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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ㅣ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82
오스카 와일드 지음 / 일신서적 / 1993년 2월
평점 :
절판
오스카 와일드의 일탈의 의미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이 책은 도덕적인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책도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 도덕적인 책이라든가 또는 비도덕적인 책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씌어져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 씌어져 있거나이다.그뿐이다 >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의 곳곳에서 모랄리스트인 예술가 버어질 홀워드와 시니컬한 향락주의자 헨리 월튼 경을 통해 <사실주의>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노출시킨다. 나는 여기에 주목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을 자서전적인 한 형식이나 되는 것처럼 다루는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는 미의 추상적인 의미를 상실해버렸어. 언젠가 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에 보여줄 테야.
난 누가 됐건 교양있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의 표준을 받아들이는 것은 천하기 짝이 없는 부도덕의 하나의 형식이라고 생각해.
그건(쇼팡의 야상곡) 신기할 정도로 낭만적이야. 모방이 아닌 예술이 하나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얼마만한 축복이야.
오스카 와일드의 사실주의에 대한 이런 혐오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나는 관심을 모은다. 이건 事實主義가 한물 간 思潮임을 강조하자는 의도적 배려가 아니다. .차라리 진보에 대한 허무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는 편에 나는 수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딱히 나를 말할 수 없다. 나는 나에 의해서 차차 밝혀질 것이다. 나의 책읽기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히는 행위다. 나는 내 스스로가 나에 의해서건 또는 타인에 의해서건 밝혀질 수도 있다는 섬약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유럽의 한 시절을 나는 상기한다. 미래를 온통 약속으로 가득 채우던 시대. 이성의 힘을 무한히 신뢰하며 진보를 아직 달성되지 않은 현실로 받아들였던 시대. 오직 현실을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받아들였던 시대. 봉건적 왕정을 무너뜨렸듯이 또 다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장미빛 신념으로 계몽을 외치던 시절. 그 시대에 팽만한 신뢰감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은 과학이었다. 쇳조각을 연기를 뿜으며 달리게 하는 힘, 병든 자를 일어서게 하는 힘, 그 기적과 같은 과학의 스펙타클 앞에서 현기증을 느껴야 했었을 시대.
천년왕국을 꿈꾸게 했던 그 계몽시대의 희망을 상기해보자. 그러나 이성의 훈장을 어깨에 걸고 무한히 행진할 수 있으리란 진보의 꿈이 결과한 것은 무엇인가. 대량살상, 끔찍한 기아와 전쟁 ..... 그러나 누가 힘있게 부인 할 수 있으랴? 이런 비극이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았음을. 진보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끔찍한 야만은 이성과 진보, 합리와 유효성의 이름으로 음모되고 감행되었다.
이런 시대에 데까당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 천박한 계몽주의자의 뒷덜미를 한번 슬쩍 후려치는 풍자는 아니었을까. 이성의 무한한 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은근히 시비를 거는 깽판은 아니었을까.두 눈을 명확히 뜨고 진보를 향해 달려가자는 대중연설자들에 대해 실없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뜨는 시니컬리즘은 아니었을까. 이 게슴츠레한 데까당들이 이성이 결과할 아우슈비츠의 야만을 미리 예견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조선인민의 행복을 위해 일제에 타협했다는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의심하지 않는다.문제는 애국도, 타협도 모두 들뜬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광수의 계몽주의는 필히 타협에 직결되었을지도 모른 다는 말이다)
이런 시대에 데까당은 무엇인가? 데까당은 <반지성>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 포즈야말로 이성에 깊이를 불어넣고자 하는 지성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닐 것인가. 이성이 가져다준 과학, 과학이 가져다 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善으로 동일시하는 시대에 또다른 자들(데까당)에 의해 이성은 스스로 자기 안에 악을 예비하지는 않았을까. 악은 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知에 정신의 깊이를 불어넣고자 하는 충동을 목적으로 가지지는 않았을까.백 개의 들뜬 낙관론보다야 하나의 진지한 비관론이 데까당에겐 더 절실했는지도 모른다.비관적 포즈를 통해, 또는 스스로의 파괴를 통해 낙관론의 당찬 표정에 찬물을 끼얹는, 그래서 당황한 계몽주의자들의 얼굴을 보는 데서 그들은 심리적 보상과 쾌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의 목적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위 <순수예술론>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론>을 옹호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간에 데까당한 그의 일탈된 행동의 바닥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동기를 들추어보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더 솔직히는 내가 빠져들고 있는 어떤 문제에 스스로 정당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