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의 수수께끼
정성호 / 사람과사람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개방과 구속, 새로운 가족의 원리


1. 문지방엔 앉지 말라?

해석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는 텍스트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텍스트도 있다. 계몽의 의지를 가진 작가들은 대체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미학적·조형적 관심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앞설 때, 중층적 의미 구조는 미덕이기에 앞서 명쾌한 커뮤니케이션을 저해하는 소위 '소음(noise)'에 다름 아니다. 무릇 理性의 논리란 명쾌하고 삽상하게 구획된 의미를 기반으로 제 스스로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의미란 칸을 나누고 구획하는, 구분의 원리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 선과 악, 여성과 남성, 육체와 정신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자기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선이냐 악이냐는 등의 2항 대립에 의해서 코스모스를 정돈해 가는 이분법적 사고는 음양이론의 원리에서부터 디지털형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가 장구하다.


그러나 언제나 중간은 있는 법,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Yes도 아니고 No도 아닌 것, 검은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닌 것,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 그런 어중간한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런 어중간한 것들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무지개의 색깔을 '빨주노초파남보'로 언어는 구분하지만 현실은 언어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혼돈스럽게 존재한다. 어떤 무지개도 일곱 가지 색깔로 명쾌하게 칸막이지워지지 않는다. '빨주노초파남보'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언어일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방식'으로 언어 속에 존재할 뿐이다. 언어는 실체가 아니라 욕망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카오스의 세계를 명확한 질서의 공간으로 바꾸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세세한 의미의 차이- 뉘앙스를 발전시켜 왔다고 해도 언어로서 분류해낼 수 없는 영역들이 반드시 세상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류학자 터너는 말한다. "경계성, 혹은 경계[문지방, threshold]에 있는 인간의 속성은 예외 없이 애매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사람들의 자세는 평소 상태나 지위를 문화적 공간에 설정하는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그것에서 빠져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도 있지 않으며, 저쪽에도 있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애매하고 부정확한 속성은 사회적, 문화적 이행을 의례화하고 있는 많은 사회에서는 다양한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경계성은 종종 죽음이나 자궁, 보이지 않는 것, 암흑, 암수동체, 황야, 그리고 일식이나 월식에 비유된다."라고.(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터부의 수수께끼』, 야마우치 히사시에서 재인용)


경계[문지방]에 있는 것들은 동일성의 체계와 질서의 세계를 혼란시키고 교란한다. 이런 까닭에 '분류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박해는 시작된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저녁의 황혼 무렵은 온갖 도깨비가 우글거리는 시간이 된다. 발리섬에서는 황혼녘이면 악령이 지상을 배회한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던가. 모든 것이 혼연일체로 뒤죽박죽이 된 카오스는, 각기 개체로 명확히 분리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 어떤 것을 연속하는 그 유사물에서 잘라내서 차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류(分類)의 논리다. 이렇게 해서 다른 것으로부터 절단된 개체는 그 자체로서의 고유성과 성스러움을 획득하게 된다. 성스러운 것에는 아무런 흠이나 결점이 없는 완전한 경우에 한해서 청정성(淸淨性)이 부여된다. 반대로 고유성이 불완전한 경우에는 불순하고 불결하다고 여겨진다. 즉, 다른 물체나 카테고리와 교차하고 혼재하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로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터부가 되는 것이다. 문지방은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곳이므로 분류의 체계를 위협하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다. 불순함을 성스러움으로 전화시키고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passage rite), 푸코가 말하는 감옥, 병원, 학교와 같은 감시의 기제들은 근대성이라고 하는 순수(?)의 세계를 위협하는 것들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통과의례로서의 체계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 경계[문지방]에 있는 자들을 따로 관리·통제하고, 가능하다면 기존의 체계에 편입시키기 위한 기제, 거기엔 막대한 고통의 비용이 지불된다.


2. 문지방에 앉은 자, 너의 정체를 밝혀라?

더러움(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에 대한 혐오의 이유가 악취나 구역질과 같은 生理的 차원에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물론 위생학적·생리적 차원에서의 더러움 대한 규정이 곧바로 더러움을 혐오해야 한다는 당위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생리적인 차원의 설명도 때로는 상당 부분을 문화적인 면과 연관 하에서 온전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가령 함석을 손톱으로 긋는 소리를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혐오할 수 있고, 그 소리에 구역질까지 느끼는 생리적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식인의 풍습(cannibalism), 은 어떤 특정 문화권에서만 혐오의 대상인 것이지, 식인의 풍습 자체가 종(種)으로서의 인류 공통의 구역질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일견 본능적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구역질의 시스템'도 따지고 보면 상당 부분 문화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규정된 것일 때가 허다하다. (食人의 풍습, 그 자체가 도덕적 보편성을 가지느냐는 도덕론자의 항변은 범주 착각의 오류이다. 구역질이 선천적인 것이냐 문화적인 것이냐, 아니면 일정 부분 선천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일정 부분 문화적인 것이냐를 따지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우리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나 냉정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막연한 혐오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혐오는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상·체질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혐오의 대상쪽에서 볼 때는 존재의 사활(死活)이 걸린 생존권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두움은 존재에겐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어두움을 상징하는 '검정색'마저도 하나의 위협일 수는 없다. 검정색이 하나의 위협이라는 가정을 반성없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종차별이라는 예고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물론 건강한 살은 희고, 시체는 거무튀튀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검정색이 부패와 죽음과 연관된다고 할 때, 억압의 상징 체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 검정색으로부터 '부패와 죽음'이라는 불필요하게 덧생긴 잉여의 의미를 걷어내고 문지방으로부터 오염의 의미를 걷어내는 작업은 비로소 억압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대체적으로 무엇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양성소유자는 남성과 여성으로 구획된 분류체계 속에서는 극심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성서의 「레위기」는 짐승이면서 새처럼 하늘을 나는 박쥐, 새이면서도 날지 못하는 타조, 육지와 수중에서 동시에 생활하는 개구리, 포유류이면서도 수중 생활을 하고 알을 낳는 오리너구리 등 애매한 양의적 경계상의 동물들이 터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지방에 앉지 말라'는 말은 한국인의 것만이 아닌 듯싶다. 백인이면 백인이고 흑인이면 흑인이어야지 혼혈아는 불순하다는 관념도 이런 터부의 논리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체면 고체고 액체면 액체이어야지 겔(gel)상태의 끈적끈적함, 느물느물거림. 미끈미끈함, 질척질척함은 기분 나쁘다. 물컹한 것을 밟을 때의 불쾌감은 어떤 한 개인의 독점적인 느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쪽에서 돌이 날아왔다>라는 어떤 이의 시구는 문지방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혐오의 감정을 재치있게 형상화해주고 있다. 문지방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우린 이렇게 주문한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라고. 그러나 이런 주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억압이다. <너의 정체를 밝히라>는 주문은 실상, <너의 정체를 기존의 분류 체계의 틀에 끼워 맞추어 보아라>라는 주문과 다르지 않다.


하수구에서 악취를 내며 썩어 가는 오물이 아닐진대, 오물은 더러워서 오물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분류 체계를 위협함으로써 오물이다. 오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체계가 존재한다. 질서가 부적절한 요소를 거부하는 의미가 있는 한, 오물은 사물의 체계적 질서와 분류들의 부산물이다. 체계가 체계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부여받기 위해선 단호하게 어떤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이지 문화가 아니다. 개념과 언어의 칸막이로써 세계를 질서 있게 틀지우려는 인간의 기획은 그러나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을 질식시킨다. 이럴 때, 세계의 모든 문지방과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은 숨통이 막힌다. 분류되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분류되길 소망하는 것들은 버겁다. 선택의 자유는 엄격히 말하자면 형용모순이다. '선택의 자유'는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자유다. 모든 선발(選拔)과 보상(報償)의 체제는 기존의 체계를 위협하지 않는 것들을 선택해서 상과 푸짐한 부상(副賞)을 내림으로써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힘이란 무엇인가? 이것저것으로 분류되지 않는, 시비와 곡직을 분명히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곧 뉘앙스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에 다름 아니던가. 더구나 내 안의 욕망은 말한다. 나는 너와 섞이고 싶다. N극은 N극을 배척하기 마련. 만약 내가 너와 같다면 나는 너와 섞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너와 섞이길 갈망한다. 문명은 분리해내지만 욕망은 섞이길 갈망한다. 여기에서 대체 어떤 화해가 가능할 것인가.


4. 새로운 가족주의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는 우리들의 분류법이 대단히 폐쇄적인 체계임을 감지한다. 어떤 새로운 경험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미 형성된 체계를 수정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경험이 과거의 것과 일치되면 될수록 우리들은 스스로 가정한 체계를 더욱 진리로 확신할 수 있다. 기존의 체계와 맞아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불유쾌한 사실들이 있으면 이미 설정된 가설들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우리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공동체의 표준화된 공적 가치들의 의미로서 문화는 많은 개인들의 경험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미리 어떤 기본 범주, 다시 말해서 관념과 가치가 질서정연한 적극적 패턴을 제공한다. 그것은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범주는 더욱 경직되어 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가설 체계를 자유롭게 바꾸거나 또는 안 바꿀 수 있다.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나 문화적 범주는 공적인 것이다. 그 범주들을 바꾸는 일은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례적인 형식의 도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모든 문화는 자신의 전제 조건에 공공연하게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분류되지 않는 것들은 소심하지만 바로 그 소심함이 그들의 내면에 폭력적인 에너지를 축적시킨다. 이례적인 것은 그러므로 위험하다. 그러므로 더욱더 이례적인 것들은 경계와 금기의 대상이 된다. 지시적 의미로서의 문지방에 걸터앉는 행위는 이제 금기의 목록에서 해금되었지만 상징적 의미로서의 문지방은 여전히 터부시되고 위험시되고 있다. 비웃을 수만 있다면 경계와 칸막이의 체계를 비웃자. 시의 문법은 일탈의 문법이니 시의 어법을 빌려도 좋겠다. 니이체가 시로써 말하는 방식은 썩 적절한 방식이지 않은가. 그의 시는 디오니소스적인 어법에 있지 않다. 디오니소스의 어법과 아폴론의 어법이 니이체의 텍스트 안에서 근사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서사적 거리와 서정적 계기라는 일견 상반되는 요소들을 균형있게 직조해내는 그의 문체는 기존의 어투와는 사뭇 다르다. 니이체의 어투는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제 내면의 필연성에 의존한다. 니이체의 실존의 무게가 고스란히 얹혀진 말하기의 방식이 곧 그의 시다. 내 목소리의 개체성을 중화시켜 버리는 마이크가 있다면 그 마이크를 던져 버리고 차라리 목이 쉴지언정 육성(肉聲)으로 말하라. 그 육성이 시가 아닌가. 그러나 시가 내 목소리의 개체성을 중화시켜 버리는 또 하나의 '마이크'가 된다면 이제는 다시 시를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버리지 못한다면 최소한 갱신이라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르란 무릇 내면의 필연성이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이 기존의 장르 구분 체계에 적절하게 들어맞을 이유가 없다. 장르의 순수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얼마든지 다종다양한 '진지한 내면'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젊은 철학자 김용호의 말대로 <동질성 회복>이라는 구호도 버려야 할 유클리드 지정학의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획일화와 표준화는 항상 <중앙>을 전제로 하게 마련이며 중앙 집권적 권력에의 흡수 통합을 수반한다." 김용호가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지적해내고 있듯(민음사,『몸으로 말한다』), "오늘날 세계는 다양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호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가면서 통일을 이루려면 <동질성 회복>이 아니라 <이질성 포용>이 새로운 구호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젊은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일치 욕구는 통상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권력욕과 함께 나타난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코드에 강제로 편입된 사람들을 짝사랑하면서 일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표준화는 월등한 권력에 의한 획일적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수립한다. 이러한 방식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소수집단이 부상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획일적 표준 자체가 숱한 갈등의 비용을 유발하는 비효율적인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체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급격하게 구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할 때 새로움은 안정을 해치는 위협요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실험은 엄격하게 말해서 구질서를 무너뜨리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질서를 반성하게 하고 그것을 안으로부터 열게 한다. 젊은 철학자의 표현을 여기서 다시 빌려 보자. " 한편으로는 개성을 포용할 정도의 개방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의존관계를 견지할 유대와 상호 구속, 그것이··· 새로운 가족의 두 원리이다. 이율배반적인 두 관계 모두를 소화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보기 힘든 실험인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내 안으로 포섭하지도 말며, 네 사랑은 너를 방임케 하기 위한 것이다는 자유방임주의도 아닌 성숙한 간섭의 원리가 '새로운 가족주의의 이념적 골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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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이야기
장일순 지음 / 다산글방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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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와 함께 해준 책


몇 번이나 달리기를 시도하다 그만 두기를 서너 차례. 대개 운동이란 하루라도 거르면 그 효과가 반감되는 법, 몸이 파김치가 되더라도 일단 달리고 보겠다는 기염에 찬 초발심이 아니라면 운동에의 각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용두사미 격으로 제 무기력한 속내를 드러내고야 만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이름하여 요요현상, 애초에 그렸던 이상적 육체는 꿈이고, 불어난 뱃살이 현실이 되고 만다.


대체 무엇 때문에 다이어트인가, 라고 물으면 대개는 건강 때문에, 라고 대답하지만 스포츠 센터를 기웃거려 보면 멀쩡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관절에 무리를 줄 수 있는 '과체중'들도 적지 않지만 대개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연세대 1학년 여대생 10명중 4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자 신입생 절반 이상이 운동으로 살을 빼고 있다고 한다. 이 학교 1학년 여학생 1천132명을 상대로 조사하여 발표한 '신입생의 건강에 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자 대학생들의 35.5%인 402명이 자신의 체격을 '비만'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대체 대한민국의 여대생으로 하여금 자신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정체는 무엇일까. 혹자는 그 혐의를 상업자본에 두고 있다. 패션산업, 광고산업, 언론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성이 없는 허구의 여성상이 이상적인 육체로 둔갑하면서 정상체중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너도 나도 깡마른 모델을 따라가기에 바쁜 것이 오늘날의 다이어트 열풍이라는 논리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다이어트 열풍이 여성이 살아가는 데 가장 효용 이 있는 무기가 몸과 외모인 우리사회의 문제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역시 일리 있는 통찰이다. 캐나다의 토론토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고, 성별을 기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야말로 바다 건너 먼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게 중에는 근사한 로맨스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룩한 아랫배와 로맨스는 어째 격이 맞지 않으니까. 잘 조율된 육체와 로맨스를 결합하는 것이 우리 대중문화의 어법이 아니던가.


그 동기야 어쨌든 도처에 달리기 열풍, 다이어트 열풍이다. 다이어트 시장이 이미 1조원을 넘어섰다고 하니 열풍이란 말이 전혀 과장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 나는 감량에 성공했다.(아, 성공이란 말의 조악함이여) 일미터 칠십도 되지 않는 단구에 74킬로그램의 몸무게는 누가 봐도 아니올시다였다. 무릎 관절의 입장에서도 결코 기분 좋지 않는 무게였다. 그러나 정작 혐오스러운 것은 내 아랫배가 아니었다. 꾸역꾸역 먹어대는 내 식욕이 문제였다 뭘 걱정해, 맘 편히 먹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먹는 거 참는 거 보기 안 좋아,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래도 건강할 사람은 건강하다구. 다이어트, 그런 게 다 자연을 거스르는 거라구, 뭔가를 의도적으로 해보겠다는 시도 자체가 다 부질없는 인간의 작태야, 라고 말하는 ' 사이비 노장주의자 '의 견해에 열심히 동조해가면서 나는 꾸역꾸역 위장을 채웠다.

그러나 대체 자연 속의 어떤 동물이 있어 콜라와 이온음료를 마시고, 피자와 켄터키 치킨과 햄버거와 튀긴 감자를 먹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아이스크림과 폭탄주임에랴.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을 끌어안는 삶이 의식의 간섭을 받지 않고 꾸역꾸역 먹어대는 삶은 아니었다. 뽕잎만 먹는 누에, 풀만을 뜯는 염소, 물과 공기와 햇빛이면 만사 오케인 식물들, 자연은 지극히 단순한 식욕을 가진 피조물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오직 인간의 식욕만이 이 피조물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은 배를 채우기보다는 마음을 채우려고 안달이다. 진수성찬은 말 그대로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차려진다. 과시적 식욕을 위해 고급 레스토랑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책장을 보면 울긋불긋 갖은 장르의 책들이 다 모여 있었다. 책장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장대한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책장에 꽂힌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야말로 내 욕망의 울긋불긋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방하착(放下着),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증이라는 명목으로 책장의 일정 부분을 비워낸 후(아직도 붙들고 있는 마음이 많다는 증거다.) 시작한 것이 달리기. 책들과 함께 내 욕망의 결과물인 살[肉]들도 함께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려 놓는다고 해서 털푸덕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마음. 마음은 '좋은 설득'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했다. '성공 다이어트'가 '좋은 설득'을 내게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채근담의 이런 구절이 내게 좋은 설득을 해주었다. 농비신감 비진미(膿肥辛甘 非眞味), 진미 지시담(眞味 只是淡)-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라는 홍자성의 채근담 구절이 내 식욕을 제지했다. '꽃은 반만 핀 것을 보고 술은 조금 취하도록 마시면 이 가운데 무한한 가취(佳趣)가 있다.'라는 구절도 왕성한 식욕을 제지했다.'차를 아주 좋은 것으로만 구하지 않으면 차 주전자가 항상 마르지 않을 것이요, 술도 훌륭 한 것만 찾지 않는다면 술독이 비지 않으리라.'라는 구절도 한몫을 했다.


스무살 무렵에 그 글을 읽었으면 어떠했을까. 어떤 글이 읽혀지기 위해선 우선 그 글을 읽을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대체 내 안에 들어와 그 글을 읽게 했던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글은 그 마음의 정체를 정치하게 분석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어쨌거나 무위당 장일순의 『
노자 이야기』를 읽었던 것도 이때, 틱낫한이란 베트남 승려의 이름을 알기 시작한 것도 이때, 이현주 목사의 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도 이때.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전우익 선생의 글이 심상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때,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사람이 뭔데』라는 글에도 이것 봐라, 시선이 머물기 시작했다. 윤오영의『방망이 깍던 노인』과 같이 담백한 글이나 이태준의 『무서록』과 같은 담백한 글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럴 때, 장일순 선생과 전우익, 이현주의 글들이 각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나의 삶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냉수마찰을 하고 책상 앞에 꿇어앉아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묵상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삶을 닮아갈 수는 없었다. 다석 유영모처럼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친근하게 여기는 내 마음이 탐식을 기꺼워 할 수는 없었다. 소박함에 대한 어떤 갈증.


다행히 식욕이 그런 요청에 응답해주었다. 내 혀도 담백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아주 서서히 체중이 내려갔다. 조금씩 달렸다. 힘들면 걷고, 걷는 게 힘들면 쉬었다. 기록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부실한 무릎이 그 욕심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조금 속도를 내어 뛰거나 걸었다. 나는 그 속도 위에서 노자와 장자, 홍자성, 유영모, 장일순, 이현주, 전우익 그런 이름들을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개구착(開口錯)이라던가, 그런 이름들 앞에서 나는 지금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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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속의 세 사람
바바라 포스터 외 지음, 원재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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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을 삶의 에너지로 전화시킬 수 있는 파워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인터넷에서, 현실에서 불륜은 이제 경악할 만한 사건이 아니다. 예전에도 불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에서부터 삼정승 육판서, 많은 '힘있는'아버지들이 두 여자 이상을 거느렸다. 커다란 죄의식 없이,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큰소리까지 쳐가며 버젓이 불륜을 행사했다. 축첩제도는 천연덕스럽게 그런 불륜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전통적으로 여자의 몸은 욕망의 대상이었지 그 주체는 아니었다. 주체는 늘 남성이었고 아버지였다.

오늘날 말해지고 있는 불륜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불륜이 아니다. 남성의 불륜은 이미 말해질 대로 말해지지 않았던가. 바야흐로 오늘날의 불륜은 여자의 불륜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의 불륜은 매우 괘씸한 것으로 간주된다. 스탠드바는 그럴 수 있으려니 보아 넘겨도 호스트바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윤리를 보라.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불문율은 여전히 대중의 정서를 강력하게 장악한다. 옳다.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여자라고 굳이 못박을 일은 아니다. 가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여자에게 전적으로 부과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가 히트를 치고 있는 모양이다. 열심히 일했으니 한번쯤 탈출을 꿈꾸어 보겠다는 데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광고의 모델이다. 그 광고가 보여주고 있는 모델은 남자다. 일은 독점적으로 남자의 것이며, 탈출 또한 남자의 것이라는 무의식이 그 광고에 작용한 것은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일,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밤샘 작업, 아니면 산더미 같은 서류, 그 속에서 다소 일그러진 표정을 보이는 샐러리맨···, 우리의 무의식은 일은 남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 광고는 남자의 탈출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여자들의 일이라고 해서 가볍게 볼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했으니 아낙들이여, 떠나보라, 라는 광고는 없다. 벗어나야 한다면 뭔가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탈출해야 한다면 갑갑하기 때문이고, 바꾸어야 한다면 식상하기 때문이다. 산뜻하게 자신을 물갈이하는 것이야말로 백 번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왜 굳이 남성뿐이겠는가. 남성들만이 탈출을 꿈꾸어도 좋다는 세상에서 정작 탈출의 꿈을 극대화시키는 사람은 여자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랑하지 않아요.” 전임 독일 연방대통령 로만 헤어초크의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한 나라의 국가 수반이 주류의 상식에 도전할 수 있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뇌까릴 수 있는 독일이 부럽기까지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독점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우리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독점하려고 한다. 결혼이란 제도는 우리에게 근엄하게 묻지 않았던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 답이 형식적이든 어떻든 거기에 우리는 응답했다. "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우리의 배타적인 소유욕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네, 라고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소란을 원치 않았기에 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 평생 이 여자만을, 이 남자만을 사랑하리라는 다소 비장한 각오로 대답했을 터이다. 그러나 사랑은 각오로 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다짐으로 될 일은 더욱 아니다. 뭐든 시들해지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큰 문제없이 세월이 지날수록 도타워지는 관계도 있을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부부관계가 우정이라는 속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고, 소유의 욕망으로 시시콜콜 간섭하던 관계가 각자의 개별성을 인정해주는 좀더 유연한 연대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화를 사랑하면서 또한 장미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제도는 이런 우리를 방관하지 않는다. 전임 독일 연방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이런 제도가 달갑지 않았나 보다.

한 인간에게 가장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제 아비요 형제요,제 짝이며, 제 자식이라는 말이다. 보기만 해도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남편, 그를 떠나서 새로운 남편을 꿈꿀 수 있다. 누군들 외도를 꿈꾸지 않을까. 그러나 배우자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보장해주는 결혼제도 안에서 외도는 허망하고 처참한 결과를 야기한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대체 나는 뭐란 말이야. 가슴이 찢기고 오열이 복받친다. 그렇게 우는 남자, 그렇게 우는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연민 어린 시선이다. 따지고 보면 저들도 제도의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문제는 결혼이라는 제도다. 결혼은 소유이기 이전에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을 알기에는 모든 결혼을 서두르는 연인들은 지나치게 젊다. 그들은 소유만을 알 뿐이다. 소유만을 아는 열정을 사랑이라고 그들은 정확히 착각한다. 통속적인 예술은 그런 착각을 강화시킨다. 질투와 선망을 사랑이라고 이름하는 데 통속예술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왜 우린 소유하되 소유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그런 경지는 경허나 조주와 같은 대선지식의 것이므로 범인인 우리로서는 넘볼 수 없는 것일까.

소유하지 못함이 불안을 낳고 불안은 시기와 질투의 온상이 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너'에게 닿기 위한 욕망인데 '너'는 '내'가 닿기도 전에 나를 외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는 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너'에게 닿았음을 확인한 사람은 불같은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지 않으리라. 사랑은 그런 점에서 여유를 준다. 사랑은 '너'를 나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사랑은 '너' 또한 욕망하는 주체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배우기도 전에 우린 결혼했다. 애 낳고 저축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하루하루 일에 치여 우린 제대로 된 여유를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니. 어디로 떠나란 말인가. 가련하게도 우리는 여유를 배우기 전에 불륜을 꿈꾼다. 제 배우자에 대한 연민을 배우기 전에 불륜의 사랑을 은밀하게 상상한다. 금기가 우리의 욕망을 폭발시키고, 드라마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욕조 속의 세 사람『욕조 속의 세 사람』(바바라 포스터 등 저, 세종서적)은 불온한 책이다. 그것은 점잖은 어조로 우리를 꼬드긴다. 제목처럼 이 책은 파격적인 사랑과 결혼 행태를 보여 준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우리에겐 몹시 낯설다. 그러나 이 책은 삼각관계가 아닌 삼각연애의 사례를 유명인들의 삶 속에서 광범위하게 추적함으로써 우리의 상식을 흔든다. 셸리, 바이런, 볼테르, 루소, 엥겔스, 뒤마, 위고, 투르게네프, 루 살로메, 니체, 릴케, 유진 오닐, 에밀졸라, 달리, 피카소, 사르트르, 로렌스, 헤밍웨이··· 듣기만 해도 떠르르한 인물들이 삼각연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시라. 삼각연애는 욕망에 기초해 있는 삼각관계와는 다르다. 질투와 반목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감정을 삶의 에너지로 전화시킬 수 있는 파워. 우리가 이 책에서 배울 것은 바로 그 파워다. 그러나 어설픈 흉내는 철없는 아이들만을 울릴 것이다. 차라리 무위를 가르치는 노장에나 빠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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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trolls - Andante (Most Dear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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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이 진공상태의 유리병 안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관찰한 동물학자 잭 몰튼은 공기의 순환이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내뱉는 숨에는 폐와 신체에서 방출되는 지극히 유해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서 그는 숨막힐 듯한 주거지에서 밀집해 사는 사람들이나 폐쇄된 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유리병 속의 동물들처럼 자신의 날숨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유추했다.
 
인간의 날숨이 인간을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몰튼의 생각은 실연의 아픔으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거의 일 년 동안 두문불출하는 그의 딸 수잔에 미쳤다. 그녀의 실연 이후 누구도 수잔의 방 커튼이 걷혀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몰튼의 과학적 가설도, 간곡한 그의 만류도 수잔을 그녀의 방으로부터 한 발짝도 끌어낼 수 없었다.
 
몰튼이 그녀를 억지로 방밖으로 끌어냈을 때 수잔은 빛을 가려 달라며 눈을 감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식음을 전폐했다. 그녀의 목에 호스를 박고 억지로 음식물을 흘려 넣었지만 계속 되는 구역질은 일체의 음식물을 용납하지 않았다. 몰튼이 그녀를 방밖으로 끌어낸 지 보름만에 수잔은 더 이상 음식물을 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숨이 끊어진 뒤였기 때문이다.
 
몰튼은 수잔을 매장하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도였지만 몰튼은 매장을 고집하는 기독교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비어 있는 관으로 기독교식 장례식을 치른 후, 아무도 모르게 콜로라도의 산정에 수잔의 유해를 가져다 놓았다.
 
수잔의 유해를 콜로라도 산정에  옮겨다 놓고 온 날 밤에 몰튼은 일기를 쓰게 된다. 그 일기는 콜로라도 대학의 구겐하임 도서관에서 1863년 2월 분실되었다. 다행히 구겐하임 도서관 직원이었던 필립 선드럼은 그 일기가 분실되기 전에 그 일기의 일부를 외우고 있었다. 그는 그가 암기하고 있는 내용을 <덴버 포스트 Denver Post>지에 소개했다. 그 일기는 다음과 같다.  
 
젖먹이 시절 쌔근거리는 너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너의 볼에 입맞추며 너의 숨결을 뺨에 느낄 때 나는 비로소 너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나를 너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던 그 아름다운 너의 숨결이 이제 너를 데려갔구나. 너는 너의 숨을 마셨고, 너의 독을 마셨고, 너의 죽음을 마셨다. 이제 너는  콜로라도의 바람을 마셔라. 너의 사랑이 너의 가슴에서 다시 새살을 돋게 할 때까지, 콜로라도의 바람이 너의 비명을 지울 때까지 너는 콜로라도의 하늘을 마셔라. 별을 마셔라.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 일기를 훔친 사람은 도서관 직원인 필립 선드럼이었다. 그는 그 일기를 사랑했다.

 
(King Crimson-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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