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한 물은 오히려 독이다



 깨끗한 것은 더러워지기 십상이다.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순수가 있을까. 순수함은 그 순수만큼의 오염과 상처의 역사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함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이란 십중팔구 오염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리라. 지속될 수 없는, 언젠가는 오염과 맞닥뜨려야 할 순수의 운명 앞에서 우리가 심리적 안정을 누리기는 어렵다. 가령,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나치게 개결(介潔)한 사람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 앞에서 느긋한 감정을 지니기는 힘들다. 순수는 아무래도 우리를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불안하게 만든다.

 퇴폐와 불순은 우리를 느긋하게 만든다. 바닥까지 닿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는 안도감을 준다. 퇴폐와 불순은 타락과 오염에의 가능성보다는 정화에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진다. 퇴폐와 불순 앞에서 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불안하지는 않다.

 미셀투르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한뜻)이란 책에서 '깨끗한 물, 순수한 물'의 위험성을 역설한 바 있다. 어떤 오염도 찾을 수 없는 깨끗한 물은 몸 속에서 출혈을 야기한다고 한다. 차라리 적당히(지나치면 또한 독이다) 불순물이 섞인 물이 우리의 몸에 들어왔을 때,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독의 기능을 하지 않는단다. "순수한 물은 독극물처럼 유기체에 영향을 준다. 이런 물이 유기체에 흡수되었을 때, 피와 체액을 운반하는 광물이 함유된 염분은 모두 물에 침전된다. 왜냐하면 물은 피와 체액의 농도를 한층 묽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의 신장이 요소나 요산, 다른 독소를 걸러낼 수 없는 경우, 이 환자의 피에 섞여 있는 이런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물을 사용하는 것이 응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병리학적인 경우에 필요한 투석(透析)은 염분의 혈청치가 정상인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사망할 수도 있는 혈액의 칼슘과 포타슘의 유출을 목격할 것이다. 실제로 심장은 혈액에 함유된 칼슘과 포타슘의 균형으로 지속되는 전류에 의해 박동한다. 맑은 물의 흡수는 위출혈이나 장출혈, 피부출혈을 유발할 수도 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미셀투르니에의 이런 대목에 와서는 무색해진다. 투르니에는 계속 말한다, "순수성으로 인한 육체적 피해는 강박관념이나 역사 속에서 야기시켰던 무수한 죄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순수성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혀 인간은 자기 주위에 죽음과 파멸을 뿌린다. 종교적 정결 의식이나 정치적 정화, 종족의 순수성 보호, 천사의 모습에 대한 반육체적 탐구와 같은 탈선은 모두 무수한 살육과 불행으로 귀착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순수한 혈통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을 개스실로 보냈고, 유대인의 배타적인 시오니즘이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을 난민으로 만들었는지. 역사는 순수에 대한 옹호, 근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은 테러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되었던가를 말해준다. 클릭 한 번으로 이역의 문화가 안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늘날, 내 것에 대한 배타적 집착은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닌지.

 육체에 대한 순수한 물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지만 정작으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배타성을 우려하고 있는 미셀 투르니에의 글쓰기는 비장한 계몽적 어조를 빌리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책은 부담 없이 읽힌다. 그러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미셀 투르니에를 심각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북라인)에서 투르니에는 사랑의 대립쌍으로서 무관심을 꼽지 않고 우정을 꼽는다. 사랑의 반대말이 우정이란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도 얼마든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랑은 경멸과 증오의 감정에도 아랑곳없이 싹틀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는 우정은 없다. 경멸은 우정의 끝이다. " 투르니에의 독서는 이렇게 산뜻한 깨달음을 준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도 그를 읽는 하나의 독법일 수 있겠다. "우정은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지지만 사랑은 점점 더 약해진다"라는 투르니에의 구절에 이렇게 토를 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시간의 경과에 의해 더욱 싶어지는 사랑도 있다. 정념의 사랑이 식어갈수록 신뢰의 믿음이 깊어 가는 그런 사랑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사랑처럼 얼마든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웃음과 눈물, 목욕과 샤워, 공포와 번민, 우측과 좌측 등 세계를 무수한 대립쌍으로 나누고 신선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투르니에의 이분법은 재미있다. 그러나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 이분법의 체계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정과 사랑을 칼금 긋듯 양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좋은 사랑은 어느 정도의 우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어떤 우정은 사랑을 향해서도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닐까. 사랑과 우정의 고유한 영토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념이 개입되지 않는 사랑, 섹스가 개입되지 않는 사랑이 우정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없는 정념이 개입되면 자연 관계는 쿨해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투정이 늘고 불평이 늘고, 과도한 것을 요구하고, 긁고 간섭하고 따지고 들기 십상이다. 심지어는 얼굴에 손톱 자국까지 남기기도 한다. 섹스나 정념에 따르는 부작용들이다. 식사를 하듯 쿨하게 섹스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과도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도 왠지 칙칙해 보인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중용은 언제나 멀게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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