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러시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솔출판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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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안과 폭력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
               
    
    유미리의 신작,『골드러시』는 패륜에 관해 말한다. 한 소년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 다. <카즈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나이는 열네 살.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경계에 소년은 놓여 있다. 확실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경계에 서 있는 자는 불안하다. <불안>은 소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

   <가족>은 소년에게 또  다른 불안의 근원. 파칭코 가게를 경영하면서 탈세를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아버지. 엄마는 그녀의 첫아들  히데끼가 '윌리엄스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 리자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종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하는 정신의  삶을 선택한다.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육체적·정신적으로는 소년에 불과한  형, 원조교제에 빠져 있는 누나인 미호, 그녀는 내가 이러고 다닌다고 해서 <누구에게 폐를 치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당당하게 소리친다.

 소년 카즈키의  불행은 성장의 모델을 가질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아버지  히데모토는 떳떳하게 말한다.  <경찰 신세만 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패션 모델 뺨치는 미인도 언제든  붙여줄 수 있다.>라고.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찌른다. 아버지는 어른이 아니다. 더러운 돈과 욕망의 어린아이.

 작가 유미리는 소년의  어머니 미키를 통해서 이렇게 폭력적인 세상에서 종교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왜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치냐는 소년의 항변에  미키는 차갑게 대꾸한다.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소년이 미키에게 돈을  주자 그녀는 돈을 불태운다. 그것이 애정 표현의 옳은 방식이든  아니든, 자신이 건네준 돈이 불태워지자,  소년은 격노한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엄마의 뺨을 후려친다.   미키, 그녀는 어른이 아니다. 모든 정상적인 관계와 물질을 거부하는 비이성적 광신에 붙들려 있는 어린아이.

 소년에게 어른은  없다. 아버지와  엄마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이 나이가  돼서 뭣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어지다니>라고 말하는  <카나모토>라는 사나이.  적어도 소년의 눈에 카나모토는 어른으로 비친다.  그는 적어도 삶을 반성한다. 반성하고 있다. 반성도 모르는 어른이라는 어린아이들이라니!

 아버지는 소년을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소년에게 어른을  강요했다.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파칭코 직원들은 소년에게 모두 존대말을  했다. 그렇다고 소년이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아버지를 죽이자.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나도 한번 어른이 되어 보는 거다.

 소년이 아버지를 죽였다.  소년은 불안하다. 자신은 어른이 되지 못했고 자신을 돌보아줄 어른을 잃었기 때문이다.소년은 어른 같이 말해본다. 남들의 코웃음을 살 뿐이다. 소년은 아버지의 정부와 또  그녀의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일 뿐, 그런 행위가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소년은 카나모토에게 복종하려 하지만 그는 소년에게 죄를 묻는다. 진퇴양난.

 소년은 주머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동물원에서 찍은 가족 사진.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기호이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의 기호. 소년의 가족은 오직 변색된 사진 속에서만 있다. 사진은 현실의 이미지요, 행복의 기호일 뿐이다. 소년의 가족은  현실 속에는 없고, 소년의 행복은 이미지와 기호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유미리의 <골드러시>는 이렇게  가족의 해체를 말한다. 해체된 가족이 어떻게 폭력을  낳는지를 말한다. 『골드러시』에서 희미하게나마 가족 안에 도사리고 있는 파괴의 힘이 어디에서 배태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엄마인 미키가 첫아들이  병자가 아니라  천재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첫아들에게 보여준 애정과 관심.  그 덕분에 누나인 미호와 소년은 철저하게  엄마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욕망은 결핍된 것을 어떤 방식으 로든지 보상받으려고 한다. 소년은 자신의 형에게 화상을 입히고  꿈 속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폭력을 통해 결핍된 애정을 보 상받으려고 한다.

 소년의 아버지가 <장영창>이라는 한국인임을 짧게 말해주는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소년의 아버지 또한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이 소설에서 폭력은 전염된다. 일본 사회의 이지메의 폭력이 아버지를 폭력적으로 만들고, 아버지의 폭력이 또 다시 자식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폭력은 이렇게 확대 재 생산된다.  

 유미리의 『골드러시』는  불안과 폭력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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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현대사상의 모험 28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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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의미있는 발작으로서의 성행위
        

 <에로티즘>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性 이상의 것이다. 신성에 이르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바타이유는 말하고 있다.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 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고립감을 벗어나게 한다. 에로티즘은 나와 너의 하나됨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지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죽음에의 문을 열어 준다.죽음은 개인적으로 존속하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성의 지배에 무한정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전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도 또한 결코 우리의 합목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비합리성의 우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을 우린 에로티즘을 통해 경험한다.에로티즘은 정신성이 지배하던  질서와 유효성의 체계를 허물어 뜨린다. 동물적 충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맹목과 망각을 누리면서 폭력을 짐승처럼 휘두른다.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고 울부짖는 야수성,팽창과 절규, 그 끝에 죽음이 있다. 그 관능적 희열이란 죽음의 전조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다.그런데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삶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존재는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자리를 내어주어 그 새로운 존재들이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에로티즘은 삶의 연소, 삶의 낭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이 아니다.생산의 메카니즘을 보기좋게 외면한다.아니 위반한다.그렇다.에로티즘은 금기의 위반이다.합리성의 파괴이다. 찢음이며 찢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폭력이다.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나 거기엔 공허가 있다. 갑작스런 한순간에 열리는 공허.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이끌어들이며,부재는 부패와 관계한다.관능적 희열 끝에 우린 급속도로 부패한다.새로운 생명에게 우릴 내어주고 우리는 잠시 죽는 것이다.

 동물성과 야수성을 말하지 않고 에로티즘을 말할 수 없다. 성행위 중의 상대방은 연속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시되며,빈틈없는 개체의 불연속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야수처럼 파고든다. 성행위 중에 동물성의 폭력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 두 존재가 성적 결합을 통해 자아를 잠시 잊고 위기를 함께 겪는다.성적 결합은 두 존재로 하여금 연속성을 향해 잠시 자아의 문을 열게 할 뿐이다. 막연한 의식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발작이 지나면 각자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따라서 성행위는 가장 진하면서도 가장 의미있는 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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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82
오스카 와일드 지음 / 일신서적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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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일탈의 의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이 책은 도덕적인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책도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 도덕적인  책이라든가  또는  비도덕적인 책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씌어져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  씌어져 있거나이다.그뿐이다 >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의 곳곳에서 모랄리스트인 예술가 버어질 홀워드와 시니컬한 향락주의자 헨리 월튼 경을  통해 <사실주의>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노출시킨다. 나는 여기에 주목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을 자서전적인 한 형식이나  되는 것처럼 다루는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는 미의  추상적인 의미를 상실해버렸어. 언젠가 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에 보여줄 테야.

 난 누가 됐건 교양있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의 표준을 받아들이는 것은 천하기 짝이 없는 부도덕의  하나의 형식이라고 생각해.

  그건(쇼팡의 야상곡) 신기할 정도로 낭만적이야. 모방이 아닌 예술이 하나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얼마만한 축복이야.

 오스카 와일드의 사실주의에 대한 이런  혐오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나는 관심을 모은다. 이건 事實主義가 한물 간 思潮임을 강조하자는 의도적 배려가 아니다. .차라리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는 편에 나는 수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딱히 나를 말할  수 없다. 나는 나에 의해서 차차 밝혀질 것이다. 나의 책읽기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히는 행위다. 나는 내 스스로가 나에 의해서건 또는  타인에 의해서건 밝혀질 수도 있다는 섬약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유럽의 한 시절을 나는 상기한다. 미래를 온통 약속으로 가득 채우던 시대. 이성의 힘을 무한히 신뢰하며  진보를 아직 달성되지 않은 현실로 받아들였던 시대. 오직 현실을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받아들였던  시대.  봉건적 왕정을 무너뜨렸듯이 또 다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장미빛 신념으로 계몽을 외치던 시절. 그  시대에  팽만한 신뢰감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은 과학이었다. 쇳조각을  연기를 뿜으며 달리게 하는 힘, 병든 자를  일어서게  하는 힘, 그 기적과 같은 과학의 스펙타클 앞에서 현기증을 느껴야 했었을 시대.

 천년왕국을 꿈꾸게 했던 그 계몽시대의 희망을 상기해보자. 그러나 이성의 훈장을 어깨에 걸고 무한히 행진할 수 있으리란 진보의 꿈이 결과한 것은 무엇인가.  대량살상, 끔찍한 기아와 전쟁 ..... 그러나 누가 힘있게  부인  할 수 있으랴? 이런 비극이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았음을. 진보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끔찍한 야만은 이성과 진보, 합리와  유효성의 이름으로 음모되고 감행되었다.  

 이런 시대에 데까당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 천박한 계몽주의자의 뒷덜미를 한번 슬쩍 후려치는 풍자는  아니었을까. 이성의 무한한 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은근히 시비를 거는 깽판은 아니었을까.두 눈을 명확히 뜨고 진보를  향해 달려가자는 대중연설자들에 대해 실없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뜨는 시니컬리즘은 아니었을까. 이 게슴츠레한 데까당들이 이성이 결과할 아우슈비츠의 야만을 미리  예견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조선인민의 행복을 위해 일제에 타협했다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의심하지  않는다.문제는 애국도, 타협도 모두 들뜬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광수의 계몽주의는 필히 타협에  직결되었을지도 모른 다는 말이다)

 이런 시대에 데까당은 무엇인가? 데까당은 <반지성>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 포즈야말로 이성에  깊이를  불어넣고자 하는 지성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닐 것인가.  이성이 가져다준 과학, 과학이 가져다 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善으로 동일시하는 시대에 또다른 자들(데까당)에  의해 이성은 스스로 자기 안에 악을 예비하지는  않았을까. 악은 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知에 정신의 깊이를  불어넣고자 하는 충동을 목적으로 가지지는 않았을까.백 개의 들뜬 낙관론보다야 하나의 진지한  비관론이  데까당에겐 더 절실했는지도 모른다.비관적 포즈를 통해, 또는 스스로의 파괴를 통해 낙관론의 당찬 표정에 찬물을  끼얹는, 그래서 당황한 계몽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는 데서 그들은 심리적 보상과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의 목적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위 <순수예술론>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론>을 옹호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간에 데까당한 그의 일탈된 행동의 바닥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동기를 들추어보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더 솔직히는 내가  빠져들고 있는 어떤 문제에 스스로 정당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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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코 범우문고 171
고골리 지음, 김영국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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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눈물이 등짝을 맞대고 있는

 

 고골리는 그의 단편  「외투」에서 주인공 아카키예비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가 언제 그 관청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누가 그를 그 자리에  앉혔는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국장이나  과장들은 수없이 갈렸지만,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 같은 지위에서  여전히 서기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모두들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관리 제복을 입고 이마가 벗어진 기성품  같은 인간이 되어 세상에 태어난 것이기라도 한 것  같이 생각하게끔 되었다" 이런 고골리의 표현은 과장임이 분명하지만  그 과장이 부자연스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아카키예비치는 쪼들리는  살림에 외투  하나를 샀다가 우여곡절 끝에 도적들에게 외투를  잃고 마음의 병을 얻어  죽어간다. 이에  고골리는 장엄한, 그러나 윗트 있는  헌사를 아카키예비치에게 바친다. (왜 죽음을 겨냥한 그의 윗트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 "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유해는 묘지로 실려 나가 매장되었다.  그리고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없어도  페테르스부르크는 그 모양 그대로였다.  마치 그런 인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리하여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소중히 여겨지지 못하고,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하고, 흔해 빠진 파리까지 핀으로  꽂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박물학자의 주의조차 끌어보지 못한  존재 -관청에서의 온갖  조소를 온순히  참아내고 이렇다 할 사업 한 가지  이루지 못한 채 무덤으로 간 존재는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고골리는 힘 조절의 명수다. 힘있게  정공법으로 밀어부쳐야 할 때와  끌어 당기거나 우회해야  할 때를  적절하게 감지해내는 분별력의  명수.  풍자든 묘사든 적절히 그쳐야 할 때를 아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아카키예비치라는 러시아 하급  관리를 묘사하고 있는 고골리의 펜은 정확하고 따스하다. <고골리>의 펜은 나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 꼼꼼하게 세상을 들여다 보라구. 좋은 웃음은 항상 눈물과 등짝을 맞대고 있는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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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반역이다
함인선 / 서울포럼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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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을 깨는 잡종의 외로움

 미술관련 서적을 주로 내는  열화당에서 나온 지오폰티의 『건축 예찬』은 건축에  대한 유려한 산문이지만 우연히 서점에서 고르게 된  『건축은 반역이다』란 책은 조금은 불온하면서도  유머스럽고,  유머스러우면서도  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의 서문 끄트머리는 이런 비장한 글로 채워져 있다. <기질 때문이었는지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항상 '타자',  '비주류'였고 우상을  깨는 쪽이었다. 원래 잡종 교배를  통해서  우성인자가 유전되는 법, 만일 외로움만 견딜 수 있다면  잡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잡종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나는 그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강이 워터프론트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가 두터워야 하며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한강의 강변은   도시고속도로라는 바리케이트가 쳐  있어  쉽게  접근을  할 수 없으며 그 배후는 모조리 아파트가 장벽을 치고 있어  또 한  번 접근이 좌절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바리케이트'라는 표현. 바리케이트란  주 지하시다시피 '어떤 곳으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장치'. 건축물이 바리케이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재밌지만 끔찍하기도 하다. 몇 해  전 국회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산의 아파트 군단이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도심을 보호하는 바리케이트의 전략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고 한다. 인간 방패막이, 참으로 재치있는(?) 발상이다. 변두리는 중심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의 한심한 유머 감각이다.

  <그 어떤 분야도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지만 특히 건축은  그것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 즉 당대의 과학 기술과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에 절  대적으로 의존한다. 건축을 이런  하부구조의 차원으로 해체하여 말하면  항상  듣는 것이  "그게  무슨 건축이냐?"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고상한(?) 건축 아카데미즘은 건축을 건축으로만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아카데미즘과 마찬가지로 건축  아카데미즘 역시 '권력으로서의 지식체계'   에 다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가 밝혔듯이 '  순수지식(pure  knowledge)',  즉  권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참된 지식이란   없다. 건축 아카데미즘이  오로지 건축적인 것만을   가지고  건축을  말하겠다는 것은 폐쇄적인 자기완결성을 무기로 독점적이고 배타적 지위를 누려보겠다는 권력  지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비단 건축만 그럴 것인가. 시로써만 시를 말하겠다는 문학주의, 철학으로써만 철학을  말하겠다는 철학주의  또한 권력지향의 또다른 형태가 아니고 무어랴.  원전이라면 그 앞에서 껌뻑 죽는 기지촌 지식인들,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전문용어 속에 학문적 성과를 가두어 두려는 학자들,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글을  아카데미즘의 포기  선언쯤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는 지식인들, 특정의 장르에 대한 고집스런 집착을 마치 지고지순한 문학애쯤으로 알고 있는 문학가들에게 <나는 건축을 건축 밖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라는 건축가 함인선의 발언은  권장해볼 만한 화두.

             자본의 논리, 인간의 논리

  기하학엔 인정사정이 없다. 그래서 기하학은 한 점과 한점을 있는 최단의 거리가 우회의 경로를 가는 곡선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짓밟지 않고, 추억을 망가   뜨리지 않고, 전통을 깡그리  부수지 않고, 한 점에서 한 점으로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다. 우리의  근대가 놓친  것은 바로 그런 구불구 불한 우회의 길이  오히려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역설의 진리. 

 <여행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좋은 도시들을 보고 또 부러워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고향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강북을 사랑한다. 그런데   나의  서울 사랑은 서울이 잘  나고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600년의  역사 도시, 북한산, 남산, 관악산이 만드는  육경축(軸)과 한강의 수경축(軸) 운운하는 입 발린 서울 예찬을 들으면 사실 나는 역겹다. 그러  한 천혜의 물리적   환경이나 역사성을 망가뜨리는 데  기여를 한 이 땅의 건축,  도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그런  얘기는 여자를  겁탈한 후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것 못지  않게 뻔뻔스럽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의 적절한 표현대로 한강의 아파트 군단이나  강변도로 그리고 고수부지는 강과 인간과의 '스킨쉽'을 가로막는 바리케이트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에  대해 미학적이고 정서적 인  배려를 배부른  자의 사치쯤으로  생각하는 한 근대화가  갈  수 있는 길은 뻔하다. 남들은 수십년 걸린다는 신도시를  단 사 년 만에  뚝딱 해치우는 저돌성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근대화는  맹탕 사기다. 그것은 지은 지 백년도 안 되는 다리와 건물을 허물 수 있는 기적, 그 기적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기적이다. 몇 년간의 건축 현장 경험이    있는 함인선은 건설업자들의 저돌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유능한 현장소장으로  어여삐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이 외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목숨값과  안전시설 비용, 부실공사와  공기맞추기, 상극적인   두 변수를 두루뭉수리로 잘 섞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엄동설한에 콘크리트를 굽는다든가 목숨값을 치를   각오를 하고   돌관작업을 강행하는 상황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라 군사작전일 따름이다. 이럴 때 건축의 예술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들은 빨리 시공하는 데 거추장스런 장애일 따름이며,  임기 내에 치적을 쌓아야 할 나리들과 하루  바삐 자신의 성공을 현시해야  하는 졸부들의 공 분(公憤)을 살 만한 짓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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