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훔치다 - 김수남이 만난 한국의 예인들
김수남 지음 / 디새집(열림원)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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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훔치다
아름다움을 훔치다, 김수남 지음 / 디새집, 2004



     한 번 못 써보고 저승으로 보낸 아들, 살아 생전 쇠고기국은 몰라도 하다 못해 따뜻한 밥 한 끼 챙겨 먹이지 못했다. 명절이라고 색동옷 한 벌 입혀보지도 못했다. 남편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던가. 방금이라도 '어무이'하며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 엄마 없이 가는 저승길이 두려워 제 집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 죽은 것도 모르고 마당의 감나무를 살살 흔들어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 놀던 고샅길에서 깡총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오느니 눈물이요, 지느니 한숨이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다. 죽은 자는 죽은 자, 산 자는 산 자. 올망졸망 살아 있는 자식들 입에 거미줄을 칠 수도 없는 일,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세워, 어찌했든 힘을 내서 살아봐야겠다. 이왕지사 지나간 일 가슴 깊숙이 슬픔을 묻고 툭툭 털고 일어나야겠다.

    잊는다고 해서 잊을 일이면 천만 번을 잊었으리라. 가슴에 묻은 피붙이를 어찌 잊겠는가. 두고두고 눈물이요 비죽비죽 한숨이다. 새벽꿈에 울며 보채는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매인다. 안되겠다. 눈물이야 한숨이야, 이래서는 안되겠다. 장리쌀이라도 빌어 떡도 좀 하고 과일도 사고 북어도 한 쾌 마련해야겠다. 죽은 아들을 불러 배불리 먹이고, 주인 없는 배고픈 귀신들도 불러다가 잔치를 좀 벌여야겠다.

    굿판이 벌어진다. "그 녀석 살아서 고생만 하더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사람들이 모인다. 이제 판을 시작할 때, 분노인지 한인지 모를 가슴속의 상처들을 불러다 장구를 치고 징을 쳐 한바탕 흐드러진 춤판이다. 바야흐로 슬픔과 상처의 아수라장이다. 무당의 깊고 어두운 노래가 가슴을 파고든다. 켜켜이 쌓인 가슴속의 괴로움이 일어선다. 눈물과 한숨이 비어져 나온다. 말로 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밀려온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비어져 나온다. 슬픔과 응어리의 절정에서 갑작스레 무당은 죽은 아들이 된다. 이른바 접신(接神)이다. 죽은 아들이 무당의 몸을 빌어 산 자의 땅으로 온 것이다. 왔구나. 왔어. 쇠동이가 왔구나. 개똥이가 왔구나. 어머니는 와락 무당을 껴안는다.

    어머니는 무당을 껴안고 흐느낀다. 이 놈아 네가 왔구나, 살아서 고생만 하더니 네가 죽어서 이렇게 왔구나. 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한숨만 쉰다. 무당은 흐느끼며 말한다. 어머니, 어머니 제가 왔어요. 무당의 눈에서도 연신 눈물이 솟는다.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살아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산 자는 가슴의 한을 씻어버린다. 죽은 자는 무당의 손을 빌어 산 자와 화해한다. 슬픔은 슬픔의 표정을 쉽게 알아보는 법, 누구랄 것도 없이 구경꾼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그들 또한 상처를 가슴 깊이 묻고 사는 자들이 아니었던가.

    이제 죽은 자를 보낼 때다. 무당은 말한다. 어머니, 어머니 이제 잘 사세요. 그래 잘 가라. 미안하다. 이승 걱정은 말고 이제 잘 가라.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민다. 망자는 떠나가고 산 자는 끝까지 살아서 몇 방울의 눈물을 더 흘려야 한다. 어찌했든 죽은 아들을 저승으로 보내고 나니 속은 후련타. 가슴속의 한이야 모두 삭아 내리겠는가마는 마음과 몸은 한결 가볍다. 세상 견디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 묵은 체증이 가라앉은 듯 조금은 살 것 같다.

    굿을 안 좋게 보는 이들이 많다. 나 역시 그랬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던 할머니는 해수병으로 생을 일찍 마감해야 해야 했던 남편과 스물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두 아들의 혼령을 위해서 숱하게 굿을 하셨다. 어린 내 눈에는 그것이 마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굿하는 광경 또한 굿에 대한 혐오감을 부채질하는 데 한몫을 했다. 어떤 괴기스러운 기운에 휩싸여 울고 웃고 하는 이들이 반미치광이로 보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샤머니즘은 청산해야 할 인습이라고 가르쳤다. 교문에는 <과학입국>이라는 푯말이 내 걸리기도 했었다. 이성의 공화국에서 샤머니즘은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굿판이 많았다.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병굿, 집안의 경사를 조상에 알리는 여탐굿, 죽은 자와 산 자의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버리는 씻김굿, 필요에 따라 다양한 굿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어디에서도 굿판의 징 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2004년 10월에 인천에서 제1회 세계샤머니즘축제가 열린단다. 이 축제의 추진위원장은 김금화란다. 김금화라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김금화는 유명세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지는 못했다. 오늘날 무속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무형문화제로 지정해준 덕에 國巫(나라무당)로 대접까지 받는 김금화. 그녀는 외국에도 수없이 초대받아 현장 굿을 펼치기도 했다. 1985년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된 김씨는 이 행사에서 우리의 전통 굿 문화를 세계에 알릴 생각이다. "굿장단의 살풀이춤을 보세요. 음악과 창, 무용 등 모든 전통예술이 굿에서 나왔지요." 그녀는 이번 행사에서 전통 원형에 충실한 내림굿을 보여줄 작정이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일지는 의문이다.

    굿 마당에서 김금화와 함께 눈물 흘리면서 그녀를 진정한 예인으로 대접해온 사진꾼이 있다. 바로 김수남. 굿이 야만으로 취급되던 시절, 그는 신문사의 일을 하면서도 굿을 한다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나섰다. 택시가 한 대밖에 없는 섬에서는 경운기를 타고 진흙길을 달렸다. 그는 카메라의 렌즈를 열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열었다. 사람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촌부들과 탁주 한잔을 마시고 그들이 마음을 열기 전에는 결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그는 피사체와 같이 마셨고 피사체와 같이 취했고 피사체와 같이 울었다. 그의 사진에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은 없다. 그는 피사체와 교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무당이었다.

    5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30년 이상의 교직자로 봉직하였고, 오랫동안 김수남과 함께 굿판을 함께 돌아다녔던 김인희 교수는 김수남의 사진이 왜 아름다운가를 말한다. "김수남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눈을 지닌 큰무당이다. 단지 방울과 부채 대신에 사진기를 들고, 공수를 내리는 대신에 셔터를 눌러 자기가 본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 무당과 다를 뿐이다."

    김수남은 한국의 굿 사진으로 이미 20여권의 사진집을 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아시아의 오지를 돌며 그 나라 고유의 민속굿을 렌즈에 담아왔다. 그런 김수남이 책을 냈다.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란다. 심방(제주도의 무당) 안사인, 곱사춤 공옥진, 광대 이동한, 만신 김금화, 명창 김소희, 도살풀이 김숙자 등, 한 때는 천하다고 멸시받던 예인들의 사진에 곁들여 붙인 10인의 한평생과 추억담은 김수남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의 기록이요, 망자를 부르는 초혼의 기록이다.

    김수남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굿판의 슬픈 사연에 매번 펑펑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사람들이 "저 심방은 굿은 안 하고 울기만 하느냐"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책은 전하고 있다. 김수남은 "원래 눈물이 많은 터라 슬픈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절로 눈물이 펑펑 쏟아져 주체할 수 없던 나는, 이 눈물 덕도 많이 봤다"라고 고백한다. 눈물은 너의 슬픔에 나의 감정이 동참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수많은 예인들의 아름다움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피사체와 동화할 수 있는 눈물의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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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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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바라보는 몇 개의 시선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라고 말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다. 시련을 이겨내는 정신들에게는 마땅히 불모의 땅이 필요하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위대한 영혼들은 사막으로 갔다.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이라고 청마(靑馬) 유치환은 그의 <생명의 서>에서 노래했다. 위대한 영혼들이라고 해서 사막의 예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 그들에게 사막은 오히려 잔혹했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고 했던가. 사막은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킨다. 낮의 강렬한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면 사막은 초극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예수가 광야를 40일 동안 떠돈 것도 고통과 유혹을 초극할 힘과의 대면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한 인간됨의 깊이와 폭이 그를 무력화시키려는 불과 모래의 시련과 맞닥뜨려 웅대한 인간적 드라마를 연출하는 곳이 사막이다. 오래도록 사막은 초극을 갈구했던 성자들의 땅이지 않았던가.

    사막을 성소(聖所)로 삼고 평생 사막을 탐험하며, 사막의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고, 돌을 채집했던 테오도르 모노, 그에게 사막은 연구의 공간이기도 했고, 고행과 자기 성찰의 순례지이기도 했다. 사막, 그곳엔 일체의 장식과 군더더기가 없다. 지극히 무심하고 단조로운 곳이 사막이다. 모노는 『사막의 순례자』(현암사)에서 “사막에서는 하루 2.5리터의 물, 간소한 음식, 몇 권의 책, 몇 마디 말이면 족하다. 사막은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라고 썼다. 대추야자 몇 알과 낙타의 젖, 일상의 모든 잔가지를 쳐버리고 사막은 최소한의 것으로만 한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 외형적인 치레는 배제된다. 사막은 아주 적은 것을 갖고 살 수 있게 하고, 또 잘 견딜 수 있게 한다고 모노는 말한다. 간디는 ’100년전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고 일갈하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소유는 지나치게 많다.

    사막에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다. 모노는 사막과 함께 하면 영원 즉 시간의 무한함을 매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라비아 불모의 사막을 거주지로 하고 있는 베두인들처럼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을 빈틈없이 계획할 까닭도 없다. 개구착(開口錯), 입을 뻥긋거려 봐야 인간의 빈틈을 노리는 모래에게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 묵묵히 한 발 한 발의 정진(精進)이 있을 뿐이다.

    불모의 땅에도 침묵만은 차고 넘친다. 소음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면 침묵은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 욕망으로 부글거리고 고통으로 삐걱거리는 피조물들을 내려다보며 우주는 천지운행을 침묵 속에 거듭한다. 소리는 공간에 어떤 육체적 질감을 갖게 하지만 침묵은 공간을 순수한 것으로 남겨두어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곳으로 존재를 확장시킨다. 그 느슨한 탈아의 체험! 저 우주의 영역 너머, 저 물질의 영역 너머, 신의 영역에까지 닿고 싶은 구도자적 욕망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사막을 찾게 한 것은 아닐까. 사막 그곳은 신과 더욱 가까운 곳이다.

    사막은 무엇보다 고독의 땅이다. 고독은 밖으로 열린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성(內省)의 눈을 갖게 한다. 고독은 무엇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일이다. 대체 이 시련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것은 성취할 가치가 있는가, 고통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자유는 대체 무엇이며 의지는 또 무엇인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의 싸움은 충분히 치열한가, 사막의 고독은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게 한다.

    사막, 그곳에서는 내 살의 무게, 내 뼈의 무게만이 모래를 딛고 서있다. 고통에 민감한 육체, 그러나 어떤 끝을 보고 말겠다는 분투의 정신, 이것이 다다. 용기는 나의 사소함을 고백하는 자기 긍정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카뮈는 누구보다 사막을 사랑했다. 『작가수첩』(책세상)의 많은 구절은 사막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 “언제나 나 자신도 영문을 알 수가 없는 이 고독에의 욕구,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 내밀한 심사와 더불어 일종의 죽음의 예고와도 같은 이 고독에의 욕구”라고 말할 때, 카뮈가 그리워하고 있는 곳은 사막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장식도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호텔방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사막에 텐트를 치고 몇 일 동안 머물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담백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세계는 아름답다. 이 세계 밖에서는 구원이란 없다, 라고 말할 때의 카뮈는 무신론자요, 현세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적 초월을 꿈꾸지 않았다. 까뮈는『작가수첩』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낱말 열 개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세계, 고뇌,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가난의 고통, 여름, 바다”라고. 고독과 쾌활, 우울과 발랄이 하나로 뒤엉킨 모순의 인간, 부조리의 인간이었다. 그는 ‘정신의 사람’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누구보다 현세의 행복을 갈구했던 ‘육체의 사람’이었다.

    『작가수첩』에서 그의 현세주의는 도처에 나타난다. 그의 문장은 관념의 의상이 아니라 투명한 사물의 의상을 입고 있다. “ 저녁, 침묵, 까마귀들, 마치 루르마랭의 새들과 암코양이, 나의 눈물, 음악처럼.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세상에서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배의 허리에 차는 물의 움직임을 따른다. 바다의 자유로운 삶과 이 몇 일의 행복.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지고 모든 것이 다 다시 만들어진다. 지칠 줄 모르는 빛 속에, 꽃무리와 기둥들로 뒤덮인 섬들 사이로 물 위를 날아다니며 보낸 이 황홀한 날들, 나는 그 맛을 입 안에, 가슴 속에 간직한다. 제 2의 계시, 제2의 탄생……”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카뮈는 우리에게 행복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념과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짜의 행복학이 아니라, 일체를 무효화시키는 사막, 그 정신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신생의 행복학.


    코감기에 걸려 본 사람은 안다. 대체 내 몸의 어디에 그렇게 많은 슬픔의 물기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오래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안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한수영의『공허의 1/4』(민음사)의 주인공 여자는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다. 주사기로 그녀는 무릎 관절에서 물을 빼낸다. 그녀는 여지없이 고로쇠나무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고통은 갑절이 된다.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기를 말려야 한다. 그녀는 삶이 버겁다. 무겁고 쓰리고 아프다. 관절염 약의 부작용으로 피둥피둥 그녀의 육체는 볼품 없이 부풀어오른다. 그녀는 제 안의 모든 나쁜 피를 뽑아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제 몸 안의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고 싶다. 그녀는 태양이 작렬하는 사막을 꿈꾼다. 룹알할리, ‘공허의 사분의 일’이란 뜻을 가진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막.

    그녀는 아파트 관리소 여직원이다. 도무지 부가가치가 없는 지리멸렬한 생활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바로 룹알할리. 그곳에 가면 모든 슬픔의 물기를 증발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그녀는 적금을 붓는다. 엘리어트는 노래했다. My desolation does begin to make a better life. 나의 불모는 보다 나은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녀 또한 불모의 저 너머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늘 희망을 배신한다. 배신과 환멸이 몸 안에 키우는 물기, 그녀는 삶이 아프다. 아픈 눈으로 세상을 보니 이웃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허의 1/4』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이야기며 동시에 세상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자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달다.

    조금은 퇴폐적이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그녀의 문장들을 <슬픔의 에로티즘>이라고 명명해본다. 그녀의 문장들은 슬픔을 잘 즐길 수 있게 한다. 슬픔이 지나치다 싶어 이게 아닌데 싶은데 아래와 같은 문장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다. 그래, 아름다움엔 슬픔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관리실에 혼자 있게 되면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목구멍 깊이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식도의 물큰하고 따뜻한 이물감, 그 느낌이 낯설어 나는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더 밀어 넣었다. 왈칵, 거꾸로 쏠린 내장들이 입으로 한꺼번에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속엣것들을 모두 토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늘 내장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래도 견딜 수 없으면 나는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질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물큰하고 부드럽고 한없이 따뜻한 것, 내 몸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누군가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어둡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그 구멍을 영원히 메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질 속에 질정을 밀어 넣었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몇 개를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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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풍금 - [할인행사]
이영재 감독, 이미연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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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시대의풋사랑
-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 대한 짧은 생각



▲ 내 마음의 풍금
2006년의 인텔리전스 빌딩.이 건물은 모든 것이 컴퓨터 브레인에 의해서 작동된다.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된다. 햇볕의 강도를 창에 부착된 센서가 감지해서 조명등의 조도를 조절한다. 냉장고에는 모니터가 부착되어 냉장고 안에 어떤 식품들이 있고,그 양은 얼마인지를 보여준다. 식품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인터넷으로 주문이 완료된다.

2004년 어느 일요일 오후 4시,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점심을 먹을 때 잠깐 컴퓨터 앞을 뜬 것을 빼면 종일 컴퓨터다.

온라인게임, 인터넷 채팅, MP3, 아바타, 사이버 애완동물, 인터넷 쇼핑, 모든 것이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이버 수족관에서 키싱구라미, 레드베타 등의 열대어를 기르고, 사이버머니를 주고 구입한 식물들을 온라인상에서 재배한다. 하루라도 컴퓨터가 먹통이 되는 날이면 이 모든 것이 끝이다.

아버지는 인터넷으로 주식시세, 신문, 잡지를 보고, 업무관련 이메일을 열어 본다. 손목에 부착된 컴퓨터는 매일 혈압과 맥박과 당뇨수치를 무선 e메일로 주치의에게 통보한다. 이상이 있을 때는 휴대폰으로 '병원에 한 번 들러 달라'는 연락이 온다.

자, 이 모든 시스템이 멈춰섰다고 가정해보자.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냉장고 안의 음식물이 썩는 냄새도 냄새지만 50층 건물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불편이 여간이 아니다.

온도조절 시스템이 비정상이니 실내는 후텁지근하다. 일체의 커뮤니케이션은 먹통이다. 악몽의 나날이다. 기술에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그 사회의 위험도도 증가한다. 산골에서 장작을 때고, 호롱불을 켜고 손수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이런 위험은 없다. 정화조가 막혀서 골머리를 앓을 이유도 없고, 보일러가 고장났다고 투덜거릴 이유도 없으며, 주문한 음식물 배달이 안 된다고 투덜거릴 이유도 없다. 강아지가 자꾸 오리들을 괴롭혀서 골머리가 아프고, 소가 채소밭으로 뛰어들어 밭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좀 문제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상할 이유는 없다. 편안한 자족의 나날들이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의 배경은 강원도 산 속 마을 '산리'다. 첨단 테크놀로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이곳에서 열일곱 살의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이 갓 부임한 스물 한 살 총각선생님을 짝사랑한다. 부임하던 날 그가 길 위에서 홍연을 '아가씨'라 불러 세우며 학교로 가는 길을 묻던 그 순간,홍연은 피할 수 없는 첫사랑의 운명에 빠져든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은 기술로부터 뚝 떨어진 아날로그의 세계, 편리함과 효율성만이 능사가 아닌 세상, 그곳에서의 사랑을 보여준다.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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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박흥식 감독, 전도연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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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의 눈에는 바다의 풍광만큼이나 연순이가 아름답다. 연순,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영락없는 촌뜨기지만 잘 뜯어보면 귀염성이 있다. 연순이가 누구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맥질을 거듭하는 그녀는 해녀다. 억척스럽고 건강하고 등푸른 물고기처럼 그녀의 지느러미는 싱그럽다.

눈빛이 선한 우체부는 그녀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연순의 자립성을 부정한다. 우체부는 있는 그대로의 연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체부는 연순을 개조한다. 바야흐로 계몽이 시작된 것이다. 가르침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사랑은 계몽의 명분을 얻으니 탄력을 받는다.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상님, 선상님 하면서 우체부를 마치 신주 모시 듯하니 기분도 좋다.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고, 이 무슨 호사란 말인가. 우체부는 나날이 행복하다. 연순 또한 행복하다. '핵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해녀에게 '학상'으로의 격상이라니, 이제부터 인생은 장밋빛 '오라이'다.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었다. 가슴이 벅차고, 동공이 확대되고, 무슨 신의 언질이라도 받은 듯 삶은 빛으로 차오른다.

꿈같은 날들이다. 일상이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우체부와 연순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사랑은 함께 꾸는 꿈이 아닌가. 이를 악물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사랑은 깊어지는 법. 비장한 결의가 둘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결합시켜 주었을 것이다. 고난을 이기겠다는 의지, 모든 연인은 그 의지 앞에서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이 아닌가.

박흥식 감독은 이 부분을 슬쩍 지나간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다. 보나마나 꿀 같은 날들이 지났으리라. 결연한 날들이 지났으리라.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뭐든 시들해지기 마련. 남녀간에 가슴 뛰는 사랑이 지속되는 것은 18~30개월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녀가 만난 지 2년 정도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감정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연구결과도 있다.

모든 사랑의 파국을 화학물질의 결핍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현실은 얼마든지 반대 사례를 보여준다. 세월이 가도 더욱 굳건해지는 사랑, 시련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는 사랑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고두심의 저 능청스런 연기력을 빌어 제 남편 알기를 발가락 때만큼도 알아주지 않는 연순의 단순무식함은 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분명 돌담에 새끼줄로 동여맨 지붕으로 보건대는 영화의 풍광은 분명 제주도 같은데, 배우들은 한결같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정체불명의 섬에서(셋팅은 제주도, 캐릭팅은 전라도라도 부디 이해하자. 제주도 사투를 맛깔 나게 구현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 전도연, 아니 전도연 할머니라도 역부족이다.) 우체부는 연순을 사랑한다. 사랑은 동등한 인격체의 평등한 만남일 때, 다시 말해서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꿀리지 않을 때, 훨씬 지속적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사랑에서 연순은 한없이 꿀린다. 영화 어디를 보아도 연순은 철부지 동생 하나밖에 없는 사고무친의 고아다. 내세울 것이라곤 펄떡펄떡 뛰는 몸뚱이와 지식의 세례를 받지 않는 순수한(?) 두뇌뿐이다. 권력은 일방적으로 우체부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녀는 해물파전 말고는 달리 줄 것이 없다. 그러나 우체부는 지식과 공책과 연필로 상징되는, 형이상학적인 것, 좀더 품위 있는 것들을 준다. 그녀는 오직 받기만을 할 뿐이다.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이것은 온당하지가 않다.

그렇다. 한 보잘것없는 여자의 마음속에도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를 뒤집고 싶다는 욕망은 있을 것이다. 적반하장,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죄 지은 놈도 때로 큰소리 한 번 쳐보고 싶은데, 연순인들 언제나 굽신거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저 순박해 보이는 우체부가 가끔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꺼지는 한숨을 쉬면서 잘 계몽되지 않는 연순의 한심한 지적 능력과 궁상스럽고 지리멸렬한 변두리의 삶을 한탄하기라도 했다면 연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 니는 얼마나 잘났냐. 그래 그렇게 잘 나서 보증 잘못 서서 집안을 말아 먹냐. 그것도 한 두 번이지. 허구헌날, 니가 해준 게 뭐냐, 누가 사람 좋은 것 모르냐. 하지만 사람이 밥 먹여 주냐. 나는 물질에, 목욕탕 때밀이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으면서, 400원 때문에 머리채를 움켜쥐고 싸우는데, 니는 고상하게 우체국 주사라니, 그렇다고 고상이 어디 돈이 되더냐, 삐까뻔쩍 광휘라도 나더냐. 쌍욕에 침을 탁탁 뱉어가며 그악스럽게 욕을 하며 우체부쪽으로 기울어진 권력의 중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밀고 당기는 권력 관계, 서사가 이렇게 되면 이미 신파가 아니다. 갈 데 없는 리얼리즘이다. 박흥식 감독은 리얼리즘을 피했다. 티격태격하는 입씨름과 피곤한 남녀의 감정의 소모전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객들도 돈까지 지불하며 한 개인의 내밀한 가정사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단순하게 가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인어공주>가 신파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리얼리즘과 신파 사이에 <인어공주>는 어중간하게 걸쳐있다. 하긴 인어공주는 물고기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물고기 반, 사람 반. 신파 반, 리얼리즘 반.

<인어공주>는 삶의 세부, 생활과 감정과 욕망의 결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파요, 멜로가 어떻게 해서 쌍욕의 파국을 드러내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그 리얼리즘은 불성실하다. 판타지로 얼버무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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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SE - (3disc) 일반판
강우석 감독, 설경구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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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그가 손을 대면 뭔가 된다. 대중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그만한 레이더를 가진 감독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저만치 앞으로 내빼면서 헉헉거리는 관중들에게 어서 따라오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관중들의 눈높이와 폐활량을 늘 고려한다. 이런 그의 태도에 대중주의니 뭐니, 껄끄러운 군소리를 늘어놓는 작자들이 못마땅해서일까. 그는 [씨네21]의 김봉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직설적으로 한 방을 날린다.

김봉석: 조중사와 박중사의 모습에서 인텔리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번 영화만이 아니라 <공공의 적>에서도 드러났던 면이다.

강우석: 저번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건데 돈 많은 놈, 배운 놈, 잘난 척하는 놈, 그런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내가 비즈니스하면서 하도 겪어봤기 때문에 나온다. 그런 사람들하고 자리를 함께 하면‘너, 나가’하거나 내가 역겨워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도 생긴다. 잘난 척하는 놈, 너 까불지 마, 누가 너보다 못나서 그런 줄 알어, 없어서 참아주는 거지, 하는, 영화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건 일종의 야지다. 야지. 그건 영원히 할 거야.


이건 조악한 이분법이 아닌가. 배운 놈은 고상한 존재요, 못 배운 놈은 천박한 존재라는 편견을 뒤집는 것까진 좋았지만 그 편견의 전복방식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군대에서 '좆뺑이'를 쳐본 사람들은 알 만큼 안다. 조중사처럼 쫄따구들을 피가 나고 이가 갈리도록 갈구어 대는 소위 '갈구리'들에게도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으며, 쫄따구들에게 인간적으로 나오는 소위 '학삐리'들이 나중에 가면 애매한 사람 뒤통수 치는 데에 한몫을 한다는 것을. 그래서 대한민국 군대는 신고식이다 뭐다 해서 어리버리한 쫄따구들을 갈구는 데에 열을 올린다.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앞으로취침, 뒤로 취침, 대가리 박아, 쪼그려 뛰어, 쫄따구들은 죽을 맛이다. 갈구리들에겐 신참들을 훈련시킨다는 고상한 명분이 있다. 국가가 그의 든든한 빽이다. 상식은 거추장스러울 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지긋지긋한 뺑뺑이와 얼차례, 그러나 거꾸로 매달려도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갈구리들에게도 한 점 인간적 따스함은 있다. 갈구리들이 한 가치 담배를 건네주며, "힘들지"라고 말할 때, 쫄다구들의 가슴은 메인다. 아, 이 자도 인간이었구나. 쫄다구들은 내심 안도한다. 그래, 이 자는 좋은 사람이었어. 이 자가 내게 내린 명령들, 폭력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었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폭력을 묵묵히 견뎠던 자신의 비굴함을 변호할 수 있다. 겉으로 갈구는 척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자는 좋은 인간이야, 쫄따구들의 무의식은 갈구리들을 미화하는 데 분주해진다. 그들을 미화하는 순간, 쫄따구들은 더 이상 자신의 비겁과 굴욕을 문제삼지 않아도 된다. 고분고분하게, 합리적으로, 유순하게 대했다간 나중에 딴 소리를 듣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조져라. 그러다가 가끔씩 한 번 인간적으로 대접하라, 이런 불문율들을 가슴에 새기며 쫄다구들은 또 한 명의 갈구리로 '성장'해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런 '쫄따구에서 갈구리로의 성장의 시스템'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은 아닌가. 그런 시스템이 폭력을 재생산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가. 특히 조직사회에서 이런 '성장의 시스템'은 수많은 마초들을 길러낸다. 그 마초 중의 하나가 <실미도>의 '조중사'다. 당연히 그 대립항은 박중사다. 강우석 감독은 박중사에게 인텔리전트한 마스크를 부여했다. 박중사, 그는 분명 용장이 아닌 지장의 이미지다. 뻣뻣하고 냉정한 조중사에 비해 그는 합리적이고, 온유하다. 그러나 강우석이 이런 작자를 가만 둘 리 없다. 인간적이었던 박중사는 결국 684 부대를 끝장내겠다는 역할을 자처한다. 조중사가 가만있을 리 없다. 영화의 후반에 뜬금없이 조중사는 철저하게 '의리의 인물'로 변화한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조중사와 함께 한다. 그러나 강우석에겐 '나를 살리느냐, 저들을 죽이느냐' 하는 선택지에서 고민하는 조중사의 모습에 괘념할 여유가 없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배운 놈은 악이다.

대체 이런 이분법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왜 강우석은 이런 이분법을 한 번 더 비틀지 못할까.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이분법은 공공연한 상식이다. 강우석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소위 '먹물'들에 대한 적개심은 공공연한 것이다. 그 정도의 인식은 대중들의 상식이란 것이다. 그 상식을 다시 한번 뒤집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을까. 그러나 강우석은 그런데 여분의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데까지 신경 쓰다가는 영화가 복잡해진다. 대중들은 단순하다. 복잡해지면 흥행이고 뭐고 끝이다. 더구나 그는 '격렬한 영화가 아니면 신이 안 난다'고 하지 않는가. ' 은근한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영화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닭살 돋아서 못 찍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발언을 뒤집어 보면 결국 강우석은 영화에서 '개인'은 만들지 않겠다는 말은 아닌가. 한 인간의 내면이 '섬세함과 은근함의 총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거대담론이 그 섬세와 은근함을 말해줄 수 있는가. 천만에, 거대담론이 실패하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예술이 필요한 자리가 아닐까.

최인훈의 <광장>, 뤽 베송의 <니키타>에서 이준익의 <황산벌>까지, 개인과 국가의 대립이란 테마는 이미 낯선 주제가 아니다. <실미도>의 대중성은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파급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될 만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개인과 국가의 대립은 섬세와 은근함의 총체인 진정한 개인의 복원에서만 가능하다.

어렵게 말 할 것 없다. 인간이란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인간이다. 복잡한 인간을 복잡하게 봐달라고 하는 것, 그것이 강우석에 대한 부탁이라면 부탁이고, '야지'라면 '야지'다. 684 대원들이 자폭할 때, 조중사의 손에 들린 사탕, 그것이 못내 역겨웠다는 말도 덧붙인다. 쉬운 것은 달콤하지 않다. 그래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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