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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부의 수수께끼
정성호 / 사람과사람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개방과 구속, 새로운 가족의 원리
1. 문지방엔 앉지 말라?
해석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는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텍스트도 있다. 계몽의 의지를 가진 작가들은 대체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미학적·조형적 관심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앞설 때, 중층적 의미 구조는 미덕이기에 앞서 명쾌한 커뮤니케이션을 저해하는 소위 '소음(noise)'에 다름 아니다. 무릇 理性의 논리란 명쾌하고 삽상하게 구획된 의미를 기반으로 제 스스로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의미란 칸을 나누고 구획하는, 구분의 원리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선과 악, 여성과 남성, 육체와 정신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자기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선이냐 악이냐는 등의 2항 대립에 의해서 코스모스를 정돈해 가는 이분법적 사고는 음양이론의 원리에서부터 디지털형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장구하다.
그러나 언제나 중간은 있는 법,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닌 것, 검은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것,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그런 어중간한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런 어중간한 것들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무지개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언어는 구분하지만 현실은 언어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혼돈스럽게 존재한다. 어떤 무지개도 일곱 가지 색깔로 명쾌하게 칸막이지워지지 않는다. '빨주노초파남보'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언어일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언어 속에 존재할 뿐이다. 언어는 실체가 아니라 욕망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카오스의 세계를 명확한 질서의 공간으로 바꾸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세세한 의미의 차이- 뉘앙스를 발전시켜 왔다고 해도 언어로서 분류해낼 수 없는 영역들이 반드시 세상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류학자 터너는 말한다. "경계성, 혹은 경계[문지방, threshold]에 있는 인간의 속성은 예외 없이 애매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사람들의 자세는 평소 상태나 지위를 문화적 공간에 설정하는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그것에서 빠져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도 있지 않으며, 저쪽에도 있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애매하고 부정확한 속성은 사회적, 문화적 이행을 의례화하고 있는 많은 사회에서는 다양한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경계성은 종종 죽음이나 자궁, 보이지 않는 것, 암흑, 암수동체, 황야, 그리고 일식이나 월식에 비유된다."라고.(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터부의 수수께끼』, 야마우치 히사시에서 재인용)
경계[문지방]에 있는 것들은 동일성의 체계와 질서의 세계를 혼란시키고 교란한다. 이런 까닭에 '분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박해는 시작된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저녁의 황혼 무렵은 온갖 도깨비가 우글거리는 시간이 된다. 발리섬에서는 황혼녘이면 악령이 지상을 배회한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던가. 모든 것이 혼연일체로 뒤죽박죽이 된 카오스는, 각기 개체로 명확히 분리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 어떤 것을 연속하는 그 유사물에서 잘라내서 차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류(分類)의 논리다. 이렇게 해서 다른 것으로부터 절단된 개체는 그 자체로서의 고유성과 성스러움을 획득하게 된다. 성스러운 것에는 아무런 흠이나 결점이 없는 완전한 경우에 한해서 청정성(淸淨性)이 부여된다. 반대로 고유성이 불완전한 경우에는 불순하고 불결하다고 여겨진다. 즉, 다른 물체나 카테고리와 교차하고 혼재하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터부가 되는 것이다. 문지방은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곳이므로 분류의 체계를 위협하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다. 불순함을 성스러움으로 전화시키고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passage rite), 푸코가 말하는 감옥, 병원, 학교와 같은 감시의 기제들은 근대성이라고 하는 순수(?)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들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로서의 체계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경계[문지방]에 있는 자들을 따로 관리·통제하고, 가능하다면 기존의 체계에 편입시키기 위한 기제, 거기엔 막대한 고통의 비용이 지불된다.
2. 문지방에 앉은 자, 너의 정체를 밝혀라?
더러움(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에 대한 혐오의 이유가 악취나 구역질과 같은 生理的 차원에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물론 위생학적·생리적 차원에서의 더러움 대한 규정이 곧바로 더러움을 혐오해야 한다는 당위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생리적인 차원의 설명도 때로는 상당 부분을 문화적인 면과 연관 하에서 온전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가령 함석을 손톱으로 긋는 소리를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혐오할 수 있고, 그 소리에 구역질까지 느끼는 생리적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식인의 풍습(cannibalism), 은 어떤 특정 문화권에서만 혐오의 대상인 것이지, 식인의 풍습 자체가 종(種)으로서의 인류 공통의 구역질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일견 본능적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구역질의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상당 부분 문화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규정된 것일 때가 허다하다. (食人의 풍습, 그 자체가 도덕적 보편성을 가지느냐는 도덕론자의 항변은 범주 착각의 오류이다. 구역질이 선천적인 것이냐 문화적인 것이냐, 아니면 일정 부분 선천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일정 부분 문화적인 것이냐를 따지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나 냉정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막연한 혐오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혐오는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상·체질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혐오의 대상쪽에서 볼 때는 존재의 사활(死活)이 걸린 생존권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두움은 존재에겐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어두움을 상징하는 '검정색'마저도 하나의 위협일 수는 없다. 검정색이 하나의 위협이라는 가정을 반성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종차별이라는 예고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물론 건강한 살은 희고, 시체는 거무튀튀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연관된다고 할 때, 억압의 상징 체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검정색으로부터 '부패와 죽음'이라는 불필요하게 덧생긴 잉여의 의미를 걷어내고 문지방으로부터 오염의 의미를 걷어내는 작업은 비로소 억압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대체적으로 무엇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양성소유자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획된 분류체계 속에서는 극심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성서의 「레위기」는 짐승이면서 새처럼 하늘을 나는 박쥐, 새이면서도 날지 못하는 타조, 육지와 수중에서 동시에 생활하는 개구리, 포유류이면서도 수중 생활을 하고 알을 낳는 오리너구리 등 애매한 양의적 경계상의 동물들이 터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지방에 앉지 말라'는 말은 한국인의 것만이 아닌 듯싶다. 백인이면 백인이고 흑인이면 흑인이어야지 혼혈아는 불순하다는 관념도 이런 터부의 논리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체면 고체고 액체면 액체이어야지 겔(gel)상태의 끈적끈적함, 느물느물거림. 미끈미끈함, 질척질척함은 기분 나쁘다. 물컹한 것을 밟을 때의 불쾌감은 어떤 한 개인의 독점적인 느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쪽에서 돌이 날아왔다>라는 어떤 이의 시구는 문지방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혐오의 감정을 재치있게 형상화해주고 있다. 문지방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우린 이렇게 주문한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라고. 그러나 이런 주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억압이다. <너의 정체를 밝히라>는 주문은 실상, <너의 정체를 기존의 분류 체계의 틀에 끼워 맞추어 보아라>라는 주문과 다르지 않다.
하수구에서 악취를 내며 썩어 가는 오물이 아닐진대, 오물은 더러워서 오물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분류 체계를 위협함으로써 오물이다. 오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체계가 존재한다. 질서가 부적절한 요소를 거부하는 의미가 있는 한, 오물은 사물의 체계적 질서와 분류들의 부산물이다. 체계가 체계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부여받기 위해선 단호하게 어떤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이지 문화가 아니다. 개념과 언어의 칸막이로써 세계를 질서 있게 틀지우려는 인간의 기획은 그러나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을 질식시킨다. 이럴 때, 세계의 모든 문지방과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은 숨통이 막힌다. 분류되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분류되길 소망하는 것들은 버겁다. 선택의 자유는 엄격히 말하자면 형용모순이다. '선택의 자유'는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자유다. 모든 선발(選拔)과 보상(報償)의 체제는 기존의 체계를 위협하지 않는 것들을 선택해서 상과 푸짐한 부상(副賞)을 내림으로써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힘이란 무엇인가? 이것저것으로 분류되지 않는, 시비와 곡직을 분명히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곧 뉘앙스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에 다름 아니던가. 더구나 내 안의 욕망은 말한다. 나는 너와 섞이고 싶다. N극은 N극을 배척하기 마련. 만약 내가 너와 같다면 나는 너와 섞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너와 섞이길 갈망한다. 문명은 분리해내지만 욕망은 섞이길 갈망한다. 여기에서 대체 어떤 화해가 가능할 것인가.
4. 새로운 가족주의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는 우리들의 분류법이 대단히 폐쇄적인 체계임을 감지한다. 어떤 새로운 경험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미 형성된 체계를 수정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경험이 과거의 것과 일치되면 될수록 우리들은 스스로 가정한 체계를 더욱 진리로 확신할 수 있다. 기존의 체계와 맞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불유쾌한 사실들이 있으면 이미 설정된 가설들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우리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공동체의 표준화된 공적 가치들의 의미로서 문화는 많은 개인들의 경험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미리 어떤 기본 범주, 다시 말해서 관념과 가치가 질서정연한 적극적 패턴을 제공한다. 그것은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범주는 더욱 경직되어 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가설 체계를 자유롭게 바꾸거나 또는 안 바꿀 수 있다.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나 문화적 범주는 공적인 것이다. 그 범주들을 바꾸는 일은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례적인 형식의 도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모든 문화는 자신의 전제 조건에 공공연하게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분류되지 않는 것들은 소심하지만 바로 그 소심함이 그들의 내면에 폭력적인 에너지를 축적시킨다. 이례적인 것은 그러므로 위험하다. 그러므로 더욱더 이례적인 것들은 경계와 금기의 대상이 된다. 지시적 의미로서의 문지방에 걸터앉는 행위는 이제 금기의 목록에서 해금되었지만 상징적 의미로서의 문지방은 여전히 터부시되고 위험시되고 있다. 비웃을 수만 있다면 경계와 칸막이의 체계를 비웃자. 시의 문법은 일탈의 문법이니 시의 어법을 빌려도 좋겠다. 니이체가 시로써 말하는 방식은 썩 적절한 방식이지 않은가. 그의 시는 디오니소스적인 어법에 있지 않다. 디오니소스의 어법과 아폴론의 어법이 니이체의 텍스트 안에서 근사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서사적 거리와 서정적 계기라는 일견 상반되는 요소들을 균형있게 직조해내는 그의 문체는 기존의 어투와는 사뭇 다르다. 니이체의 어투는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제 내면의 필연성에 의존한다. 니이체의 실존의 무게가 고스란히 얹혀진 말하기의 방식이 곧 그의 시다. 내 목소리의 개체성을 중화시켜 버리는 마이크가 있다면 그 마이크를 던져 버리고 차라리 목이 쉴지언정 육성(肉聲)으로 말하라. 그 육성이 시가 아닌가. 그러나 시가 내 목소리의 개체성을 중화시켜 버리는 또 하나의 '마이크'가 된다면 이제는 다시 시를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버리지 못한다면 최소한 갱신이라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르란 무릇 내면의 필연성이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이 기존의 장르 구분 체계에 적절하게 들어맞을 이유가 없다. 장르의 순수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얼마든지 다종다양한 '진지한 내면'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젊은 철학자 김용호의 말대로 <동질성 회복>이라는 구호도 버려야 할 유클리드 지정학의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획일화와 표준화는 항상 <중앙>을 전제로 하게 마련이며 중앙 집권적 권력에의 흡수 통합을 수반한다." 김용호가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지적해내고 있듯(민음사,『몸으로 말한다』), "오늘날 세계는 다양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호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가면서 통일을 이루려면 <동질성 회복>이 아니라 <이질성 포용>이 새로운 구호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젊은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일치 욕구는 통상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권력욕과 함께 나타난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코드에 강제로 편입된 사람들을 짝사랑하면서 일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표준화는 월등한 권력에 의한 획일적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수립한다. 이러한 방식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소수집단이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획일적 표준 자체가 숱한 갈등의 비용을 유발하는 비효율적인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체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급격하게 구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때 새로움은 안정을 해치는 위협요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실험은 엄격하게 말해서 구질서를 무너뜨리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질서를 반성하게 하고 그것을 안으로부터 열게 한다. 젊은 철학자의 표현을 여기서 다시 빌려 보자. " 한편으로는 개성을 포용할 정도의 개방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의존관계를 견지할 유대와 상호 구속, 그것이··· 새로운 가족의 두 원리이다. 이율배반적인 두 관계 모두를 소화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보기 힘든 실험인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내 안으로 포섭하지도 말며, 네 사랑은 너를 방임케 하기 위한 것이다는 자유방임주의도 아닌 성숙한 간섭의 원리가 '새로운 가족주의의 이념적 골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