그는 잊혀지지 않는 주연이어야 했다. 삶이라는 무의미성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이 초라한 욕망,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의 위대한 시와 서사가 싹 트는 것은 아닌지. 망각에 저항하는 저 불후의 욕망.
세느강은 흐르고 시간은 간다. 열정이 식었다고 말해도 좋다. 시간이 흘렀다고 말해도 좋다. 연륜이 쌓였다고 해도 좋다. 드 보통은 사랑에 대해서 비로소 말한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P.275)'
시시콜콜한 사적인 연애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철학적 사유가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드 보통의 글쓰기는 시종 유쾌하다. 실패한 첫사랑이든 진행중인 사랑이든 반드시 나의 사랑을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