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한 물은 오히려 독이다



 깨끗한 것은 더러워지기 십상이다.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순수가 있을까. 순수함은 그 순수만큼의 오염과 상처의 역사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함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이란 십중팔구 오염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리라. 지속될 수 없는, 언젠가는 오염과 맞닥뜨려야 할 순수의 운명 앞에서 우리가 심리적 안정을 누리기는 어렵다. 가령,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나치게 개결(介潔)한 사람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 앞에서 느긋한 감정을 지니기는 힘들다. 순수는 아무래도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불안하게 만든다.

 퇴폐와 불순은 우리를 느긋하게 만든다. 바닥까지 닿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는 안도감을 준다. 퇴폐와 불순은 타락과 오염에의 가능성보다는 정화에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진다. 퇴폐와 불순 앞에서 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안하지는 않다.

 미셀투르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한뜻)이란 책에서 '깨끗한 물, 순수한 물'의 위험성을 역설한 바 있다. 어떤 오염도 찾을 수 없는 깨끗한 물은 몸 속에서 출혈을 야기한다고 한다. 차라리 적당히(지나치면 또한 독이다) 불순물이 섞인 물이 우리의 몸에 들어왔을 때,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독의 기능을 하지 않는단다. "순수한 물은 독극물처럼 유기체에 영향을 준다. 이런 물이 유기체에 흡수되었을 때, 피와 체액을 운반하는 광물이 함유된 염분은 모두 물에 침전된다. 왜냐하면 물은 피와 체액의 농도를 한층 묽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의 신장이 요소나 요산, 다른 독소를 걸러낼 수 없는 경우, 이 환자의 피에 섞여 있는 이런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물을 사용하는 것이 응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병리학적인 경우에 필요한 투석(透析)은 염분의 혈청치가 정상인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사망할 수도 있는 혈액의 칼슘과 포타슘의 유출을 목격할 것이다. 실제로 심장은 혈액에 함유된 칼슘과 포타슘의 균형으로 지속되는 전류에 의해 박동한다. 맑은 물의 흡수는 위출혈이나 장출혈, 피부출혈을 유발할 수도 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미셀투르니에의 이런 대목에 와서는 무색해진다. 투르니에는 계속 말한다, "순수성으로 인한 육체적 피해는 강박관념이나 역사 속에서 야기시켰던 무수한 죄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순수성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혀 인간은 자기 주위에 죽음과 파멸을 뿌린다. 종교적 정결 의식이나 정치적 정화, 종족의 순수성 보호, 천사의 모습에 대한 반육체적 탐구와 같은 탈선은 모두 무수한 살육과 불행으로 귀착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순수한 혈통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개스실로 보냈고, 유대인의 배타적인 시오니즘이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을 난민으로 만들었는지. 역사는 순수에 대한 옹호, 근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은 테러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되었던가를 말해준다. 클릭 한 번으로 이역의 문화가 안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늘날, 내 것에 대한 배타적 집착은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닌지.

 육체에 대한 순수한 물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지만 정작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배타성을 우려하고 있는 미셀 투르니에의 글쓰기는 비장한 계몽적 어조를 빌리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책은 부담 없이 읽힌다. 그러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미셀 투르니에를 심각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북라인)에서 투르니에는 사랑의 대립쌍으로서 무관심을 꼽지 않고 우정을 꼽는다. 사랑의 반대말이 우정이란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도 얼마든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랑은 경멸과 증오의 감정에도 아랑곳없이 싹틀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는 우정은 없다. 경멸은 우정의 끝이다. " 투르니에의 독서는 이렇게 산뜻한 깨달음을 준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도 그를 읽는 하나의 독법일 수 있겠다. "우정은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지지만 사랑은 점점 더 약해진다"라는 투르니에의 구절에 이렇게 토를 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시간의 경과에 의해 더욱 싶어지는 사랑도 있다. 정념의 사랑이 식어갈수록 신뢰의 믿음이 깊어 가는 그런 사랑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사랑처럼 얼마든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웃음과 눈물, 목욕과 샤워, 공포와 번민, 우측과 좌측 등 세계를 무수한 대립쌍으로 나누고 신선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투르니에의 이분법은 재미있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 이분법의 체계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정과 사랑을 칼금 긋듯 양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좋은 사랑은 어느 정도의 우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어떤 우정은 사랑을 향해서도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의 고유한 영토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념이 개입되지 않는 사랑, 섹스가 개입되지 않는 사랑이 우정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없는 정념이 개입되면 자연 관계는 쿨해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투정이 늘고 불평이 늘고, 과도한 것을 요구하고, 긁고 간섭하고 따지고 들기 십상이다. 심지어는 얼굴에 손톱 자국까지 남기기도 한다. 섹스나 정념에 따르는 부작용들이다. 식사를 하듯 쿨하게 섹스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과도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도 왠지 칙칙해 보인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중용은 언제나 멀게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이서브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고통을 초월하는 사랑의 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고통을 위로할 수 있지만 고통은 더 큰 고통 앞에서 더 겸손한 표정을 짓는다. 나보다 더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에 의해서 내 아픔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기도 한다. 수십 명이 사상을 당한 참사의 현장에서 찰과상 정도는 차라리 신의 가호쯤으로 생각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십상이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처럼 내 고통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유아론적 함정에 빠지지 쉬운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인생은 고해라던가, 조금만 우리의 이웃들을 돌아다 보면 고통은 곳곳에 산재한다. 내 안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 따지고 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비극은 얼마든 있다. 버리고 버림받고 병들고 아프고, 무수한 상처로 얼룩진 곳이 이승이 아니던가.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아이서브)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어야 했던 한 인간의 고통의 기록이다. 대개의 수용소 이야기가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성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고통과 그것을 초월하려 했던 한 인간의 실존의 드라마가 아주 담담한 서술 속에 감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의 체험기는 여타의 체험기와는 우뚝하게 다르다. 과장도 없다. 형이상학적 초월도 없다.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것을 초극하려 했던 한 인간의 내면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이런 책은 음미되어져야 마땅하다. 이 책을 빌려달라는 지인들의 요청을 거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나는 빌릴 수 있는 책이 있고 빌릴 수 없는 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권을 소유함으로 해서 내 존재의 풍성한 질량감을 확보했다는 느낌-그 느낌이 허구이든 실제이든-을 갖게 하는 책, 프랑클의 책은 필경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치아에 대한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지식을 소유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지식이 어금니와 잇몸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통증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면 대체 치의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통받는 인간』(서울대학교출판부)의 저자 손봉호는 말한다. "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저 멀리 있는 '있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도 아니고 고통의 본질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서술도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요, 해방될 수 없으면 고통의 의미라도 알아서 위로 받는 것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기존의 철학적 담론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 책도 학문적 수준의 논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고통에 대한 담론이 실존의 해방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원제가 <어느 심리학자가 체험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듯이 이 책은 프랑클 박사가 2차대전 중 나치의 아우슈비츠 등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체험을 기록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과거는 회억(回憶) 속에서 굴절되기 마련, 대개 불행의 기억이란 실제의 질량과 부피보다 훨씬 과장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빅토르 프랑클은 담백한 어조로 과거를 말한다. 군대 체험이나 병상 체험을 말하는 남자들의 술좌석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톤 높은 목소리나 호들갑스런 제스쳐도 없다.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해야할 만큼 극악하고 야만적인 수용소에서의 체험은 그것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악몽일 것이며, 극심한 고통은 그것의 사실적 재현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학문적인 아카데미즘에 있지 않고 살아있는 인간의 실존에 있었다. 고통과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성숙의 관문이 될 수 있는가, 인간됨을 말살하는 극악한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은 인간됨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가, 사랑은 어떻게 한 존재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고통 속에서 예술과 유머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프랑클은 말한다. 그 어조의 톤은 낮고 담담하다.

 꼭 그렇게밖에는 달리 행동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자유를 말할 수는 없다. 외적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열악한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개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어진 상황적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데서 자유는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 환경 속에서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데도 환경적 구속을 벗어나 다르게 선택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자유는 비로소 그런 사람의 입에서 말해져야 하리라.

 프랑클은 말한다. " 경험적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얼마든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수용소 생활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준다.……안팎으로 궁지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제수용소에 있어 본 우리들은, 연병장에서 혹은 바라크 안에서 주위 동료들을 위로하면서 자신들의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마저도 주어버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강제수용소가 다른 건 다 강탈할 수 있어도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유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고통은 오히려 존재를 갱신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라는 것이다.
 "수용소 생활이라는 내부적 난관을 내부 단련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고, 과거의 삶 속으로만 자꾸 숨으려 했다. 그런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수감자 생활을 오히려 절정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지 못했다." 이런 지적은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시련의 현실은 비로소 '강철의 무지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증가되는 고통의 양이 그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단계로 존재를 비약시키는 저 불가사의한 고통의 변증법이다.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사랑을 말하는 대목이다. 프랑클은 죽음의 위험을 앞두고 그의 친구에게 구두로 유언장을 전한다. " 첫째, 우리는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당신 얘기를 안 한 적이 없었다고, 그건 자네가 증인이잖아. 둘째,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했다고. 셋째, 비록 짧았지만 당신과 함께 살았던 그 행복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 어떤 괴로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사랑은 환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초월의 힘이라는 얘기다. 어떤 환멸도 우린 사랑으로, 사랑이 없다면 사랑에 대한 추억만으로도 우린 능히 견뎌낸다.

정체성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민음사刊)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샹탈은 사랑을 잃어버린 자, 희망을 상실한 자의 심정을 참담하게 고백한다. 샹탈은 자신의 아이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독백한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경멸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죽음이 세계를 경멸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마음껏 경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학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분노의 눈을 부라리는 일이리라. 그러나 비참한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도 프랑클은 세상에 대한 우의를 버리지 않는다. 그에겐 사랑이, 그 어떤 권력도 짓밟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학작품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한 체험은, 이 세상 어떤 권력도 그대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그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옹색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며 의연하게 견디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프랑클은 말한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타인의 눈은 살아있다. 살아서 그를 위로하고 현재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 집요한 사랑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는 고통의 운명을 견디고 초월해 간다. 그 초월의 기록은 눈물겹다.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그 어떤 종교서적보다 빅토르 프랑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감동적인 어조로 사랑을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양연화(花樣年華)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과거'는 흘러 가버린 시간이다. 그러나 상처의 시간이 나무의 옹이를 만들 듯 모든 과거가 흘러 가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과거는 상처에 고여, 밀봉된 앙코르와트의 석벽의 구멍에 틀어박혀 부글거린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상처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웠던 한때를 본다. 상처이기도 하고 쾌감이기도 한 상처의 기억들. 나르시시스트들은 찌르는 상처 속에서 야릇한 쾌감을 얻는다. 그는 본질적으로 '아파하면서 즐겨하는' 매조히스트다. 고통과 쾌락의 발원지인 상처는 매조히스트들의 성채(城砦)다.

<2046>의 주선생, 양조위는 노래한다. 너(수리첸-장만옥)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라고. 그는 과거의 성채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는다. 어떤 사랑도 다시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양조위는 내 유일한 사랑이 너였음을 웅변한다. 너 없는 어떤 행복도 설계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선언이다. 그것은 나를 버린 너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하다. 어떤 사랑도 다시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얼음의 성채에 가두어 고스란히 떨고 있는 내 존재의 추위를 네게 보여줌으로써 너를 아프게 하고야 말겠다는 무의식적 전략이다. 그 무의식은 말한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는 행복하니?! 그러나 자학은 의외의 기쁨을 안겨다 준다. 내 추위 때문에 너 또한 떨고 있을지 모른다는 새디스트의 쾌감. (가학과 피학, 극단은 동전의 양면이다.)

양조위는 말한다. 나도 한때는 사랑을 소유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랑은 내게 아무런 언질도, 희망도 주지 않았다. 내게 돌아온 것은 쓰디쓴 패배였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내 살갗 위를 스쳐 가는 현재의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쾌락이다. 나는 오직 감각적인 현재만을 원한다. 나에겐 과거는 상처 위에 부글거린다. 나는 이미 '과거'가 충분하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떤 사랑도 '과거'가 되길 원치 않는다. 바이 링(장쯔이)양, 나를 사랑하면 당신에게도 아픈 '과거'가 생겨. 나는 당신의 상처를 원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제발 스쳐 지나가 줘. 더구나 당신은 고급 콜걸, 직업적 마인드를 최대한 살려 쿨하게 내 몸뚱이를 스쳐 지나가 줘. 내 몸뚱이를 몸뚱이로만 읽어 줘. 사랑은 타이밍이라구, 내가 당신을 좀더 일찍 만났다면 문제는 달라졌겠지. 하지만 지금 나의 사랑은 과거에 있고 몸뚱이는 현재에 있지. 내 몸뚱아리로부터 어떤 형이상학도 기대하지 말아줘.

그러나 또 하나의 수리첸(공리)에게는 상처의 과거가 있다. 그녀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과거에 있다. 수리첸의 몸뚱이를 가져도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 그녀는 결핍, 그 자체이다. 무엇인가가 결핍된 수리첸의 몸뚱아리를 가져야 하는 양조위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그는 자신의 쿨한 정체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서 벗어나면 내게로 돌아 오라'고. 하지만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과거를 잊기 위해 주선생, 양조위는 미래 소설을 쓴다. 텍스트 속에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열차를 탄다. 그러나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한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열차는 기억을 되찾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과거를 떨치기 위한 수단이다. 기차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인조인간이다. 인조인간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나는 어떤 사랑도 않겠다, 나는 과거의 성채 속에서만 머무르겠다'는 주선생이 욕망이 선택한 전략적 소재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몸이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이 없는 몸,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몸뚱이만의 사람, 즉 인조인간일 뿐이라는 주선생의 쾌락주의 앞에서 어떤 설교도 먹히지 않는다. 그는 이미 폐허다. 어떤 사랑도 자랄 수 없는 불모다. 열차는 폐허와 불모의 공간이다. 망각의 열정으로 열차는 달린다.

그가 폐허이면 폐허일수록, 그가 불모이면 불모일수록 주선생은 아름답다. 그의 아름다움을 안스럽게 지켜보는 바이 링은 아프다. 가슴이 미어진다. 불모인 너를 갖고 싶어, 폐허인 너를 안아주고 싶어, 라고 바이 링의 모성애는 말한다. 하지만 주선생은 그녀의 품을 벗어나는 못된 아이다. 불모는 불모를 낳고 폐허는 폐허를 낳는다. 폐허인 주선생은 불모인 바이 링을 낳는다. 이 악연의 굴레를 끊는 길은 과거의 성채를 허물고 주선생의 영하의 심장에서 꽁꽁 얼어붙은 사랑을 끌어내는 일이다. 현재의 사랑을 사랑으로서 수락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 과거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아픔을 감당하겠는가. 내 과거 속의 썩지 않는 불후의 사랑을 어떻게 시간의 강물 위에 흘려 보내겠는가. 화양연화, 내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절, 그 찬란했던 한 때를 강물 위에 방생(放生)해야 하는 아픔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오직 내 처음의 사랑은 고통스런 기억의 성채에서만 가능한 것. 방생은, 망각은 또 하나의 배신이다. 그것은 현재를 얻는 대신 과거를 버리는 배반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사랑을 수락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이 말하듯 사랑은 늘 타이밍이 문제다. 늘 어긋나고야마는 사랑, 어떤 이에게 사랑은 이르게 오지만 어떤 이에게 사랑은 더디게 온다. 또 어떤 이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글 때 어떤 이는 마음의 새벽을 맞는다. 호시절이 호시절을 만나 알콩달콩하기가 왜 이리 힘든가. 모든 사랑이 현재 위에 꽃피기가 왜 이리 어려운가. <2046>은 과거에 얽매인 텍스트다. 그것은 현재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아픈 이여. 현재를 살아라. 모든 사랑은 현재의 사랑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아름다워 - [할인행사]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사실은 허구보다 항상 위대한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창 자신의 미모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딸이 엄마A에게 묻는다. "엄마 나 이뻐. 사실대로 말해 줘." 엄마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마음먹고 딸에게 답한다. "너의 두 눈은 비대칭인데다 대한민국 평균인의 눈보다 그 크기가 현저하게 작다. 쉽게 말해서 '새우눈'이지, 코는 약간 정면을 향하여 들렸는데 그런 코를 일러 '들창코'라 한단다. 게다가 너의 입술을 보렴. 상당히 두껍지 않니? 그 끝은 밑으로 처져 있고 말이야. 턱이나 뺨 등의 선은 매끄럽지 못하고 각져 있지. 또 너의 피부는 매끄럽지 못한데다 군데군데 잡티가 있지 않니.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너의 얼굴은 평균 이하, 점수로 치면 대략 40점 정도라고 결론지을 수 있단다."

 다음은 같은 질문에 엄마 B의 답이다. "우리 딸보고 누가 밉다고 그러니? 그런 사람 있음 나와 보라고 그래. 세상에 내 딸 미모보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장님이야, 장님! 우리 딸 미모만큼 돼 보라구 해봐."

 냉정하게 따져서 엄마 A는 사실을, 엄마 B는 거짓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한 엄마A의 말에 딸은 기분이 우울하다. 왠지 엄마가 야속하다. 엄마가 그럴 수가 있어. 엄마 혹시 계모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엄마B의 말을 들은 딸은 엄마의 말이 사실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다. 역시 우리 엄마가 최고다.

  어떤 현상이 객관적 상황과 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거짓'이라 한다. 상식적으로 사실은 거짓보다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 거짓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거짓이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정과 사랑이 담긴 '진실'도 있는 법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간 어버지 귀도는 아들 조슈아에게 전쟁을 게임이라고 속인다. 순진한 아들은 전쟁을 1,000점을 먼저 따면 1등상으로 탱크를 받게 되는 게임이라고 믿는다. 아들 조슈아는 1,000점을 따기 위해 숨바꼭질 게임에서 독일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끝까지 숨는다. 이 영화에서 아들을 살린 것은 아버지의 '거짓말'이었다. 만약 사실을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A가 딸에게 사실을 말했을 때 딸이 슬픔과 분노를 느낄 수 있듯, '사실'은 어린 조슈아를 절망과 낙담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진실'은 어린 조슈아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생명을 열어주는 거짓으로서의 진실, 바로 그것이 예술은 아닐까.

  처녀가 아이를 낳았고,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종교, 전쟁을 게임이라고 말하는 영화, 물에 빠진 심청이가 왕비가 되었다는 소설, 이 모두가 허구요 가상이다.(물론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소설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허구와 가상에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힘이 있다.

  과학자나 수사관이나 기자처럼 사실을 왜곡됨 없이 밝히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만이 중시되는 세상은 '멋'이 없다. 과장도 있고 엄살도 있고, 때로는 그럴 싸한 왜곡도 있는 세상이 오히려 살만하지 않을까. 세상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감독 : 로베르토베니니 
 
감독 : 로베르토베니니
주연 :  로베르토베니니, 니콜레타브라시, 조르지오깐따리니
제작 : 1997 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ORLORN LABOUR-TRAM
"Music For Paul Auster"에
수록된 음악이다.

이 노래. 폴오스터의 소설 <우연의 음악>과 닮아 있다.
좋다, 흐린 날의 창을 바라보며 한없이 빠져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