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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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낡음, 그 그윽한 눈길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나희덕,「부패의 힘」


모든 것들은 조용히 낡아갑니다. 시간이 존재의 피부 속으로 침투할 때, 모든 존재는 제 윤곽을 허뭅니다. 빗물에 철대문이 붉은 녹물을 흘리며 낡아가고, 알함브라 궁전의 광휘도 조금씩 빛을 잃어갑니다. 누렇게 탈색되는 한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의 추억은 속수무책으로 그 푸르름을 잃어갑니다. 새벽이 오면 별들은 '알수없는 모래성'으로 자리를 옮기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도 조금씩 그 열기를 잃어 갑니다. 모래톱 속에 물이 빠지듯 사물들은 조금씩 제 형체와 윤곽을 허뭅니다. 시간은 결코 그 속도를 늦춰주는 법이 없습니다. 거울을 보며 안절부절 아이 크림을 발라 보기도 하지만 시간은 결코 비껴가는 법이 없습니다. 시간과의 게임은 필경 패배가 예정된 게임.

청춘을 잃었다고 호들갑을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기사 백발과 구부러진 허리를 기꺼워 할 사람은 없죠. 주름살이 패이고 흰머리가 는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심리적 체험이겠죠. 그러나 새치와 주름살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것도 그다지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닙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만이 가지는 건강과 탄력이 있겠지만 낡은 것은 낡은 것만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뻔지르르한 합성수지 가구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전적 분위기를 구입하기 위해 황학동 벼룩시장을 헤매는 유한마담들도 있지 않습니까. 싱그러움과 탄력을 잃은 대신 어떤 이는 그윽하고 깊은 눈길을 얻기도 하더군요. 싱그러움과 탄력은 그저 얻어지는 것일지 몰라도 그윽한 눈길은 그저 얻어지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시간의 퇴적층에 묻힌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통과해낸 자의 '그윽한 눈길'은 그 어떤 발랄함과 삽상함과도 견주어도 기울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지방을 제거하고 주름살을 잡아 늘여서라도 노화를 방지해보겠다는 심리의 배후엔 청춘은 善이요, 늙음은 惡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체 어떤 논리가 이런 등식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것인지요. 황지우의 다음 시는 청춘을 고름이 든 화농(化膿)으로 보고 있습니다. 벌겋게 化膿이 된 상처를 보며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청춘이 싫다.
터지지 않은 화농(化膿)이 화끈화끈 애린다.
어서 늙고 병 나야지.
내 사타구니에서
덜렁덜렁 鐘치는 붉은 鐘樓,
때가 되었다고
운다.
-황지우,「301」,시집 『나는 너다』중에서

'시도때도 없이' 우는 욕망에 비해 '때가 되었다'고 우는 욕망은 차라리 자연스럽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는 욕망이야말로 욕망의 뻔뻔스런 본질이 아니던가요. 시도때도 없이 자기네 물건을 사달라고 은근히 졸라대는 광고주는 무한히 확장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겠지만 시인은 그 욕망으로 해서 화끈화끈 애리고 아픕니다. 이럴 때, 그 뻔뻔스런 욕망이 들끓는 장소(場所)인 청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저 늙음에의 의지는 단지 겉치레 발언에 불과한 것일까요. 무한 확장의 의지를 증폭시키는 광고의 발언에 비해 시인의 발언은 이렇게 아프고 애리기만 합니다.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
곤쟁이젓 같은,꼴뚜기젓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윤후명,「희망」

냉엄한 현실 논리의 앞에서 이런 詩的 발언이 당당히 고개를 들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적 발언이 계속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진실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녹슬지 않는 욕망, 썩지 않는 육체, 화려한 네온의 거리를 보면 많은 것들이 썩지 않을 기세로 번쩍거립니다. TV 모니터 속의 광고나 드라마를 보아도 온통 건강함만이 우글거립니다. 전혀 늙을 기색이라곤 없는 표정들. 가끔씩 광고의 지면에 늙은 '오드리 헵번'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잔주름이나 새치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 막강한 자본을 배경으로 한 미용산업의 물량공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미덕으로 하는 사회에서 정년을 앞당기자는 구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그런 사회에서 늙음의 자리는 파고다 공원의 비둘기 옆이 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늙음이 정당한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늙지 않은 것'마저도 늙었음을 한탄하는 조로(早老) 현상이 아닐는지요. '새것'을 위해선 기존의 것이 제 자리를 내 주는 것은 사회의 신진대사를 위해서도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로 '내 자리를 내놓아라'하는 호령은 일견 파렴치하게도 보입니다. 물론 어떻게 해서라도 제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집착도 그다지 아름답진 않습니다.

낡음이 지닐 수 있는 '그윽한 눈길'을 미덕으로 보아줄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심하고 늙을 수 있지 않겠는지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라고. 그것은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라고.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겸손은 한 고매한 인격의 성취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낡음'과 '부패'를 생산성과 효율성의 소멸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또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시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미련하게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황폐해지지 않을 만큼의 젊음과 늙음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겠지요. 기력이 쇠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런 힘이 줄어들 것이라곤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파워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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