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어공주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박흥식 감독, 전도연 외 출연 / 베어엔터테인먼트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우체부의 눈에는 바다의 풍광만큼이나 연순이가 아름답다. 연순, 검게 그을린 얼굴이 영락없는 촌뜨기지만 잘 뜯어보면 귀염성이 있다. 연순이가 누구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맥질을 거듭하는 그녀는 해녀다. 억척스럽고 건강하고 등푸른 물고기처럼 그녀의 지느러미는 싱그럽다.
눈빛이 선한 우체부는 그녀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연순의 자립성을 부정한다. 우체부는 있는 그대로의 연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체부는 연순을 개조한다. 바야흐로 계몽이 시작된 것이다. 가르침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사랑은 계몽의 명분을 얻으니 탄력을 받는다.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상님, 선상님 하면서 우체부를 마치 신주 모시 듯하니 기분도 좋다.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고, 이 무슨 호사란 말인가. 우체부는 나날이 행복하다. 연순 또한 행복하다. '핵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해녀에게 '학상'으로의 격상이라니, 이제부터 인생은 장밋빛 '오라이'다.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었다. 가슴이 벅차고, 동공이 확대되고, 무슨 신의 언질이라도 받은 듯 삶은 빛으로 차오른다.
꿈같은 날들이다. 일상이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우체부와 연순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사랑은 함께 꾸는 꿈이 아닌가. 이를 악물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사랑은 깊어지는 법. 비장한 결의가 둘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결합시켜 주었을 것이다. 고난을 이기겠다는 의지, 모든 연인은 그 의지 앞에서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이 아닌가.
박흥식 감독은 이 부분을 슬쩍 지나간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다. 보나마나 꿀 같은 날들이 지났으리라. 결연한 날들이 지났으리라.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뭐든 시들해지기 마련. 남녀간에 가슴 뛰는 사랑이 지속되는 것은 18~30개월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녀가 만난 지 2년 정도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감정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이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연구결과도 있다.
모든 사랑의 파국을 화학물질의 결핍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현실은 얼마든지 반대 사례를 보여준다. 세월이 가도 더욱 굳건해지는 사랑, 시련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는 사랑도 얼마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고두심의 저 능청스런 연기력을 빌어 제 남편 알기를 발가락 때만큼도 알아주지 않는 연순의 단순무식함은 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분명 돌담에 새끼줄로 동여맨 지붕으로 보건대는 영화의 풍광은 분명 제주도 같은데, 배우들은 한결같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정체불명의 섬에서(셋팅은 제주도, 캐릭팅은 전라도라도 부디 이해하자. 제주도 사투를 맛깔 나게 구현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 전도연, 아니 전도연 할머니라도 역부족이다.) 우체부는 연순을 사랑한다. 사랑은 동등한 인격체의 평등한 만남일 때, 다시 말해서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꿀리지 않을 때, 훨씬 지속적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사랑에서 연순은 한없이 꿀린다. 영화 어디를 보아도 연순은 철부지 동생 하나밖에 없는 사고무친의 고아다. 내세울 것이라곤 펄떡펄떡 뛰는 몸뚱이와 지식의 세례를 받지 않는 순수한(?) 두뇌뿐이다. 권력은 일방적으로 우체부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녀는 해물파전 말고는 달리 줄 것이 없다. 그러나 우체부는 지식과 공책과 연필로 상징되는, 형이상학적인 것, 좀더 품위 있는 것들을 준다. 그녀는 오직 받기만을 할 뿐이다.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이것은 온당하지가 않다.
그렇다. 한 보잘것없는 여자의 마음속에도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를 뒤집고 싶다는 욕망은 있을 것이다. 적반하장,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죄 지은 놈도 때로 큰소리 한 번 쳐보고 싶은데, 연순인들 언제나 굽신거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저 순박해 보이는 우체부가 가끔 술이라도 한 잔 걸치고 꺼지는 한숨을 쉬면서 잘 계몽되지 않는 연순의 한심한 지적 능력과 궁상스럽고 지리멸렬한 변두리의 삶을 한탄하기라도 했다면 연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 니는 얼마나 잘났냐. 그래 그렇게 잘 나서 보증 잘못 서서 집안을 말아 먹냐. 그것도 한 두 번이지. 허구헌날, 니가 해준 게 뭐냐, 누가 사람 좋은 것 모르냐. 하지만 사람이 밥 먹여 주냐. 나는 물질에, 목욕탕 때밀이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으면서, 400원 때문에 머리채를 움켜쥐고 싸우는데, 니는 고상하게 우체국 주사라니, 그렇다고 고상이 어디 돈이 되더냐, 삐까뻔쩍 광휘라도 나더냐. 쌍욕에 침을 탁탁 뱉어가며 그악스럽게 욕을 하며 우체부쪽으로 기울어진 권력의 중심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밀고 당기는 권력 관계, 서사가 이렇게 되면 이미 신파가 아니다. 갈 데 없는 리얼리즘이다. 박흥식 감독은 리얼리즘을 피했다. 티격태격하는 입씨름과 피곤한 남녀의 감정의 소모전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객들도 돈까지 지불하며 한 개인의 내밀한 가정사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단순하게 가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인어공주>가 신파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리얼리즘과 신파 사이에 <인어공주>는 어중간하게 걸쳐있다. 하긴 인어공주는 물고기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물고기 반, 사람 반. 신파 반, 리얼리즘 반.
<인어공주>는 삶의 세부, 생활과 감정과 욕망의 결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파요, 멜로가 어떻게 해서 쌍욕의 파국을 드러내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그 리얼리즘은 불성실하다. 판타지로 얼버무린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