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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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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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틀뢴,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추상화된 언어로 불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어떤 공통적 성질을 추출하는 추상(抽象)의 작업은
결국 유(類)로는 환원될 수 없는 개체성을 버리는
사상(捨象)의 과정 속에서만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틀뢴, 그곳에서는 사물들은 개별성의 훼손됨이 없이
자기 고유의 이름으로 명명된다고 합니다.
틀뢴에서의 사물들의 이름은 그 개별적 사물만이 갖는
독특한 향기와 빛깔과 질량을 함유하겠지요.
하기사 4월의 라일락과 6월의 라일락을
'라일락'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우리들의 명명체계는 얼마나 허술하고 부실한 것인지요?
分類와 抽象의 위협으로부터
유일무이한 나만의 오리지낼러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 틀뢴,
그곳에서 지금 창 밖에서 마악 꽃봉오리를 여는 라일락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었을까요?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는 華嚴論的인 명제는
틀림없이 나는 네가 될 수 없다는
절망이 키워낸 부산물일 것입니다.)

모든 類와 種에 아랑곳없이
존재의 특이성이 남김없이 보장받는 곳 틀뢴,
언어의 모음과 자음들이
존재의 유일무이한 광휘를 찬양하는 데 바쳐지는 그곳에서는
사랑이나 우정은 망각에 저항하는 도착적(倒錯的) 열정으로
'이곳'만큼은 아프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현재의 바람이 '살아 있음'의 유구한 기쁨을 노래하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은 오늘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햇살 아래 한 순간을 살다가는 육체들은
열려진 가능성의 미래를 잊은 채
오직 현재를 유일한 기쁨으로 승낙할 것입니다.
그런 현세주의는 근사합니다.
우린 너무나 많은 희망의 노래에 길들여져 왔고
슬픔이나 절망의 초월적 권능을 과장하는 문화에
필요 이상의 상상력을 고갈시켰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희망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의미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보르헤스의 세계는
어찌 한 줄이라도 읽힐 수 있겠습니까?)

보르헤스의 주인공은
틀뢴의 백과사전 11권을 발견한 놀라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밤의 밤>이라 불리는 어떤 밤이 있다.
그날 밤은 하늘의 비밀 문이 넓게 열리고,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진다고 한다.
만약 하늘의 비밀문이 열렸었다 해도,
나는 그날 밤은 그처럼
이상한 정신적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누가 깊은 숨을 들이 쉬며 쉬어 가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움은 그런 짧은 정지 속에서 기쁨의 순간을 연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틀뢴은 현실태로서 가능한 곳일까요?
모든 존재가 남김없이 자신의 독자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계가 참말로 있을 수 있을까요?
추상의 욕망이 무장해제된 세계,
만약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의 시간은 '이곳'의 시간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갈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을 포착하려는 꿈이
그것들을 뭉뚱그려 한데 묶으려는 추상의 욕망을 낳지는 않았을까요?)
'이곳'에서의 찰나가 '그곳'에서는 한 生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의 사물은 오래도록 자신의 광휘를 잃지 않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시간이 덧없이 흐르는 곳에서
기억은 망각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겠지만
느린 시간 속에서 의식은 하품을 하며
나른한 현재를 즐길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누워 있는 안락한 의자 밑으로
구름 한 점이 낙엽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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