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역 민음의 시 87
김영남 지음 / 민음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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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구불구불한 길.
커브가 많은 삶은 슬프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면 그녀에게선
아름다운 커브가 나온다.

커브가 많은 그녀. 기둥을 자주 수리했던 여자, 어룽무늬
의 커튼이 쳐진 여자, 난간이 있는 여자, 일요일이면 혼자
쉬어야 하는 여자, 바이올린 같이 현이 있는 여자, 그래서
한번 더 슬픈 커브를 갖는 그녀.

그러나 그녀의 커브를 몇 굽이 돌다보면
의외로 넓고 푸른 뜰을 만날 수 있다.
그 뜰에서 키우는
비둘기와 양을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의 들녘으로 나가는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뜰을 가득 채워오는 농아들 웃음이
그녀의 어둔 공간을 밝히고
하늘의 별로 반짝여 올 때
그녀의 커브는
커브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벼랑을 슬기롭게 돌아나간 커브,
그 커브가 그녀를 향기롭게 한다.
-김영남, 「커브가 아름다운 여자」


생리학이란 것을 정상적 인간의 기능에 대한 과학으로 정의한다면, 생리학은 정상적인 인간, 즉 자연인을 암묵적으로 가정한 것이겠지요. 생리학자 바크(M. Bacq)는 "평온, 게으름, 심리적 무관심은 정상 생리학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라고 하더군요. 평온하고 게으르고 무관심할 때의 인간이 생리학의 대상이란 것이죠. 참 의미심장합니다. 평온하고 게으르고 무관심할 때의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이란 의미로도 들리니까 말입니다. 말을 뒤집으면 분투하는 인간, 부지런한 인간, 신경을 곤두세우는 인간은 정상적인 생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병적인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1970년대의 우리 경제가 극구 찬양해 마지않던 <근면한 인간>도 어찌보면 형용모순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부지런한 인간은 <태초의 인간>은 아니겠죠. 부지런한 인간이란 문명에 의해서 개조되어지고 훈육되어진 인간의 모습일 겁니다. 성실하라, 근면하라, 공손하고 예절바르거라, 하는 명령들도 따지고 보면 '태초의 인간'을 개량하겠다는 계몽적 의지의 다른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이 곧바로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애비 에미도 몰라보는 인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는 파렴치한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명화된 인간은 어째 정감이 가지를 않습니다. 과학에 의해 그의 대뇌가 온통 장악돼버린 인간은 어째 곁을 주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합리가 어찌 나쁘겠습니까. 문명이나 과학의 발전 방향이 인간을 좀더 편리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쪽일진대 문명과 과학의 발전 방향에 바리케이트를 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좀더 빠른 시간 내에 좀더 많은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데 삐뚤어진 시각을 보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진행 중인 태풍의 방향을 미리 알고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다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과학은 과학대로의 타당한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떳떳한 존재 이유를 갖기 위해서는 과학 아닌 다른 것들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군중 속에 첨단의 로봇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 로봇에게 이런 명령을 했다고 합시다. "최단 거리를 경유해서 내게 도달하라." 자, 사람의 명령, 그 이후의 로봇의 움직임을 상상해볼까요. 최단거리를 경유해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로봇은 사람의 머리통을 밟고 갑니다. 어깨며 허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로봇에게 중요한 것은 최단거리이지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 결과 몇 사람의 두개골이 함몰되고 몇 사람의 어깨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하학에 정통한 어떤 사람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로봇과 같이 명령을 수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단 거리를 지향하는 로봇의 길은 직선입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세떼들의 비행을 고려하여 우회했다는 뉴스를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길은 우회하는 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인간은 <인간만을 위해서 우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생물의 군락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우회하는 고속도로, 문화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우회하는 철도나, 늪의 뭇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늪을 우회하는 국도, 연어의 회귀처를 보호하기 위해 보류되는 발전소 등은 이동성이나 효율성, 경제성에서는 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비효율성으로 해서 그 길은 가장 인간적인 길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겠지요. 바로 그런 길 위에서 인간의 안온한 삶이 둥지를 트는 것이겠지요.

과학은 한 점에서 한 점을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는 직선이라고 답하지만 인간은 이렇듯 <커브길>을 만들어 냅니다. 효율성, 생산성 따위의 덕목들은 과학과 기술에게는 최선의 덕목일지는 몰라도 피와 살이 있는 인간에게는 최선일 수는 없겠습니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나 에움길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비효율성 때문은 아닐까요. 그 길은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로 느릿느릿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비둘기와 양을 만날 수 있고, 날마다 하느님의 들녘으로 나가는 황소 같은 어진 발걸음 소리도 들을 수>가 있겠지요.

직선의 길은 속도를 충동질합니다. 엑셀레이터를 한껏 밟고 싶다는 충동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커브길은 속도를 죽이는 길입니다. 아무리 무섭게 달리던 폭주족들의 오토바이도 커브길을 만나면 속도를 죽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매서운 기세를 가진 속도도 커브길 앞에서만은 주눅이 듭니다. 광포한 속도를 주눅들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아름다운 커브입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썼던 사람은 괴테였던가요. 오늘은 <커브가 아름다운> 사람의 품으로 가서 그 사람의 그늘 아래에서 한 나절을 쉬고 싶은 초록의 봄날입니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분다면 내 눈썹을 간지르는 바람쯤으로 아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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