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할인행사]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과거'는 흘러 가버린 시간이다. 그러나 상처의 시간이 나무의 옹이를 만들 듯 모든 과거가 흘러 가버리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과거는 상처에 고여, 밀봉된 앙코르와트의 석벽의 구멍에 틀어박혀 부글거린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상처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웠던 한때를 본다. 상처이기도 하고 쾌감이기도 한 상처의 기억들. 나르시시스트들은 찌르는 상처 속에서 야릇한 쾌감을 얻는다. 그는 본질적으로 '아파하면서 즐겨하는' 매조히스트다. 고통과 쾌락의 발원지인 상처는 매조히스트들의 성채(城砦)다.

<2046>의 주선생, 양조위는 노래한다. 너(수리첸-장만옥)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라고. 그는 과거의 성채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는다. 어떤 사랑도 다시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양조위는 내 유일한 사랑이 너였음을 웅변한다. 너 없는 어떤 행복도 설계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선언이다. 그것은 나를 버린 너에 대한 앙갚음이기도 하다. 어떤 사랑도 다시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얼음의 성채에 가두어 고스란히 떨고 있는 내 존재의 추위를 네게 보여줌으로써 너를 아프게 하고야 말겠다는 무의식적 전략이다. 그 무의식은 말한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너는 행복하니?! 그러나 자학은 의외의 기쁨을 안겨다 준다. 내 추위 때문에 너 또한 떨고 있을지 모른다는 새디스트의 쾌감. (가학과 피학, 극단은 동전의 양면이다.)

양조위는 말한다. 나도 한때는 사랑을 소유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랑은 내게 아무런 언질도, 희망도 주지 않았다. 내게 돌아온 것은 쓰디쓴 패배였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내 살갗 위를 스쳐 가는 현재의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쾌락이다. 나는 오직 감각적인 현재만을 원한다. 나에겐 과거는 상처 위에 부글거린다. 나는 이미 '과거'가 충분하다. 그러니 더 이상 어떤 사랑도 '과거'가 되길 원치 않는다. 바이 링(장쯔이)양, 나를 사랑하면 당신에게도 아픈 '과거'가 생겨. 나는 당신의 상처를 원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제발 스쳐 지나가 줘. 더구나 당신은 고급 콜걸, 직업적 마인드를 최대한 살려 쿨하게 내 몸뚱이를 스쳐 지나가 줘. 내 몸뚱이를 몸뚱이로만 읽어 줘. 사랑은 타이밍이라구, 내가 당신을 좀더 일찍 만났다면 문제는 달라졌겠지. 하지만 지금 나의 사랑은 과거에 있고 몸뚱이는 현재에 있지. 내 몸뚱아리로부터 어떤 형이상학도 기대하지 말아줘.

그러나 또 하나의 수리첸(공리)에게는 상처의 과거가 있다. 그녀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과거에 있다. 수리첸의 몸뚱이를 가져도 그녀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 그녀는 결핍, 그 자체이다. 무엇인가가 결핍된 수리첸의 몸뚱아리를 가져야 하는 양조위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그는 자신의 쿨한 정체성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서 벗어나면 내게로 돌아 오라'고. 하지만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과거를 잊기 위해 주선생, 양조위는 미래 소설을 쓴다. 텍스트 속에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열차를 탄다. 그러나 '속도는 망각의 열정에 비례한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열차는 기억을 되찾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과거를 떨치기 위한 수단이다. 기차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인조인간이다. 인조인간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나는 어떤 사랑도 않겠다, 나는 과거의 성채 속에서만 머무르겠다'는 주선생이 욕망이 선택한 전략적 소재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들의 몸이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이 없는 몸, 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몸뚱이만의 사람, 즉 인조인간일 뿐이라는 주선생의 쾌락주의 앞에서 어떤 설교도 먹히지 않는다. 그는 이미 폐허다. 어떤 사랑도 자랄 수 없는 불모다. 열차는 폐허와 불모의 공간이다. 망각의 열정으로 열차는 달린다.

그가 폐허이면 폐허일수록, 그가 불모이면 불모일수록 주선생은 아름답다. 그의 아름다움을 안스럽게 지켜보는 바이 링은 아프다. 가슴이 미어진다. 불모인 너를 갖고 싶어, 폐허인 너를 안아주고 싶어, 라고 바이 링의 모성애는 말한다. 하지만 주선생은 그녀의 품을 벗어나는 못된 아이다. 불모는 불모를 낳고 폐허는 폐허를 낳는다. 폐허인 주선생은 불모인 바이 링을 낳는다. 이 악연의 굴레를 끊는 길은 과거의 성채를 허물고 주선생의 영하의 심장에서 꽁꽁 얼어붙은 사랑을 끌어내는 일이다. 현재의 사랑을 사랑으로서 수락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 과거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아픔을 감당하겠는가. 내 과거 속의 썩지 않는 불후의 사랑을 어떻게 시간의 강물 위에 흘려 보내겠는가. 화양연화, 내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절, 그 찬란했던 한 때를 강물 위에 방생(放生)해야 하는 아픔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오직 내 처음의 사랑은 고통스런 기억의 성채에서만 가능한 것. 방생은, 망각은 또 하나의 배신이다. 그것은 현재를 얻는 대신 과거를 버리는 배반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사랑을 수락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이 말하듯 사랑은 늘 타이밍이 문제다. 늘 어긋나고야마는 사랑, 어떤 이에게 사랑은 이르게 오지만 어떤 이에게 사랑은 더디게 온다. 또 어떤 이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글 때 어떤 이는 마음의 새벽을 맞는다. 호시절이 호시절을 만나 알콩달콩하기가 왜 이리 힘든가. 모든 사랑이 현재 위에 꽃피기가 왜 이리 어려운가. <2046>은 과거에 얽매인 텍스트다. 그것은 현재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아픈 이여. 현재를 살아라. 모든 사랑은 현재의 사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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