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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자서전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크게 한방을 내리치는 책
에릭 호퍼 자서전,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2003
학력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한국 사회에서 출신을 따지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모양이다. 국적은 바꾸더라도 모교는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학벌이란 족쇄가 얼마나 한 개인을 옥죄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책의 날개에 관례처럼 기록되어 있는 한 저자의 프로필에서 그가 어떤 대학의 출신이냐는 사실이 판매 부수를 결정짓는 주요한 변수 중의 하나라는 것이 출판계의 상식. 책의 질이 그 내용으로 판단되기보다는 저자의 프로필로 좌우된다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가수는 노래로, 책은 그 내용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소위 ‘립싱크’형 가수라 해서 얼굴만 그럴싸한 가수도 있는가 하면, 출판계에서도 저자의 미모(?)가 책의 판매 부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에릭 호퍼에겐 변변한 학력이 없다. “삶을 관광객처럼 살았다.”는 그는 떠돌이였다. 레스토랑 보조 웨이터, 사금채취공, 부두노동자, 자질구레한 직업이 이력의 전부였다. 이 떠돌이 사상가의 유일한 학교는 책이었다. 길은 그를 떠돌게 했고, 책은 그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에릭 호퍼 자서전』(이다미디어)에 의하면 에릭 호퍼는 1902년 뉴욕시티의 브롱크스에서 독일계 이주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7세 때 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의 시력도 잃은 호퍼는 그 후 8년 간 실명 상태로 지내다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다. 다시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수불석권(手不釋卷), 그는 떠돌이 생활 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학, 물리학, 지리학, 그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천성적으로 배움에 목마른 자였다. 18세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는 생업을 위해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해 오렌지 행상, 야적장 인부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28살의 어느 일요일에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음독 자살을 결심한 그는 수산염을 삼킬 요량으로 길을 걷는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초록빛으로 뒤덮인 들판과 과수원을 굽이굽이 돌며 푸른 바다로 달려가는 길을 생각했다. 배낭을 가볍게 흔들면서 팔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음식을 삼키면서 나는 생이 길이라는 비전-어디로 가는지, 그 위로 무엇이 가는지 모른 채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나는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지만 그 일요일에 노동자는 죽고 방랑자가 태어났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삶은 곧 길이었다. 그는 자살 미수를 기회로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캘리포니아를 떠돈다. 캘리포니아는 방랑자에겐 최적의 조건이었다. 날씨는 온화했고, 손을 뻗으면 황금색 오렌지가 길가에 널려있었다.
그의 모든 사고를 물들이게 된 계기가 되고, 그가 쓰게 될 모든 글의 씨앗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는 엘센트로 부랑자 임시 수용소에서 호퍼는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의 친족적 유사성에 눈을 뜨게 된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 혐오는 일상적인 생존 경쟁에서 유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드러낸다. 약자들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함은 말하자면 그들에게 특수한 적응력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라고 말한 호퍼는 분명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 에너지가 길로, 학문으로 그를 내몰았다.
어느 날 그는 오렌지 행상에게 픽업돼 오렌지를 팔러 나섰다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다. 놀라운 장사수완으로 오후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한 트럭 분의 오렌지를 혼자 다 팔아치운다. 두둑하게 받은 돈을 세던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그 날로 장사를 그만둔다. 독학한 독일어와 식물학, 화학 실력으로 캘리포니아대 감귤연구소 소장이 쩔쩔매던 감귤의 백화병 치유책을 간단하게 발견한 뒤, 같이 일하자는 교수의 제의를 뿌리치며 그는 길 위로 나선다. 편안함,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미덕이 아니었다. 위험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탈주하는 유목민의 정신, 그는 진정한 떠돌이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엄청난 사고 과정을 요구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 때 그의 손이 사전 속으로 손을 뻗치는 것을 그의 눈이 보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반성적 인간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순간 나는 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면 그 같은 나의 행동이 힘든 생각을 회피하려는 수작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 경우 나는 진정한 사상가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싫은 불쾌한 발견이었다. 나는 그 책을 바람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쉬운 답과 결론을 구하지 않았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치든 스스로 답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이라는, 임제(臨濟)의 선풍(禪風)이 그러했던 것일까. 호퍼는 자신의 눈을 믿었으며 경전화된 문자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다. “성숙한 이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한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어린아이와 미개인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들이 보아온 것보다는 들어왔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라고 호퍼는 쓰고 있다. 문자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 자유(自由)의 사람, 길 위의 사람이었다.
호퍼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상대는 그의 심성과 재능을 깊이 사랑한 아름다운 여성 헬렌. 그녀와 사귈 때, 헬렌은 호퍼를 비범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호퍼는 그녀의 평가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헬렌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나를 원더맨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작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미친 짓이었다. 나는 헬렌을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 분야의 사람들은 곧 나를 협잡꾼으로 여길 것이다. 내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그녀들과 함께 살면 나는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즉각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정처(定處) 없는 나그네의 길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길을 얻으면 길을 버리는, 그는 진정한 길의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쓰고 있다. “그녀들과의 이별로부터 회복되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다. 실제로 완전히 회복된 적은 없었다.”라고.
안주(安住)를 허락하지 않는 그는 길 위의 철학자였다. 미래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지인(知人)들의 충고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 미래는 당신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당신의 농장이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실 테지만 혁명이 일어나면 당신은 농장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떠돌이 노동자인 저는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죠. 화폐와 사회 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계속됩니다. 물론 그 일은 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구요. 절대적 안전을 원한다면 부랑자 무리에 섞여 떠돌이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세요.” 바랑 하나 걸머지고 길을 나서는 탁발승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호퍼에게서 ‘무소유’는 관념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