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율이란 언제나 사소한 말단에서 시작하는 법인지도 몰라
당신이 움켜쥔 것은 전율하는 몸뚱이
모든 피와 감각이 오직 심장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일 뿐
그러나 어떤 새로운 시작도 꿈꾸지 않는 휴식을 나는 꿈꾸었지
모든 것이 하나의 심연으로 잦아드는, 그런...
 

Rachel's - Anytime Soon [Music For Paul A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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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가지고 가기 전에는
나는 저 무수한 동그라미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었지
울퉁불퉁 올록볼록
어디든 데려가시라
내 유일무이한 개체성을 증명하는 당신!
헤이, 헤이
아침이 올 때까지는 우리는 밤이다
어둠이다
 
Never There-C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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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곳에 먼지처럼 숨어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
당신이 빨아들이는 저 폭풍의 심연 속으로
형체도 없이 질량도 없이
 
                            
                             Stay with me till the morning-- -다나 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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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낡음, 그 그윽한 눈길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나희덕,「부패의 힘」


모든 것들은 조용히 낡아갑니다. 시간이 존재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때, 모든 존재는 제 윤곽을 허뭅니다. 빗물에 철대문이 붉은 녹물을 흘리며 낡아가고, 알함브라 궁전의 광휘도 조금씩 빛을 잃어갑니다. 누렇게 탈색되는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의 추억은 속수무책으로 그 푸르름을 잃어갑니다. 새벽이 오면 별들은 '알수없는 모래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도 조금씩 그 열기를 잃어 갑니다. 모래톱 속에 물이 빠지듯 사물들은 조금씩 제 형체와 윤곽을 허뭅니다. 시간은 결코 그 속도를 늦춰주는 법이 없습니다. 거울을 보며 안절부절 아이 크림을 발라 보기도 하지만 시간은 결코 비껴가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과의 게임은 필경 패배가 예정된 게임.

청춘을 잃었다고 호들갑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기사 백발과 구부러진 허리를 기꺼워 할 사람은 없죠. 주름살이 패이고 흰머리가 는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심리적 체험이겠죠. 그러나 새치와 주름살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것도 그다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닙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만이 가지는 건강과 탄력이 있겠지만 낡은 것은 낡은 것만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뻔지르르한 합성수지 가구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전적 분위기를 구입하기 위해 황학동 벼룩시장을 헤매는 유한마담들도 있지 않습니까. 싱그러움과 탄력을 잃은 대신 어떤 이는 그윽하고 깊은 눈길을 얻기도 하더군요. 싱그러움과 탄력은 그저 얻어지는 것일지 몰라도 그윽한 눈길은 그저 얻어지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시간의 퇴적층에 묻힌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통과해낸 자의 '그윽한 눈길'은 그 어떤 발랄함과 삽상함과도 견주어도 기울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지방을 제거하고 주름살을 잡아 늘여서라도 노화를 방지해보겠다는 심리의 배후엔 청춘은 善이요, 늙음은 惡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체 어떤 논리가 이런 등식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것인지요. 황지우의 다음 시는 청춘을 고름이 든 화농(化膿)으로 보고 있습니다. 벌겋게 化膿이 된 상처를 보며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청춘이 싫다.
터지지 않은 화농(化膿)이 화끈화끈 애린다.
어서 늙고 병 나야지.
내 사타구니에서
덜렁덜렁 鐘치는 붉은 鐘樓,
때가 되었다고
운다.
-황지우,「301」,시집 『나는 너다』중에서

'시도때도 없이' 우는 욕망에 비해 '때가 되었다'고 우는 욕망은 차라리 자연스럽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는 욕망이야말로 욕망의 뻔뻔스런 본질이 아니던가요. 시도때도 없이 자기네 물건을 사달라고 은근히 졸라대는 광고주는 무한히 확장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겠지만 시인은 그 욕망으로 해서 화끈화끈 애리고 아픕니다. 이럴 때, 그 뻔뻔스런 욕망이 들끓는 장소(場所)인 청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저 늙음에의 의지는 단지 겉치레 발언에 불과한 것일까요. 무한 확장의 의지를 증폭시키는 광고의 발언에 비해 시인의 발언은 이렇게 아프고 애리기만 합니다.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꼴뚜기젓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윤후명,「희망」

냉엄한 현실 논리의 앞에서 이런 詩的 발언이 당당히 고개를 들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적 발언이 계속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진실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녹슬지 않는 욕망, 썩지 않는 육체, 화려한 네온의 거리를 보면 많은 것들이 썩지 않을 기세로 번쩍거립니다. TV 모니터 속의 광고나 드라마를 보아도 온통 건강함만이 우글거립니다. 전혀 늙을 기색이라곤 없는 표정들. 가끔씩 광고의 지면에 늙은 '오드리 헵번'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잔주름이나 새치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 막강한 자본을 배경으로 한 미용산업의 물량공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미덕으로 하는 사회에서 정년을 앞당기자는 구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그런 사회에서 늙음의 자리는 파고다 공원의 비둘기 옆이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늙음이 정당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늙지 않은 것'마저도 늙었음을 한탄하는 조로(早老) 현상이 아닐는지요. '새것'을 위해선 기존의 것이 제 자리를 내 주는 것은 사회의 신진대사를 위해서도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로 '내 자리를 내놓아라'하는 호령은 일견 파렴치하게도 보입니다. 물론 어떻게 해서라도 제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집착도 그다지 아름답진 않습니다.

낡음이 지닐 수 있는 '그윽한 눈길'을 미덕으로 보아줄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심하고 늙을 수 있지 않겠는지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라고. 그것은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라고.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은 한 고매한 인격의 성취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낡음'과 '부패'를 생산성과 효율성의 소멸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또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미련하게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황폐해지지 않을 만큼의 젊음과 늙음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겠지요. 기력이 쇠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런 힘이 줄어들 것이라곤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파워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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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 민음의 시 87
김영남 지음 / 민음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구불구불한 길.
커브가 많은 삶은 슬프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면 그녀에게선
아름다운 커브가 나온다.

커브가 많은 그녀. 기둥을 자주 수리했던 여자, 어룽무늬
의 커튼이 쳐진 여자, 난간이 있는 여자, 일요일이면 혼자
쉬어야 하는 여자, 바이올린 같이 현이 있는 여자, 그래서
한번 더 슬픈 커브를 갖는 그녀.

그러나 그녀의 커브를 몇 굽이 돌다보면
의외로 넓고 푸른 뜰을 만날 수 있다.
그 뜰에서 키우는
비둘기와 양을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의 들녘으로 나가는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뜰을 가득 채워오는 농아들 웃음이
그녀의 어둔 공간을 밝히고
하늘의 별로 반짝여 올 때
그녀의 커브는
커브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벼랑을 슬기롭게 돌아나간 커브,
그 커브가 그녀를 향기롭게 한다.
-김영남,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생리학이란 것을 정상적 인간의 기능에 대한 과학으로 정의한다면, 생리학은 정상적인 인간, 즉 자연인을 암묵적으로 가정한 것이겠지요. 생리학자 바크(M. Bacq)는 "평온, 게으름, 심리적 무관심은 정상 생리학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라고 하더군요. 평온하고 게으르고 무관심할 때의 인간이 생리학의 대상이란 것이죠. 참 의미심장합니다. 평온하고 게으르고 무관심할 때의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이란 의미로도 들리니까 말입니다. 말을 뒤집으면 분투하는 인간, 부지런한 인간, 신경을 곤두세우는 인간은 정상적인 생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병적인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의 우리 경제가 극구 찬양해 마지않던 <근면한 인간>도 어찌보면 형용모순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부지런한 인간은 <태초의 인간>은 아니겠죠. 부지런한 인간이란 문명에 의해서 개조되어지고 훈육되어진 인간의 모습일 겁니다. 성실하라, 근면하라, 공손하고 예절바르거라, 하는 명령들도 따지고 보면 '태초의 인간'을 개량하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다른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이 곧바로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애비 에미도 몰라보는 인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는 파렴치한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명화된 인간은 어째 정감이 가지를 않습니다. 과학에 의해 그의 대뇌가 온통 장악돼버린 인간은 어째 곁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합리가 어찌 나쁘겠습니까. 문명이나 과학의 발전 방향이 인간을 좀더 편리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쪽일진대 문명과 과학의 발전 방향에 바리케이트를 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좀더 빠른 시간 내에 좀더 많은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데 삐뚤어진 시각을 보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진행 중인 태풍의 방향을 미리 알고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과학은 과학대로의 타당한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떳떳한 존재 이유를 갖기 위해서는 과학 아닌 다른 것들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군중 속에 첨단의 로봇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 로봇에게 이런 명령을 했다고 합시다. "최단 거리를 경유해서 내게 도달하라." 자, 사람의 명령, 그 이후의 로봇의 움직임을 상상해볼까요. 최단거리를 경유해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로봇은 사람의 머리통을 밟고 갑니다. 어깨며 허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로봇에게 중요한 것은 최단거리이지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 결과 몇 사람의 두개골이 함몰되고 몇 사람의 어깨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하학에 정통한 어떤 사람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로봇과 같이 명령을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단 거리를 지향하는 로봇의 길은 직선입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세떼들의 비행을 고려하여 우회했다는 뉴스를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길은 우회하는 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인간은 <인간만을 위해서 우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생물의 군락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우회하는 고속도로, 문화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우회하는 철도나, 늪의 뭇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늪을 우회하는 국도, 연어의 회귀처를 보호하기 위해 보류되는 발전소 등은 이동성이나 효율성, 경제성에서는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비효율성으로 해서 그 길은 가장 인간적인 길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런 길 위에서 인간의 안온한 삶이 둥지를 트는 것이겠지요.

과학은 한 점에서 한 점을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는 직선이라고 답하지만 인간은 이렇듯 <커브길>을 만들어 냅니다. 효율성, 생산성 따위의 덕목들은 과학과 기술에게는 최선의 덕목일지는 몰라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에게는 최선일 수는 없겠습니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나 에움길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비효율성 때문은 아닐까요. 그 길은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로 느릿느릿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비둘기와 양을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의 들녘으로 나가는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가 있겠지요.

직선의 길은 속도를 충동질합니다. 엑셀레이터를 한껏 밟고 싶다는 충동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커브길은 속도를 죽이는 길입니다. 아무리 무섭게 달리던 폭주족들의 오토바이도 커브길을 만나면 속도를 죽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매서운 기세를 가진 속도도 커브길 앞에서만은 주눅이 듭니다. 광포한 속도를 주눅들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아름다운 커브입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썼던 사람은 괴테였던가요. 오늘은 <커브가 아름다운> 사람의 품으로 가서 그 사람의 그늘 아래에서 한 나절을 쉬고 싶은 초록의 봄날입니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분다면 내 눈썹을 간지르는 바람쯤으로 아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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