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SE - (3disc) 일반판
강우석 감독, 설경구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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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강우석, 그가 손을 대면 뭔가 된다. 대중의 기호를 포착하는 데 그만한 레이더를 가진 감독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저만치 앞으로 내빼면서 헉헉거리는 관중들에게 어서 따라오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관중들의 눈높이와 폐활량을 늘 고려한다. 이런 그의 태도에 대중주의니 뭐니, 껄끄러운 군소리를 늘어놓는 작자들이 못마땅해서일까. 그는 [씨네21]의 김봉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직설적으로 한 방을 날린다.

김봉석: 조중사와 박중사의 모습에서 인텔리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번 영화만이 아니라 <공공의 적>에서도 드러났던 면이다.

강우석: 저번 인터뷰에서도 얘기한 건데 돈 많은 놈, 배운 놈, 잘난 척하는 놈, 그런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내가 비즈니스하면서 하도 겪어봤기 때문에 나온다. 그런 사람들하고 자리를 함께 하면‘너, 나가’하거나 내가 역겨워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도 생긴다. 잘난 척하는 놈, 너 까불지 마, 누가 너보다 못나서 그런 줄 알어, 없어서 참아주는 거지, 하는, 영화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건 일종의 야지다. 야지. 그건 영원히 할 거야.


이건 조악한 이분법이 아닌가. 배운 놈은 고상한 존재요, 못 배운 놈은 천박한 존재라는 편견을 뒤집는 것까진 좋았지만 그 편견의 전복방식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군대에서 '좆뺑이'를 쳐본 사람들은 알 만큼 안다. 조중사처럼 쫄따구들을 피가 나고 이가 갈리도록 갈구어 대는 소위 '갈구리'들에게도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있으며, 쫄따구들에게 인간적으로 나오는 소위 '학삐리'들이 나중에 가면 애매한 사람 뒤통수 치는 데에 한몫을 한다는 것을. 그래서 대한민국 군대는 신고식이다 뭐다 해서 어리버리한 쫄따구들을 갈구는 데에 열을 올린다.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앞으로취침, 뒤로 취침, 대가리 박아, 쪼그려 뛰어, 쫄따구들은 죽을 맛이다. 갈구리들에겐 신참들을 훈련시킨다는 고상한 명분이 있다. 국가가 그의 든든한 빽이다. 상식은 거추장스러울 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지긋지긋한 뺑뺑이와 얼차례, 그러나 거꾸로 매달려도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갈구리들에게도 한 점 인간적 따스함은 있다. 갈구리들이 한 가치 담배를 건네주며, "힘들지"라고 말할 때, 쫄다구들의 가슴은 메인다. 아, 이 자도 인간이었구나. 쫄다구들은 내심 안도한다. 그래, 이 자는 좋은 사람이었어. 이 자가 내게 내린 명령들, 폭력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었어.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폭력을 묵묵히 견뎠던 자신의 비굴함을 변호할 수 있다. 겉으로 갈구는 척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자는 좋은 인간이야, 쫄따구들의 무의식은 갈구리들을 미화하는 데 분주해진다. 그들을 미화하는 순간, 쫄따구들은 더 이상 자신의 비겁과 굴욕을 문제삼지 않아도 된다. 고분고분하게, 합리적으로, 유순하게 대했다간 나중에 딴 소리를 듣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조져라. 그러다가 가끔씩 한 번 인간적으로 대접하라, 이런 불문율들을 가슴에 새기며 쫄다구들은 또 한 명의 갈구리로 '성장'해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런 '쫄따구에서 갈구리로의 성장의 시스템'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은 아닌가. 그런 시스템이 폭력을 재생산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가. 특히 조직사회에서 이런 '성장의 시스템'은 수많은 마초들을 길러낸다. 그 마초 중의 하나가 <실미도>의 '조중사'다. 당연히 그 대립항은 박중사다. 강우석 감독은 박중사에게 인텔리전트한 마스크를 부여했다. 박중사, 그는 분명 용장이 아닌 지장의 이미지다. 뻣뻣하고 냉정한 조중사에 비해 그는 합리적이고, 온유하다. 그러나 강우석이 이런 작자를 가만 둘 리 없다. 인간적이었던 박중사는 결국 684 부대를 끝장내겠다는 역할을 자처한다. 조중사가 가만있을 리 없다. 영화의 후반에 뜬금없이 조중사는 철저하게 '의리의 인물'로 변화한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가 조중사와 함께 한다. 그러나 강우석에겐 '나를 살리느냐, 저들을 죽이느냐' 하는 선택지에서 고민하는 조중사의 모습에 괘념할 여유가 없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배운 놈은 악이다.

대체 이런 이분법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왜 강우석은 이런 이분법을 한 번 더 비틀지 못할까.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이분법은 공공연한 상식이다. 강우석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소위 '먹물'들에 대한 적개심은 공공연한 것이다. 그 정도의 인식은 대중들의 상식이란 것이다. 그 상식을 다시 한번 뒤집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을까. 그러나 강우석은 그런데 여분의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데까지 신경 쓰다가는 영화가 복잡해진다. 대중들은 단순하다. 복잡해지면 흥행이고 뭐고 끝이다. 더구나 그는 '격렬한 영화가 아니면 신이 안 난다'고 하지 않는가. ' 은근한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영화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닭살 돋아서 못 찍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발언을 뒤집어 보면 결국 강우석은 영화에서 '개인'은 만들지 않겠다는 말은 아닌가. 한 인간의 내면이 '섬세함과 은근함의 총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거대담론이 그 섬세와 은근함을 말해줄 수 있는가. 천만에, 거대담론이 실패하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예술이 필요한 자리가 아닐까.

최인훈의 <광장>, 뤽 베송의 <니키타>에서 이준익의 <황산벌>까지, 개인과 국가의 대립이란 테마는 이미 낯선 주제가 아니다. <실미도>의 대중성은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파급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될 만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개인과 국가의 대립은 섬세와 은근함의 총체인 진정한 개인의 복원에서만 가능하다.

어렵게 말 할 것 없다. 인간이란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인간이다. 복잡한 인간을 복잡하게 봐달라고 하는 것, 그것이 강우석에 대한 부탁이라면 부탁이고, '야지'라면 '야지'다. 684 대원들이 자폭할 때, 조중사의 손에 들린 사탕, 그것이 못내 역겨웠다는 말도 덧붙인다. 쉬운 것은 달콤하지 않다. 그래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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